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창시한 종교. 박중빈은 그의 나이 26세에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대각하고,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파란고해(波瀾苦海)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개교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2대 종법사 정산(鼎山) 송규(宋奎)는 원불교라는 교명에 대해 “원(圓)이란 형이상으로 말하면 언어와 명상(名相)이 끊어진 자리라 무엇으로 이를 형용할 수 없으나, 형이하로써 말하면 우주만유가 이 원으로써 표현되어 있으니, 이는 곧 만법(萬法)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만법의 실재인지라, 이 천지 안에 있는 모든 교법이 비록 천만가지로 말은 달리하나 그 실(實)에 있어서는 원(圓) 이외에는 다시 한 법(法)도 없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불(佛)은 곧 깨닫는다(覺)는 말씀이요 또는 마음이라는 뜻이니 「원의 진리」가 아무리 원만하여 만법을 다 포함하였다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다만 이는 빈 이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불(圓佛) 두 글자는 각자 마음에서 근본적 진리를 깨친 바탕 위에서 나타낸 것이므로 서로 떠나지 못할 관계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원불교와 불교】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법에 두고 있으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이다. 그러나 외면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차이는 신앙 대상의 상징이 다르며, 불교와의 역사적 교섭관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교단의 운영방식과 제도면에서도 종래의 사찰제도와는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즉 근본적 진리는 서로 상통하나, 교단은 기존 불교의 분파적 입장이 아니다. 창조·모방·개혁을 시도하는 새로운 교단으로 볼 수 있다. 박중빈은 불법을 주체로 삼아 새 종교를 주창하였는데, 그가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 즉 법신불(法身佛)사상을 주체로 하고, 모든 종교의 장점을 취하여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다. 시대화란 어느 시대에 처하든지 불법을 그 시대에 맞게 구현하자는 것을 말한다. 시대적 변화에 잘 동화하면서도 높은 차원으로 사람들을 지도해나갈 수 있도록 불법을 응용하자는 뜻이다. 생활화란 생활 속에서 불법(佛法)을 찾고 깨달아서 그 불법으로 새 생활을 개척해 나가자는 것이다. 대중화란 민중화, 서민화 또는 시민화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특수한 계층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보람을 찾을 수 있도록 국한 없이 불법을 구현하자는 것이다. 원불교는 정신개벽(精神開闢)을 표방하고 있다. 다른 기성종교와는 달리 우리 나라에서 발생된 종교로서 후천개벽의 이념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교조 박중빈(朴重彬)】박중빈은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에 우주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을 일으켰고, 9세 되던 해에는 인간만사에까지 큰 의심을 일으켰다. 이를 해결해보려고 산신과 도사를 찾기도 하였으며, 극진한 공을 드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기도와 고행을 15년 동안 행하였다. 15세에 양씨(梁氏)와 혼인하여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계속하여 의문나는 일에 몰두하였다. 부모의 후원으로 가정을 겨우 지탱하여오다가 20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생활고는 더욱 심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장차 이 일을 어찌할고” 하는 탄식과 더불어 오직 의심뿐 모든 것을 갑자기 다 잊어버리는 지경(頓忘狀態)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중 1916년 4월 28일 이른 아침, 문득 생각이 밝아지면서 온몸이 상쾌하여지고 모든 의심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대각의 경지였다. 박중빈은 그때의 깨달음의 경지를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말하였다.
    【원불교의 창교】박중빈은 그가 태어난 고향을 떠나지 아니하고 구도(求道)하였으며 그곳에서 도를 이루었다. 또한 그가 창교이념을 실현한 곳도 고향이었다. 그는 1917년 고향에서 뜻 있는 동지들을 모아 방언조합을 조직하여, 근검절약과 허례폐지, 금주·금연과 숯장사라는 제1차 시련으로 경제적 기초를 세우고, 1918년 3월에는 조상 대대로 버려 둔 해변의 갯벌에 자력으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시작하여 제2차 시련을 감행하여 1년만에 2만 6,000평의 옥답을 개간하였다.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박중빈은 제2차 시련을 거친 제자들을 이끌고 새로운 회상(會上) 창립을 위하여 제3차 시련에 들어갔다. 박중빈은 8인의 제자들을 이끌고 산상기도에 들어갔다. 박중빈은 방언공사와 산상기도를 통하여 교단창립의 기초를 다진 것이었으며, 박중빈과 그의 제자들은 그의 탄생지인 길룡리를 토대로 또 다시 회상 공개의 준비에 들어갔다. 도와 학이 겸비된 수제자 송규(宋奎)를 얻은 후 교법의 틀을 짜 갔다. 한편 1924년 4월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룡리(지금의 원불교중앙총부)에 총부를 건설하려고, 「불법연구」라는 임시 명칭으로 교문(敎門)을 열었다. 1940년에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수계리에 대농장을 건설하였다. 이는 원불교 창립의 제5차 시련 작업이었다. 과수원과 축산업을 겸한 새로운 영농방식에 착수하여, 명실공히 산업종교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박중빈은 교단의 사업목표를 교화·교육·자선에 두고, 차츰 이를 추진해나갈 기관을 확장해나간 것이다. 「원불교」란 교명은 광복을 맞이하고 박중빈의 유시에 의하여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가 개칭한 것이었으며, 1947년 4월에 재단법인 원불교의 등록을 필한 후 공포되었다.
    【교리 및 교서】박중빈은 그가 깨달은 진리를 「○」으로 그려 상징하고, 이는 불생불멸의 진리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우주만상이 전개되고 있음을 밝혔다. 원불교의 교리는 이 일원상의 진리를 최고 종지로 하였다. 곧 일원상의 진리는 만사만리(萬事萬理)의 근원이요, 만령을 움직이는 생성력(生成力)이라고 본 것이다. 이 진리를 근거로 하여 박중빈은 사은사요(四恩四要)의 신앙문(信仰門)과 삼학팔조(三學八條)의 수행문(修行門)을 열게 된 것이다. 원불교 경전은 9종 교서 및 그 밖의 교서로 나누어져 있다. 9종 교서는 『정전(正典)』·『대종경(大宗經)』·『불조요경(佛祖要經)』·『원불교예전(圓佛敎禮典)』·『성가(聖歌)』·『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세전(世典)』·『원불교교사』·『원불교교헌』을 말한다.
    【조직 및 체제】원불교는 교단을 총괄하기 위하여 중앙총부를 두고, 종법사와 수위단회(首位團會)·중앙교의회(中央敎義會)·교정원(敎政院) 및 감찰원(監察院)을 두고 있다. 그리고 각 지방별로 국내 15개의 교구와 500여 개의 교당이 있으며, 해외에는 미주동부교구·미주서부교구·유럽교구·일본교구 등 4개 교구와 40여 개의 교당이 있다. 아울러 교육기관·훈련기관·문화기관·복지기관·의료기관·산업기관 및 기타 관련 단체를 두고 있다. 신도는 약 100만으로 집계된다. 종법사는 교단을 주재하고 대표하며 수위단회의 회장이 된다. 수위단회는 교단의 최고의결기구일 뿐만 아니라 박중빈의 초기 교단조직의 이념에 근거하여 「이단치교」의 교단통치의 최고기구로서 역할되고 있다. 박중빈이 죽고 난 뒤, 종법사가 된 정산(鼎山) 송규(宋奎, 1900∼1962)는 일제강점기 시절 임시로 내걸었던 「불법연구회」라는 간판을 내리고, 이미 내정되었던 「원불교」 교명을 붙였다. 1962년 2월에 정산종사의 종통을 이어 대산(大山) 김대거(金大擧, 1914∼1998)가 종법사로 취임하였고, 1994년 11월 대산종사의 뒤를 이어 이광정(李廣淨, 호는 좌산 左山, 1936∼)이 종법사로 취임하였다. 2006년 11월 4일에는 경산종사가 종법사로 취임하고 좌산은 상사로 추대되었다.【진안지역 원불교 현황】진안지역에는 마령교당이 1929년 6월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38년 좌포교당, 1958년 진안교당, 1968년 백운교당, 1970년 중길리교당, 1971년 주천교당, 1978년 가수교당 등 7개의 교당이 설립되어 있다. 진안지역 원불교 교당 설립 초기에는 각 교당마다 100명 미만의 규모로 법회가 이루어지다가, 1987년에는 법회에 참여하는 교도 수가 1,300명으로 늘어났다. 2024년 현재 진안지역 법회에 참여하는 교도 수는 3,00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불교 전북교구 진안지구「진안군·무주군·장수군」에는 10개의 교당 중 7개 교당이 진안군에 설립되어 있고, 이를 총괄하는 전북교구청이 전주시 경원동에 있다. 진안군에는 2024년 현재 진안교당, 가수교당, 마령교당, 백운교당, 좌포교당, 주천교당, 중길리교당 등 7개의 교당과 만덕산 훈련원이 있다.
    《참고문헌》원불교(http://www.won.or.kr/)
  • 성수면 가외반로 13-3「좌산리 산92-13」에 있는 원불교 교당.
    원불교의 교리를 널리 알리고자 교도 류장영·최유석 부부가 1976년 12월에 한옥 2동과 대지를 매입하여 조성을 시작하였다. 1978년 2월 23일에 원불교 가수선교소로 인가 받고, 1979년 3월에 임묘준이 초대 교무로 부임하였다. 1979년 5월에서 1981년 3월까지 법당과 생활관 등을 보수하고 담장을 쌓았으며, 법당 신축을 위하여 9년 동안 교도들이 건축 기금을 조성하였다. 1986년 9월에 임묘준이 좌산새마을유아원 원장에 취임하면서 유아원이 가수교당으로 이전하였다. 김용겸이 성수면 좌산리 산92-13의 대지 991㎡를 기부하여 1987년 9월 22일에 대지 991㎡「300평」, 법당 99㎡「30평」, 생활관 49㎡「15평」 등 새로운 교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전북교구 진안지구에 속한다. 역대 교역자는 1대 임묘준(林妙俊), 2대 문희원(文熙圓), 3대 송덕신(宋德信), 4대 박용덕(朴龍德), 5대 최희성, 6대 이남현, 7대 박효정. 8대 박정관. 매주 일요일 법회가 열리고 있다. 전화 432-9087
    《참고문헌》원불교 전북교구(http://www.wonjb.or.kr/)
  • 백운면 노촌리 상미마을에 있는 원불교 수련 전문 시설.
    김효철이 1998년 12월에 건물 두 채(30평과 15평)를 건립하여 설립하였다. 현재 국제수련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원불교
  • 마령면 솔안1길 12-19「평지리 631-1」에 있는 원불교 교당.
    처음에 송동환의 집 사랑방을 빌려서 60명의 교도와 활동하다가 1929년 5월 마령면 평지리에 대지 3,296㎡「997평」을 매입하여 6월에 기와집을 신축하여 설립하였다. 1932년 2월에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당유지답 4,628㎡「1,400평」을 마련하였으며,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당을 정착시켰다. 1960년에는 대각전을 신축하였고, 1976년 8월에는 대법당을 신축하였다. 1962년에는 어린이, 학생, 청년회를 활성화시키고 야학을 개설하는 등, 원불교의 붐을 조성하였다.
    【역대교무】박대완 최초 출장원을 비롯하여 초대 팔산 김광선(八山金光旋), 2대 구산 송벽조(久山宋碧照), 3대 영산 박대완(靈山朴大完), 4대 용타원 서대인(龍陀圓徐大仁), 5대 하산 김일현(河山金日鉉), 6대 달타원 이정화(達陀圓李正和), 7대 호산 이군일(湖山李君一), 8대 앙산 조준곡(仰山趙峻谷), 9대 지타원 전기철(至陀圓全基徹), 10대 앙산, 11대 경타원 이도흥(慶陀圓李道興), 12대 온산 태덕권(溫山太德權), 13대 온타원 박명음(溫陀圓朴明音), 14대 적타원 전경화(積陀圓全敬和), 15대 신영문(辛靈文), 16대 동타원 박현도(同陀圓朴玄道), 17대 진타원 남궁은(眞陀圓南宮恩), 18대 위타원 유종신(威陀圓柳宗信), 19대 서경은이 봉직하고 있다., 마령교당에서 배출된 교역자로는 송혜환(宋慧煥: 東煥「본명」), 전음광(全飮光: 世權), 오종태(吳宗泰: 孝順), 오종순(吳宗順), 송원철(宋圓徹: 今道), 송일환(宋日煥: 昌煥), 전구일(全九一: 流頭), 황형일(黃亨一: 永周), 전수석(全守石: 龍煥), 최정균(崔正均: 昌植), 전태수(全泰守: 泰英), 이현도(李玄度: 同宰), 이혜선(李惠善: 玄南), 김원우(金圓祐: 炳祐), 최인춘(崔仁春: 春江), 송원전(宋圓田: 金柱), 송혜자(宋慧慈: 金英), 전해덕(全海德: 南海), 박창운(朴昌運: 東準), 오정도(吳正道: 善未), 이순성(李順性: 午順), 태성실(太成實: 貞模), 오은도(吳恩道: 銀道), 최향일(崔享一: 圭珍), 송용원(宋庸元: 性鎭), 서용덕(徐庸德: 泰熟), 송청진옥(宋淸進玉: 분옥), 전봉선(田奉善: 淳子), 전봉규(全奉圭: 奉圭), 김도심(金道心: 潤子), 김용성(金容聖: 鍾潤), 이덕원(李德源), 김지훈, 김인정, 이성도, 최덕화, 서영자 등이다.
    《참고문헌》원불교 전북교구(http://www.wonjb.or.kr/)
  • 성수면 중길로 655-37「중길리 563-8」에 위치한 원불교 훈련원.
    원불교 초창기에 교조 소태산 박중빈의 방문의 인연으로 1924년(원기9) 익산총부건설 이전에 12인의 제자와 더불어 처음으로 수선(修禪)했던 만덕산 일대.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초선지(初禪地)와 만덕산 농원을 포함하여 성지로 보고 있다. 만덕산 성지는 1924년(원기9) 5월에 소태산이 친방하여 한 달 동안 수선했으며, 그 과정에서 원불교의 3대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를 만나기도 했다. 만덕암에서는 소태산을 스승으로 성주의 송규(정산종사), 영광의 김광선ㆍ오창건, 임실과 진안의 최도화와 전삼삼ㆍ전음광 모자, 노덕송옥과 손자 대산, 전주의 이청춘, 경성의 박사시화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12인이 김광선의 주관으로 1개월 선회(禪會)를 열고 총부건설도 준비했다.【만덕산훈련원】마령교당 송혜환 송일환 등 인재양성단 활동이 매우 활발하여, 1930년에 그들의 수시 지방양성금으로 성수면 중길리 상달의 너부실 산판 17만평을 매입하여 훗날 만덕산농원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또 이공주가 20원을 희사하여 만덕산에 임야 50정보를 매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준경, 이보국, 정일지, 전구일, 이재문 등이 총부에서 파견되어 너부실에 집(洪谷堂)을 짓고 감나무 등을 심는 등 산전 개간을 하며 약초를 캐다 팔면서 간고한 생활을 하였다. 설립당시의 규모는 건물1동 5평, 부동산 임야 50정 59묘이었다. 1932년(원기17) 개간임야에 감나무 5,300주를 심었으며 1936년에는 15,000평을 개간하여 다시 감나무를 심었다. 원기29년 중길리 상달에 사는 최내선 교도가 홍곡당에서 간간히 법회를 보다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불법연구회 중길리 출장소」 간판을 걸었다. 6.25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교당도 없는 상태에서 농원을 팔자는 의견 등 많은 의견이 분분할 때 동전주교당 백낙천 교도회장(전주 박고약)이 만덕산 농원 개발의 서원을 가지고 1967년(원기52) 법당 겸 숙소를 지었다. 만덕산 전체가 참나무임을 보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만덕산은 표고버섯 재배가 적격이라 판단하고 1971년(원기56)부터 표고버섯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원기58) 양제승 교무가 부임하여 농원 운영을 영육쌍전에 바탕한 산업훈련 도량화 하였다. 동년 대산종법사 특별유시로 농장개발이 활성화되어 표고재배, 인삼재배, 사슴사육 등 고등농장으로 변모하였으며 전주교구의 훈련도량으로도 개발되었다. 이 해부터 만덕산 동선을 시작하였다. 1976년(원기61)에 식당을 건축하고 1978년(원기63) 전기를 가설하였다. 1981년(원기66) 3월 23일 상달까지 시외버스가 개통되었고, 1982년(원기67) 중길교당을 건축하고 전화를 가설하였다. 이 해에 훈련관을 신축하고, 규모는 법당 195㎡, 생활관 271㎡, 훈련관 232㎡, 수련관 198㎡이다. 1983년(원기68)에 훈련원의 면모를 갖추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후 예비교역자 전지훈련 등 동, 하선으로 만덕산 초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90년(원기75)에는 동선과 마찬가지로 하선 훈련을 시작하였다. 만덕산농원은 표고버섯을 비롯하여 각종 자연식품을 생산하여 오다가 최근 영농법인을 설립하여 만덕산 푸른생명 효소 등 많은 다양한 건강식품을 개발하여 시판하고 있다. 이와 연대하여 1999년부터 효소 크리닉센터(酵素禪院)를 열어 효소 단식을 통한 건강회복이 성공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 많은 수련생이 다녀갔다.
    역대원장은 양제승(梁濟乘: 承鉉), 정도중(鄭道中), 김효명(金曉明), 이양신(李良信), 양태홍, 전흥진, 고원주 등이다. 만덕산훈련원에서 배출된 교역자는 김서학(金瑞鶴: 吉萬), 이성원(李聖圓: 建平), 윤상원(尹常原: 宗基), 이진도(李眞道: 敬淑) 등이 있다. →원불교
    《참고문헌》원불교 전북교구(http://www.wonjb.or.kr/), 만덕산훈련원(http://cafe.daum.net/mdsan)
  •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 불당골 위 벼랑바위 아래에 위치하고 있던 좌포리 김해 김씨의 종중 산제당.
    원불교도들은 ‘초선지’라고 부르나 정산종사는 <불법연구회 창건사>에서 ‘만덕암’이라고 하였다. 영산·변산·익산과 함께 원불교 성지의 하나로 되어 있다. 정산이 미륵사에서 최도화를 만났고 소태산도 봉래정사에서 이곳을 찾아 머물렀다. 1924년 6월,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직후 이곳에 두 번째 와서 여름 동안 제자들과 수양하였다. 이때 가장 나이가 어리던 11세의 소년 김대거는 뒷날 출가하여 송규의 뒤를 이어 법통을 받았다. 원불교 종단은 만덕암 아래 농원과 훈련원을 세웠다. 최근에 만덕암 들어가는 입구에 원불당을 세웠다.→원불교
  • 백운면 백암리 540에 위치한 교당.
    설립일은 1968년(원기53) 3월 11일이다. 1964년(원기49) 10월부터 마령교당(교무 全基徹)은 연원교당을 설립하기 위하여 조정덕화 가 20리나 떨어진 백운면에 4년 동안 순교를 다녔다. 박혜련화, 전계송의 주선으로 1966년 4월 반송리에 5칸 초가를 매입, 매달 2회 법회를 보다가 1968년(원기53) 1월에 백암리 540번지로 이전하여 동년 4월21일 마령교당의 교도와 지방 유지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운교당 신설봉불식을 가졌다. 초대교무로는 마령교당 박인숙(朴仁淑)이 부임하였다. 백운교당은 2년만인 1970년(원기55) 화재로 전소되어 청년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화재 복구작업을 하여 전국교당에서 교도들의 협조금이 답지함으로써 동년 2월 16평의 새로운 교당을 마련하였다. 1979년(원기64) 3월 26일 법당을 신축하고 1984년(원기69) 7월 생활관 25평을 현대식 기와집으로 신축하여 농촌교당으로서 새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역대 교역자는 초대 박인숙(朴仁淑), 2대 강영문(姜英文), 3대 김진학(金進學), 4대 김도운(金道運), 5대 정희행(鄭喜行), 6대 하용현(河龍現), 7대 신평숙(申平淑), 5대 진문철, 6대 성명종, 7대 허선관이 봉직하고 있다. 전화 : 432-4517 →원불교
    《참고문헌》원불교 전북교구(http://www.wonjb.or.kr/)
  • ⇒원불교 주천교당
  • 성수면 원좌길 33-12에 위치한 교당.
    1938년 4월에 설립되었다. 갑자년(1924) 여름, 불법연구회 창립 직후 대종사 만덕산 수양을 계기로 이현공, 노덕송옥을 비롯하여 성수면 좌포리 주민들이 많이 불법연구회에 입회하였다. 마령교당 설립 이후 시오리 산길 물길을 건너 법회를 보기 위해 섬진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 평지리까지 내왕하여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32년(원기17), 마령교당에 김광선 교무가 부임하면서 좌포리에 음력 시월초사흘날부터 매월 초사흘, 열사흘, 스무사흘 날에 출장 법회를 보기 시작하였다. 1938년(원기23) 윤채운씨(대산의 외조모)가 대지 300평과 건평 40평의 가옥을 희사하고 김인오씨(대산의 부)가 논 3두락을 희사하여 교당과 유지답이 확보됨으로 해서 좌포교당이 성립되었다. 동년 4월, 마령교당 외감원으로 있던 송봉환이 좌포 순교무로 부임하고 만덕산 일까지 관장하게 되면서 좌포교당 교화가 시작되었다. 초대 교도회장은 김대설 교도(대산의 동생)이다. 1942년(원기27) 3월부터 교도들의 혈심 노력과 부산지방 강수련 교도의 특별원조를 받아 교당 건축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1943년 10월 준공하여 이안 봉불식을 거행했다. 광복되던 이듬해(1946) 4월에 지부로 승격되었고 지부장은 김대설(대산의 친제) 교도가 임명되었으며 6. 25를 당하여 서세인 교무와 감원 최복기화 교도가 남아 천신만고 끝에 교당을 지키다가 수복이 되면서 치안대원이 주재하게 되었다. 1951년(원기36) 이정만 교무가 부임하여 쓰러져 가는 교당 건물을 팔고 1960년 4월에는 성수면 좌포리 821에 대지 800평 위의 목조와가 4칸과 부속건물을 매입하여 1961~1962년에 개수, 확장하였고, 1964년 목조와가 3칸과 대지 200평을 매입 생활관과 정문을 건립하여 교화에 활력을 얻었다. 1968년 유지답 500평을 매입하였다. 1984년 9월 4일에는 유아원 건물 45평을 신축하여 원광 유아원을 개설하고 어린이 교화의 장을 갖춰 교당의 면모를 확실히 다졌다. 창립 유공인은 김대거, 이현공, 안경신, 노덕송옥, 김인오, 윤채운, 서홍기화, 김대근, 이정국, 이혜명화, 오현초, 김명심, 김대설, 유현주화, 최봉서화, 송진언 교도 등이다. 좌포는 농촌지역인 관계로 교육혜택도 받기 힘든 지역이라 교도자녀들을 중심으로 주변 청소년들을 모아 1953년부터 야학을 한 것이 교화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다. 교무는 4~8km 떨어진 교도 집을 순교하면서 교도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학생회는 1956년 2월 2일에 30여명이 모여 발족하였고 1957년 2월 25일에 청년회를 결성하였다. 1966년 12월1일에는 종전에 실시한 바 있던 야학을 <원광야간중학>이란 명칭으로 50명을 모집하고 체계를 세웠다. 이때 교사는 주로 청년회원인 좌포초등학교 교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1971년 2월 1일부터 어린이 20여명이 조직되어 박영남 교도의 지도로 성가, 무용법회를 각 지역마다 순회하면서 실시함으로써 교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4년 9월 4일 새마을 유아원을 개원하여 원생교육에 착수했다.
    역대 교역자는 초대 이태연(李泰然), 2대 송봉환(宋奉煥), 3대 이태연(李泰然), 4대 이대교(李大敎), 5대 이성신(李聖信), 6대 임선양(林善陽), 7대 김봉식(金奉植), 8대 서세인(徐世仁), 9대 이정만(李正滿), 10대 김광순(金光順), 11대 장선거(張善居), 12대 이성로(李性露), 13대 이정환(李晶煥), 14대 김제명(金濟明), 15대 김경인(金敬仁), 16대 이영덕(李永德), 17대 이신정(信正), 18대 김형모(金亨模), 19대 장경도(張敬道), 박주성 송재도 문도연 교무 등이다.
    좌포교당에서 배출된 교역자는 김대거(金大擧: 榮灝) 김대근(金大根: 榮薰), 김형철(金亨徹: 順任), 김은신(金恩信: 三玉), 김복환(金復煥: 復煥), 김덕현(金德賢: 恭淑), 심도정(沈道正: 大燮), 심창덕(沈昌德: 孝順), 이선종(李善宗: 貞子), 김성관(金聖觀: 聖觀), 최만진(崔滿振: 德眞), 최도선(崔道善: 順子), 김은준(金恩峻: 峻謙), 김정유(金正有: 載璟), 이명종(李明鍾: 鍾文), 최성란(崔聖蘭: 仁順), 김명원(金明元: 大準), 김덕영(金德寧: 榮植), 김은주(金恩珠), 김도심(金道心: 潤子), 김순익(金舜益: 扶謙), 김의겸(金義謙: 義謙), 이혜선(李惠善: 玄南), 이선도(李宣道: 正琴), 조지성(趙智聖: 銀衡), 이광정(李廣淨: 建衡), 송청진옥(宋淸進玉: 분옥), 이자복(李慈福: 福姬) 등이다. 좌포교당 전화 432-9072.
  • 주천면 주양리 89-10 괴정마을에 있는 원불교 교당.
    주천교당은 당초 안천교당이 이전된 것이다. 안천교당은 1968년(원기53)말 김적락(金寂樂: 炳文), 이화원(李和圓) 부부의 발원과 교화 3대목표의 하나인 교당늘리기의 일환으로 진안지부 김보신 교무가 출장법회를 보다가 1970(원기55) 4월 김법진 교무가 부임하면서 선교소로 발전하여 진안군 안천면 노성리 1086에서 봉불식을 하게 되었다. 이에는 창립요인 임명일 교도의 자녀인 진안중학교 교사 김석윤 교도의 숨은 노력이 컸으며 교도회장을 맡으며 모친 임명일 주무의 회갑식을 교당에서 갖고 회갑연에 필요한 경비로 교리강습을 개최하여 법공양을 하는 등 교당을 유지하였다. 이후 용담댐으로 인한 수몰로 교당이 수몰되게 되자 그 보상금으로 지금의 대지인 답 977평을 매입 30평의 법당건물과 25평의 생활관을 신축하여 원기86년(2001) 5월 27일 봉불식을 거행하였다.
    주천(안천)교당의 역대 교역자는 초대 김법진(金法眞), 2대 박명제(朴明濟), 3대 온화중(溫和中), 4대 소정인(蘇貞仁), 5대 송인명(宋仁明), 6대 박정혜(朴正慧), 7대 김인봉, 8대 이영진(李永眞), 9대 남궁선(南宮善), 10대 양성훈(楊聖薰) 11대 장원심, 12대 이보림, 13대 김원봉, 14대 김성길 교무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