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시대의 진안은 용담댐 수몰지구인 금강 본류와 정자천, 진안천 유역에서 격지·몸돌·긁개 등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그 상한이 후기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갈 개연성을 암시해 주었다. 진안 진그늘 유적은 전북에서 최초로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밝혀졌다. 여기에서 20여 개소의 석기제작소와 화덕자리, 그리고 여러 가지 석기와 함께 몸돌과 격지·돌날·좀돌날·부스러기·조각돌 등 구석기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특히 슴베찌르개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을 근거로, 이곳은 특정 철마다 찾아와서 주로 사냥용 연장을 만들고 잡은 짐승을 처리하던 사냥 캠프로 추정되었다. 진안지역의 신석기시대는 1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본격적인 농경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채집경제에서 생산경제로 탈바꿈하면서 정착생활을 영위하는 생활유적이 등장하고 토기의 발명, 마제석기의 출현 등으로 상징된다. 이 시기의 유적도 여러 곳에서 조사되었다. 안천면 삼락리 승금·안자동, 상전면 용평리 운암, 정천면 갈룡리 갈머리·농산, 모정리 진그늘·여의곡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섬진강 유역에 속한 성수면 좌포리에서도 빗살무늬토기편과 석기류가 수습되었다. 이 유적들은 대체로 하천변의 들판과 구릉지에 입지를 두고 있는데, 그것은 농경에 유리한 자연환경과 다양한 생계양식을 통한 안정된 정착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빗살무늬토기편이 절대량을 차지하는 유물은 정주형의 집자리보다 화덕자리 혹은 집석 유구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유구의 속성은 금강과 섬진강, 영남지방 서부 내륙지역 출토품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었다. 진안군과 그 주변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대체로 금강과 섬진강 양쪽에 넓게 펼쳐진 들판에 입지를 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앞으로 이 시기의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요망된다. 

  • 조선 개국 후 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마령현이 통합되어 진안현으로 개칭되면서 현감이 두어졌고, 이듬해에 진안향교가 창건되었다. 1589년에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로 몰려 죽도(竹島)로 도주하다가 부귀면 오룡리 다복동에서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왜군에게 현이 함락되었으며, 전주 만호 황박(黃璞)과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 및 김제 군수 정담(鄭湛) 등의 관군과 김수(金粹)·김정(金精) 형제 등을 주축으로 한 진안지방 의병의 연합군이 웅치에서 용담·진안을 거쳐 전주를 공략하려던 왜군과 대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정담을 비롯한 김수·김정 등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원 전사하였다. 비록 패했지만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왜군이 호남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한 중요한 전투였다. 1646년에는 10년 동안 진안현을 폐지하여 장수현에 속하도록 했고, 1655년 1월에야 다시 진안현으로 승격되었다. 용담현도 1646년에 현령이 현감으로 격하되었다가 1656년에 이르러서야 현령으로 회복되었다. 조선 말에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진안지방으로 피난한 천주교 신자들이 어은동을 비롯한 곳곳에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진안과 용담 지역은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연원지이자 농민전쟁의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1895년에 전국이 23부(府)로 개편되면서 진안현은 진안군으로, 용담현은 용담군으로 개칭되어 남원부에 속하게 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13도로 개편되자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태종 13년 때의 진안현, 용담현

  • 진안군의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된 지석묘는 금강 상류지역인 정자천·안자천·주자천을 따라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특히 정천면 모정리와 안천면 삼락리 일대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 섬진강 유역에서는, 역시 하천을 따라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교통의 중심지인 마령면 일대에 본래 3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처럼 지석묘는 농경지의 개간과 경지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 대부분 없어져 아쉬움을 더해 준다. 백운면 일대에는 10여 개소에서 대략 4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지석묘들은 백운면 노촌리·백암리·운교리·평장리 등 대부분 하천을 따라 들판이 펼쳐져 있거나 내륙 교통로가 통과하는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종래에 지석묘에 대한 발굴조사는 용담댐 수몰지구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안천면 삼락리, 정천면 모정리 등 에서 200여 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섬진강 유역에 속한 마령면 평지리에서도 1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특히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과 모실 유적에서는 지석묘와 석관묘가 함께 조사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이 지석묘들은 외곽에 타원형·장방형·방형의 묘역을 구획한 다음, 그 중앙에는 지하식 혹은 지상식의 매장주체부를 갖추어 놓았다. 종래에 이것과 유사한 형태의 지석묘가 백두대간 산줄기 동쪽인 거창군과 합천군 등 황강 유역에서 조사되었다. 이밖에도 안천면 삼락리 수좌동, 정천면 갈룡리 농산과 모정리 여의곡 유적에서 청동기시대의 생활유적이 조사되었다. 이 시기의 집자리가 처음으로 조사된 수좌동에서는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어, 그 성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고 농산에서는 평면형태가 원형 혹은 장방형을 띠는 집자리와 수혈 유구, 여의곡에서도 송국리형 집자리와 함께 밭 유적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백운면 동촌리에서는 송국리형 토기가 수습된 장방형 집자리가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지석묘처럼 유구의 속성이 황강 혹은 남강 유역에서 조사된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어 많은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정천면 여의곡에서 조사된 밭은 당시 생산경제체제를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4년에는 행정구역을 대개편함에 따라 용담군이 진안군에 병합되어 진안·동향·마령·백운·부귀·상전·성수·안천·용담·정천·주천 등 11개 면1을 관할하는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진안지역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수탈에 대한 저항으로서 3·1운동이 전개되었고 이외에도 야학운동 등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안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1911년 진안면에 설립된 진안공립보통학교를 필두로 1912년 용담면에 용담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일본인을 위해서 1914년 진안공립심상소학교가 진안면에 설립되었다. 이후 마령면(1918), 정천면(1922), 주천면(1923), 안천면(1925), 백운면(1927), 부귀면(1928), 동향면(1930)에도 각각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외에도 부녀자를 위한 야학이 개설되었다. 진안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5일 진안읍 장날을 기하여 오전에 수백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자 장꾼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4월 3일에는 주천면 주양리에서 주민과 학생들이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때 주양리에는 사립 화동학교(현 주천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김주한 등은 이 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고 화동학교 학생들을 권유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하였다. 그 날 오후 4시경에 주민과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자진 해산하였는데 그날 밤 10시 경에 다시 주민과 학생 60여 명이 마을 앞에 모여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6일에는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도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는데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하였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 도통리에서, 다음날에는 마령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13일은 마령 장날이었기 때문에 미리 운동을 계획하였던 오기열, 전영상 등에 의해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마령시장 만세운동 이후에도 진안군의 인사들은 기회 있는 대로 운동을 계획하며 또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4년 이후의 진안군


  • 진안지역의 철기시대 문화유적으로 와정리 유적, 운교리 유적, 신괴리 고분군, 황산리 고분군, 운봉리 고분군, 모정리 고분군, 월계리 와요지, 대불리 야철지 등이 있다. 와정리 유적 : 용담댐에서 상류 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용담면 월계리에 속한다. 이곳은 금강과 섬진강을 직접 연결하는 남북방향 교통로와 호남정맥과 소백산맥을 넘는 여러 갈래의 동서방향 교통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유적은 금강 유역의 반달 모양으로 생긴 산에 입지하였는데, 산의 외곽에는 판축법(板築法)으로 토성을 쌓았고, 내부에는 주거지와 저장용 구덩이 유적이 있다. 흙을 일정한 깊이로 파낸 다음 그 안에 생활공간을 마련했는데, 북벽 혹은 북서벽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온돌시설이 벽면을 따라 돌려져 있다. 유물은 세발토기·항아리·시루 등 백제 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여기에 뚜껑 접시와 같은 가야 토기도 일부 섞여 있다. 이 유적을 통하여 철기시대 진안지역의 중심세력이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운교리 고분군 : 백운면 운교리 일원에 적지 않은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은 섬진강 수계의 상류지역이며 금남호남정맥에 우뚝 솟은 고봉의 서쪽 기슭 말단부로 섬진강의 본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상원산마을 동쪽 산줄기의 남쪽 기슭에 구덩식 돌널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폭 넓게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계단식 농경지나 대규모 민묘(民墓)구역으로 개발되어 적지 않은 고분이 유실 또는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유적을 통해 이 지역에 일단(一團)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괴리 고분군 : 안천면 신괴리 지사마을의 북쪽에 있다. 안천면과 상전면의 경계인 고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동쪽 기슭 하단부에 지사마을이 있다. 이 마을 북서쪽에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고분군이 있다. 이 일대는 용담면 월계리 성남마을에서 금강의 본류를 건너 육십령과 월성치로 직접 연결되는 동서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길목이다. 지사마을에서 남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곳에도 동서방향 교통로가 통과하는 고개가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에 일정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산리 고분군 : 1997년 용담댐 수몰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그 존재가 알려진 곳으로, 용담면 월계리 황산마을 동쪽에 자리하여 황산리 고분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금강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의 정상부와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데, ‘가’ 지구에서 12기와 ‘나’ 지구에서 5기 등 모두 17기의 구덩식 돌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유물은 토기류·철기류·방추차 등 97점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는 다양한 양식의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섞인 상태로 출토되어 가야세력과 백제와의 교역 및 교류 관계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운봉리 고분군 : 주천면 운봉리 구암마을 북쪽에 있는 고분군으로 마을 북쪽 산봉우리의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과 여기에서 서쪽으로 2㎞ 가량 떨어진 산봉우리에 운봉리 봉수가 있다. 산성과 봉수의 중간에 탁고개가 있으며, 금남정맥의 싸리재와 주자천을 따라 선상으로 연결된 여러 갈래의 교통로가 여기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러한 교통의 요충지에 고분군이 위치한 것으로 보아 이곳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정리 고분군 : 용담댐 수몰 지구 내 문화유적에 대한 구제 발굴 당시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 C 지구에서 1기의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고분의 위치·벽석의 축조 방법·연도(羨道 : 고분의 입구에서 시체를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의 위치·장축 방향 등 유구(遺溝)는 백제고분의 속성을 강하게 담고 있어서 백제시대의 고분임을 알 수 있다. 월계리 와요지(瓦窯址) : 용담댐 수몰지구 내 문화유적에 대한 구제 발굴을 통해 알려진 곳으로 용담면 월계리에 속한다. 월계리 원월계마을에서 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동쪽 기슭에서 지하식 등요(登窯) 2기와 반지하식 등요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는 막새류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아 무단식 암·수 기와만을 생산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기와의 문양과 제작기법, 와요 형태, 출토 유물의 속성 등이 백제 기와 가마터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대불리 야철지 : 운장산에서 동쪽으로 3.5㎞ 정도 떨어진 복두봉 북서쪽 기슭 하단부의 주천면 대불리 학선동마을과 학산재 사이의 골짜기에 있다. 이를 통하여 철기시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철기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 진안군은 전라북도의 동부 산악 지역에 있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들의 수탈이 비교적 적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비록 거대 지주들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중소 지주들이 진안군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1943년에 조선총독부는 진안군에 4개의 저수지[반월제·포강제·월포제·신기제]를 한꺼번에 축조하여, 전쟁 중에도 쌀 증산을 위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수립된 용담댐 건설계획은 용담면을 비롯한 진안군 7개 면의 현대사에 아픈 경험을 남겼다. 광복 이후에도 1914년에 개편된 행정구역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1979년 5월 1일에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진안군의 행정구역은 1읍 10면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 대통령령에 의해 마령면 연장리가 진안읍으로, 정천면 구룡리는 상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에 상전면 운산리를 진안읍에, 정천면 용평리를 상전면에 편입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1994년 12월 26일에는 동향면 신송리 백암마을 일부지역이 장수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11개의 읍과 면, 77개의 법정리, 303개의 행정리로 구성된 현재의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이 진안군에 들어온 것은 7월 22일 무렵이었다. 북한군은 금강-대전-영동-무주를 거쳐서 진안군으로 들어왔는데, 약 2개월 동안 진안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북한군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행정을 통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우익세력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한편 운장산을 중심으로 진안군의 청년들이 조직한 대한비밀결사대(←)는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까지 범위를 넓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9·28 수복 이후 군경과 협력하면서 팔공산·지리산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진안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전쟁 중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지주와 소작의 관계가 대립적이었거나, 해방 직후 이념갈등이 심했던 지역들이었다. 진안군은 신분제에 따른 차별이나 대지주의 수탈이 심하지 않았고, 산간지역이었으므로 이념분쟁에도 휘말리지 않아 전쟁에서 심각한 민간인 피해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복 이후 패잔 북한군 토벌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백운면 등 산촌지역에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진안군은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그다지 주목받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군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상전면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명해졌다. 이는 미군 전쟁사에서 사단장급 장군이 적의 포로가 된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던 딘 소장은 금산 부근에서 낙오하여 산속을 헤매다가,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 살던 박종구 등의 도움을 받으며 1개월 이상 홀로 남하하여 진안군 안천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딘 소장은 도움을 청하였던 한두규의 밀고로 8월 25일에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지금의 진안읍]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의 근대화정책은 농업과 농촌사회 및 농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의 농업은 지속적으로 쇠퇴하였으며,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도시로 이주하였다. 진안군의 인구는 1966년에 약 10만 2500명에 달했으나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69년에는 10만 명 이하로 떨어졌고, 1980년 이후에는 7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1996년에는 4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2006년에는 2만 7천 명을 기록하였다. 40년 동안 진안군의 인구가 약 1/4로 줄어든 셈이다. 인구의 절대적인 감소만이 아니라 인구구조에서도 진안군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을 나타내는 인구 고령화율이 2008년에 26.8%를 기록함으로써, 진안군은 이미 초고령화 단계에 들어섰고 출산율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현재 진안지역에서는 인구 감소와 인구구조의 변화로 인한 농업 노동력의 절대부족으로 농업생산성이 하락하고 농업작물과 농사방식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출산율 저하로 인해 차세대 노동인구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안군은 2000년대 이후 농촌 붕괴와 농업 해체 위기에 직면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촌사회의 재활성화를 위한 ‘귀농 정책’과 ‘마을간사’ 제도를 통한 ‘마을만들기’ 등의 지역활성화 정책뿐만 아니라, 홍삼·고추·버섯·흑돼지·한과 등의 특산물과 특화작물의 재배와 가공 및 시장 개장과 다양한 홍보 전략의 활용 등을 통해 지역 농업의 부활에 노력하고 있다.

  • 선사시대는 일반적으로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를 말한다. 고고학상의 시대 구분으로는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포함한다. 진안지역에서 전북 최초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면서 진안을 비롯한 전라북도 내륙지역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안군의 선사시대는 용담댐 수몰예정지 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전북지역 최초인 구석기시대(진그늘) 유적과 내륙지역 신석기 유적인 갈두마을 유적을 비롯하여 여의곡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또한 진안의 여러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인 슴베찌르개, 몸돌, 빗살무늬토기, 마제석검 등 많은 선사시대 유구와 유물이 발굴되었다. 



  •                                    백제 때 진안지방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안지방  


    고대와 관련하여 진안지역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지명 연원에 불과하다. 진안과 관련된 고대와 중세 시기의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지명에 대한 것이고, 여기에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본래 진안은 백제에 속하는 난진아현(難珍阿縣) 또는 월량현(月良縣)[지금의 진안읍·부귀면·상전면 지역]·마돌현(馬突縣)[지금의 마령면·백운면·성수면 지역]·물거현(勿居縣)[지금의 용담면·동향면·안천면·정천면·주천면 지역]에서 기원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이후 경덕왕(景德王) 시기에 난진아현을 진안현(鎭安縣)이라고 바꿔 벽계군(壁谿郡)[지금의 장계면 일대] 소속으로 두었고, 마돌현은 마령현(馬靈縣)으로 바꾸어 임실군(任實郡) 소속으로 두었으며, 물거현은 청거현(淸渠縣)으로 바꿔 진례군(進禮郡)[지금의 금산군] 소속으로 각기 분할하였다. 고려 초에는 진안현과 마령현을 모두 전주 소속으로 옮기고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1391년에는 진안 감무가 마령의 감무까지 겸임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용담지역에는 1313년에 용담현(龍潭縣)을 두었고, 1391년에는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용담향교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