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覺齋居士咸陽吳公采烈功績碑(각재거사함양오공채열공적비)

    【위치】 마령면 마이산 남로 132[동촌리] 이산묘 앞.
    【시기】 1968년
    【형태】 비갓과 거북 좌대석이 있다. 높이 140cm, 너비 50cm, 두께 1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按古史也 國之治亂盛衰 興廢存亡 限千年 幾百年之間 無往不飜覆於其中 而若大亂則 時無古今之異 人無朝野之別 盡忠報國 雖勢難當敵 畢死而後乃已者 自萬古君君臣臣之大義也 我朝開國以來 累經兵燹 戰歿敵陣 或倡義旅 憂國干城之精忠 大韓乙庚之際 公卿碩德之殉忠直節 在野韋布之討賊滅身 尙忍言尙忍言 駬山廟之創設 荊民懷舊德而前王之不忘也 後人慕先烈而尙忠之秉彛也 覺齋居士 咸陽吳公采烈 世襲縉紳之苗裔也 未嘗不忍痛含怨於慨世之恨 自創建重建 至于臨終之前 與鄕中士林 周旋是役 不顧家事 不避風雨寒暑 於京於鄕 以言以書 可謂全責其任 死而後已 眞所謂朝聞道夕死爲可者此也 覺齋之衛功懿績 不可無流芳於後世 故以圖觀感於來裔之資. 大韓光復後戊申肇夏之日 大韓駬山廟奉贊會立. 【풀이】 옛날의 역사를 상고해보면 국가의 치란(治亂) 성쇠(盛衰)와 흥폐(興廢) 존망(存亡)은 1천년을 한정하고 볼 때 몇백년 사이는 그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그러나 큰 난리가 나면, 때는 고금(古今)의 차이가 없이, 사람은 조야(朝野)의 구별이 없이 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여 비록 형세가 적(敵)을 당적하지 못하더라도 죽음으로써 맞서 싸우다가 그만둔 것은 억만년 전부터 이어온 군군(君君, 임금은 임금다움) 신신(臣臣, 신하는 신하다움)의 대의(大義)이다. 우리나라는 개국(開國)이래로 수없이 병화(兵火)를 겪었는데 혹은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죽고, 혹은 의병을 일으켜 신절(臣節)을 다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걱정한 간성(干城)의 정충(精忠)이라 하겠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을사(乙巳) 경술(庚戌) 무렵에 공경(公卿) 석덕(碩德)의 순충(殉忠) 직절(直節)과 초야(草野), 포의(布衣)의 토적(討賊) 멸신(滅身)은 더욱 어떻게 참아 말이나 하겠는가. 이산묘(耳山廟)를 창설한 것은 형민(荊民: 즉 초<楚>나라 백성)이 옛 덕을 기리어 전왕(前王, 초소왕<楚昭王>에게 가탁하여 쓴 말)을 잊지 못해 하는 뜻이오 후인들의 선열(先烈)을 사모하고 충절을 숭상하는 병이(秉彝)의 발로(發露)이다. 함양오공 채열은 대대로 진신(搢紳)으로 이어온 집안의 후예이다. 일찍이 세상을 개탄한 한스러움으로 비분한 마음을 품어 이산묘의 창건(創建)과 중건(重建)으로부터 본인이 임종(臨終)하기 전까지 고을의 사람들과 이 일을 주선하여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풍우(風雨) 한서(寒暑)를 피치 않은 채 서울에서 시골에서, 말로써 글로써 가위 전책임을 지고서 힘을 다하다가 죽어서야 그만두었으니 이른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夕死可)’는 그것이었다. 각재의 선열을 보위한 공과 아름다운 업적은 후세에 방명(芳名)을 전함이 없을 수 없겠기에 내후(來後)의 보고 느끼는 자료로 삼고자 이 돌을 세우는 바이다. 대한광복 후 무신(1968) 초여름 대한이산묘봉찬회 세우다.
  • 【위치】 마령면 마이산 남로 132[동촌리] 이산묘 동쪽 마이산 암벽.
    【시기】 1924년 / 1928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친친계(親親契)는 구한말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방 유림(儒林)이 결성한 계인데 연재가 작고한 3년 뒤인 무신(戊申)년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위하여 이곳에서 수계(修契)하며 갑자(甲子, 1924)년 늦은 봄에 이곳을 마이동천(馬耳洞天)이라 각하고 그 좌측 암벽에 계원명단(아래 수록)을 각하였다. 현현계(賢賢契)는 구한말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이 지방 사림들이 결성한 계인데 그 계원들도 무진(戊辰, 1928)년 7월에 ‘주필대(駐蹕臺)’우측에 계원들의 명단(아래 수록)을 새겼다. 당시 오른쪽에 주필대(駐蹕臺)라 각한 것은 이태조가 이곳에 들렀음을 기념한 것이다.
    마이동천제명록(馬耳洞天題名錄)
    【친친계원】 宋秉璿 尹用求 金宗漢 尹寗求 徐光弼 鄭殷采 李道復 金仁植 柳長烈 梁在日 丁顯圭 全鶴根 姜信永 全中權 金炳興 金龜泳 吳炳烈 鄭炳謨 全翊鉉 全直相 姜善熙 徐相浩 全淙鈺 金永基 申鉉台 吳承烈 宋吉煥 梁鍾鎬 宋翼煥 白恒基 吳世烈 梁基燮 韓宗錫 全永述 柳英琪 全炳謨 全鍾九 全炳植 吳正烈 李漢膺 吳光烈 李基鈺 吳相喆 金永暢 金淳泳 梁在德 宋成濂 宋昌煥 李圭衡 徐翊煥 崔洪烈 金容圭 全永鮮 吳圭烈 白南鶴 崔相晥 河致泓 全永黙 吳基烈 金敎性 金宜泰 全炳鉉 吳益烈 朴圭晶 金敎必 全永表
    孔夫子誕降 2475(1924)年 甲子
    【현현계원】 崔永祚 李庸根 劉東烈 白完基 辛鍾浩 申彦驥 金孟洙 宋曾憲 梁大水 金學永 洪淳亮 金敎英 丁浩鉉 金休奉 全載敏 文柱泰 金相焱 河相斗 全鶴權 崔相規 曺東煥 愼宗台 李根翊 洪玟杓 金敎奉 全炳和 梁在業 全周根 李柄淵 金永哲 金東植 全麟權 黃泰顯 朴暻俊 李炳基 李根世 李海元 鄭圭采 金正奎 洪淳甲 李炳祿 吳昌烈 愼宗宇 李炳壽 鄭柏鉉 李東基 姜進熙 嚴震 李煥悅 梁基萬 全相舜 宋相鎭 李炳厦 李正哲 梁在善 全相權 李道華 全永弼 梁在涉 全永八 全炳俊 李漢燮 孫炳基全錫萬 高泳柱 徐秉鉉 李益雨 金敎常 金炳善 姜準熙 吳相奇 高昇柱 崔相億 金鍾 全振權 金容哲 全鳦權 韓圭政 宋周煥 李春根 宋日權 白舜基 宋柱國 許埰 李漢照 河相鳳 崔正業 朴魯憲 金用基 愼慶晟 金桓注 丁敬興
    戊辰(1928)年 7月
    有司 吳柄烈 金容圭 金龜泳 全東權
  • 【위치】 진안읍 가림리 산 223-1. 마이산남로 도로변.
    【시기】 1907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마이산 남쪽 진입로 입구에서 이산묘 못 미쳐 500m 부근에 있는 바위. 전면에 송병선(宋秉璿), 최명호(崔明鎬), 최제국(崔濟國), 이기회(李起晦), 이호용(李浩瑢), 한창희(韓昌熙), 최제학(崔濟學), 최은상(崔殷相)의 이름과 경자(庚子. 1900년) 8월이라 새겨져 있다.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가 새긴 것이라 한다. 1907년 9월 12일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 바위 위에 제단을 쌓고 의병을 일으키면서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였다.
  • 【위치】 진안읍 가림리 산 223-1. 마이산남로 도로변 용암 뒤 마이산 암벽.
    【시기】 1949년 이래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마이동천 암벽은 협소하여 포화 상태인지라 부근에는 이산묘에 직간접으로 공로가 있는 인사들을 기념할 각자(刻字) 장소가 없어 용암(龍巖) 뒤의 암벽이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 있으므로 여기에 이산묘 유공인(有功人)들을 각자하기 시작하여 작업을 수년간에 걸쳐 진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는 각자한 특정 날자를 기재하지 아니하였다. 여기에는 모두 702명의 인명(人名)이 각자되었다.

    【龍岩洞門題名錄】 全永祚 宋相吉 朴淵東 李元植 朴魯東 宋日洙 全永云 李順植 全孝基 李康老 金漢表 鄭八文 金會燮 李吉童李奉鉉 宋相辰 宋世煥 朴鍾弼 朱先仲 徐奇奉 全壽權 愼判範 宋正煥 宋幸濂 金容瑞 全奉權 金周烈 李湳根 崔龍錫 宋義濂 宋俊煥 梁公西 朴鍾甲 宋守煥 白奉周 洪在鳳 宋寅煥 金永祿 李佐京 韓益善 金東植 李日南 朴魯成 馬光祿 全炳九 朴鍾彦 金敎南 金榮洙 張永根 全成德 沈泰燮 朴昌圭 韓奉模 金山岩 朴鍾晋 崔殖林 全中相 全南玉 徐奇成 朴弘學 辛安坊 元世昌 宋三文 宋相善 全炳俊 李錫漢 朴順珍 金景坤 元容植 李起福 李点童 李錫薰 全金岩 姜鍾熙 高道成 徐在洪 元喆喜 宋在先 宋奎鎬 金炳龍 朴希俊 姜信國 梁貴男 林相吉 宋在烈 李周淳 朴洛圭 徐炳烈 姜信洪 李金岩 盧奉煥 全永萬 宋相奇 梁禮根 金鍾鳴 姜信甲 金炳琦 元昌喜 宋龍煥 李熙洙 鄭奉星 尹和燮 朴奉玉 梁仁煥 孫炳憲 金永祥 李大根 朴漢奉 李道生 朴先東 安在萬 朴甲辰 全炳國 全炳勳 尹仁燮 李道洪 徐甲錫 辛相萬 韓鍾玉 洪福 丁南洙 全相昊 金明先 愼致晟 李尙九 崔仁太梁在奉 金錫洛 文判南 徐炳用 愼自晟 李昌先 崔淇文 金永吉 金錫基 金鐵同 宋弼煥 崔植溶 全昌龍 全泰成 安八龍 李漢喆 愼永祚 全君伯 愼云晟 愼景範 崔在洙 蘇南泳 朴春錫 全奉權 杜奇鍾 崔相文 全永采 全其權 蘇鎭五 愼萬範 尹贊五 全昌玉 金光洙 朴漢守 李昌三 劉仲吉 劉在燮 全順榮 河龍圖 金判實 金學秀 李根求 洪東錫 金用權 全泰奉 李元裕 張基甲 崔文基 金基承 梁正煥 金鍾烈 全炳浩 張基杓 梁相權 辛榮煥 崔永碩 李圭洪 劉秉五 全永學 余東龍 鄭信模 崔淇春 全大甲 全炳鳳 李炳春 梁元仲 朴漢祚 愼洛晟 全公烈 柳明七 全敎鐸 安炅錫 鄭明朝 李漢植 孫熙京 張東燮 金奉漢 梁在玉 李晙相 辛鍾植 金正洙 孫熙先 李判基 宋在彧 梁鎭權 梁成烈 辛仁泰 金正球 孫熙廷 金成萬 金卜斗 梁聖權 李繪相 梁星鉉 魯鍾桓 孫熙上 辛基南 金容燮 金判山 朴鍾林 安士章 鄭鎭宣 孫俊基 朴箕文 朴昌甲 金炳澤 朴鍾來 宋柱彩 白萬洙 孫洪基 李南宗 孫錫大 梁泰烈 康井五 梁柱鉉 白恭洙 孫鐸基 李海萬 朴鍾洙 康東龍 梁焄承 梁碩鉉 金漢基 張陸燮 趙根濟 朱校 吳明烈 全炳山 權相淑 全慶善 張七燮 林大鳳 朱桓 李尙榮 全炳來 權相泰 林京贊 張烋燮 李希宗 孫公培 李虎榮 申君模 李漢綉 全甲錫 張今燮 金光照 朴鍾根 孫炳基 金祺祥 辛箕寅 安昌玉 姜相植 李琪洪 金元根 李潤雄 朴相吉 安昌孫 金八權 崔吉洪 李東郁 全秉用 金鎬燮 安在鉉 崔漢益 崔周恩 金鎭玹 朴在烈 朴晭德 朱龍吉 鄭德溱 裵聖裕 金永漢 高德基 朴在民 韓龍鎭 金洪烈 姜元基 安瑀烈 金吉龍 安大根 張貴鎬 金桓辰 柳興錫 鄭成南 姜學權 裵炳洙 安在淵 張寬鎬 高在鉉 金泰辰 韓正基 安在七 李福信 安在明 張光三 嚴柱元 薛昌業 金炳柱 尹學東 安次烈 金炳桓 張世國 徐亨煥 安德在 朴順甫 李康賢 安箕烈 鄭觀朝 金南洙 金永來 任泰亨 李東馥 梁正權 安昌辰 鄭學奉 元仁常 李八圭 鄭道弘 孫鍾萬 朴海水 金達柱 梁明洙 全淳万 金炯贊 柳春玉 李圭泰 柳任春 宋柱成 愼鏞琥 高濟三 金鍾百 朴順溶 尹尙煥 愼完範 辛燿泰 愼玉範 李俊儀 李春實 李相烈 白德欽 全亨奎 李湘寧 梁珖鉉 李康周 李琪培 金東圭 梁鍾浩 朴今同 梁官永 愼鏞寅 李康允 金漢喆 嚴玟永 梁叮錫 愼必晟 蔡圭元 金長洙 柳庠珪 金應植 安瑯烈 梁炳瑄 愼判喆 金容信 林炳春 林亨澤 全炳寅 高光文 梁斗煥 河相吉 韓泰洪 嚴仁永 金道基 金完山 金桓栻 愼鎈晟 李尙馥 張基浩 李龍鎬 元重熙 全淳錫 薛鎭南 全鳳九 高在明 全炳薰 吳秉鎔 元鍾淏 李圭燦 金南洙 劉學俊 吳玄錫 金慶南 朴仲植 吳秉箕 柳平秀 劉福南 金榮浩 鄭寅洙 愼德晟 李相儀 吳善其 金庚喜 李昌雨 成京浩 崔台淑 朱權 高泳柱 姜琪煥 金光洙 劉供升 李建永 林鍾熹 文學萬 安桓吉 蔡吉洙 高錫煥 白南虎 蘇仁永 元儒常 朴昌浩 蘇學永 金東郁 吳起烈 全壽南 洪甲龍 元容殖 柳寅善 金炳勳 李根英 吳穆烈 朴成才 朴在緖 元大喜 金永豪 王斗淳 尹錫柱 朴在春 李鍾賢 金相烈 李鍾元 禹濟寬 白柾基 金鍾吉 李鳳玉 朴永云 任義淳 鄭永熙 元容德 朴龍八 金時榮 李命周 朴万鳳 許洪錫 朴榮先 全洪植 朴應喆 金圭鐵 全永澤 金守城 許璨錫 張琪煥 張龍馬 金豪彦 金煥喆 金相烈 韓相倫 李良辰 李榮奎 李鳳煥 朴贊益 李基洙 林鍾澤 韓宗熙 朴鍾弼 徐基永 睦源大 宋貞燮 鄭鎭灄 李判權 李漢淑 張內周 朴淵汀 鄭相三 全昌根 高光祚 金宗鉉 韓甲鉉 張軫龍 梁順一 李權寧 黃載夏 吳在曄 金在華 李安儀 金京洙 柳內龍 崔洙福 李順寧 吳在東 梁星來 金永術 金凡用 朴鍾仁 愼吉鏞 陸炳淑 李圭珣 愼宜晟 李羲鍾 李成裕 崔學順 李漢洙 陸溶基 高官五 辛瀊澈 薛學洙 朴炳德 崔善長 蘇基春 陸鳳基 金容準 韓三熙 孫吉永 黃金鐸 金蒙洙 全炳洙 陸炳天 宋炳用 李相斗 高敬模 程順烈 金基永 李羲錫 金逸鉉 金鍾九 愼聖範 李羲祚 朴昌輔 金基羲 鄭宗黙 黃健周 姜瑾春 奇宇岳 鄭寅鉉 安俊鎬 崔炳澈 鄭元黙 黃燦周 高泳信 尹錫基 徐丙贊 崔光五 李炳壕 金基學 黃龍顯 高應鉉 元彩喜 吳在憲 全良根 鄭淳洪 柳浩錫 李鍾斗 金炳哲 崔昇烈 吳在瑃 鄭漢玉 梁喜喆 李萬器 蔡奎龍 姜凡熙 李錫東 趙永完 吳在洪 柳直養 宋三燮 林奎從 吳在益 梁泰圭 韓台鎬 吳在九 吳一昇 李鍾澤 朴錫喆 李暻澤 朴東宇 朴學根 吳淇鉉 柳根鎬 蘇錫哲 金錫權 柳濟敬 宋二用 吳俊烈 金炯柱 郭漢永 申晩雨 河千秀 鄭益煥 鄭基唐 李治香 宋漢義 黃琫奎 李存亨 許秉烈 申程雨 鄭鳳溱 林文三 金喜權 郭鐸 李道衡 姜采善 宋相浩 金寶鉉 金洪奇 李容沂 李愚軾 任憲濬 高棟晩 李泰淵 宋東準 那貴官 金會吉 曺宗祿 柳仲養 羅琇鉉 權五奉 全大權 金平基 李容燁 許政烈 宋斗燮 林鍾鎬 盧甲俊 崔學鉉 尹命模 崔鎭浩 尹正學 全永和 金正萬 全炳厦 全炳熙 偰昌煥 丁泰鉉 那光郁 趙東官 李炳九 李炳轍 崔周鉉 崔元集 李聖麟 朴學淳 金處重 鄭泰國 金正復 金舜培 梁仁權 河相弼 李一根 金正大 李炳現 崔斗鉉 全炳賢 宋相元 趙昌浩 崔永景 趙秉龍 崔鳳鉉 金正模 全炳朝 宋升煥 崔世泰 李得載 全洪烈 鄭泰善 鄭泰洪 河在倫 尹義燮 朴漢喆
    有司 金興烈 梁仁權 宋升煥
  • 【위치】 마령면 동촌리 77-3. 이산묘 건너편 독립유공자추모탑 경내 암벽.
    【시기】 1949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고종황제의 위판은 당초 옥구군의 해종전(海宗殿)에 있었는데, 일제하에 훼철(毁撤)을 당하여 임시로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속에 봉안하였다가 전주의 유림들이 회덕전에 봉안하기를 발의하자, 여러 고을의 사론(士論)이 모두 함께 봉향(奉享)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1948년 가을에 회덕전에 옮겨서 봉안할 때 고종황제의 어필 ‘非禮勿動(비례물동)’이 같이 왔기에 이 글씨를 이산묘 건너편 암벽에 새긴 것이다.
  • 【위치】 마령면 동촌리 산28-2. 이산묘 북서쪽 500m 지점 암벽.
    【시기】 1949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이산묘 건립 당시인 1948년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大韓乾坤 靑邱日月(대한건곤 청구일월)’여덟 자를 크게 써 주므로 이산묘의 건너편 멀리 북서쪽 암벽에 새겼다. 풀이하면 ‘우리나라[大韓, 靑丘]는 하늘과 땅, 해와 달처럼 무궁하리라’는 뜻이다.
  • 【위치】 마령면 평지리 196-1. 원평지마을회관 우측 후편.
    【시기】 1949년
    【형태】 벽돌 담장이 둘려있고,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0cm, 너비 5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忠孝烈三綱大節乃國家之棹幹 生民之命脈也 人而無是則 人不可以爲人 國而無是則國不可以爲國也 可不愼且重歟 卽據鎭安駬山廟儒通則 本郡馬靈面 金節婦籍順天卽良景公之后也 年十六嫁爲 霽峯高先生后 金柱之妻 其舅濟壽 其大舅伯鎭也 四德極著 一門雍睦 不幸夫嬰奇疾 百藥無效 禱天願代及 至急危砟踵 指注血纔三日而終 金氏時年十六 一死下從 初非難事 但上有癃耋二老 下無一點血 育奉養嗣 績何以經紀 由是抑情强起 甘旨衣服之節 益勤且誠 於是一鄕 累薦孝烈 自官特蠲煙役及 日政之初 彼亦慕義 稱以恩賜 遺以巨金 金氏曰 我無實有名 心固自愧況曰 之我韓有萬世 必報之讐 庚戌之耻 甚於壬辰 豈可謂受讐金乎 以此相詰 金氏死拒不屈 噫, 世之所謂髥丈夫 反心背義者項背相望 乃以巾幗柔質 能判三大節於一身 曷不盛哉 今金柱之從兄 昇柱來曰 以吾從婦之節行 四方儒通義金踵至 至必建碑 義當三節 所謂公議不可遏者 是也 爲先建碑 以待立國後蒙旌 願得一言爲記 余辭不獲遂述之如此云
    戊子三月上澣 完山 崔秉心記
    【풀이】 무릇 충효열(忠孝烈) 삼강(三綱)은 국가의 대간(大幹)이요, 백성을 살리는 명맥(命脈)이다. 사람이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나라가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나라라 할 수 없으니, 어찌 삼가고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산묘의 유림에서 천거한 본군 마령면 절부(節婦) 순천김씨(順天金氏)는 지아비를 잘 받든 후손이라. 16세에 제봉(霽峯) 고(高) 선생의 후손인 금주(金柱)의 처가 되었으니, 시아버지는 제수(濟壽)이고 시백부(媤伯父)는 백진(伯鎭)이다. 사덕(四德)이 극히 뛰어나 집안이 화목하였는데, 불행히도 지아비가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자 하늘에 빌어 자신이 대신하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손가락을 깨어 피를 먹였더니 겨우 3일을 소생하였으나 죽게 되었다. 김씨는 이때 16세로 지아비 따라 한번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위로 늙으신 시부모 두 분이 계시고, 아래로 혈육 한 점 없으니 시부모의 봉양과 선조의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이에 감정을 억누르고 일어나 좋은 음식과 맞는 옷으로 봉양함이 날이 갈수록 근면하고 성실하니 고을에서 여러 차례 천거하게 되었다. 일정(日政) 초에 그 의로움을 칭찬하여 은사(恩賜)와 거금이 내려졌는데, 김씨가 말하기를 “나는 무실유명(無實有名)하여 마음이 괴롭고 부끄럽다. 하물며, 일본은 우리 한국이 만년을 두고 갚아야 할, 임진란보다 더 심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한 원수이다.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 하고 따져 묻고는 죽기로 거부하며 굴하지 않았다. 희라! 세상에 소위 수염난 장부(髥丈夫)도 반심 배의하고 서로 등지는 때, 유약한 부인으로 능히 3대절(忠孝烈)을 알고 일신으로 실천하니 어찌 장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제 금주(金柱)의 종형 승주(昇柱)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 종부(從婦)의 절행(節行)에 사방의 유림이 보내온 의금(義金)이 답지하니, 비를 세워 삼절(三節)의 의로움에 당하게 하는 것이 이른바 ‘公議는 막지 못한다’라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다. 먼저 비를 세우고 나라가 독립된 후 정려가 내리기를 기다리니, 원컨대 그대의 글을 얻어 기록해 두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와 같이 기술하는 바이다.
    무자(戊子, 1949)년 3월 상한(上澣),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

    고씨절모 김유인 기절각기(高氏節母金孺人紀節閣記)
    【비문】 褒崇節孝 有國恒典 若乃滄桑之後 其事出於敵人之爲 則受之爲不義 不受之爲義 此無容復論也 然方敵之奴我隸我 而以一婦人 抗大義 以拒其所謂賜金 寧身親刀組 而不忍等吾敵於吾國 亦可謂凜然者歟 吾友李文卿 自南州還 言高節母金孺人之事 余聞而感焉 文卿言 孺人爲節母爲孝婦 猶之有等倫也 其拒彼之遺 卓然守義 不可不特書 講于記其義 使揭其鄕所 建紀節閣者 此鄕人士之望也 余不獲與其鄕之人士相識 不能得其詳 然拒敵之義 事無小大 聞者可憬然於民族之精神 玆故書之 四千二百八十二年開天慶節 鄭寅普記
    【풀이】 절효(節孝)를 포숭(褒崇)하는 것은 국가의 항전(恒典)이다. 그러나 창상(滄桑, 상전[桑田] 벽해[碧海]. 세상이 바뀜을 뜻함)이 바뀐 뒤에 그 일이 적인(敵人)의 소위에서 나왔다면 받는 것이 불의(不義)이고 받지 않는 것이 의(義)가 되는 것이니, 이는 두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적인이 우리를 노예로 삼고 있는데, 부인의 몸으로 대의(大義)로 항거하여 이른바 사금(賜金)을 거절하고, 차라리 몸이 칼 아래 죽을지언정 차마 우리의 적을 우리나라와 대등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은 이 역시 이른바 늠름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친구 이문경(李文卿)이 남쪽 고을에서 돌아와서 고절모(高節母) 김유인(金孺人)의 일을 말하였는데, 나는 듣고 감동하였다. 문경이 말하기를 “김유인이 절모가 되고 효부(孝婦)가 됨은 차라리 남들과 같은 바가 있다 하겠으나, 저들이 주는 돈을 거절하여 드높이 의를 지킨 일은 특서(特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그대가 그 의로움을 적어서 향소(鄕所)에 걸고 기절각(紀節閣)을 짓게 하는 것이 고을 인사들의 소망이오.” 하였다. 나는 그 고을 사람들과 아는 이가 없어 사실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을 거절한 의로움은 사안이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듣는 이는 민족의 정신에 깜짝 놀라우리만큼 감명을 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적는 바이다. 단기 4282년(1949) 개천경절(開天慶節)에 정인보(鄭寅普)가 기술하다.
  • 【비표】 節婦孺人鎭安李氏紀蹟碑(절부유인진안이씨기적비)

    【위치】 마령면 평지리 196-1. 원평지마을회관 동쪽 100m 지점 골목길 모롱이.
    【시기】 1959년
    【형태】 높이 140cm, 너비 4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李氏固鎭安望族也 始自直學士諱校 著文蔭累繼 孝友相承數百年 而至菊史諱柄淵亦文行著鄕 有女 姿甚靜間慧識如珠 幼得菊史 外內譽長而聲溢于閨 出嫁爲黃公觀顯妻 黃氏長水區閥也家 世業儒昧 生産作業 有或飽煖失時 兼有老母在堂矣 孺人與之共挽鹿車 惟其力之可及靡不盡其心 故自有以生焉而用之且節於菽水資不知節也 自是姑氏之寵有甚於玆母而惟恐新婦須曳離也 居一歲姑氏沒喪之具盡力營辨無何 夫君又得疾 群家醫葯到底歿効及不可救也 指血以延生者才一日 時孺人年二十一而無子女 家有夫君二弟二妹幼者尙在襁稍長者亦 不足聽使令家勢且剝落無餘孰爲而生世孰爲而守閨 幸有遺血在腹而迺所望者男分娩則失所望也 夫黨親黨無不爲之憂而强忍無形于色辭庄於家間小大事 男女之所當分職者獨一身而兼 役無寒暑無晝夜 蓬頭垢面而一日無手足閒 其間緦叔妹可以撫養也 嫁娶不可以時失也 祭祀之奉賓客之待分産之節 事難一二擧 系以夫弟復顯長子亨周以奉夫祀以昌家門 顧齋 李炳殷論之曰 世皆知 從夫以殉之爲壯而必極口揚之 視諸更其節者固應如是然 家無舅姑子女之奉率奈如之何 設無舅姑子女之吾一人生死而夫子家門之存否系之與其一朝之瞌然曷若守其遺産嗣其夫后全其貞操之爲尤壯也 若李孺人者 不欲讚嘆而自不可己也 黃門方營其紀蹟碑介崔君相晥於炳殷 要爲之文余何辭之系之銘曰 能盡爲婦 爲母道者 一則孺人 二則其誰 爰立數尺 紀績之碑 千秋萬世 疇不欽之
    己亥仲冬全義李顧齋炳殷撰
    【풀이】 진안 이씨는 진안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직학사(直學士) 교(校)는 문장으로 저명하고 음덕(蔭德)이 이어져왔으며, 효우(孝友)의 가문으로 수백 년을 내려와 국사(菊史) 병연(柄淵) 역시 문장과 행실이 고을에 저명하였다. 병연의 딸은 자태가 심히 고요하고 지혜가 구슬처럼 밝아 어릴 때부터 국사의 자랑거리였다. 커가면서 규문 중에 두드러지더니 황광현(黃觀顯)에게 출가하였다. 황씨는 장수의 벌족으로 유업(儒業)을 이어왔기 때문에, 재산을 늘리는 일에는 어두워 풍족한 살림이 아니었으며 늙은 시어머니가 살아 계셨다. 이씨는 지아비와 더불어 조그마한 수레를 끌며 미치는 데까지 힘써 일하고 마음을 다하였으며, 살림을 절약하였으나 시어머니에게 공궤하는 숙수는 절약하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총애하여 잠시라도 곁에서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1년이 지나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니 힘을 다해 장례를 치렀는데, 지아비 또한 병을 얻어 모든 약방의 약이 효과가 없어 소생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열지하여 피를 먹였으나 하루를 연명할 뿐이라, 이때 이씨의 나이 21세로 슬하에 자녀가 없고, 다만 지아비의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는데 강보에 있거나 아직 어렸으므로 따라 죽을 수도 없었다. 먹을 것이 없는 빈궁한 가정에서 누가 생계를 꾸려나갈 것이며, 누가 규문을 지킬 것인가. 또 뱃속에 아이가 있어 사내 아이를 출산하니, 더구나 이룰 수 없었다. 부군의 집안과 친정에서 걱정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강인하여 얼굴빛으로 드러냄이 없었으며 도움을 사양하였다. 집안의 대소사에 남녀의 직분이 따로 있으나, 홀로 맡아 춥고 더움과 밤낮을 잊으니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에 때가 낀 채로 하루라도 손발을 쉬지 않았다. 시숙매(媤叔妹)를 키우다보니 때를 놓쳐 재가하지 못했다. 제사를 모시고 빈객을 맞이하는 일의 어려움은 한둘이 아니나 시동생 복현(復顯)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장남 형주(亨周)가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게 하여 가문을 일으켰다. 고재(顧齋) 이병은(李炳殷)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세상 모두가 지아비를 따라 순절하는 것이 장하다고 극구 찬양하지만, 그 팔자를 고친 자에 비유하면 의당 그러하다. 그러나 집안에 시부모를 받들고 자녀를 키울 사람이 없을 때에는 어찌 그럴 수 있으리오. 설령 시부모와 자식이 없다해도 자신이 살아 죽은 지아비의 가문을 유지하는 것이 어찌 부당하리오. 나 하나의 생사에 지아비 가문의 유지 여부가 달렸다면, 하루아침에 눈을 딱 감고 죽는 것이 어찌 그 유산을 지키고 지아비의 제사를 잇게 하고 절조도 온전히 하는 훌륭함만 하겠는가. 그러니 유인 같은 경우는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황씨 문중에서 지금 기적비(紀蹟碑)를 세우고자 최상환(崔相晥)이 병은(炳殷)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하지 못하고 명하기를 “능히 며느리와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게 함은 / 첫째 유인(孺人)이로되, 둘째는 누구이던가. / 이에 수척(數尺)의 기적비를 세우니 / 천추 만세에 흠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기해(己亥)년 겨울(仲冬) 전의(全義) 이고재(李顧齋) 병은(炳殷) 찬(撰)
  • 【비표】 追慕齋崔公斗七墓道碑(추모재최공두칠묘도비)

    【위치】 마령면 평지리 162. 원평지마을 동쪽끝 임진로변
    【시기】 1945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57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櫟泉宋文敬公 講道懷川之上 及門士 多彬彬 慕齋崔公其一也 公諱斗七 字子建 姓崔 崔之籍完山者 冑于完山府院君文忠公諱群玉 自是封君顯貴 代有聞人 有王柔平章事謚文肅 至諱瀁官贊成與 藝祖有子陵契 而守伯夷節 卒謚忠翼公 世稱晩六先生 三傳諱琮 以壯元進士 見 莊陵禍 不仕晦處鎭安山中 曰德立 秉節校尉 曰璡 階三品職 曰以岌 有儒行 延安金以粹女 三世諱若妣 慶州朴文龜女 其本生父母也 公以 肅廟癸亥生 生有異質 語黙作止 動遵規雘 及長就學 嗜讀書心近四字 循環熟複 而尤用力庸學 如天人性命義 厚封外王父祭田 使之永世不餒 性於周急 見人凍餒 推衣食之 値歲大饑 收人棄兒鞠育 娶婦以家之 具資裝棺廓 以遂親戚知舊婚葬者多 英廟丙子四月十二日 壽七十四 終于平地里第 葬于里後掛陽山艮坐原 配延安金氏 父世圭 葬祔墓下 育三男二女 男玄暐 有二子 曰述 逌 玄暉有二子 曰逵 逄 玄曜有一子曰邃 女行晉州姜昌震 慶州李昌根 公資稟旣異 孝友成性 事親有道 存養深熟 操履端確 誠信孚于朋舊 恩義浹於鄕黨 士林列其學術孝行 祭于社薦于朝 至 高宗乙卯 特加褒崇 贈司憲府監察 公之六世孫相冕 以當時門人縣監蘇公洙中狀 千里蹐門 徵余藥石之銘 余病臥江上 萬念灰寒 獨於公孝義之感人深 不忍終辭 剔狀而繫之銘 銘曰 甘白其質 孝自天植 學而充之 操履克篤 而學而孝 爲世矜式 襟紳俎豆 王國褒嘉 槩公終始名實無差 我銘不愧 可詔無涯
    高宗甲子後八十二年乙酉肇夏下浣 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副提學同知 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 世子侍講院檢校輔德驪興閔丙承撰 通政大夫前秘書院丞安東金寗漢篆
    【풀이】 역천(櫟泉) 송문경공(宋文敬公, 명흠[明欽])이 회천(懷川) 위에서 도학을 강의하고 있을 때, 문하에는 빈빈(彬彬, 문채나는 모양)한 선비들이 많았는데, 추모재(追慕齋) 최공(崔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공의 휘는 두칠(斗七)이요, 자는 자건(子建)이며, 성은 최씨(崔氏)이다. 최씨로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한 사람들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군옥(群玉)에게서 비롯하였다. 그로부터 군(君)에 봉해지고 현달하여 대대로 드러난 사람이 있었는데, 휘 유(王柔)는 평장사(平章事)에 시호는 문숙(文肅)이요, 찬성(贊成) 휘 양(瀁)에 이르러서는 이태조(李太祖)와 자릉(子陵, 후한[後漢] 엄광[嚴光]의 자)과 같은 절개를 지켰다. 사망하자 충익공(忠翼公)의 시호가 내렸는데 세상에서는 만육 선생(晩六先生)이라 부른다. 3대를 내려와 휘 종(琮)은 장원진사(狀元進士)로 단종의 화(禍)를 보고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진안(鎭安)의 산중으로 들어와 숨어서 살았다. 이름하여 덕립(德立)은 병절교위(秉節校尉)요, 진(璡)은 벼슬이 3품직(三品職)이며, 이급(以叛)은 유행(儒行)이 있었는데, 공 이상의 3대의 휘함(諱銜)이다. 연안(延安) 김이수(金以粹)의 따님은 어머니이고, 휘 이구(以山久)와 경주(慶州) 박문구(朴文龜)의 따님은 생가(生家)의 부모이다. 공은 숙종 계해년(癸亥年, 숙종 9, 1683)에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동지(動止) 어묵(語默)에 법도를 따랐다. 커서 서당에 들어갔는데, 글읽기를 좋아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돌려가면서 숙독하였고,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더욱 힘을 써 천인(天人)의 성명(性命,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에 대하여 깊이 궁리하였다. 성품이 남의 위급을 구제함을 좋아하여 외조부의 위토를 후히 장만하여 길이 궐향(闕享)치 않게 하였고, 남이 굶주리고 헐벗음을 보면 자기의 밥과 옷을 먹이고 입히고 하였다. 때마침 큰 흉년이 들자 남이 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고 키워서 시집 장가를 들였으며, 혼수(婚需)와 관곽(棺廓)을 마련하여 친척과 친구들의 혼인과 상장(喪葬)을 도운 적이 매우 많았다. 영조 병조(丙子, 영조 32, 1756) 4월 12일 향년 74세로 평지리(平地里)의 자택에서 사망하여 마을 뒤 괘양산(掛陽山) 간좌원(艮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세규(世圭)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 아래에 장사지냈는데 3남 2녀를 길렀다. 아들 현위(玄暐)는 2남을 두니 술(述)과 유(賜)요, 현휘(玄暉)는 2남을 두어 규(逵)와 방(澄)이며, 현요(玄曜)는 1남을 두어 수(遂)이고, 딸은 진주(晉州) 강창진(姜昌震)과 경주(慶州) 이창근(李昌根)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자질이 특이하고 효우(孝友)가 천성을 이루어 어버이 섬김에 도리가 있었고, 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이 깊고 조리(操履)가 굳건하여 성신(誠信)은 붕우간에 믿음을 주었고, 은애(恩愛)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사림이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기묘년(己卯年, 고종 16, 1879)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포숭(褒崇)을 가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공의 6세손 상면(相冕)이 당시의 문인이었던 현감 소공(蘇公) 수중(洙中)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천리 길에 나의 집을 찾아와서 나에게 묘비(墓碑)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병으로 교외(郊外)에 나와 지내면서 모든 생각이 다 식어버린 처지이나 유독 공의 효성과 의로움이 깊이 사람을 감명시키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끝까지 사절하지 못하고 행장에서 간추려서 서술하고 명을 다는 바이다. 명하기를 “청백(淸白)을 좋아함은 그 천성이요 / 효성도 천성에서 뿌리를 내렸는데 / 배우고 확충(擴充)하여 조리(操履)가 독실하였다. / 그 학문과 그 효성 / 세상의 모범이 되니 / 선비들 제사를 올리고 / 나라에선 포상하였네 / 공의 시종을 더듬어보면 / 명성과 실지 다름 없으매 / 나의 명 부끄러움 없이 / 무궁토록 깨우쳐 주리로다.”
    고종 갑자(甲子, 즉위년) 후 82년 을유(乙酉, 1945) 4월 하순
    가선대부이조참판겸홍문관부제학동지 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성균관 사규장각 직제학 세자시강원 검교보덕(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副提學同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世子侍講院檢校輔德)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通政大夫前秘書院丞) 안동(安東)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쓰다.
  •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에는 마령면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아래와 같은 비석들을 이건하여 세워두었다.
    좌측으로부터 이익응 영세불망비, 이중익 영세불망비, 강봉형 시혜기념비, 오세열 기념비, 오세열 불망비와 2016에 세운 일석 정진영 선생 송덕비(一石鄭鎭暎先生頌德碑)가 있으나 이 책이 30년 이상인 금석문만 다루는 관계로 따로 싣지 못한다.
  • 【비표】 縣監李侯重翼永世不忘碑(현감이후중익영세불망비)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불명
    【형태】 높이 10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중익(李重翼)은 진안현
  • 【비표】 縣監李侯益應永世不忘碑(현감이후익응영세불망비)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1877년 10월(光緖三年 丁丑 十月 日)
    【형태】 높이 11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1931년
    【형태】 높이 10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강봉형(姜鳳馨, 1871~1948)은 효성이 뛰어났고, 부인 진주 하씨(晉州河氏)와 함께 덕행을 베풀어 여러 곳에서 포제(褒題)가 있었다.
  • 【비표】 前面長吳公世烈紀念碑(전면장오공세열기념비)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1927년
    【형태】 높이 108cm, 너비 34cm, 두께 13cm.
  •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1928년(소화(昭和) 3년)
    【형태】 높이 10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오세열(吳世烈)은 일제하 마령면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