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귀면 금계길 92에 위치한 개인 사암.
    관리자는 노동환이다. 전화 011-891-6159.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성수면 용포리 반룡마을 성수산 서쪽 중턱에 있는 사찰.
    반룡마을 쪽에서 성수산 방향으로 700m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1910년 김홍직이 중건하여 작은 인법당 형태로 유지해 오다가 1980년 소귀영에 이어 박찬오 등이 중창하였다. 한때는 용천사(龍天寺)로 불리기도 하였다. 전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 함석지붕 건물인 법당 1동과 요사 1동, 칠성각 1동, 석등, 최근에 조성한 석탑, 입구에 미륵 불상 등이 있다. 은선암에는 2000년 이후 승려가 머물고 있으나 진안군에 종교시설로 등록은 안되어 있다.
    《참고문헌》鎭安郡史(진안군, 1992)
  • 마령면 동촌리 5번지 마이산 동봉 아래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의 사찰.
    1920년에 이규헌(李圭憲1853~?)이 창건하여 정명암(正明庵)이라 하였다. 「은수사」라는 이름은 “조선 태조가 이곳에 왔을 때 「물이 은처럼 맑다」고 하였다” 하여 지어진 것이라 한다. 본디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이던 건물과 그 위 산신도각(山神度閣)이 있었으나, 근래에 무량광전, 대적광전, 태극전과 요사채 등을 건립했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과 「삼신할머니상」이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또,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줄사철군락」(천연기념물 제380호)이고 또 하나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정면 5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이다. 이전에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이 있었는데 이를 대적광전에 함께 수용하였다. 「비로자나불」과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봉안하였다.
    【무량광전(無量光殿)】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다. 불상은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태극전(太極殿)】다른 사찰에는 없는 전각이다. 각 2칸으로 네모난 건물인데, 처마는 8각으로 만들고 지붕은 둥글게 꾸며 철판으로 덮었으며 내부 단청은 8괘를 방위에 맞춰 썼고, 바깥벽은 일월곤륜도 벽화로 장식하였다. 연목은 64개로 걸어 8괘를 세분한 64괘라는 역의 원리를 응용한 특이한 건축으로 1987년 완성된 건물이다. 전통적인 음양사상에서 4괘, 8괘, 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설계로 꾸몄다 한다. 안에는 단군을 배향했고, 「몽금척도(夢金尺圖)」와 금척 모조품, 몽금척무 족자의 목각판을 진열해 놓고 있다.
    【요사(寮舍)】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으로 꾸며진 한옥이다.
    【극락도(極樂圖)】가로 4.2m 세로 5.4m 크기로, 이진영(李眞榮)의 괘불작품이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러 불제자 및 신장이 청법하는 광경과 새로 극락에 든 선남선녀들이 연꽃 위에 태어나는 모습을 그렸으며, 선인들이 천상의 구름에 싸여 무량수(無量壽)를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청색을 주조색으로 한 견본 채색화로, 전체적인 느낌은 시공을 초월한 가라앉은 분위기이며 종래 내려온 전통적 구도를 그대로 살린 작품이다.
    【금척수수도(金尺授受圖)】“이성계가 미시(微時,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꿈속에서 마이산신으로부터 새 왕조 창업의 천명을 받았다”는 조선 건국 설화를 내용으로 한 상상화이다.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며 기도를 올릴 때 제일봉(동봉) 아래의 샘을 은수(銀水)라 불렀다”는 전설을 살려 사찰명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가로 1.50m 세로 2.10m로 1983년 강장하(姜壯夏)가 그린 작품이다.
    【법고(法鼓)】지름 1.88m 길이 1.80m로 1983년 제작되었다. 북통을 64쪽의 은행나무로 조립제작하여 64괘를 상징하였고, 좌우의 가죽은 수소와 암소의 가죽을 사용하여 음색을 음양으로 조화시켜 소리가 매우 웅장하다. 이금봉(李金奉)이 6개월에 걸쳐 제작하였다.【목어(木魚)】수입 재목인 「마티카」를 재료로 하여 길이 2m, 폭 0.5m의 크기로 1984년에 만든 작품이다. 머리 부분은 용두(龍頭)와 같이 조각하였으며, 몸통과 꼬리부분은 잉어처럼 조각하였다.
    【마이산신제단(馬耳山神祭壇)】산신도각 오른쪽 위에 있는 제단으로 매년 10월 11일 「진안군 마이제전위원회」에서 마이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2024년 현재 관리자는 광전행 이남성이다. 불사의 규모에 따라 승려는 2명에서 10명 정도로 변동이 있다. 그러나 은수사가 관광지 내에 위치한 때문인지 많은 관광객들로 항시 붐비고 있다. 줄사철 군락은 마이산이 이 수종의 북방 한계 지역인데 은수사 뒤 쪽 가파른 벼랑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재인용
  • 『진안지』에 ‘정명암(正明庵)은 금당사의 동쪽 마이산 제일봉의 아래에 있다’고 실려 있는데, 현재 은수사(←銀水寺)의 예전 이름이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중대산(팔공산)에 있었는데 없어진 절이라고 기재되어 있다.《참고문헌》新增東國輿地勝覽(관찬지리서, 1530),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정천면 갈룡리 1428번지 조포마을 골짜기 서쪽 300m 지점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전통 사찰.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본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에 「숭암사(崇巖寺)」라 하였고, 그 때문에 그곳 마을 이름도 최근까지 「숭암(와전되어 「수암」)」이라고 불러 왔다. 절에 소장되어 있는 「용담군 천황사 규칙(龍潭郡天皇寺規則)」(1906)을 보면 1694년의 기록에도 숭암사로 되어 있었으며, 1854년의 기록에 비로소 천황사로 나온다. 따라서 천황사는 적어도 숙종대까지는 숭암사였으며, 그 후 150년 사이 바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근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천황사는 원래 이웃한 주천면 운봉리에 있던 것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지금 운봉리에는 윗양명 절골과 안정동 다래골에 각각 하나씩 2개의 절터가 있는데 위 2개의 사지(寺址)가 다 천황사 터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천황사에 대한 기록들도 착오와 오기가 많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천황사는 875~876년경에 도인(道人) 무염(無染)이 창건하고, 1060년~1078년경에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이창(二創)했으며, 1456~1463년경 학조(鶴祖) 대사의 삼창(三創)을 거쳐 1854년에 서운(瑞雲) 화상이 여섯 번째로 중수하고, 1871년에도 용담 현령 원필상(元弼常) 등이 중심이 되어 일부를 개축했으며, 1906년에는 혜명(慧明)이 일곱 번째로 중수하였다. 그 뒤 1972년에 요사채를, 1976년에 명부전을 보수하고 1986년에는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
    【당우】 현존하는 당우(堂宇)는 대웅전·명부전·열선당(說禪堂)·정묵당·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024년 현재 정묵당은 개수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의 건물로 1985년 보수하였으며 2024년 현재 지붕을 보수하고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지장보살이다. 열선당(說禪堂)은 요사채로 쓰이던 건물로 전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다. 최근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의 요사채를 신축하였다. 소속 암자로는 남암(南庵)이 있다. 천황사가 번성하였을 때는 9개의 암자가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암을 제외하고는 없다.
    【문화유산】 대웅전(천황사 대웅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며,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된 부도(천황사 부도)가 있다. 절 입구 전나무 밑에는 또 1기의 부도가 있는데 이는 「명봉대선사탑(明峰大禪師塔)」으로 그리 오래 전에 세워진 것은 아닌 듯하다. 또한 남암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된 전나무가 있다. 또한 천황사 대웅전 석가여래 불화가 진안군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황사는 여러 그루의 커다란 전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의 나무에 둘러싸여 있는데 특히 보호수로 지정되었던 전나무는 큰 것이 수령 800년 이상, 높이 32m, 둘레 1.7m이었는데 강풍으로 가지가 찢어져 보호수에서 해제되었다. 2024년 현재 주지는 현산(백정하) 스님이다. 사찰전화 432-6161.
    《참고문헌》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 백운면 신암리 산 30. 대전마을에 위치한 개인 사암. 관리자는 최정례이다. 전화 433-9296.《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마령면 마이산남로 367「동촌리 8」 마이산 서봉 절벽 아래 있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사찰.
    【개요】 탑사(塔寺)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마이산의 적석에서 유래한다. 1920년경 이갑룡(李甲龍)「1860∼1957」이 마이산에 들어와 초옥을 짓고 거주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불교를 표방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후 마이산을 찾는 치성인들의 수가 불어나자 이갑룡의 기도처이자 치성처인 초막은 어느 때인가 함석지붕으로 새로이 지어지고 자연스럽게 삼신상과 불상이 안치되어 사찰이 되었다. 당시는 절 이름도 없었으나 그가 평생 적석을 축조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탑사(塔寺)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갑룡은 1957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108기의 적석을 완성시켰으며 현재 80여 기가 남아 있다. 그 후 그의 손자인 이왕선(李旺善)이 한국불교태고종에 사찰로 등록하면서 「탑사」로 이름을 붙였다. 1986년 인법당을 대웅전으로 고쳐 짓고, 1996년 나한전「현재의 영신각」을 지었으며, 1997년 종각과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주요 행사로는 정월 기도, 삼월 십구일 산신제,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유월 방생제, 칠월 칠석, 칠월 십오일 백중, 추석 차례, 시월 초아흐레 산신제, 십일월 동짓날 동지 기도, 양력 12월 31일 타종식 등이 있다.
    【법회】 1992년 이래 주지는 진성이고 상주하는 승려는 3명이다. 1만 여 명의 신자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큰 법회에는 수백 명이 참석한다. 탑사의 신도들이 「나누리 봉사단」, 「천지기도회」, 「관음회」, 「갑룡 장학회」 등을 운영하고 있고, 누리회, 전주교도소 법회 등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당우】 시설물로는 대웅전, 산신각, 영신각(靈神閣), 적석군「「천지탑, 오방탑, 일광탑, 월광탑, 중앙탑」 등」, 미륵불, 종각, 요사채, 약수터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대웅전에 이르기 전의 왼쪽 절벽으로 정면 3칸·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영신각이 있고, 대웅전 뒤쪽의 절벽을 따라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산신각이 있다. 불화로는 후불탱과 1976년 조성한 신중탱, 1988년 조성한 칠성탱이 있다. 사찰 입구에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요사 겸 종무소, 정면 2칸·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사물각「범종각」이 자리한다. 사물각에는 범종·법고·운판·목어가 있는데 이곳의 법고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42호 악기장 윤덕징이 제작한 길이 1.95m에 이르는 대형 법고이다.
    【적석탑】 「천지탑, 오방탑」을 비롯한 80여 기의 자연석탑들은 「마이산탑」이라 하여 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천지탑」은 기단부에서는 한 몸통으로 축조되어 올라가다가 중간부터 남북으로 나뉘어 두개의 몸통으로 나뉘었으며 정상부는 편편한 돌을 뾰쪽하게 쌓아 올린 첨두 원추형으로, 전체 높이가 13.5m에 이른다. 그 외에도 미륵불, 관음보살 석조 입상과 이갑룡 생애비, 이갑룡 사적비, 이처사 화상 등의 조형물이 있다. 2024년 현지 주지는 진성(이재동)이다. →마이산탑.
    《참고문헌》마이산학술연구(진안문화원, 2003), 최규영/마이산(진안문화원, 2011)
  • 마이산 안에 있었다는 절. 나옹암의 다른 이름이다. →나옹암.《참고문헌》新增東國輿地勝覽(관찬지리서, 1530), 鎭安誌(진안문화원,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