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 石亭李公元孝遺蹟碑(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석정이공원효유적비)

    【위치】 백운면 평장리 88. 평장초등학교 앞.
    【시기】 1974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0cm, 너비 60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孔子曰仁者는 必得其壽라하시고 孟子曰脩天爵이면 人爵이 從之라하시니 惟大人君자라야 可以當之而 贈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石亭李公이 是矣라 公諱는 元孝요 字는 舜卿이요 石亭은 其號이니 鎭安之氏는 以寶文閣直提學士諱校로 爲上祖라 當麗季하야 以直見忤하야 貶于鎭安이러니 社爲屋에 隱居求志以終하니 子孫이 仍籍而居焉이라 三傳하야 諱達孫은 號幽溪니 成廟朝에 以文章德行으로 歷宣務郞訓導安岳郡守하다 是生三男하니 曰光俊은 副司果요 曰英俊은 號水軒이니 兩試文科하야 官至副正하고 曰終俊은 安州敎授라 司果公이 有一子하니 諱는 公謹이니 智陵參奉이요 水軒公이 有三子하니 曰仁賢은 號雙尖이니 兩試文科하야 官至司成하며 享靈溪院이요 曰義賢은 官修義副尉요 曰禮賢은 官禦侮將軍矣라 參奉이 無嗣하야 以副尉公第三房諱尙白으로 爲後하니 於公에 八代祖也라 繼而碩德이 相望而贈軍資監正諱揆聖과 贈工曹參議諱龜蓮과 贈漢城判尹諱受森은 曾若祖彌니 皆以公貴로 蒙恩하다 妣는 贈貞夫人通川崔氏니 應泰女요 有婦德이라 正廟甲辰에 生公于平章村하니 天姿純粹하고 誠孝篤至라 六歲에 丁父憂하야 哀痛從禮를 如老成하니 遠近이 咸服이더라 値先世忌辰에 灑掃滌器烹臠等節을 身親莅之하고 求堪輿師하야 得明堂하야 以安數世體魄하고 奉萱闈에 克敬克誠하여 遭艱에 廬墓三年할새 不脫衰不食稻하며 服闋而展省如一하고 備石儀置塋田하야 伊昔未遑을 事多成就하다 讀書에 以三省四勿과 九容九思로 爲座右銘하고 一出場屋은 爲親之故而不得於有司에 卷而懷之하고 沈潛性理之書하야 玩索精微之蘊하야 內外交養에 知行이 竝進하고 於諸子百家에도 亦皆曲暢傍通하야 行去厓異而所守則確如하고 愛人之心은 如陽春之潤物이나 難奪之志는 如泰山之厚重하며 居敬存誠으로 爲立心之本하고 明善行義로 爲進德之方하며 不喜著述而時或應酬文字나 旨遠辭簡하야 華實이 兼全이라는 其氣는 良玉之溫和요 其色은 精金之輝煌이며 不設皐此而學者坌集하니 垢刮葷洗하야 隨症磨礱을 莫不獲河飮而各充하고 有行誼之可尙者는 雖卑幼나 禮貌之하며 稱揚之하고 有四窮之無依者는 助婚資하며 賻喪需하고 立齋修契하며 延師敎幼하다 家雖淸寒이나 座上에 客常滿이요 時以山巾野服으로 吟詠乎山水間하야 多留勝蹟하다 刺史守令이 存問之호대 各恥其或後러라 葵堂鄭相公範朝가 稱以百里樹風에 望閭必式이라하고 兵使李公觀淵이 薦壽하야 陞崇政階하니 皐鶴聞天이 其理不差라 高宗庚午에 卒하니 葬鼠走洞先塋下坤向原할새 輓誄哭奠者는 塡路러라 配는 貞敬夫人全義李氏範羽의 女라 葬水中臺丑坐하다 生四男하니 伯은 鎭龍이니 以孝學으로 累登道剡하고 仲季는 鎭鳳鎭麟이니 早夭하고 叔은 鎭龜니라 噫라 以公邃學廉直으로 闊步雲梯댄 功施普澤流遠이어늘 而擧世相違하야 蟄伏畎畝而止하니 甚可慨야라 然이나 師表鄕省에 警覺來裔하야 興起斯文하니 去彼取此가 尤有光焉이로다 後孫正信聖麟二友가 袖菊史柄淵翁所述家狀하고 訪余하야 責不朽銘이어늘 菊翁之馨風懿德이 望重一方이라 余 不敢以人微로 辭하야 略綴狀文而敍之하고 繼而銘하니 曰 誠深百行之源學篤性理之宗育英材喜施與天爵修人爵從百里樹風式閭前賢已有明徵靈芝焚而香聞寶刀埋而氣騰
    檀紀四千三百七年甲寅捌月之晦에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공자께서 말하기를 “인자(仁者)는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라고 하셨고, 맹자께서 말하기를 “천작(天爵, 덕[德])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온다”고 하였다. 오직 대인군자(大人君子)라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증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贈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석정(石亭) 이공(李公)이 그런 사람이다. 공의 휘는 원효(元孝)요, 자는 순경(舜卿)이요, 석정(石亭)은 호이다. 진안 이씨(鎭安李氏)는 보문각 직제학사(寶文閣直提學士) 교(校)를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엽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진안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곳에 은거하며 생을 마치니 자손이 이로 인해 적(籍)을 삼고 살게 되었다. 3대를 내려와 달손(達孫)의 호는 유계(幽溪)인데, 성종조(成廟朝)에 문장과 덕행으로 선무랑(宣務郞) 훈도(訓導)와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역임하였다. 이 분이 3남을 낳으니 광준(光俊)은 부사과(副司果)요, 영준(英俊)은 호가 수헌(水軒)으로 문과하여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종준(終俊)은 안주교수(安州敎授)이다. 사과공(司果公)의 아들은 공근(公謹)이니 지릉참봉(智陵參奉)이다. 수헌공(水軒公)은 3남을 낳았는데 인현(仁賢)은 호가 쌍첨(雙尖)이니 문과하여 사성(司成)에 이르고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의현(義賢)은 수의부위(修義副尉)요, 예현(禮賢)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참봉은 자식이 없어 부위(副尉公)의 3자 상백(尙白)으로 후사를 잇게 하니 공의 8대조가 된다. 석덕(碩德)으로 이어져 오다가 증 군자감정(贈軍資監正) 규성(揆聖)과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 귀련(龜蓮)과 증 한성판윤(贈漢城判尹) 수삼(受森)은 공의 증조, 조부, 부친이니 모두 공이 벼슬함으로 인해 몽은(蒙恩)을 입었다. 비(騙)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통천 최씨(通川崔氏)로 응태(應泰)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었고, 정조(正祖) 갑진(甲辰)년 평장마을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자(天姿)가 순수하고 성효가 돈독하였다. 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하며 예에 따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으니 원근의 사람이 감복하였다. 조상의 제삿날에는 청소하고 그릇 씻고 조리하는 일을 손수 하였으며, 지사(地師)를 데려와 조상을 명당에 안치하였다. 모친을 받듦에 경(敬)과 성(誠)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여묘 3년 동안 해진 옷을 벗지 않고 쌀을 먹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에도 성묘하는 일을 그 전과 같이 하였으며, 석의(石儀)를 구비하고 제전(祭田)을 만들어 경황 중에 못했던 일들을 성취하였다. 독서(讀書)함에 삼성사물(三省四勿)과 구용구사(九容九思)로 좌우명을 삼았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한번 보았으나 이루지 못하자 책을 품에 품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경전을 탐독하여 안과 밖으로 사귀고 부양함에 지행(知行)이 나란하였고, 제자백가서에 능통하여 그 궁극에 다다랐다. 규칙을 확고하게 지켰으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봄볕이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고한 뜻은 태산의 무거움과 같아 거경존성(居敬存誠)을 마음 세우는 근본으로 하여 선을 밝히고 의를 행하며 덕을 쌓았다. 책을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혹 글을 써서 화답할 때는 간단하나 뜻이 깊은 글을 쓰니 화려함과 실속이 겸전하였다. 기운은 좋은 옥과 같이 온화하며, 얼굴은 정금(精金)과 같이 빛나니 부르지 않아도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더러운 것은 떨쳐버리게 하고, 학문을 연마하여 얻지 못함이 없이 각자 충만하게 하였고, 숭상할 만한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어리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예로 대하며 칭찬하였다. 사궁(四窮)으로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은 혼인 자금을 도와 주었으며,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부조하였고, 재(齋)를 세우고 수계(修契)하여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안은 비록 청한(淸寒)하였지만 항상 손님이 많았으며, 거친 옷을 입고 산수에 나아가 음영(吟詠)하며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고을 수령들이 찾아와서 공을 뵙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규당(葵堂) 정범조(鄭範朝)가 “백리에 수풍의 소문이 퍼져 정려에 경의를 표했구나[百里樹風 望閭必式]”라고 칭찬하였으며, 병사(兵使) 이관연(李觀淵)이 수직으로 천거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오르니, “학(鶴)이 울면 하늘이 듣는다” 하는 이치가 틀림이 없다. 고종(高宗) 경오(庚午)년에 사망하여, 서주동(鼠走洞) 선영의 아래 곤향원(坤向原)에 장사지내니 만가(輓歌)를 부르고 곡을 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범우(範羽)의 따님인데 수중대(水中臺) 축좌(丑坐)에 장사지냈다. 4남을 낳으니 장남은 진룡(鎭龍)인데 효학(孝學)으로 누차 도에 천거되었고, 차남과 3남은 진봉(鎭鳳)과 진린(鎭麟)이나 요절하였고, 4남은 진구(鎭龜)다. 희(噫)라, 공의 깊은 학문과 염직함으로 벼슬길에 나갔다면, 공(功)을 베풀어 널리 혜택을 주었을 것이지만, 세상과 상위(相違)하여 밭고랑 사이에서 칩거하는데 그쳤으니 심히 안타깝다. 그러나 고을의 사표(師表)가 되어 후인을 깨우치고 유학을 일으켰으니,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함이 더욱 빛나도다. 후손 정신(正信)·성린(聖麟) 두 친구가 국사(菊史) 병연(柄淵) 옹(翁)이 기술한 가장(家狀)을 가지고 내게 찾아와 비석의 명(銘)을 맡겼다. 국사옹의 향기와 아름다운 덕은 존경받는 바이어서, 나는 모자란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을 줄여 서하고 명하기를 “성(誠)의 깊기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 학문이 돈독하기는 성리(性理)의 종장(宗匠)이었네. / 영재를 기르고 기쁘게 베풀어 / 천작(天爵 / 德)을 닦으니 인작(人爵)이 따랐구나. / 백리(百里)에 수풍(樹風)의 소문이 퍼져 정려에 경의를 표했구나 / 먼저 간 현자들이 이미 밝혔도다. / 영지(靈芝)를 사르니 향기가 퍼지고 / 보도(寶刀)를 묻으니 기운이 하늘로 오르네.” 단기 4307(1974)년 갑인(甲寅)년 8월 그믐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
  • 【비표】 孝子松坡處事全公遺蹟碑(효자송파처사전공유적비)

    【위치】 백운면 평장리 산 97임. 가전마을 어귀 산비탈 전인권효자각 앞.
    【시기】 197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높이 179cm, 너비 66cm, 두께 3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子曰見賢思齊焉 賢者之一動一靜 可以爲範於世明矣 所以表而出之 以警夫千百人而使之思齊而遷善者也 月浪儒林爲是之策 將竪孝子松坡處士全公遺蹟碑銘 雅士 宋升煥 李聖麟 全永泰 與公之子柄和 齎各項文字 屈駕半千長程以刻詞屬之不侫 余以耄昏固辭不獲略敍梗槩而復焉 謹按 公諱麟權 字聖才 松坡其號 天安氏 上自百濟開國十濟功臣 歡城君諱聶 在麗諱樂 天安君至 諱克禮 端廟朝戶曹判書乙亥棄官南下鎭安四傳 諱繼宗 文習讀 殉節龍蛇亂 贈參議 享靈溪院 世稱葵菴先生 諱載行號東隱 諱洪錫號岡菴 諱永鍾號湖隱 俱有文學 公之曾祖及祖禰 密陽孫氏 順天朴氏 錦山金氏三妣位 公朴出 公以高宗庚申生 自幼岐嶷 聰悟過人 得味必獻 聞異必告 七歲讀史略 至大舜事親之節欣然三復曰 人子奉親當以大舜爲法極其誠意 是歲遭母喪 號天痛哭不離尸床 及 父再聘喜動顔色曰 自失所恃依仰無無地今得賢母無異生母 孝奉竭力 年至十七 母氏嬰疾 沈綿奉藥 祈神所不至 漸次危谹 股肉指血以延三晝 命竟不起哀毁如前喪 後居外艱粥終制禮戚備至 鄕里感服 累報營邑 公聞之愕然曰 無實妄擧大乖倫綱 欲取狀燒滅而爲人秘藏不得焉 常與菊史李公柄淵 修堂鄭公鍾燁 爲道契講磨道義負笈者盈門 奉先而修玄堂置祭田餕餘 曾子若孫提其長短曰 長必加勉短必改之且以漢昭烈 勿以不爲勿以爲之丁寧敎戒人 校宮修文廟保校士興學育材 於削令曰 此是外勢捏造終不屈 際國變 海山全公基泓 靜齋李公錫庸之擧義也 以親老不得從事 傾家財助焉 遂隱遯雲谷以圖自靖之策 與鄕邦長德排拒日警 創建駬山廟殿 奉四先王祠 妥先賢先烈 以扶植綱常 白凡金九 省齋李始榮 兩先生 以書物贊美之 噫 公之灼灼群行 可徵於成均館及鄕道狀 大筆赫赫 可以警百世而長存 遂爲之銘曰, 詩禮業專 孝悌行篤 義助軍需 節守罔僕 尊賢彰烈 衛道獎學 館校里邑 薦章成
  • 【비표】 孝子學生梁源河之閭(효자학생양원하지려)
    孝子學生梁鍾潤之閭(효자학생양종윤지려)

    【위치】 백운면 평장리 260. 송림마을 남쪽 진입로변.
    【시기】 1892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10cm, 너비 48cm.
    【개요】 이 석조(石造) 정려(旌閭)에는
  • 비표 : 鳳岡崔先生紀績碑(봉강최선생기적비)

    【위치】 백운면 평장리 462. 정천마을 동쪽 평가로변 소나무숲 내.
    【시기】 1978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22cm.

    【개요】 최진형(崔進亨)의 호는 봉강(鳳岡), 전주인(全州人)이다. 고려조 문충공(文忠公) 군옥(群玉)의 후예로 충익공(忠翼公) 만육(晩六) 양(瀁)의 차남이다. 정훈(庭訓)을 이어받아 견문이 넓고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14~1388)의 문인으로 많은 기림을 받았다. 판서(判書) 이식(李軾)은 공의 처부(妻父)였으나 공을 심중히 여겨 마치 사우(師友)처럼 여겼다 하니, 공의 높은 인격(人格)과 도덕(道德)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의리(義理)의 학문에 정심(精深)하여 형상형하(形上形下)의 도리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전현(前賢)이 아직 밝혀내지 아니한 오지(奧旨)를 명쾌(明快)히 드러내 많은 문인들이 뒤따른 바, 자사(刺事) 하연(河演)의 천달(薦達)로 응양위 상호군(鷹揚衛上護軍)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도연명(陶淵明)의 고아(高雅)한 풍도(風度)를 지키며 충효전가(忠孝傳家)의 가통(家統)을 굳게 지켰다. 이와 같이 임하(林下)의 은사(隱士)로 자처하며 의론이 청직(淸直)한 바, 백씨(伯氏)인 진명(進明), 종씨(從氏)인 진성(進誠)과 함께 많은 이름을 남기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공(先公)의 충절과 둔촌(遁村)의 학문을 아울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