조선시대
운영자 24-02-20 14:18 4,000 hit

조선 개국 후 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마령현이 통합되어 진안현으로 개칭되면서 현감이 두어졌고, 이듬해에 진안향교가 창건되었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로 몰려 죽도(竹島)로 도주하다가 부귀면 오룡리 다복동에서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군에게 현이 함락되었으며, 전주 만호 황박(黃璞)과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및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의 관군과 김수(金粹)·김정(金精) 형제 등을 주축으로 한 진안지방 의병의 연합군이 웅치에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략하려던 왜군과 대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정담을 비롯한 김수·김정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전사하였다. 비록 패했지만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왜군이 호남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한 중요한 전투였다. 1646년에는 10년 동안 진안현을 폐지하여 장수현에 속하도록 했고, 1655년 1월에야 다시 진안현으로 승격되었다. 용담현도 1646년에 현령이 현감으로 격하되었다가 1656년에 이르러서야 현령으로 회복되었다. 조선 말에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진안지방으로 피난한 천주교 신자들이 어은동을 비롯한 곳곳에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진안과 용담 지역은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연원지이자 농민전쟁의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1895년에 전국이 23부(府)로 개편되면서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은 용담군으로 개칭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13도로 개편되자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때의 진안현, 용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