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번지(마이산남로 406)에 있는 사찰.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된 금당사괘불탱(金塘寺掛佛幀)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좌상(金塘寺木佛坐像),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로 지정된 금당사 석탑(金塘寺石塔)이 있다. 지금의 자리에 절을 새로 세운 것은 1675년의 일이다. 1692년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 조선 후기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 공백으로 남는다. 1914년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였고, 1976년 이후 요사의 신축을 시작으로 경내 각 전각을 중건하였다. 1978년 명부전, 1987년 산신각, 1990년 극락보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또한 1985년 미륵존불상을 조성하였고, 1991년 산신 탱화와 용왕 탱화를 봉안하였다. 금당사의 선행 사찰이라는 금동사(金洞寺)에 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백제 말경(AD650~700)에 무상화상(無上和尙)과 그 제자 김취(金趣)가 세웠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814년) 중국 승려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는 설이다. 당초에는 혜감 창건 설이 유일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 『삼국유사』에 「보덕(普德)화상에게는 법이 높은 제자 11인이 있었는데, 그 중 무상화상이 제자 김취와 더불어 금동사를 창건하였다(3卷3興法편)」라는 기록에 착안한 『진안군사』의 기록자에 의하여 무상화상 창건 설이 추가되었다. 『삼국유사』의 금동사(金洞寺)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보덕화상이 고구려에서 백제 고대산(孤大山)으로 망명한 사실로 미루어 마이산의 금동사를 가리킨다고 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동사는 두 곳이 더 있다. 경기 삭녕군(朔寧郡, 철원·연천 일대)의 북쪽에 1곳, 평안도 안주목(安州牧) 오도산(悟道山)에 1곳이다. 금당사가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진안지』에 고금당(古金堂)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금당은 현 금당사에서 서쪽으로 약 350m 나옹암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고금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예전에 금당사가 있던 자리로 알고 있다.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지금도 옛 절의 기와 조각「瓦片」이 수습되는데 조선시대의 기와편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처음의 금당사 터라고 여겨진다. 지금의 금당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석탑이 있다. 현재 옥개석(屋蓋石)은 3층 분만이 남아 있으며, 상당수의 탑 부재(塔部材)가 없어졌거나 잘못 놓여 있다. 이는 금동사의 부침을 추정케 해 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아마 옛 금동사 경내에 있던 탑인데 금동사가 퇴락하고 상당 기간 방치되었던 것을 금당사가 수습했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찰 이름은 금당사(金塘寺) 또는 금당사(金堂寺)로 옛 기록도 제각각이다. 금당사가 처음으로 기록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가람고(伽藍考)』에는 「金塘寺」로, 뒤의 정조 때 편찬된 『범우고(梵宇考)』에는 「金堂寺」로 되어 있다. 고지도 역시 기록이 다르다. 영조 때 편찬된 『비변사지도』와 『해동지도』에는 「金塘寺」로, 1872년 『군현지도』와 『광여도(廣輿圖』(1800년)에는 「金堂寺」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금당사에서 제작되고 계속 보관되어온 괘불탱화의 화기에는 「聳出山金堂寺」 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 당시에는 「金堂寺」로 불린 것으로 보이지만 오기(誤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대까지 금당사에서는 「金塘寺」로 자처하고 경내에 우물 같은 깊숙한 연못을 만들고 「금당(金塘)」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필경 사연이 있었을 것이므로 사찰의 이름에 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당우(堂宇)】금당사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 명부전(冥府殿), 산신각(山神閣), 괘불각(掛佛閣), 요사(寮舍) 등의 당우(堂宇)가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당우이지만 금당사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지 않았으므로 대웅전이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새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대웅전을 건축하였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은 금당사의 주 당우이다. 1990년 완공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 건물로 외 7포 내 5포이다. 자연석의 기단 위에 화강석을 다듬은 주초석을 썼으며, 우주(隅柱)는 45㎝, 평주(平柱)의 둘레는 39㎝이며, 전면 주간(柱間)과 양옆에 정자문을 달았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뒷면 전체와 양옆의 일부까지 불단을 짓고, 천정에는 운학(雲鶴)의 그림을 중심으로 단청을 하였으며 용두(龍頭) 한 쌍을 조각하여 장엄한 분위기로 꾸몄다. 극락보전의 아미타삼존불 중 본존불인 목불좌상은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이다. 극락보전(極樂寶殿)이라 이름한 것은 이곳에 봉안한 불상이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기 때문이다. 명부전(冥府殿)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목조 건물로 1978년 당시의 주지 현각(賢覺)이 지었다. 극락보전의 왼편에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산신각(山神閣)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을 한 아담한 건물로 극락보전의 동편 위에 있다. 1987년 청신녀(淸信女) 정을동(鄭乙童)이 “꿈에 자신의 집을 지어 달라는 산신의 부탁을 받았다.” 하여 화주를 자원하고 여러 신도들의 협력으로 그 이듬해 완공된 것이라 한다. 요사(寮舍)채는 사찰의 모든 건물이 퇴락하여 1976년 당시 주지 현각이 금당사를 다시 중창(重創)하고자 맨 먼저 세운 건물이다. 용담 현청(龍潭懸廳)을 해체한 고재(古材)를 주로 사용하여 건립되었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를 단 「ㄷ」 자형 와가이며 근래에 지어진 건물로는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미륵존불상(彌勒尊佛像)은 화강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단을 포함하여 전체의 높이는 약 17자로 꾸며졌다. 미륵불은 머리에 네모난 갓을 썼다. 목은 보통이며 법의는 통견의를 입었고 연화대 위에 그대로 서 있는 형상으로 단의 서면(西面)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다. 1985년 10월에 남강석재(南崗石材) 권오달이 조각한 것이다. 참배단 오른편에는 미륵불 조성에 관한 사적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미륵불 조성의 뜻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법고(法鼓)는 직경 약 60㎝, 길이 1m 정도의 북이다. 겉가죽은 여러 번 갈아메운 흔적이 있다. 통은 두 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워낙 낡아 구멍이 나서 실제로 다시 사용하기에는 적당치 못하다. 마이산 주필대에서 이석용(李錫庸)이 주도한 「호남의병창의동맹」 결성 당시(1907년)에 이 법고를 가져다 사용한 바 있다고 한다. 금산사 성보(聖寶) 박물관에 위탁 관리하고 있다가 다시 환수하여 보존하고 있다. 금당사에서 수행 정진한 고승으로는 한말(韓末)의 대완(大完)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안동 김씨로 어릴 적에 출가하여 비구(比丘)로서 당시 최익현(崔益鉉)을 맹주로 하여 호남의 선비들이 의병 동맹을 모으자 승려의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가담하여 많은 의사들에게 각종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상주하는 승려는 2명이고, 신자 수는 미상이며, 금당사 신도회가 있다.
    《참고문헌》마이산학술연구(진안문화원, 2003), 금산사(www.geumsansa.org)
  •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마령현에 있었다는 사찰.
    이규보가 32세 때인 1200년 사록 겸 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 전주목에 부임하여 마령속현(馬靈屬縣)으로 출장 갔다가 지은 「금동사의 주지를 찾아가는 시」가 있다. 이로써 당시 마령현에 금동사(金洞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러나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는 일체 금동사가 보이지 않는다. 시의 내용만으로 금동사가 어디에 존재하는 사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마이산 안에 있는 절이라는 심증이 간다. 하지만 마이산이라 해도 지금의 금당사 주변인지, 지금의 나옹암인지, 광대봉 아래 지금의 보흥사 자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지금의 보흥사 자리에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강정리 5층석탑)이 있으므로 그곳에도 사찰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금동사는 역시 지금의 금촌(金村: 금당촌) 부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명을 들 수 있다. 금당(金塘) 또는 금당(金堂)이라는 지명은 금동(金洞)이라는 지명과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마이산에는 혈암사(穴巖寺), 쇄암사(碎巖寺)가 있다고 했으나 금동사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영조 때의 기록인(1765년) 『여지도서』에는 「혈암사와 쇄암사는 모두 폐하였다」고 하면서 새롭게 금당사(金塘寺)를 추가하였다. 이로 보면 금동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퇴락하여 없어졌든지, 아니면 혈암사 또는 쇄암사로 이름이 변천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혈암사와 쇄암사도 기실 다른 절이 아니라 하나의 사찰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혈암(穴巖)은 「바위에 뚫린 구멍」을 나타내고, 쇄암(碎巖)은 「바위 부스러진 자리」를 뜻하니 결국은 같은 뜻이다. 같은 시대 비슷한 장소에 있던 다른 사찰이라면 이처럼 뜻도 같고 음도 비슷한 이름으로 작명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혈암사와 쇄암사는 기록자가 현장을 확인하지도 않고, 동일한 사찰을 달리 전하는 이름대로 기록해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혈암사는 이름으로 보아 동굴에 위치하거나 동굴 근방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마이산에서 사암(寺庵)이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곳은 지금의 나옹암밖에 없다. 그렇다면 혈암사는 나옹암 자리에 있던 절일 수밖에 없고 이는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나옹암 자리가 혈암사 터였다면 금동사도 혈암사의 선행 사암이거나 금동사의 이름만 혈암사「쇄암사」로 바꾸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금동사(金洞寺)의 이름도 동굴의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동(洞)은 본디 「동굴」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뒤에 뜻이 전(轉)하여 「골짜기」 또는 「마을」의 뜻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금동(金洞)은 동굴이 있는 동네, 또는 동굴 그 자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만일 금동사가 동굴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가 퇴락하였다면 마이산 안 어디에서인가 그 흔적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지만, 아직까지 절터로 알려진 곳은 옛 금당사가 있었다는 고금당(古金塘) 터와 은수사의 선행 사찰이라는 정명암(正明庵) 터 이외는 그 흔적이 발견된 바 없다. 고금당 터와 정명암 터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 등은 조선시대의 유물로 밝혀져 고려시대에 있었다는 금동사와는 관련이 없다. 마이산 사찰에 관하여 좀 더 확실한 연혁을 밝혀내려면 더욱 심층적인 발굴 조사 작업이 필요하다. →금당사, 나옹암.
    《참고문헌》馬耳山學術硏究(진안문화원, 2003)
  • 마이산 금당대 바위굴에 있었던 암자.
    【개요】 금당사에서 서북 방향으로 직선거리 약 900m 지점에 『진안지』에 실린 금당대(524.5m)가 보인다. 금당대 아래 암벽에 넓이 약 10평 남짓한 굴이 뚫려 있는데 「천상굴」, 「수행굴」 또는 「나옹암」으로 불린다. 이곳을 나옹암으로 부르는 이유는 나옹선사가 한 때 이곳에서 수행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옛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1924년판 『진안지』에 비로소 실린 것으로 보아 이 부분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암굴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사찰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시 「마이산」에 “이틀 밤을 쇄석암(碎石庵)에 머물면서…”라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쇄석암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쇄석암은 혈암사(穴巖寺)나 쇄암사(碎巖寺)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때 진안현감이었던 민인백(閔仁伯, 1552~1626)의 문집에는 “내가 놀러갔을 때 작은 암자가 있었다. 사면 및 상하가 모두 돌인데 천정은 돌지붕, 바닥은 온돌, 네 벽도 돌로 천연이 만들어낸 곳이며, 옆에 늘어서 있는 괴석들은 개개가 특이하여 여러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둘레가 십리가 족히 될 것으로 참으로 기관(奇觀)이다.”라고 하여 굴 속에 위치한 암자를 그리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마이산 안에 다른 절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조구상(趙龜祥, 1645~1712)의 문집에는 “고금당 아래 산 허리춤에 석벽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이다. 그 중앙은 갈라져 굴이 되었다. 나무 사다리를 통해 올라서면 굴 속에 두 칸의 집이 있고, 단청이 벗겨져 어느 때에 지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한 칸은 방이고 방에는 사면 벽에 창문이 있으며, 모두가 자연스러워 조탁한 것 같지가 않다. 한 칸은 처마의 집인데, 사람의 손으로 세워져 있다. 위태로운 난간으로 아득히 만학천봉이 보이고 그 아래는 몇 길이나 되는지 굽어볼 수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 진안현 남쪽 마이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이산의 형상은 석봉이 솟아나 깎아지른 듯 두 산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 높이는 몇 만 길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의 귀 같은 모양이어서 이렇게 불린 이름일 것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용출산이라고도 하며, 산중에는 기록에 남겨둘 만한 곳이 수도 없이 많다. 다만 이 석굴을 기록하는 것은 그 기이한 절경이 가히 호남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굴 속에 암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역시 이 기록에서도 마이산 안에 다른 절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이 점으로 보아도 마이산 안에는 지금의 나옹암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나옹암이 아니라, 혈암사(穴巖寺) 또는 쇄암사(碎巖寺)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기록들의 혈암사(穴巖寺), 쇄암사(碎巖寺), 나옹암(懶翁庵)은 각기 다른 절이 아니라 하나의 절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금동사. →금당사
    《참고문헌》마이산학술연구(진안문화원, 2003)
  • 정천면 갈룡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암자.
    갈룡리 천황사 앞에서 남쪽 산비탈로 500m 지점에 위치한 암자이다. 본디 천황사 소속 암자였으나 퇴락해 버린 것을 천황사의 신도였던 이도림(李道琳)이 1929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이도림의 아들 김흥룡이 주지로 있었는데, 그 당시는 태고종 소속이었다. 김흥룡이 죽은 뒤 그의 처 김숙자가 관리하다가 타지로 이주하여 비어 있던 것을 약 30여 년 전 조계종에서 수습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은 조계종 제17교구에 소속되어 있으며 참선 수행 도량으로 신도의 출입은 끊어진 상태이다. 남암은 수도처로서 외부 신앙 행사 없이 승려 1명이 거주하면서 기도 수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인법당과 1931년 중건한 1칸의 산신각이 있다. 인법당 앞에는 수령이 약 400여 년이 넘는 전나무가 있어 천연기념물(→천황사전나무)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 부귀면 황금리 운장산 중턱에 있던 절. 고지도에 표기는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1907년 9월 15일(음) 자로 작성된 호남창의록에는 “대불리에서 운장산을 넘어 내원사(內源寺)에서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해동지도, 비변사지도, 1872년 군현지도
  • 상전면 진무로 2572-219[월포리 7-1] 고산골 초입에 위치한 개인 사암(寺庵). 관리자는 오남숙이다. 전화 010-3681-5395.《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백운면 백운동로 401-109에 있는 개인 사암. 백운동과 백운동전원마을 중간에서 북동쪽으로 1km 지점에 위치한다. 주지는 신유임이다. 사찰전화 063-432-7550.《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진안읍 마이산로 240-34 마이산 북부의 천왕문 못미처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1965년 혜일(慧日)이 창건하였다. 본디 은수사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혜일은 유복희(柳福熙)의 도움으로 1965년 이곳에 목조 기와집 3칸을 짓고 마이사를 창건하였다. 1975년에 대한불교 화엄종에 등록하였다가 2008년 한국불교 태고종에 등록하였다. 함석지붕의 인법당 1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찰 뒤편에 창건주의 사적을 적은 창건사적비[1985년, 마이사 창건주 비구니 혜일 스님 공덕비]가 있다. 2016년 현재 주지는 초련이다. 전화 432-0519
    《참고문헌》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담현 운장산에 있었다”는 사찰. 확실하지 않지만 주천면 운봉리 미적동에 있었던 사찰로 추정된다.《참고문헌》新增東國輿地勝覽(관찬지리서, 1530)
  • 진안읍 연장리 53 대연장마을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
    1954년 송오봉이 대명사(大明寺)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으나 그 후 김봉주에 의하여 관리되다가 1991년에 법장(法藏)이 인수하여 태고종에 등록하였다. 현재는 오복덕이 관리하고 있다. 현재는 야외 법당에 3좌의 석불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인법당의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불사를 행하고 있지 않다. 전화 : 433-3869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