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읍 대광길 26-14[군하리 421-1]에 있는 전주교구 소속의 천주교 교회.
    【연혁】1876년경 진안지역에는 충청도 등지에서 피난해 온 천주교 신자들이 삼바실, 절골, 모시골, 절번덕이 등에 흩어져 살았다. 1883년 교세 보고서에 의하면 삼바실 공소에는 56명의 신자가 살았고, 최덕효(崔德孝)를 중심으로 1884년 설립된 모시골 공소에는 21명의 신자가 있었다. 1888년 어은동(魚隱洞) 공소가 설립된 후에 어느 정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신자들은 점차 어은동으로 이주하였다. 이렇게 어은동을 비롯한 진안 지역으로 전라도 다른 지역의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그 수가 현저히 증가하였다. 1886~1900년에는 무려 27개의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에 전주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는 진안을 비롯하여 용담, 장수, 남원, 무주 지역의 많은 공소들을 관할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1900년 9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보두네 신부에게 진안 등의 지역을 전주 본당에서 분리할 것을 제안했고, 한국인 신부 한 명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어은동 본당 시기】1900년 9월 뮈텔 주교는 보두네 신부의 뜻에 따라 어은동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김양홍 신부를 파견하였다. 김양홍 신부는 보두네 신부의 관할 구역 가운데 진안을 비롯한 11개 지역 공소를 이관 받아 이를 다시 18개 공소[진안 4, 무주 1, 용담 1, 장수 9, 남원 3]로 나누었는데, 당시 이관 받은 신자 수는 999명이었다. 이 중에서 삼바실, 모시골, 절골, 절번덕이를 합친 어은동 공소는 신자 수가 189명에 이르렀다. 김양홍 신부는 부임한 이듬해 9월 옛 공소를 수리 확장하여 너와 지붕 목재 7칸 건물을 성당으로 완공하였다. 1903년 신자 수가 1,400명에 이르자 기존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어 1904년 마을 아래쪽에 15칸의 새 성당을 신축하였다. 이후 계속되는 신자의 증가로 1909년 3월에 너와 지붕 목조 162㎡[49평]의 새 성당을 다시 준공하여, 그해 9월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한편 당시 진안읍에는 학교가 있기는 했지만 배우고 싶어 하는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충분한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김양홍 신부는 1909년 2월 이들을 위해 성당 사랑채에 영신 학교(永信學校)를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의 학생 수는 30명이었으나 곧 60여 명으로 늘어났고, 1911년 9월 학교를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영신 학교는 교육뿐만이 아니라 전교에도 기여하였다.
    【한들 본당 시기】1915년 6월 김양홍 신부가 제주도로 전임되고, 임시 주임으로 타케 신부가 임명되어 사목 활동을 하는 동안 진안 지역에는 군상 천주당[진안군 진안면 군상리], 진안 천주당[진안군 진안면 죽산리], 반송 천주당[진안군 백운면 반송리] 등 3개의 포교소가 개설되었다. 2대 주임 이상화 신부는 본당 발전을 위해 전교 전망이 큰 지역으로 본당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1921년 6월 장재동 공소로 옮겨 거처하다가, 1922년 6월 다시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 한들로 옮겼다. 이어 박덕화(朴德和)[다미아노]의 주선으로 한들[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중평]에 정착한 후 7월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였다. 1924년 10월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고, 1930년에 종각을 세웠다. 이상화 신부가 한들로 본당을 옮길 때 어은동 일부 신자들이 신부를 따라 한들로 이사하였다. 그때 한들의 박덕화는 이주한 신자들이 생활 기반을 마련하도록 논을 구입해 주었다. 3대 주임 권영조 신부는 1935년 10월 성모 동굴을 건립하고 성모상을 세웠다. 또 권 신부는 교육 사업에도 헌신하여, 한들 본당 지역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1933년 4월 해성 학교(海星學校)를 설립하고 초가 4칸의 교사를 신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학생 수가 증가하자 1936년 9월에는 교사 5칸을 증축하였다. 4대 주임 이기수 신부는 문교 시책에 따라 해성 학교를 보통학교로 개편했고,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학술 강습소를 개설하였다.
    【진안읍 본당과 어은동 본당의 설립과 폐쇄】1941년 4월 13일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자 한들 본당 이기수 신부가 진안읍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한들 본당에는 허일록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기수 신부는 진안읍 군상리 함연국 회장 집에 거주하며 사목 활동을 했고, 진안읍 군상리 866번지 소재 초가를 구입하여 기와지붕의 강당을 개수하였다. 그리고 군하리 소재 전답 1만 4876㎡[4,500평]을 성당 부지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성당은 건립되지 못했고, 결국 진안읍 본당은 1942년 말 폐쇄되어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한편 어은동에도 1947년 11월 다시 본당이 신설되어 송남호 신부가 부임하여 진안면 일부와 장수군 천천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하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어은동 본당은 1951년 2월 폐쇄되고 한들 본당 관할 공소로 환원되었다. 1951년 4월 한들 본당에 허 신부 후임으로 김반석 신부가 부임하고 1952년 진안읍으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였다. 김 신부는 4대 주임 이기수 신부가 사용했던 군상리의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당시 이 신부가 매입해 두었던 군하리 전답에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과 각 공소 회장들로 성당 신축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6년 10월 363㎡[110평]의 성당을 준공하여 1957년 7월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어은동, 진안읍, 군상리, 한들로 본당을 옮기고 그 사이에 진안읍과 어은동에 새로 본당이 신설되기도 했던 진안 지역은 비로소 진안 본당으로 정착되었다. 한편 1956년 12월 성탄 준비 중 목재 2층의 사제관이 화재로 전소되어 시멘트 벽돌로 사제관을 다시 지은 후 1957년 7월에 성당과 함께 축복식을 가졌다. 같은 해 3월에는 소화 유치원을 개원했으나, 운영난으로 인해 1962년 3월 진안 경찰서에 인계하였다. 1959년 3월에는 진안읍 군상리의 개인 병원을 매입하여 성모 병원을 개원하였다.
    【진안 본당의 정착과 발전】10대 주임 황인규 신부는 전교 활동에 힘쓰는 한편, 지역 주민들의 복리 증진과 생활 터전 마련을 위해 개간 및 수리 시설 등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황 신부는 가톨릭 구제회에 요청하여 받은 구호 물품으로 부귀면 봉암리의 황무지 3만 3100㎡[1만여 평]을 전답으로 개간하고, 봉암면 미실 마을 뒤 골짜기에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수리 시설을 갖추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개간 사업이 완료되기 전에 황신부가 전임되고 이후 여러 가지 사정상 사업을 계속 추진할 수 없게 되어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1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현석 신부는 다양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구(舊) 유치원 건물에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양재 기술을 교육하였으며, 성모 병원을 회수하고 입원실을 2층으로 증축하여 병원 운영을 재개하였다. 이와 함께 이 신부는 신자들의 주선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동향면의 구 면사무소 건물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할 계획을 세우고 그곳에 전교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우는 등 열성적으로 사목 활동을 수행했으나, 과로로 성모 병원에 입원한 뒤 1971년 3월 사망하였다. 이어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성운 신부는 1973년 동구점 공소를 설립하고 본당 성모상을 건립했으며, 어은동 성당을 보수하고 본당에 자모회를 결성하였다. 14대 주임 서석구 신부는 1976년 4월 구 유치원 목조 건물을 철거하고, 122㎡[37평]의 단층 건물을 신축하여 1962년 문을 닫은 소화 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였다. 1977년에는 사제관을 보수하고, 진안읍 중리와 부귀면 황금리에 공소를 신축하였다. 한편 1970년부터 운영을 재개했던 성모 병원은 운영난으로 인해 또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 1977년 12월 31일 한들 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본당 관할 지역인 부귀면, 마령면, 백운면, 성수면이 한들 본당에 이관되었다. 하지만 한들 본당은 전주 교구의 장기적인 사목 계획에 따라 1985년 1월 폐쇄되어 진안 본당에 통합되었다. 15대 주임 김윤섭 신부는 매월 사도회와 공소회장 회의를 개최하여 연중 계획을 검토하고 실천했으며, 신자들의 신심 교육에 힘써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이끌고 레지오 마리애 전교 활동을 강조하여 쁘레시디움 창단이 활성화되었다. 1979년 12월 진안 천주교회 농민회 협의회가 발족되면서 평촌 공소·소토실 공소·어은동 공소에 농민회 분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2월 선인동 공소 농민회 분회가 결성되었다. 농민회는 김윤섭 신부의 지도하에서 농협 민주화 활동, 불량 비닐 보상 문제의 해결 등을 통해 지역 공동체와의 일치와 화합을 다져 나갔다. 16대 주임 강덕창 신부는 1982년 9월에 진안읍 오천리 평촌 공소 신자들의 본당 신축 요청에 따라 신축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595㎡[180평] 부지를 확보하고 5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다음해 11월 성당[247㎡]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고 관할 지역에 묘가 있는 이명서[베드로]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지어졌다. 17대 주임으로 부임한 성태수 신부는 1985년 6월 사제관을 수리하여 1층은 식당, 2층은 사제관으로 개조했고, 재임 기간 동안 봉암·마령·수항 공소의 강당을 개축하였다. 또한 1987년 7월 수녀원 건물이 새로 지어져, 이듬해 2월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 분원이 마련되었다. 18대 주임으로 부임한 윤양호 신부는 본당과 공소 신자들의 신심을 더욱 심화시키고자 1988년 청년회, 성모 기사회, 울뜨레야를 결성하여 본당 신심 단체를 확대했으며, 각 공소에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을 창단하고 성모상도 건립하였다. 20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사정 신부는 애령회를 결성하여 신자들이 일치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공소 전교에도 관심을 기울여 마령 공소에는 선교사 부부가 입주하였고, 한들 공소에는 선교 수사가, 평촌 공소에는 선교 자매가 실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21대 주임 이동 신부는 임기동안 소토실 공소[1996년]와 부귀 공소, 거석 공소[1997년]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98년 1월 22대 주임으로 부임한 현유복 신부는 이듬해 12월 전기 누전으로 성당이 전소되자 새 성전 건립 공사를 추진했고, 2000년 10월 29일에는 어은동 공소에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또한 2002년 4월 연면적 1,983㎡[600평] 지하 1층, 지상 1층의 콘크리트 건물인 신축 본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현황】2024년 현재 진안 지역의 성당으로는 진안읍에 있는 진안 성당이 유일하며, 공소로는 부귀 공소·동구점 공소·두원 공소·머우내 공소·봉암 공소·소토실 공소·수항 공소·선인동 공소·어은동 공소·오암 공소·장재동 공소·중리 공소·평촌 공소·한들 공소·황금 공소 등 15곳이 있다.
    《참고문헌》진안성당105년사(진안성당, 2006)
  • 진안읍 죽산리 내오천마을에 있는 천주교 공소.
    내오천마을은 [안머우내]라고도 부른다. 안머우내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0년대 초이다. 이는 어은동에 성당이 설립되자 인근 지역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살게 된 결과이다. 내오천[안머우내] 공소가 지어지기 전까지는 어은동성당으로 미사를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41년 1월 7일에 내오천공소가 단층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때부터는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진안성당 16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덕창이 1982년 9월에 진안읍 오천리 평촌공소 신자들의 본당 신축 요청에 따라 신축 추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1월 부지 595㎡[180평]를 확보하여 5월부터 공사를 시작, 다음해 11월 석고개성당을 완공하였다. 석고개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고 관할 지역에 묘가 있는 이명서[베드로]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으로 지어졌다. 석고개성당은 어은동공소 인근과 내오천공소 인근을 관할하였다. 때문에 자연히 내오천공소는 석고개성당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석고개성당과 매우 가깝게 있는 내오천공소는 건물만 남아 있고 사용하지 않으며, 신자들은 진안성당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석고개성당 또한 낡아 허물어질 위험이 있어 사용하지 않고 있다.
  • 백운면 반송리 두원마을에 있는 천주교 공소.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12호로 지정되었다. 전주 본당[현 전동성당] 신부 보두네가 활동하던 1897년경에 설립되었다. 1957년 10월에는 공소 경당을 신축하였다. 1988년 8월 10일에 성모상을 조성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2006~2007년경 함석지붕을 강판으로 교체하였으며, 담장을 헐고 꽃나무 울타리를 조성하였다. 두원공소 구역 내에는 신자들이 꽤 있지만,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기는 힘들다. 미사는 진안성당으로 가서 봉행하고 있으며, 공소 건물은 오랫동안 활용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다.
  • 진안성당 봉암공소(鎭安聖堂鳳岩公所) 부귀면 봉암리 원봉암마을에 있는 천주교 공소.
    원봉암마을은 전주 이씨와 오씨에 의해 형성된 천주교 신자촌이다. 1881년에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교 활동을 한 리우빌이 1885년에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 미실공소로 불리다가 행정구역 명칭을 따라 봉암공소로 바뀌었다. 당시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30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10년 후인 1896년에는 232명으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1985년에 공소 건물을 66㎡[20평] 규모로 개축하였다. 봉암공소 천주교 신자들은 부귀면 거석리에 있는 부귀공소에서 집회를 하고, [레지오 마리애] 활동과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진안지역의 공소 중에서도 활동이 활발한 공소이다.
  • 부귀면 거석리 중거석에 있는 천주교 공소.
  • 진안읍 선인길 13-6[가림리 530-2]에 있는 천주교 공소.
    어은동성당에 신부 김양홍이 재임하던 1901년에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초가였던 공소 건물은 후에 목조의 함석지붕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 초에 조립식 건물에 강판 지붕으로 교체하였으며, 2009년에는 고해실과 주방을 증축하였다. 성모상은 1988년 12월 19일에 세워졌다. 1970년대에는 50세대가 넘는 신자들이 살았으나 이농 현상으로 2011년에는 15세대 25명이 생활하고 있다. 매달 첫째 주에 공소에서 예배하고 나머지 주일은 진안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진안읍 진장로 488[물곡리 1320-4] 궁동 마을에 있는 천주교 공소.
    마을은 옛날에 솥점이 있었다 하여 솥터실에서 음이 변하여 소토실이라고 불린다. 이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경 신경운[마르코]과 송태로[프란치스코]가 입주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기존 주민 3세대를 중심으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강호균의 증언에 의하면 1908년에 소토실공소가 설립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1957년에는 궁동에 공소를 세울 목적으로 대지와 헌집을 매입하고 주일 미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72년에는 공소 건물을 세웠다. 전주교구 신부 이태주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소토실 공소 방문 때 70여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고 하니 상당히 큰 규모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96년 12월 21일에 현 소토실공소의 축복식을 가졌다.
  • 진안읍 어은동길 23[죽산리 453]에 있는 진안 성당 관할의 공소.
    어은동마을은 1888년에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천주교 신자촌이다. 진안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이다. 전주 본당[현 전동성당] 관할이었던 어은동공소는 1900년 9월 22일 전주 본당에서 분가해 전주 동남쪽인 진안, 장수, 무주, 남원 일대까지 관장하는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김양홍(金洋洪)[스테파노, 1874~1945]이 어은동 본당의 초대 주임신부였다. 당시 인계받은 본당 관할 공소는 11곳이었으나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18개 공소로 나누었다. 신자 수는 모두 999명이었고, 어은동에만 189명이 있었다. 1888년 9월 옛 공소를 수리하고 확장해 목조 7칸 성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점점 불어나자 1904년 마을 아래쪽에 새 성당 15칸 크기의 한옥을 신축하였다. 1905년에는 주교 뮈텔[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1854~1933]의 지시로 여성 신도들을 위하여 통로를 따로 만들었다. 1906년 다시 성당을 넓힐 때 남녀 교우청을 각각 한 칸씩 신축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09년 3월 마침내 돌너와지붕 목조 162㎡[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였다. 지붕을 돌너와로 일 때 신자들이 인근 산에서 등짐으로 직접 돌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이 완공되던 1909년에 김양홍은 성당 사랑채에 영신학교를 세워 국어·한문·수신·산수 등을 가르쳤으며, 1911년에는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신자 수는 2,117명이었고, 어은동공소 신자만 520명이나 되는 등 어은동은 진안·장수 지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마령면 연장리 한들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제되었다. 이후 어은동공소는 1947년 11월 송남호를 주임신부로 맞이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1951년 다시 폐쇄되어 한들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 가면서 어은동공소도 진안 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말과 어은동공소 중간쯤 모시골[당고개재] 산 능선에는 완주군 천호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성인 이명서의 묘터가 있다. 2014년 현재 신자 수는 21세대 약 51명[남자 24명, 여자 27명]이고, 어린이들은 없다. 전화 433-7368. 어은동공소는 1909년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돌너와 성당으로 등록 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당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인 전통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유럽의 양식인 [바실리카]식 성당 평면 요소를 현지의 재료와 건축 방식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서양 성당의 양식을 한국적 방식으로 토착화하였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정면과 측면의 축을 바꾸어 긴 장방형의 종축(縱軸) 끝에 제단을 둔 방식은 실제적인 전례 공간을 위한 독창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중앙 기둥 사이의 칸막이로 남녀 기도석을 구분한 것은 한국의 전통[남녀 구분]을 위한 독특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성당의 평면은 한옥이지만 전통 한옥의 구조를 고집하지 않고 필요에 의해 재구성한 독창성[제의방, 고해실, 제단 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삼랑식 실내 평면 구조 또한 전통 한옥의 평면 구조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닌 독특함을 갖추고 있다. 또한 지붕으로 얹은 돌너와는 백운면 영모정, 장수군 천천면의 신광사 등과 함께 지역적 특성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한옥과 양옥의 절충적 형태로 전통성과 독창성을 모두 갖춘 어은동성당은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더러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도 중요한 건물이다. 또한 성인 이명서의 묘가 있었던 모시골이 인근에 있어 천주교 문화 유적지와의 연계에도 좋은 위치이다.
    《참고문헌》한국 가톨릭 대사전 10권(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진안성당105년사(진안성당, 2006), 순교의 맥을 찾아서(가톨릭출판사, 2009), 가톨릭교회 문화유산 보존관리방안 연구(주교회의문화위원회, 2010)
  • 진안읍 연장리 중평마을에 있는 진안성당 공소.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11호로 지정되었다. 진안지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1922년에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에 있는 본당을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진안지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22년 목조 7칸의 성당과 목조 5칸의 사제관을 준공하여 1924년 10월 주교 드망즈의 주례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930년에 종각을 세우고, 1935년도에는 성모 동굴을 건립하여 성모상을 안치했다. 이상화는 성당 건물이 안정되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1925년 본당에 [성체회]가 결성되었고, 1926년에는 장재동공소에 여자 교우 30명으로 [영신회]가 조직되었다. 이상화의 후임으로 권영조가 부임하였고,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한들 본당 지역 신자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1933년 4월 [해성학교]를 설립하고 초가 4칸의 교사를 신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후에 부임한 이기수는 문교부 시책에 따라 보통학교로 개편하고, 대지와 건물 8칸을 국가에 희사하였다. 더불어 이기수는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학술 강습소를 개설하여 생활 형편상 취학 시기를 놓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941년 진안읍에 본당이 신설되어 한들본당과 함께 진안지역을 담당하였지만, 1942년 말 폐쇄되어 한들공소로 환원되었다. 1947년에는 어은동에 본당이 신설되지만, 1951년 다시 한들 본당으로 환원되었다. 1951년 새로 부임한 김반석은 본당 발전을 숙고한 끝에 1952년 4월 본당을 진안읍으로 옮김으로써 한들본당은 30년 동안 수행한 역할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후 진안지역의 천주교는 진안성당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977년 12월 31일 다시 한들본당으로 승격되어 부귀면·마령면·백운면·성수면을 관할하기도 하였지만 교구의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다시 1985년 1월 폐쇄되어 진안본당 관할의 한들공소로 환원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한들공소에서는 한 달에 2회 본당 신부의 방문으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그 외의 주일 미사는 진안성당에서 실시하고 있다.
    《참고문헌》천주교전주교구사 연구자료집 제2권(호남교회사연구소, 1987), 천주교전주교구사 Ⅰ·Ⅱ(천주교 전주 교구, 1998), 진안성당 105년사(천주교전주교구 진안성당, 2006).
  • 부귀면 방각길 10-10[황금리 666-1]에 있는 진안성당 공소.
    부귀면 황금리 방각마을에 방각공소(1880년대 개설)가 있어 인근에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신자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리우빌 신부가 활동하던 1880년대 무렵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7년 진안 본당 14대 주임인 서석구[요한] 신부 때 황금리에 공소를 신축하게 됨에 따라, 방각공소는 폐쇄되고 황금리공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황금리공소는 12세대에 53명의 신자들로 시작하였고 공소 회장은 안동주였다. 공소 건물은 단층 한옥 건물로 건평 70㎡[21평] 정도이다. 천주교 신자들은 매주 부귀면 거석리에 있는 부귀공소에서 미사를 하고 있고, 황금리공소에서는 기도 모임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