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신교의 약사】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로서, 16세기 초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의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반대하여 새로 일어난 종교 분파 단체이다. 「종교 개혁」 이후 성립된 「신교」 교단의 통칭으로 「기독교」라고도 한다. 1세기 초에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의 삶과 교훈이 후세에 편집되어 「성서」로 정경화(正經化)되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유일한 진리」로 받든다. 본디는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하나의 교명으로 통용되었으나 이 「진리」에 대한 해석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차이가 생겨 나중에 3대 교파로 분리되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저항은 「면죄부」 판매가 결정적인 원인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이 이끈 종교 개혁의 결과 로마 카톨릭(Catholic)에서 분리되어 성립한 종교를 좁은 의미의 기독교(Christ Church)라 부른다. 개신교(Protestantism)라 함은 1529년 쉬파이어 의회가 카톨릭의 결정에 불복(protestantio)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구교(천주교)」와 「신교(개신교)」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고,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또는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마 카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독교」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논하는 기독교의 개념은 신교 즉 프로테스탄티즘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일반적으로 성서주의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여」 자기의 신앙을 형성해 갔으며, 신앙 동지들의 자유로운 결사에 의한 교파의 형성과 분열이 잦아 300여 개의 교파로 나뉘어졌다. 이 결과 16세기에 개혁 운동으로 생긴 프로테스탄티즘은 독일의 루터교회,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H)와 칼빈(Calvin, J)의 운동이 통합되어 생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하는 자유교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등으로 분파되었다. 이어 18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자유화 운동으로 더욱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으며,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영국·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여러 교파가 세계 각지로 그 선교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결합된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가시적인 면에서는 신자들이 모이는 건물을 뜻하기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라는 명칭을 예수가 처음으로 표현하였고,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이 감동받은 것이 교회의 출발이 된 점과 교회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식 명칭이 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개신교의 조선 전래】 1873년 조선 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출신의 로스(Rose, J)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McIntyre, J)가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청년 학자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盛夏)·김진기(金鎭基)·서상륜(徐相崙) 등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1876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882년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의 번역이 완료되어 만주 심양에서 이를 발행하였으며, 1887년에는 마침내 『예수셩교젼셔』라 하여 신약 성서 전부가 발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례를 받은 187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가 출발한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일본에서 이 책을 구해서 1885년 4월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1887년 9월 서울에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을 통해서 이미 입교했던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의 선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먼저 착수하였는데,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알렌(Allen, H. N)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2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인천에 왔다. 그 해 5월에 북감리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 모자가 도착하여 그의 어머니는 곧 이화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86년 여름부터 개교하였다. 또한,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레이놀즈(Reynolds, W. D), 테이트(Tate, L. B. 최의덕), 젠킨(Jenkin, W. M) 등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고, 남감리교에서는 윤치호(尹致昊)의 기금이 자극이 되어 1895년 10월에 리드(Reid, C. F)를 우리나라에 파송하여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밖에도 성공회는 189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부는 1889년에, 캐나다 장로교는 1893년에, 침례교(浸禮敎)는 1889년에, 제칠일안식교(第七日安息敎)는 1904년에, 성결교(聖潔敎)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특징 있는 선교를 전개하였다.
    【호남지방으로의 전래】 호남 지역에는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면서 개신교 전래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서울에서 열린 「미션공의회」에서 호남 지역을 선교구로 정한 결의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최의덕(崔義德)을 비롯한 7인의 선발대가 1894년에 전주에 도착하여 선교부(Jeonju Station)를 세우고 전주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진안지방으로의 전래】 진안 지역의 개신교는 선교사 마로덕(馬路德, Luther Oliver McCutchen, 1875-1960)에 의해 전래되었다. 마로덕은 1902년에 한국에 왔고,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전남 목포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04년 전북 전주선교부로 옮겨왔다. 마로덕은 당시 완주군 일부 지역, 진안, 장수, 무주 등지를 선교 지역으로 맡아 순회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마로덕은 전주에서 재를 넘어 가장 가까운 지역인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고 먼저 세동교회를 세웠다. 다음에 역시 같은 지역에서 부귀중앙교회를 설립하는 등 부귀면에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어 마로덕은 주천면 대불리로 이동하여 선교 기지를 정하고 대불리교회(현 대광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부귀면 세동리와 주천면 대불리 중간 지점에 진상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이어서 진안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한편 당시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 설립에 공헌한 사람으로 김필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 마로덕의 조사로 일하였고 1909년 평양신학교를 수료하고 윤식면, 최중진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김필수는 이들 세 명과 함께 호남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김필수는 목사가 된 후 바로 진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일본의 노골적 침략으로 국민들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여 정천면 학골에 학골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1910년부터 평신도 훈련을 주관하여 진안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내고 제직회를 조직하였는데, 그가 길러낸 이 조직이 진안 지역의 전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마로덕 외에도 보이열, 강운림 등이 있다.
    【진안지방 초기의 교회들】 구전과 각 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교회는 1897년 10월 진안읍 당산 옆 백남인의 집에서 가정 예배로 시작되었고, 1901년 부귀면 거석리 거석교회(현 부귀중앙교회), 진안읍 연장리 한들교회(현 연평교회), 상전면 월포리 단밭교회, 백운면 메실교회(현 백운교회), 을림교회(현 신암교회), 1902년 부귀면 세동교회, 1903년 주천면 대불교회(현 대광교회), 1904년 부귀면 진상동교회(현 황금교회), 정천면 조림교회(현 정천중앙교회) 등이 세워졌다고 한다.
    【진안지방 개신교의 확장】 1909년 이후 개신교회는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이 시대부터 선교사 중심의 시대는 끝나고,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협력 시대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필수가 진안, 용담, 무주 지역에 1년간 마로덕과 함께 순회 전도 목사로 활동하였다. 1910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들의 활동으로 진안 지방에는 정천면 학골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10년 5월 8일 한들교회에서 진안 지역 소제직회를 구성하여 메실, 한들, 진상동, 단밭, 세동, 거석리, 학동, 해월리(완주군 상관면) 등지에서 신자 대표가 참가, 교인 내부에서도 조직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경부터 진안 지역은 강운림(C. W, Monroe)과 김성원, 마로덕과 정찬식의 순회 전도를 통하여 비조직화된 교회를 대상으로 활동했다. 1917년 전라노회에서 전북노회가 분리되어 대한예수교 전북노회가 설립되고 진안 지방도 자연히 전북노회로 편입되었다. 전북노회에 등록된 정회원은 1919년 학골교회 김화성(金化成)이 있었고, 1923년 1월 23일 전북노회에 등록된 신자는 진안면 군하리 박승섭(朴勝燮), 강운림(康雲林), 구역으로 부귀면 진상동 홍순익(洪順翼), 오정리 최사행(崔士行), 거석리 이원칠(李元七), 마령면 연장리 이선량(李善良), 용담면 소방동 김성단(金成端), 정천면 봉학리 김택정(金宅程), 농산리 임주상(林周相), 진안면 군하리 김봉헌(金鳳憲), 주천면 대불리 김병섭(金炳燮), 진안면 역리(단양리) 박종서(朴宗西), 성수면 염북리 김응선(金應先), 백운면 을림리 최광일(崔光日), 상전면 월포리 정일도(鄭一道), 용담면 옥거리 고영선(高泳善) 등이 있었다.
    【3·1 만세운동】 3·1 만세운동에 이 지역 개신교의 신자도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에 의하면 진안 지역에서는 3월 15일 수백 명이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1922년에 주천 주양교회가, 1923년에 용담교회가, 1928년에 상전 갈보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진안읍교회는 1928년 백남인(白南仁)이 중심이 되어 창립하여 비조직 교회에서 조직 교회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진안 지역과 인근 장수·무주 지역의 선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사참배와 개신교의 시련】 일제는 1932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또 미국의 경제 공황으로 해외 선교부에 대한 경제 지원의 축소, 일제와 미국의 불편한 관계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선교사와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일제는 다시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거절하여 강제로 추방당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와 성직자들은 일제의 강요와 회유에 넘어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교회와 성직자도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교인과 폐교를 당한 교회도 있었다. 진안 지역에도 신사 참배 거부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용담, 갈보리, 금지, 학동 등의 교회가 1943년에 폐교 당하였고, 이 시기에 일제의 강압에 의한 신사 참배와 교회 내부의 대립과 파쟁 등에 의한 혼란은 훗날 기독교계에 큰 시련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광복과 6·25】 일제의 통치가 끝나자 각기 교회를 재건하고 나섰다. 전북 지방의 장로교회도 「일본 기독교 선교단 전북교구단」의 간판을 내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로 환원하였다. 또한 추방당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의 재개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내한하기 시작했다. 진안 지역에도 폐교된 교회가 1946년 문을 열면서 농촌 청소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며 이들이 교회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내 정세는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을 가져오고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쪽을 침략하였다. 한국 교회는 이 한국전쟁을 통하여 가장 뼈아픈 시련과 고통을 당하였다. 북측이 제일의 적으로 지목한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하여, 12개의 교회가 있는 진안 지역에도 예배당은 인민재판소나 사무실로 만들었고, 서류는 불타고 교인들은 흩어져 피난가야 했고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조흥식(趙興植)은 1911년 10월 9일 성수면 좌포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개인 전도를 하다가 그 지역 교회들의 청원에 의해 전도사로 선임되어 일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하여 1950년 8월 21일에 처형되었다. 6·25로 인하여 교회는 중요한 기록인 「당회록」이 유실되면서 각 교회의 교회사를 잃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다시 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개신교의 분열】 그러나 한국 교회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뿌리는 신사 참배에 항거하여 투옥된 목사나 신도와 신사 참배를 결의했던 목사 등이 광복 이후 단합하지 못하고 갈등과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동족 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1951년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파」를 비판하고 또 「고려파」는 총회에서 이탈하는 등, 최초의 장로교에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전북과 진안은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그 영향은 크게 받지 않았고 더욱 교회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광복 이후 1950년대 사이에 진안군 내에서 설립된 교회는 18개로 이 시기에 가장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오직 장로교 일색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1954년 신학 방법론 때문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한국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어 전자는 「예장」 후자는 「기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안 지역의 교회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장」은 또다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분열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C.W.C.C) 관계로 「통합」 측을 「용공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하고, 보수를 주장하는 「합동」이라는 교파가 생겨났다. 이때 전북과 진안 지역에도 교회의 양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 가장 극심한 대립과 분열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에 의하여 교회가 침체의 상태에 머물고 있었음은 1960년대에 진안 지역에서 겨우 5개의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도 증명된다.
    【진안지방의 개신교 추이】 1980년대에 진안군의 교회는 73개로 「합동」 측이 45개의 교회에 신자는 약 3,000명으로 가장 많았고, 「통합」 측이 15개의 교회에 신자는 약 1,100명으로, 진안 지역의 교회는 「예장」 측의 교회가 절대 다수였다. 「기장」은 8개의 교회로 신자는 약 300명이었다. 또한 「개혁」 측 교회가 2개에 신자는 약 60명이며, 예수교성결교회, 감리교, 개혁이 각각 1개의 교회로 신자는 50명 이내로 분포되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신자 수는 반 이하로 격감하였고, 용담댐 수몰 등으로 교회들이 상당수 없어졌으나 신설된 교회도 있어 1980년대에 비하여 교회 수는 큰 변동이 없다. 갈보리교회, 모정교회, 목양애교회, 삼락교회, 송풍교회, 수동교회, 조림교회, 와룡교회, 월포교회 등이 다른 교회와 통합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였다. 진안 지역의 총 교회 수는 74개이다. 진안의 교회를 교파별로 볼 때 장로교회가 전체 74개 교회 중 50개로서 월등히 많다. 이는 1903년에 열린 「미션공의회」에서 교파별 선교 지역을 할당하였는데, 호남 지역이 장로교 선교 지역으로 결정되어 이 지역에서 장로교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鎭安郡史(진안군, 1992)
  •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로서, 16세기 초 유럽에서 로마 카톨릭의 교의(敎義)와 제의(祭儀)에 반대하여 새로 일어난 종교 분파 단체이다. ‘종교 개혁’ 이후 성립된 ‘신교’ 교단의 통칭으로 ‘개신교’라고도 한다. 1세기 초에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수의 삶과 교훈이 후세에 편집되어 ‘성서’로 정경화(正經化)되었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유일한 진리’로 받든다. 본디는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하나의 교명으로 통용되었으나 이 ‘진리’에 대한 해석은 민족과 문화에 따라 차이가 생겨 나중에 3대 교파로 분리되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저항은 ‘면죄부’ 판매가 결정적인 원인이었고, 이에 반대하는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이 이끈 종교 개혁의 결과 로마 카톨릭(Catholic)에서 분리되어 성립한 종교를 좁은 의미의 기독교(Christ Church)라 부른다. 개신교(Protestantism)라 함은 1529년 쉬파이어 의회가 카톨릭의 결정에 불복(protestantio)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구교(천주교)’와 ‘신교(개신교)’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고,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또는 동방정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마 카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독교’라 부르고 있다. 여기에서 논하는 기독교의 개념은 신교 즉 프로테스탄티즘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일반적으로 성서주의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여’ 자기의 신앙을 형성해 갔으며, 신앙 동지들의 자유로운 결사에 의한 교파의 형성과 분열이 잦아 300여 개의 교파로 나뉘어졌다. 이 결과 16세기에 개혁 운동으로 생긴 프로테스탄티즘은 독일의 루터교회, 스위스의 츠빙글리(Zwingli, H.)와 칼빈(Calvin, J.)의 운동이 통합되어 생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급진적인 개혁을 주창하는 자유교회,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 Anglicanism) 등으로 분파되었다. 이어 18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자유화 운동으로 더욱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으며, 19세기 중엽부터 미국·영국·유럽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여러 교파가 세계 각지로 그 선교 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결합된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가시적인 면에서는 신자들이 모이는 건물을 뜻하기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라는 명칭을 예수가 처음으로 표현하였고,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통해 수천 명이 감동 받은 것이 교회의 출발이 된 점과 교회가 기독교 공동체의 정식 명칭이 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873년 조선 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출신의 로스(Rose, J.)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McIntyre, J.)가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청년 학자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盛夏)·김진기(金鎭基)·서상륜(徐相崙) 등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함께 성서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1876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882년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의 번역이 완료되어 만주 심양에서 이를 발행하였으며, 1887년에는 마침내 『예수셩교젼셔』라 하여 신약 성서 전부가 발행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례를 받은 187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가 출발한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일본에서 이 책을 구해서 1885년 4월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1887년 9월 서울에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교인 14명 중 13명이 서상륜을 통해서 이미 입교했던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의 선교는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먼저 착수하였는데,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알렌(Allen, H. N.)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4년 9월 22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 H. G.)가 인천에 왔다. 그 해 5월에 북감리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 모자가 도착하여 그의 어머니는 곧 이화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워 1886년 여름부터 개교하였다. 또한,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레이놀즈(Reynolds, W. D.), 테이트(Tate, L. B. 최의덕), 젠킨(Jenkin, W. M.) 등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고, 남감리교에서는 윤치호(尹致昊)의 기금이 자극이 되어 1895년 10월에 리드(Reid, C. F.)를 우리나라에 파송하여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밖에도 성공회는 1891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부는 1889년에, 캐나다 장로교는 1893년에, 침례교(浸禮敎)는 1889년에, 제칠일안식교(第七日安息敎)는 1904년에, 성결교(聖潔敎)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각각 특징 있는 선교를 전개하였다. 호남 지역에는 1892년에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면서 개신교 전래가 시작되었다. 1893년 서울에서 열린 ‘미션공의회’에서 호남 지역을 선교구로 정한 결의에 따라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최의덕(崔義德)을 비롯한 7인의 선발대가 1894년에 전주에 도착하여 선교부(Jeonju Station)를 세우고 전주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진안 지역의 개신교는 선교사 마로덕(馬路德, Luther Oliver McCutchen, 1875-1960)에 의해 전래되었다. 마로덕은 1902년에 한국에 왔고,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전남 목포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04년 전북 전주선교부로 옮겨왔다. 마로덕은 당시 완주군 일부 지역, 진안, 장수, 무주 등지를 선교 지역으로 맡아 순회 선교 활동을 하였다. 마로덕은 전주에서 재를 넘어 가장 가까운 지역인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 도착하여 이곳에 자리를 잡고 먼저 세동교회를 세웠다. 다음에 역시 같은 지역에서 부귀중앙교회를 설립하는 등 부귀면에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어 마로덕은 주천면 대불리로 이동하여 선교 기지를 정하고 대불리교회(현 대광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부귀면 세동리와 주천면 대불리 중간 지점에 진상동교회를 설립하였고, 이어서 진안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한편 당시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 설립에 공헌한 사람으로 김필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 마로덕의 조사로 일하였고 1909년 평양신학교를 수료하고 윤식면, 최중진 등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김필수는 이들 세 명과 함께 호남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김필수는 목사가 된 후 바로 진안으로 돌아왔다. 그는 당시 일본의 노골적 침략으로 국민들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생명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여 정천면 학골에 학골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1910년부터 평신도 훈련을 주관하여 진안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내고 제직회를 조직하였는데, 그가 길러낸 이 조직이 진안 지역의 전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안 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마로덕 외에도 보이열, 강운림 등이 있다. 구전과 각 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교회는 1897년 10월 진안읍 당산 옆 백남인의 집에서 가정 예배로 시작되었고, 1901년 부귀면 거석리 거석교회(현 부귀중앙교회), 진안읍 연장리 한들교회(현 연평교회), 상전면 월포리 단밭교회, 백운면 메실교회(현 백운교회), 을림교회(현 신암교회), 1902년 부귀면 세동교회, 1903년 주천면 대불교회(현 대광교회), 1904년 부귀면 진상동교회(현 황금교회), 정천면 조림교회(현 정천중앙교회) 등이 세워졌다고 한다. 1909년 이후 개신교회는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이 시대부터 선교사 중심의 시대는 끝나고, 선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협력 시대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필수가 진안, 용담, 무주 지역에 1년간 마로덕과 함께 순회 전도 목사로 활동하였다. 1910년으로 접어들면서 이들의 활동으로 진안 지방에는 정천면 학골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10년 5월 8일 한들교회에서 진안 지역 소제직회를 구성하여 메실, 한들, 진상동, 단밭, 세동, 거석리, 학동, 해월리(완주군 상관면) 등지에서 신자 대표가 참가, 교인 내부에서도 조직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0년경부터 진안 지역은 강운림(C. W, Monroe)과 김성원, 마로덕과 정찬식의 순회 전도를 통하여 비조직화된 교회를 대상으로 활동했다. 1917년 전라노회에서 전북노회가 분리되어 대한예수교 전북노회가 설립되고 진안 지방도 자연히 전북노회로 편입되었다. 전북노회에 등록된 정회원은 1919년 학골교회 김화성(金化成)이 있었고, 1923년 1월 23일 전북노회에 등록된 신자는 진안면 군하리 박승섭(朴勝燮), 강운림(康雲林), 구역으로 부귀면 진상동 홍순익(洪順翼), 오정리 최사행(崔士行), 거석리 이원칠(李元七), 마령면 연장리 이선량(李善良), 용담면 소방동 김성단(金成端), 정천면 봉학리 김택정(金宅程), 농산리 임주상(林周相), 진안면 군하리 김봉헌(金鳳憲), 주천면 대불리 김병섭(金炳燮), 진안면 역리(단양리) 박종서(朴宗西), 성수면 염북리 김응선(金應先), 백운면 을림리 최광일(崔光日), 상전면 월포리 정일도(鄭一道), 용담면 옥거리 고영선(高泳善) 등이 있었다. 3·1 만세운동에 이 지역 개신교의 신자도 참여하였다. 『한국기독교회사』 「호남편」에 의하면 진안 지역에서는 3월 15일 수백 명이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1922년에 주천 주양교회가, 1923년에 용담교회가, 1928년에 상전 갈보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진안읍교회는 1928년 백남인(白南仁)이 중심이 되어 창립하여 비조직 교회에서 조직 교회로 ‘당회’가 구성되었고, 진안 지역과 인근 장수·무주 지역의 선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는 1932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또 미국의 경제 공황으로 해외 선교부에 대한 경제 지원의 축소, 일제와 미국의 불편한 관계 등은 우리나라에서도 선교사와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일제는 다시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기독교 정신에 위배된다고 거절하여 강제로 추방당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와 성직자들은 일제의 강요와 회유에 넘어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교회와 성직자도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옥고를 치른 교인과 폐교를 당한 교회도 있었다. 진안 지역에도 신사 참배 거부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용담, 갈보리, 금지, 학동 등의 교회가 1943년에 폐교 당하였고, 이 시기에 일제의 강압에 의한 신사 참배와 교회 내부의 대립과 파쟁 등에 의한 혼란은 훗날 기독교계에 큰 시련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일제의 통치가 끝나자 각기 교회를 재건하고 나섰다. 전북 지방의 장로교회도 ‘일본 기독교 선교단 전북교구단’의 간판을 내리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로 환원하였다. 또한 추방당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의 재개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내한하기 시작했다. 진안 지역에도 폐교된 교회가 1946년 문을 열면서 농촌 청소년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며 이들이 교회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내 정세는 남과 북으로 갈리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을 가져오고 결국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남쪽을 침략하였다. 한국 교회는 이 한국전쟁을 통하여 가장 뼈아픈 시련과 고통을 당하였다. 북측이 제일의 적으로 지목한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하여, 12개의 교회가 있는 진안 지역에도 예배당은 인민재판소나 사무실로 만들었고, 서류는 불타고 교인들은 흩어져 피난가야 했고 희생자도 발생하였다. 조흥식(趙興植)은 1911년 10월 9일 성수면 좌포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부터 열심히 개인 전도를 하다가 그 지역 교회들의 청원에 의해 전도사로 선임되어 일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하여 1950년 8월 21일에 처형되었다. 6·25로 인하여 교회는 중요한 기록인 「당회록」이 유실되면서 각 교회의 교회사를 잃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다시 교회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재건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뿌리는 신사 참배에 항거하여 투옥된 목사나 신도와 신사 참배를 결의했던 목사 등이 광복 이후 단합하지 못하고 갈등과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동족 상잔의 비극이 일어났고, 1951년 전쟁의 포화가 멈추지 않은 상황에서 ‘고려파’를 비판하고 또 ‘고려파’는 총회에서 이탈하는 등, 최초의 장로교에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전북과 진안은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그 영향은 크게 받지 않았고 더욱 교회 발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광복 이후 1950년대 사이에 진안군 내에서 설립된 교회는 18개로 이 시기에 가장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오직 장로교 일색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1954년 신학 방법론 때문에 대한예수교 장로회와 한국기독교 장로회로 나뉘어 전자는 ‘예장’ 후자는 ‘기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진안 지역의 교회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장’은 또다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분열은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C.W.C.C) 관계로 ‘통합’ 측을 ‘용공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하고, 보수를 주장하는 ‘합동’이라는 교파가 생겨났다. 이때 전북과 진안 지역에도 교회의 양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 기독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 가장 극심한 대립과 분열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회의 내분에 의하여 교회가 침체의 상태에 머물고 있었음은 1960년대에 진안 지역에서 겨우 5개의 교회가 설립된 것으로도 증명된다. 1980년대에 진안군의 교회는 73개로 ‘합동’ 측이 45개의 교회에 신자는 약 3,000명으로 가장 많았고, ‘통합’ 측이 15개의 교회에 신자는 약 1,100명으로, 진안 지역의 교회는 ‘예장’ 측의 교회가 절대 다수였다. ‘기장’은 8개의 교회로 신자는 약 300명이었다. 또한 ‘개혁’ 측 교회가 2개에 신자는 약 60명이며, 예수교성결교회, 감리교, 개혁이 각각 1개의 교회로 신자는 50명 이내로 분포되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농촌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신자 수는 반 이하로 격감하였고, 용담댐 수몰 등으로 교회들이 상당수 없어졌으나 신설된 교회도 있어 1980년대에 비하여 교회 수는 큰 변동이 없다. 갈보리교회, 모정교회, 목양애교회, 삼락교회, 송풍교회, 수동교회, 조림교회, 와룡교회, 월포교회 등이 다른 교회와 통합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였다. 한국 개신교 교회는 10개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 이중 65%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The Presbyterian Church)를 비롯하여 감리교(The Methodist Church), 성결교, 침례교(The Baptist Church), 순복음(The Pentecostal Church), 구세군(The Salvation Army),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정교회(The Orthodox Church), 루터교, 복음교회 등이 한국 개신교 종파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 진안 지역의 총 교회 수는 74개이다. 진안의 교회를 교파별로 볼 때 장로교회가 전체 74개 교회 중 50개로서 월등히 많다. 이는 1903년에 열린 ‘미션공의회’에서 교파별 선교 지역을 할당하였는데, 호남 지역이 장로교 선교 지역으로 결정되어 이 지역에서 장로교 선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鎭安郡史(진안군, 1992), 디지털진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jinan.grandculture.net/?local→jinan) 재인용
  • 한국장로교회의 한 교단. 1960년 12월 고려파와의 합동으로 형성되었다. 한국장로교의 대표적 보수교단이며 약칭 「예장합동측」이라고도 한다. 한국장로교 초기에 형성된 근본주의적 신앙전통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교단이다. 교단 지도자들의 지도이념과 신학교 문제를 둘러싸고 1961년 「고려파」가 환원된 뒤에도 최근까지 교단운영에 따른 분규가 계속되었다. 장로교는 전래 초기 미국 북장로교 등 4개 선교부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지고 선교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단일교파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광복 후 신학노선의 차이, 신앙의 경건성 문제, 교회정치 문제, 신학교운영 등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다. 1951년 7월 총회에서 신앙경건성 문제로 「고려파」가, 그리고 1953년 6월 신학노선 문제로 한국기독교장로회측이 분열되었다. 이어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제44회 대전총회가 공전을 거듭하다 1960년 2월 통합총회가 분립 조직되자, 1960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45회 총회 때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의 합동을 결의하고 1960년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교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진안군에는 소속교회가 40개소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 한국장로교회의 한 교단. 장로교의 대표적 중도교단이며, 「예장통합측」이라고도 한다. 선교 초기부터 미국 북장로교 등 4개 선교부가 상호 협력하여 단일한 체계를 유지해온 장로교는 공의회시대·독로회시대를 거쳐 1912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를 결성함으로써 교단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장로교 신앙노선과 교리체계, 그리고 교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1930년대부터 신사참배강요 등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아오다가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체되고 일본 기독교단에 통합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자 일제의 강요에 의하여 변형되었던 신앙을 이전의 순수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로 수감되었던 교인들이 출옥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와 당시 교권을 잡고 있던 「교권파」 간의 신앙의 경건성과 윤리성 문제를 놓고 심한 마찰을 빚은 결과 1951년 5월 「고려파」가 분리되었다. 남북교회 간의 내부적인 갈등이 「조선신학교 문제」로 표면화되었다. 즉,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 신학과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초기 장로교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 간의 갈등이 나타났는데, 이로 인하여 1953년 6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되었다. 그 뒤 약 5년 간 안정을 보이던 교단은 「에큐메니컬운동(ecumenical movement)」의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또 한 차례 분열을 겪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한 지지 여부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며 근본주의 신학의 대변자인 박형룡(朴亨龍)의 세칭 「공금유용사건」과 교권투쟁의 문제가 있었다. 보수신학과 순수신앙을 주장하던 복음동지협의회(NAE)의 지지자들은 에큐메니컬운동을 반대하였고, 세계교회협의회(WCC)와의 단절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1948년 WCC 형성 초기부터 관여했던 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대를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들이 별도로 1960년 2월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통합총회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소위 통합측이라 불리는 이 교단이 탄생하였다. 진안군에는 소속교회가 16개소 있다.
    【참고】에큐메니컬 운동: 교파·교회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 교회를 통일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통일에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결국 1910년 에든버러에서 제1회 세계선교회의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 한국장로교회의 한 교파. 그 기원은 한국의 장로교회와 함께 하고 있으나,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의 전신) 사건」을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분립을 선언하였다. 조선신학교는 194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에서 총회직영 신학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평양신학교는 개교가 매우 불투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된 평양신학교 계열의 학생들이 학교의 신학사상과 교육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1947년 제33회 총회에 호소문을 제출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조선신학교의 신학이 성서문자 「무오(無誤)설」을 부인하는 19세기 극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장로교의 보수정통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신학교의 신학사상은 비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한 신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장로교는 이후 여러 가지 갈등과 우여곡절 끝에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총회 명칭을 개칭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와의 혼돈을 피하기로 하였으며, 이 명칭은 1961년(제46회 총회)에 지금의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되었다. 진안군에는 소속교회가 7개소 있다.
    《참고문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 정천면 갈룡길 83[갈룡리 1066-8] 무거마을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의 교회.
    1978년 1월 17일 설립되었다. 당시 정천면 소재지(용담댐으로 수몰)에 있던 조림교회에 다니던 신태인, 최진행, 하충헌, 신경순, 신경로, 왕옥님 등이 협력하여 마을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78년 설립과 함께 정천면 갈룡리 산 1211번지에 약 20평의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997년 4월 연건평 60여 평의 예배당 본관과 사택을 지어 이주하였다. 1998년 8월 18평의 교육관을 지었다.
    역대 목회자로는 신경옥, 백운용, 박경배, 정종근, 이판용, 김영화, 김영보 등이며, 2024년 현재 김영보 목사가 집무하고 있다. 전화 432-6127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진안읍 중앙로 23[군하리 288-14]에 소재하는 대한기독교감리교회 소속의 교회.
    공식명칭은 기독교대한감리회진안교회이다. 1985년 설립되었다. 2024년 현재 김진수 목사가 집무하고 있다. 교회전화 433-3253.
    감리교(監理敎)는 18세기 영국에서 창립된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이다. 창시자는 웨슬리(Wesley, J)이다.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웨슬리는 그의 선교에 대한 영국교회의 반대가 심해지자, 영국교회를 떠나 순회전도를 하며 그가 믿는 복음을 설교하는 데 전념하였다. 여기에 그의 동생과 동료인 휘트필드(Whitefield, G)가 가세하여 감리회(Methodist Society)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한국 감리교의 선교 시작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 시작이 된다.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Maclay, R.S)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의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하여 이를 허락하였는데, 그 날이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선교 계획과 준비는 급진전을 이루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 이후 의료사업, 육영사업에 공로를 세우고, 일제강점기에는 애국운동을 주도하였다. 광복 이후 교회는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고 일대 혼란에 빠졌다가 수습되었다. 즉, 감리교회가 한말과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과제를 선교의 과제로 삼아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던 전통을 저버리고 교회의 건축과 교세의 확충에만 주력하는 것은 민족을 위한 교회의 길이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였다. 이로 인하여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 갱신파의 분열이 있었으나 이 또한 곧 치유되어 화합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 마령면 원강정1길 60[강정리 46] 원강정 마을에 소재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의 교회.
    1990년 설립되었다. 2016년 현재 정규인 목사가 집무하고 있다. 전화 432-0136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부귀면 운장로 173[궁항리 101] 하궁항마을에 소재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의 교회.
    1979년 11월 17일 설립되었다. 이정수, 김민수에 이어 2024년 현재 백운용 목사가 집무하고 있다. 교회전화 432-8925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
  • 금마교회(金馬敎會) 진안읍 금마길 203-4「반월리 467-1」 금마곡에 소재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소속의 교회.
    1957년 설립되었다. 2024년 현재 김의중 목사가 집무하고 있다. 전화 433-2724
    《참고문헌》종교시설대장(진안군,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