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산 금당대 바위굴에 있었던 암자.
    【개요】 금당사에서 서북 방향으로 직선거리 약 900m 지점에 『진안지』에 실린 금당대(524.5m)가 보인다. 금당대 아래 암벽에 넓이 약 10평 남짓한 굴이 뚫려 있는데 「천상굴」, 「수행굴」 또는 「나옹암」으로 불린다. 이곳을 나옹암으로 부르는 이유는 나옹선사가 한 때 이곳에서 수행했기 때문이라 하는데, 옛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1924년판 『진안지』에 비로소 실린 것으로 보아 이 부분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곳에는 오래 전부터 암굴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사찰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김종직(金宗直)의 시 「마이산」에 “이틀 밤을 쇄석암(碎石庵)에 머물면서…”라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 쇄석암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쇄석암은 혈암사(穴巖寺)나 쇄암사(碎巖寺)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선조 때 진안현감이었던 민인백(閔仁伯, 1552~1626)의 문집에는 “내가 놀러갔을 때 작은 암자가 있었다. 사면 및 상하가 모두 돌인데 천정은 돌지붕, 바닥은 온돌, 네 벽도 돌로 천연이 만들어낸 곳이며, 옆에 늘어서 있는 괴석들은 개개가 특이하여 여러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둘레가 십리가 족히 될 것으로 참으로 기관(奇觀)이다.”라고 하여 굴 속에 위치한 암자를 그리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마이산 안에 다른 절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조구상(趙龜祥, 1645~1712)의 문집에는 “고금당 아래 산 허리춤에 석벽이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이다. 그 중앙은 갈라져 굴이 되었다. 나무 사다리를 통해 올라서면 굴 속에 두 칸의 집이 있고, 단청이 벗겨져 어느 때에 지은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한 칸은 방이고 방에는 사면 벽에 창문이 있으며, 모두가 자연스러워 조탁한 것 같지가 않다. 한 칸은 처마의 집인데, 사람의 손으로 세워져 있다. 위태로운 난간으로 아득히 만학천봉이 보이고 그 아래는 몇 길이나 되는지 굽어볼 수가 없다. 이것들은 모두 진안현 남쪽 마이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마이산의 형상은 석봉이 솟아나 깎아지른 듯 두 산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그 높이는 몇 만 길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의 귀 같은 모양이어서 이렇게 불린 이름일 것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용출산이라고도 하며, 산중에는 기록에 남겨둘 만한 곳이 수도 없이 많다. 다만 이 석굴을 기록하는 것은 그 기이한 절경이 가히 호남에서 으뜸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굴 속에 암자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역시 이 기록에서도 마이산 안에 다른 절이 있다는 언급은 없다. 이 점으로 보아도 마이산 안에는 지금의 나옹암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나옹암이 아니라, 혈암사(穴巖寺) 또는 쇄암사(碎巖寺)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즉 기록들의 혈암사(穴巖寺), 쇄암사(碎巖寺), 나옹암(懶翁庵)은 각기 다른 절이 아니라 하나의 절을 다른 이름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금동사. →금당사
    《참고문헌》마이산학술연구(진안문화원, 2003)
  • 정천면 갈룡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암자.
    갈룡리 천황사 앞에서 남쪽 산비탈로 500m 지점에 위치한 암자이다. 본디 천황사 소속 암자였으나 퇴락해 버린 것을 천황사의 신도였던 이도림(李道琳)이 1929년에 중건하였다. 이후 이도림의 아들 김흥룡이 주지로 있었는데, 그 당시는 태고종 소속이었다. 김흥룡이 죽은 뒤 그의 처 김숙자가 관리하다가 타지로 이주하여 비어 있던 것을 약 30여 년 전 조계종에서 수습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은 조계종 제17교구에 소속되어 있으며 참선 수행 도량으로 신도의 출입은 끊어진 상태이다. 남암은 수도처로서 외부 신앙 행사 없이 승려 1명이 거주하면서 기도 수양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인법당과 1931년 중건한 1칸의 산신각이 있다. 인법당 앞에는 수령이 약 400여 년이 넘는 전나무가 있어 천연기념물(→천황사전나무)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鎭安의 文化財(진안문화원, 2015)
  • 부귀면 황금리 운장산 중턱에 있던 절. 고지도에 표기는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1907년 9월 15일(음) 자로 작성된 호남창의록에는 “대불리에서 운장산을 넘어 내원사(內源寺)에서 유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해동지도, 비변사지도, 1872년 군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