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관리자 23-12-28 09:26 49 hit
한국장로교회의 한 교단.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이며, 「예장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선교 초기부터 미국 북장로교 등 4개 선교부가 상호 협력하여 단일한 체계를 유지해온 장로교는 공의회시대·독로회시대를 거쳐 1912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결성함으로써 교단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장로교 신앙노선과 교리체계, 그리고 교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1930년대부터 신사참배강요 등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아오다가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체되고 일본 기독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자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변형되었던 신앙을 이전의 순수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로 수감되었던 교인들이 출옥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와 당시 교권을 잡고 있던 「교권파」 간의 신앙의 경건성과 윤리성 문제를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결과 1951년 5월 「고려파」가 분리되었다. 남북교회 간의 내부적인 갈등이 「조선신학교 문제」로 표면화되었다. 즉,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과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초기 장로교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간의 갈등이 나타났는데, 이로 인하여 1953년 6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되었다. 그 뒤 약 5년 간 안정을 보이던 교단은 「에큐메니컬운동(ecumenical movement)」의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또 한 차례 분열을 겪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한 지지 여부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며 근본주의 신학의 대변자인 박형룡(朴亨龍)의 세칭 「공금유용사건」과 교권투쟁의 문제가 있었다. 보수신학과 순수신앙을 주장하던 복음동지협의회(NAE)의 지지자들은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와의 단절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1948년 WCC 형성 초기부터 관여했던 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를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들이 별도로 1960년 2월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총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소위 통합측이라 불리는 이 교단이 탄생하였다. 진안군에는 소속교회가 16개소 있다.
【참고】에큐메니컬 운동: 교파·교회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 교회를 통일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통일에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결국 1910년 에든버러에서 제1회 세계선교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