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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
진안지방에는 김상현 정려, 김학배·종관·봉배 정려, 박이풍 정려, 분성김씨 정려, 성석태·필원 효자문, 손동현 정려, 수원백공 효려, 신의련 효자각, 오성복·오빈 정려각, 이난향비, 장형풍 효자문, 정재효 정려, 황민찬 정려 등이 현존한다.
정문·정려를 세운 것은 신라 때부터이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조선은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신분의 고하·귀천·남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 조선 초기의 정려정책은 고려의 충신, 효자, 순손(順孫), 의부(義夫), 절부(節婦) 등에 대한 정려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충신·효자·의부·절부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였으며, 또 일부 사람에 대해서는 그 행적에 따라 상직(賞職) 또는 상물(賞物)을 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족(士族)의 경우는 가문의 명예였으며 공사천(公私賤)의 경우는 면천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실제 생활에 이익을 주어 후손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였다. 정표자들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교화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쟁 중에 삼강의 행실이 뛰어난 효자·충신·열녀의 수는 평시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정려·정문·복호 등으로 포상함으로써 민심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수상을 목적으로 하는 자도 있어 정표자의 진위문제가 자주 논의되기도 하였다. 정려·정문의 유적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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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면 좌포리 원좌포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효자 정려로 팔작지붕 양식이다. 고종 31년(1894) 2월에 정려가 내렸다. 정려각에는 3인의 정려 현판이 있다. 즉, ‘孝子 成均進士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金鶴培之閭’, ‘孝子 通仕郞 繕工監 假監役 金鳳培之閭’, ‘孝子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金鍾觀之閭’이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김종관, 김학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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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반송리 353. 대광수련원 입구 백장로변에 있는 부자(父子)효행 석정.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3호로 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좌측 비신 높이 87cm, 너비 32cm, 두께 12cm., 우측 비신 높이 88cm, 너비 30cm, 두께 12cm. 왼쪽 비표(碑表)는 孝子通訓大夫司憲府監察朴履豊之閭(효자통훈대부사헌부감찰박이풍지려), 오른쪽은 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朴尙休之閭(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박상휴지려)이다. 1886년 건립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광서(光緖 12, 1886)년 1월 28일 진안의 사노(私奴) 순득(順得)이 임금의 어가행차에 징을 두드리며 박리풍 부자의 효행 사실을 하소연함으로써 내려졌다”고 한다. 비문은 비표와 같은 이름으로 『진안지』에 실려 있는데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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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면 능금리 하능마을 안에 있는 정려. 정려문은 ‘烈女 學生 朴致基妻 孺人盆城金氏之門’이다. 김씨는 노태(老泰)의 딸로 동향면 능금리 능길마을에 살던 박치기의 부인이다. 남편이 갑자기 병이 들어 식욕을 잃고 있던 중 두릅나물 먹기를 원하자 한겨울인데도 온 산을 헤매며 나물을 구해서 남편의 식욕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가 늙고 자식이 어려 차마 죽지 못하다가 아들이 조금 자라자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다. 1870년(고종 7)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본디 정려는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80년 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정려기는 열녀분성김씨정려기(烈女盆城金氏旌閭記)이다. 내용은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鎭安郡史(진안군, 1992), 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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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리 하양지 마을 어귀에 있으며 성씨 부자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성석태(1799~1862)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며 부친을 보살폈으며 그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성묘 할 때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풀이 나지 않고 그 형태가 남아있다고 한다. 1886년 (고종 23)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사헌부감찰에 추증되었다. 성필원(1830~1889)은 성석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효행을 따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병들자 손수 약을 달여 드렸다. 성필원은 부친이 돌아가심에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개가 항상 그의 길을 인도하였다 한다. 1886년 아버지와 함께 조정에서 정려가 내렸으며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효자성공석태자필원양세정려기(孝子成公錫泰子弼源兩世旌閭記)이 『진안지』에 실려 있는데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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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면 갈룡리 갈거마을 어귀에 있는 효자 정려. 1884년 정려가 내려진 후 정려각이 건립되었으며 1990년경에 중수되었다. 여각은 전면 1칸(200㎝) 측면 1칸(170㎝) 맞배지붕의 콘크리트 기와집으로 페인트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그 안의 허공 중간에 ‘孝子 贈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密陽孫東賢之閭’라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손동현의 고조부는 손만화(孫萬和), 증조부는 손택도(孫宅道), 조부는 손석두(孫錫斗), 부친은 손용서(孫龍瑞)이다. 정천면 갈룡리에서 태어났다. 1884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贈職)되고 정려가 내려졌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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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노촌리 671번지에 있는 효자각.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효행을 포창하여 선조 때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당시에 세워진 정려비는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효자각은 1801년(순조 1)에 세워진 것이지만 중수의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다. 노촌리 평장초등학교(폐교)에서 천변길을 따라 동쪽으로 750m 거리의 길 왼쪽에 있다. 효자각 바로 옆에는 미계 신선생의련 유적비(→신의련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효자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효자각의 사면에는 홍살을 둘렀다. 효자각 안에 비석은 없으며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상단에는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孝子愼義連之閭)’라 쓴 아래에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801년 4월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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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령면 평지리 원평지마을 앞 도로변에 있는 효자충신 정려각. 효자 오성복(吳成福)과 충신 오빈(吳玭)의 정려를 하나의 정려각에 같이 걸었다. 오성복(吳成福)의 정려문은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吳成福之閭(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오성복지려)’이다. 오빈(吳玭)의 정려문은 ‘忠臣將仕郞成均館學諭吳玭之閭(충신장사랑성균관학유오빈지려)’이다. 정려는 1677년에 내렸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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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백삼로 33(백화리 중배실) 어귀 화산서원 앞 도로변에 있는 정려. 1865년에 건립되어 하배실 앞 동산에 있었는데, 농로가 나면서 훼손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육씨 부인은 임진왜란 중에 남편 황대성이 의병을 이끌고 싸우러 나간 뒤에 시비(侍婢) 천분(千分)과 같이 난을 피하여 상배실 앞 구례말 남쪽 산 불공터에 움막을 짓고 숨었으나 왜병에게 붙들려 욕을 당하게 되자 둘이 함께 자결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였다고 한다. 여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이며, 그 안의 현판에는 ‘烈婦 通政大夫黃大成妻沃川陸氏之閭(烈婦 통정대부황대성처옥천육씨지려)’라 써있다. 기문은 열부육씨정려중수기(烈婦陸氏旌閭重修記)라는 제목으로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鎭安郡史(진안군,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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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백장로 193-5[반송리] 원반송 마을 안에 있는 효자 정려. 정려에는 ‘有明朝鮮孝子 贈 朝奉大夫 童蒙敎官 張享豊之門’이라 쓰였다. 고종 7년(1870)에 증직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며, 고종10년(1873)에 정려가 내려졌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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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신괴리 괴목정 삼거리 도로변에 있는 효자정려. 정려각은 전면 1칸(225㎝), 측면 1칸(220㎝), 맞배지붕의 함석집(본디는 와가)으로 단청을 칠했으나 퇴락했으며, 그 안의 허공 중간을 가로질러 현판이 걸려있다. 돌과 흙을 섞어 쌓고 기와를 얹은 담장이 둘러 쳐져 있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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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백삼로 33. 백화리 중배실마을 어귀 화산서원 건너편 길가에 있는 효자정려. 여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 우진각 지붕의 와가로, 그 안의 허공 중간에 가로질러 걸려 있는 현판에는 붉은 글씨로 孝子學生贈九品後任部中學校敎官長水黃玟燦之閭(효자학생증구품후임부중학교교관장수황민찬지려)라 쓰여 있다. 돌과 흙을 섞어 쌓고 기와를 얹은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정려기는 증교관황민찬정려기(贈敎官黃玟燦旌閭記)로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