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高麗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贈諡文成公李据神道碑(고려대사마대장군평장사겸시중증시문성공이거신도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산내길 66-3. 산수동 전주이씨 재각 경모재 마당.
    【시기】 196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0cm, 너비 59cm, 두께 27cm.
    【개요】 비문에서는 백운면 평장리를 가리키고 있으나 비는 성수면 산수동에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湖之南에 有以平章으로 名洞里者二니 今在鎭安白雲面者其一也라 鎭之山勢가 鬱積磅磚하고 水口又絶佳하니 於其地靈所鍾에 傑人名宦이 往出其間이라 以餘所聞則李氏平章事公이 致仕而肇基于此하고 至其曾孫하여 示官平章하니 其所以名里가 蓋尊榮之而傳之尙不泯者近千示異矣라 近考其郡誌則不果誣也로다 日에 其遠裔炳春炳文炳紹者顧余南安山齋而曰 我全州之李姓 實出新羅司空諱翰하니 其塚有疑하여 設壇하니 乾止山肇慶壇이 是也라 自司空으로 累傳而諱珍有와 有諱宮進初諱宮准諱勇夫는 大將軍이니 是生內侍執奏諱璘과 次諱据하니 官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諡文成이니 我 太祖高皇帝之從六世祖也라 公이 退居于鎭安縣東德泰山下하니 地勢狹塏하고 明氣醉人하니 所謂平章里者是也라 有男三人하니 諱陽翼은 官三城將軍門下舍人이요 次曰陽軫은 陽星이요 舍人이 孫男行典은 官門下侍中平章事라 按公의 表德則晩祥이요 又靖菴이니 高麗明宗四年甲午正月九日에 生于紫晩洞私第하고 高宗三十三年丙午正月三日에 卒하니 墓在平山治矢干峯下中麓乾亥壬三回龍下癸坐라 配南平文氏殿中內給事克純女고 明宗二年壬辰二月二日生이요 高宗二十四年二月五日에 卒하니 墓合窆이라 噫라 年代旣邈而累經桑溟하여 其立朝履歷과 志業風栽를 無可攷懲하고 而墓失其傳하여 酒掃不及하고 香火未薦이라 秋霜春露에 齎恨含痛이 庸有旣乎아 平章里之近左右浦上山水洞冠帽峯之下에 有公後禮曹判書珍寶之墓라 每歲一祀之日에 一宗이 咸爲後孫은 其得享하되 先祖는 其不得享하니 胡爲而可오 從古爲壇者實以墓之疑信相半而望墓以設하니 顧人子恣性自然而亦可爲義起之事라 第念惟平章里則雖云無公之墓나 卽杖屢所而子孫奠居也 府君於昭之靈이 安知以時陟降于此乎리요 且彼溪山岩石이 雖曰孱削消磨於千年風雨之間이로되 而迺不變其所則有之하니 亦莫非公之所以登臨者요 而且人情之所合神理之所宜也니 此可以設壇而行上塚之儀也니라 乃卜吉日하여 除地而壇하니 判書公墓南邊也 式旣擧에 又以治一丈石하여 爲神道顯刻이라 敢請長者有以一言之相也니라 炳殷이 人之俱微而大耋之하여 不省事하니 其何能承이리요 當窃念羅麗之墓失傳者何限而今之世壇享을 亦不可數計니 此獨近日人情之最厚也라 推而上之則人倫이 大明하고 風俗이 甚厚而宗國之興其在此乎인저 吾所以有感中者는 況吾友鄭貴泳이 以書로 道李門追遠之賢勞하니 不敢辭也로다 按其家牒則公之後裔而最顯者는 判書諡孝靖珍實이요 子禮判軾이 端宗朝에 以靖國功臣으로 封星山君贈諡忠靖이라 是生甲仁은 進士宗親府副正이요 由義는 進士文科濟州牧使成宗朝功臣이요 由禮는 進士副司直宗親府副正이라 由智는 進士內禁衛將宗親府副正이라 四昆季子孫이 散居鎭安高山益山任實江西而不失鄕中之令名이요 若彭錫은 生員文科縣監郡守요 御侮將軍階至通政하고 成宗庚戌에 錄功佐理功臣하고 彭東은 以孝行으로 除授獻陵參奉하고 彭種은 生員이요 彭穗彭祖는 俱顯監이요 元貞은 生員이니 文科로 縣監郡守요 堯貞堯卿은 俱生員이요 守宇는 生員三縣監三縣令六郡守로 階通政하고 累典十二邑하여 多治蹟하고 中宗三十七年에 壬寅老而致仕歸鄕하니 凡三十五年善治에 一世名稱이요 宇宙는 中宗三年戊辰에 中文科하여 初擢翰林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兼經筵參贊官司諫院大司諫司憲府大司憲弘文館大提學議政府左贊成이라 上이 命稱安靖功臣諡文敬하고 希忠及曄은 主簿요 芷는 參議요 世恭은 參奉이요 世儉은 縣令으로 皆至通訓하고 世讓은 寺正이요 萬興은 通政大夫요 哲은 通政大夫同知中樞府事요 昌福은 宗親通直郞이요 昌慶은 累徵不就하고 昌吉은 慶科로 將仕郞敎授요 龍壽는 通德郞이요 好誠은 宣務郞禮賓寺主簿요 好詠은 贈同知中樞府事요 日雲은 武科로 郡守요 祥虎는 武科로 訓練院參軍이요 健은 弘文館典翰이요 信은 僉正이요 顯宗朝癸丑十月十九日에 加資送使臣이 下鄕하니 信이 別世가 五日이니 見不幸之事하니 浪淚하고 上京하여 上疏하니 上이 見上疏文하고 恨歎하며 贈五衛都摠官하다 櫶은 生員이요 震興은 判官이요 命立은 同知中樞府事階嘉善이요 尙翊은 贈吏曹參判 延鵬은 受學於李先生締之門하고 東彦은 贈司僕寺正이요 孝伯은 僉知中樞府事하고 階通政하다 蒙濟는 宗親應製로 文科正言하고 亨益은 贈戶曹參議요 雲起는 僉知中樞府事하고 階通政이요 延景은 武科로 御侮將軍이요 承秀는 贈吏曹參判이요 夏興은 僉知中樞府事요 階通政이라 夏昌은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요 信馨은 高宗朝副護軍階通政이요 惟馨은 憲宗朝嘉善大夫行敦寧府同敦寧요 高宗朝贈五衛都摠官이요 仁醇은 哲宗朝特命으로 宗親府應製乾元陵參奉이요 仁燮은 武科로 行守門將하고 贈五衛都摠官이요 宗植은 高宗朝贈嘉善大夫行政秘書요 若其宗子則坪圭요 尸碑役者는 政基甲喆振基銀圭也라 余旣序之如此하고 又爲之銘하니 曰 天佑勝國篤生偉人이요 爲將爲相에 柱石之臣이라 麗史所居月浪에 麗水佳山이라 里名平章에 表其達尊이라 山亦德泰山이요 柳非厚仁가 況又曾孫이 繩厥先武라 位極平章하고 榮貴罕都라 錫祚無彊하니 世奠厥居로다 篤心報本하니 封壇是謀라 爰相厥基하니 于彼冠峯이로다 衆巒星拱하고 百神護從이라 齊明盛服하여 薦以馨香하니 於左於右에 如在洋洋이라 庶幾夙夜에 著存不忘이라 而又礱石에 峙于高岡이라 永永萬年에 不泯平章이로다.
    全義李炳殷謹撰
    【풀이】 호남에 평장(平章)이라 이름한 동네가 둘 있으니, 현재 진안 백운면에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진안의 산세는 첩첩이 둘러싸여 물과 바위가 절경을 이루니, 그 땅의 지령(地靈)으로 뛰어난 인물과 명환(名宦)이 왕왕 나왔다. 들은즉 이씨 평장사공(平章事公)이 여기에 터를 잡아 증손에 이르러 평장사의 벼슬을 보았다고 한다. 동네 이름이 된 까닭은 대개 그 영화(榮華)를 받들어 전하여 민몰하지 않게 하고 천년 가까이 제사를 지냄에 있다. 군지(郡誌)를 살펴본즉 헛된 소리가 아니로다. 하루는 그 후손 병춘(炳春)·병문(炳文)·병소(炳紹)가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전주 이씨는 실로 신라(新羅) 사공(司空) 휘(諱) 한(翰)에서 나왔으나, 그 무덤에 의문이 있어 단을 세우니, 건지산(乾止山) 조경단(肇慶壇)이 그것이라. 사공(司空)부터 몇 대를 전하여 진유(珍有)와 궁진(宮進, 초휘[初諱] 궁회[宮准])이 있었고, 휘(諱)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이라. 이 분이 내시집주(內侍執奏) 휘(諱) 린(璘)과 휘(諱) 거(据)를 낳으니 벼슬이 대사마대장군평장사겸시중(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우리 태조(太祖)의 종6세조(從六世祖也)라. 공이 물러나 진안현의 동쪽 덕태산 아래에 우거하였는데, 땅이 좁고 높아 밝은 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하니 소위 평장리이다. 아들 셋을 낳으니 양익(陽翼)은 벼슬이 삼성장군문하사인(三城將軍門下舍人)이요, 둘째는 양진(陽軫)이요, 다음은 양성(陽星)이다. 사인(舍人)의 손자 행전(行典)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라. 공의 행장을 살펴보니 호는 만상(晩祥)이요, 또 정암(靖菴)이라고도 하였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4년 갑오(甲午) 5월 9일 자만동(紫晩洞) 집에서 태어나 고종(高宗) 33년 갑오(甲午) 1월 3일 졸(卒)하니, 묘는 평산(平山) 시간봉(矢干峯) 중록(中麓) 건해임(乾亥壬) 삼회룡(三回龍)의 아래 계좌(癸坐)라. 배(配)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극순(克純)의 따님이고, 명종(明宗) 2년 임진(壬辰) 2월 2일에 태어나 고종(高宗) 24년 2월 5일에 사망하여 합폄(合哮)하였다. 희(噫)라, 연대가 멀어 조정에서의 이력(履歷)과 공업(功業)과 풍모를 고증하지 못하고, 묘 또한 실전(失傳)하여 성묘하고 향화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해마다 한스럽고 애통함이 어찌 없으리요. 평장리 근처 좌우 시냇가 위 산수동(山水洞) 관모봉(冠帽峯) 아래에 공의 후손 예조판서(禮曹判書) 진보(珍寶)의 묘가 있다. 종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매년 시제를 모실 때 후손은 모시나 조상을 모시지 못하니 어찌 옳다 하겠는가. 예법에 따라 설단한 것은 실제의 묘가 어디인지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며, 묘라 생각하고 설단하였으니, 돌아보아 자손의 심성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義)로운 일이라 하겠다. 생각하니 평장리에는 비록 공의 무덤은 없으나 공께서 이 곳에 주(住)하심으로 자손이 이 곳에 살며 제사지내게 되니, 부군(府君)의 밝은 영혼이 어찌 이 곳에 오르내리지 않겠는가. 또한 계곡과 산과 암석이 비록 천년의 풍우에 마모되었으나 그 장소는 남아 있으니 또한 공께서 이 곳에 오르시던 곳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인정(人情)에 부합하는 것이 신리(神理)에도 부합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설단하여 상총(上塚)의 예의로 행함이 가하다. 길일을 받아 땅을 고르고 단을 쌓으니 판서공(判書公) 묘의 남쪽이다. 또 이미 일장(一丈)의 돌을 다듬어 놓고 신도비(神道碑)를 각하려 하니, 감히 청컨대 어르신의 한 마디 말씀을 받았으면 한다 하였다. 하지만 병은(炳殷)은 미흡하고 늙어 일을 살피지 못하니, 어찌 능히 받들 수 있겠는가. 당하여 혼자 헤아려보니, 신라와 고려 때의 묘를 실전한 경우가 어찌 셀 수 있을 것이며, 금세에 설단하고 향사하는 예가 또한 셀 수 없으니, 이는 요즈음 사람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일이다. 위로 조상을 받들면 인륜이 크게 밝아지고 풍속이 심후하게 되어 나라의 흥함이 여기에 있음이로다. 내가 감격한 까닭은 하물며 내 친구 정귀영(鄭貴泳)이 글로써 이씨 문중의 조상을 추원(追遠)하는 노고를 해주었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가첩(家牒)을 보건대 공의 후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은 판서 효정공(孝靖公) 진보(珍寶)요, 그 아들 예조판서 식(軾)이 단종(端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지고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아들 유인(由仁)은 진사로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이요, 유의(由義)는 진사로 문과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낸 성종(成宗) 때의 공신이요, 유례(由禮)는 진사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이고, 유지(由智)는 진사로 내금위장(內禁衛將)과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을 지냈다. 4형제의 후손이 진안(鎭安)·고산(高山)·익산(益山)·임실(任實)·강서(江西) 등에 흩어져 살지만, 고을에서 명예를 실추하는 일은 없었다. 팽석(彭錫)은 생원으로 문과하여 현감과 군수를 지냈고, 어모장군(御侮將軍)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階)에 올랐으며, 성종(成宗) 경술(庚戌)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팽동(彭東)은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팽종(彭種)은 생원이요, 팽수(彭穗)와 팽조(彭祖)는 현감이다. 원정(元貞)은 생원으로 문과하여 현감과 군수를 지냈고, 요정(堯貞)과 요경(堯卿)은 모두 생원이다. 수우(守宇)는 생원으로 현감 3번, 현령 3번, 군수 6번을 지내고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12읍에 기록되었는데 치적이 많았다. 중종(中宗) 37년 임인(壬寅)에 늙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무릇 35년의 선정(善政)에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우주(宇宙)는 중종(中宗) 3년 무진(戊辰)년에 문과하여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겸 경연 참찬관,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좌찬성(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兼經筵參贊官司諫院大司諫司憲府大司憲弘文館大提學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중종이 안정공신(安靖功臣)에 명하고, 칭찬하여 문경(文敬)이라 시호를 내렸다. 희충(希忠) 및 엽(曄)은 주부(主簿)요, 지(芷)는 참의(參議)요, 세공(世恭)은 참봉이요, 세검(世儉)은 현령으로 모두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세양(世讓)은 시정(寺正)이요, 만흥(萬興)은 통정대부(通政大夫)요, 철(哲)은 통정대부동지중추부사(通政大夫同知中樞府事)요, 창복(昌福)은 종친통덕랑(宗親通德郞)이요, 창경(昌慶)은 몇 번 불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창길(昌吉)은 경과(慶科)로 장사랑(將仕郞)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용수(龍壽)는 통덕랑(通德郞)이요, 호성(好誠)은 선무랑(宣務郞) 예빈사 주부(禮賓寺主簿)요, 호영(好詠)은 증 동지중추부사(贈同知中樞府事)요, 일운(日雲)은 무과로 군수(郡守)요, 상호(祥虎)는 무과로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요, 건(健)은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요, 신(信)은 첨정(僉正)으로 현종(顯宗) 계축(癸丑)년 10월 19일에 가자(加資)를 받든 사신이 내려왔는데 이미 5일에 별세하였으므로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상경하여 상소하였다. 현종이 상소문을 보시고 한탄하며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하였다. 헌(櫶)은 생원이요, 진흥(震興)은 판관(判官)이요, 명립(命立)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가선대부(嘉善大夫)요, 상익(尙翊)은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연붕(延鵬)은 이선생 체(締)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동언(東彦)은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효백(孝伯)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몽제(蒙濟)는 종친응제(宗親應製)로 문과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형익(亨益)은 증 호조참의(贈戶曹參議)요, 운기(雲起)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연경(延景)은 무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요, 승수(承秀)는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하흥(夏興)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하창(夏昌)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요, 신형(信馨)은 고종(高宗) 때 부호군(副護軍)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유형(惟馨)은 헌종(憲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령부 동돈령(敦寧府同敦寧)을 지냈고, 고종(高宗) 때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다. 인순(仁醇)은 철종(哲宗) 때 특명(特命)으로 종친부 응제(宗親府應製)를 거쳐 건원릉참봉(乾元陵參奉)을 지냈고, 인섭(仁燮)은 무과로 수문장(守門將)을 지내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으며, 종식(宗植)은 고종(高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정비서(行政秘書)에 추증되었다. 그 집안의 종손(宗孫)은 평규(坪圭)요, 비를 세우는 데 힘을 쏟은 사람은 정기(政基)·갑철(甲喆)·진기(振基)·은규(銀圭)이다. 나는 이와 같이 서(序)를 쓰고 또 명(銘)하기를 “하늘이 도와 고려 때 위인(偉人)을 나게 하였으니 / 장군, 재상으로 사직의 주춧돌이 되었구나. / 고려 때 월랑(月浪)에 우거하니, 산수가 수려하였더라. / 마을 이름 평장이니 그 달존(達尊, 덕과 나이와 벼슬)을 표함이라. / 산 또한 덕태산(德泰山)이니, 유씨가 후인(厚仁)하지 않겠는가. / 하물며 또 증손이 선대의 발자취를 이어 / 평장사의 지위에 오르니, 그 영귀함이 도성에서도 드물었더라. / 복록을 내림이 무궁하니 대대로 이 곳에 안주하였다. / 조상을 위한 돈독한 마음으로 단을 세우려 하도다. / 이에 터를 다듬으니 저기가 관봉(冠峯)이구나. / 뭇 봉우리가 조아리며 뭇 신령이 지켜주는데 / 제물을 갖춰 제복을 입고 향화를 피워 올리니 / 좌에도 우에도 양양한 기운이로다. / 조석으로 살피는 마음 두드러져 잊지 못하니 / 돌을 다듬어 높은 산등성이에 올렸구나. / 만세에 길이 민몰치 않을 평장이로다.”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 근찬(謹撰)
  •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시기】 1986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2개소의 석정(石亭) 안에 비석이 2개씩 들어 있다.
    【개요】 공주이씨의 종중 비석군이다. 비석은 다음 4개가 있다.
    숭정대부 봉은 이공 효행비(崇政大夫鳳隱李公孝行碑)
    감역 우석 이공 공덕비(監役愚石李公功德碑)
    성균진사 소석 이공선덕 의인 하동정씨 효열비(成均進士小石李公善德宜人何東鄭氏孝烈碑)
    주서 지산 이공 창의비(注書砥山李公倡義碑)
  • 【비표】 崇政大夫鳳隱李公孝行碑(숭정대부봉은이공효행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孝子李公 諱載準 字華重 號鳳隱者 公州之華閥也 大司馬大將軍 諡文武 諱天一 始顯於新羅赫居世朝 至麗末 殿中御史 文成公 諱明成 有罔僕志 隱於杜門洞 太宗屢徵不起 享公州鳴灘院 鎭安忠節 楊州追遠 諸壇 工判光弼 六世孫 公遠 公建 公迪 三昆季 自古阜移任實 又轉居鎭安之佐浦 公迪子元奭 號寒圃 贈司僕寺正 受業宋文敬公性潭先生之門 文名大振 崔尙書勉翁 記其堂於公曾祖也 祖諱震恒 贈左承旨 考諱周瑀 贈戶參 皆以公貴 公以正廟丁巳四月五日 生于佐浦里第 賦性聰慧 文藝夙就 哲宗己未 登上庠 品行端肅 風儀偉然 雖出入卿宰之門 絶無私干焉 特於事親之節 志體俱養 愛敬備至 事無大小必禀 每於良辰佳節 聚群子弟以娛之 及遭二艱 顔色之戚 哭泣之哀 弔者大悅 至於先塋石儀之具 守護之節 無有不備 而於鄕里窮乏之人 歲時周恤 猶恐其有未洽 自是 慈惠之頌遠播 剡騰之薦累上 於高宗丁卯優老之典 有司擬公以百歲之秩 而直超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此異數也 子曰 事親孝故 忠可移於君 事兄弟故 順可移於長 由是觀之 忠順必自忠悌中做出則人於父兄 不能孝悌而能忠順於君長者未之有也 況公子禹欽 官繕工監假監役 有孫三人 長浩季 成均進士 仲浩溶 文科及第 承政院注書 季浩殷 有文有守 令文不已 天之報施善人 於斯可驗矣 公之玄孫 現基氏 猶恐其先美湮沒 遠往半千里 求文於不佞 刻諸豊碑 以樹其里門焉 其意實有在耳 豈無一人有所觀感而興起於孝者乎哉
    檀君紀元四千三百十九年丙寅 大雪之節 羅州 羅鉀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효자 이공(李公)의 휘(諱)는 재준(載準), 자(字)는 화중(華重), 호(號)는 봉은(鳳隱)이다. 공의 집안 공주(公州)는 명문호족(名門豪族)으로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시호(諡號) 문무공(文武公) 천일(天一)은 신라 혁거세의 중신이었고, 고려말 궁중어사(宮中御使) 명성(明成)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태종(太宗)이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공주(公州) 명탄서원(鳴灘書院) 진안(鎭安) 충절사(忠節祠) 양주(楊州) 추원사(追遠祠)에 배향되어 있다. 공판(工判) 광필(光弼)의 6세손 공원(公遠), 공건(公建), 공적(公迪) 삼형제는 고부(古阜)에서 임실(任實)로 이거했다가 또 진안(鎭安) 좌포리로 이거하였다. 공적(公迪)의 자 원석(元奭)은 호(號)가 한포(寒圃)로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되었고 송성담선생(宋性潭先生) 문하에서 배워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그 일을 적었는데 (이 분은) 공의 증조부이다. (공의) 조부는 진항(震恒)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父) 주우(周瑀)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공(公)은 정조 정사(丁巳, 1797)년 4월 5일 좌포리(佐浦里) 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품행이 단정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는데 비록 재상(宰相)의 집에 드나들었으나 개인적인 부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특별히 뜻을 두어 어버이의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였으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여쭈었으며 매번 좋은 시절이 되면 여러 자제(子弟)를 모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렸다. 어버이의 상을 당했을 때는 슬픈 안색을 하고 애처로운 곡을 하여 조문하러 온 자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선영의 석물(石物)을 갖추고 지키는 일을 완비하였다. 향리(鄕里)의 궁핍한 사람들에 대해서 세시(歲時)마다 구휼하면서도 오히려 흡족하게 해 주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자애롭고 은혜롭다는 칭송이 멀리 퍼지고 지방관의 천거가 여러 번 올라가서 고종 정묘년(1867 고종4)에 있던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에서 유사(有司)가 공을 100세의 등급에 의망하여 곧바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공자께서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옮겨서 군주에게 충성할 수 있고, 형을 공손하게 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옮겨서 웃어른에게 순응(順應)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볼 때 충성과 순응은 반드시 효제(孝悌)에서 나오는 것이니 부형(父兄)에게 효제할 줄 모르고도 군장(君長)에게 충성하고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은 있지 않다. 공의 자(子) 우흠(禹欽)은 관직(官職)이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이고, 손자는 셋이 있어 맏이는 호계(浩季)로 성균진사(成均進士), 둘째는 호용(浩溶)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고, 막내 호은(浩殷)은 문장(文章)과 지조(志操)를 지킴에 있어 좋은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선(善)을 베푼 일에 보답함이 가히 이와 같이 영험스럽도다. 공(公)의 현손(玄孫) 현기(現基)는 그 선대의 아름다운 일이 민몰(泯沒)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멀리 5백리를 찾아와 나에게 글을 구하여 커다란 비를 각하여 그 동리앞에 세운다고 하니 그 뜻이 실다운데 어찌 한사람뿐인가. 이를 보고 효(孝)에 대하여 흥기(興起)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단기 4319(1986)년 대설지절 나주(羅州) 라갑주(羅鉀柱)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
  • 【비표】 監役愚石李公功德碑(감역우석이공공덕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君子有德行之美而不得傳於世則是子姓 不明不仁之過也 豈不懼哉 月浪治西聖壽之坊 有隱君子以旣歿之百有一穓矣 其曾孫博士李現基甫 懼其懿德之泯沒 將治珉 樹於宗垈之傍 屬余識其事實以未辨魚魯之愚 安敢當 固辭不獲 謹按狀 敍之曰 公諱禹欽 字敬亮 號愚石 公州人 文武公 諱天一 爲上祖 至殿中侍御史 諱明誠 麗社旣屋 杜門不仕入本朝 贈諡文成 士林奉享于鳴灘書院 有諱元奭 號寒圃 師事宋文敬公性潭門 文學鳴世 贈司僕寺正 於公爲高祖也 公天性剛毅 心地正大 治産有度 自居儉約 極孝于兩庭 盡志體之養 友于昆季 析著深厚 設塾延師 敎門子弟 及 村秀才 貧不能就業者 期必使進學 各有所成焉 宗族鄕黨 莫不稱訟 接賓誠敬 雖有襤樓之客 同卓而飯 同衾而寢 毫無厭色 樂善好仁 恤窮周急 隨處頌德豎碑 皆使拔而埋之 或人標榜於完營門樓曰 萬人積善李某云 完伯李公秉文 按實啓薦 除繕工假監役 然不以名利動心 若風淸日和 則設筵邀朋 賦詩敍懷 手不釋券 探究性理 又愛山水之勝 遺芳躅于鳳山上 千仞亭矣 有子三人 浩季進士 浩溶文注書 浩殷 公以華閥肖裔 志行高潔 文翰瞻富 有遺稿 孝友根天 德望隆盛 一鄕矜式 垂蔭于後 麟趾熾昌 古人所謂 積善之家 必有餘慶者信不誣矣 銘曰 公山世家 寒圃肖孫 仁深德崇 之潔行敦 救貧恤窮 化被一鄕 刻諸貞石 庸闡幽光
    光復後 丙寅(1986) 小春下澣
    南陽 洪斗炫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군자가 선행의 아름다움이 있음에도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지 못함은 그 자손이 불명불인(不明不仁)의 과오를 범한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월랑(진안) 서쪽 성수마을에 숨은 군자가 있어 이미 타계하여 101년의 제사를 모셔온 바 그 증손 박사 이현기(李現基)씨가 그 선대의 높은 도덕이 민몰(泯沒)될까 두려워 장차 비를 만들어 종대(宗垈) 옆에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그 사실을 적어달라는 부탁이나 “어노(魚魯)도 분변(分辨)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어찌 감히 감당하리요”하고 고사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삼가 실상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우흠(禹欽)이요 자(字)는 경량(敬亮)이며 호(號)는 우석(愚石)이니 공주인(公州人)이라 시호(諡號)는 문무공(文武公)이며 휘(諱)가 천일(天一)이신 이가 윗대 선조요, 전중어사(殿中御史)이며 휘(諱) 명성(明誠)에 이르러 고려 사직이 이미 망하매 두문(杜門)하여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니 조선조에 들어와 문무공의 시호를 내려 사림(士林)이 명탄서원(鳴灘書院)에 봉향(奉享)하다 휘(諱)가 원석(元奭)이요 호가 한포(寒圃)인 이가 있어 송문경공(宋文敬公) 성담(性潭)에게 사사(師司)하여 문학이 세상에 떨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贈職)하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공은 천성(天性)이 굳세고 심지(心地)가 정대(正大)하였다. 재산을 관리하는 데 법도가 있었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양정(兩庭 타인의 부모에 대한 존칭)께 지극히 효성스러워 뜻과 몸을 봉양하는 데 극진했다.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분가(分家)할 때는 재산을 매우 후하게 나누어 주었다. 글방을 열고 선생을 모셔 와서 가문의 자제와 집이 가난해 배우지 못하는 시골 수재(秀才)들을 가르치게 하여 기필코 학업을 쌓아 각기 성취하는 바가 있게 하니,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에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손님을 정성과 공경으로 손님을 접대하여 비록 남루한 나그네라 할지라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면서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선행을 즐거워하고 인애(仁愛)를 좋아하여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고 위급한 사람에게 주선(周旋)해 주어서 도처에서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나 모두 뽑아서 묻게 했다. 어떤 사람이 전주 감영(全州監營)의 문루(門樓)에 방(榜)을 붙여 ‘만인(萬人)에게 적선(積善)한 사람은 이(李) 아무개이다.’라고 하였다. 전라 감사 이병문(李秉文) 공이 사실을 조사하고 장계로 천거해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명리(名利)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는 않았다. 바람이 맑고 따뜻한 날이면 자리를 마련하고 벗들을 맞이하여 시를 지어 회포를 서술하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성리(性理)를 탐구했다. 또 산수(山水)의 승경(勝景)을 사랑하여 봉산(鳳山, 봉황대) 가에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 천인정(千仞亭, 지금은 없어짐)이다. 아들은 셋이 있어 맏이는 호계(浩季)로 성균진사(成均進士), 둘째는 호용(浩溶)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막내는 호은(浩殷)이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지행이 고결하고 문장이 깊어 유고가 있으며 덕망이 융성하여 한 고장의 모범이었다. 음덕(蔭德)이 드리워 후예들도 기린의 발처럼 치성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은 틀리지 않는 말이다. 명(銘)하되, 공주이씨 가문 한포의 후예로 어질고, 덕이 고결하고 행의가 돈독하고 빈궁을 구휼하여 그 덕이 한 고을에 미쳤네. 이에 아름다운 돌을 새겨 비(碑)를 세움으로써 유광(幽光)을 드러내리.”
    남양(南陽) 홍두현 찬(洪斗炫撰) 수양(首陽) 오병근 서(吳炳根書)
  • 【비표】 成均進士小石李公善德宜人何東鄭氏孝烈碑(성균진사소석이공선덕의인하동정씨효열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人之於世 生而人仰之 沒而人慕之者 必其事行 一出於至誠純粹底故也 是豈可以易致哉 余讀近故 小石李公 曁其配鄭氏狀 亦信知其然也 謹按 公諱浩季字胤敎 小石其號也 李氏系出公州 文成公松隱先生 諱明誠後 繕工監監役 諱禹欽子 監役公世稱 萬人積德 李某也 公幼而儀容端重 擧止異凡 性至孝 先意承順 年未成童 見宗人之貧窮 在遠者 輒悶之 進言于監役公 備田宅 而使居一里 年十九旱災太甚 遠近作人 難辨賭租 公又進言 乃減其半 農土賑給作人而使自作 鄕隣咸頌其德 紀之樹碑 公曰家産 瞻饒則賑恤窮乏 人之所當爲 安敢反受過分之稱乎 使人拔而埋之 年二十一 擧成均進士 若將有爲而未得展其所蘊 翌年辛巳 遽棄世 嗚呼惜哉 宜人鄭氏 河東人 文獻公一蠹先生后 諱耆鉉女 自髫齡 婉娩仁孝 閨範夙著 及歸于李公 未幾年 夫君遘疾 久在床褥 宜人祈天禱地 庸藥聞 無不爲誠 力調護 靡不以極 未得奏效 竟至危谹則裂指注血 亦無奈何 自謂寧欲代逝而延壽 投身於高軒絶砌之下者再 而未遂其志 竟遭晝哭 宜人時年二十二 哀痛如不欲生 旋念老舅在堂 血嗣幼冲 奉老扶幼重於殉從 忍痛視事 奉舅姑尤孝 育遺孤甚勤 待妯娌 御奴僕 恩義幷至 家門雍如也 年二十八之丙戌以疾卒 盖以憂勞憔瘁 不遑顧身而然歟 嗚呼 眞可謂是夫是妻也 夫世之人 有一善行 滔滔皆是 而若李公 與鄭氏 以妙齡 能知大本 施濟人之善而 惟恐人聞 忘其身而行人所難行 是其强爲之也哉 皆出於天賦之本心 至性純粹而然也 昔盛世 有卓異之行者則自國朝 官而榮之 旌而褒之 樹風敎而勸人爲善也 而今則母之 歡如之何 雖然 公議 尙在鄕中 士林 爲記而褒揚之 然文載簡編而已則曷若刻諸風碑 令行路人 皆得觀感而慕效哉 將竪碑於故宅之洞口 與祖父 同知中樞府事 諱載準孝行碑 父監役公功德碑及其弟注書公諱浩溶 倡義碑 齊立焉 偉歟盛哉 公之肖孫現基氏 以儒狀 囑余以文 顧人文 俱下 辭之固而未獲 遂書如右
    檀君紀元四千三百十九年 丙寅冬至節 礪山 宋河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사람이 살아서는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추모를 받는 것은 반드시 그 행실이 뛰어나게 지성스럽고 순수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가 소석(小石) 이공(李公) 및 그 부인 정씨(鄭氏)의 행장을 읽어보니 역시 그렇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호계(浩季)이고 자(字)는 윤교(胤敎)이고 소석(小石)은 그 호다. 공주이씨는 문성공(文成公)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명성(明誠)의 후예로 공은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휘(諱) 우흠(禹欽)의 자(子)로서 감역공(監役公)을 세칭(世稱) ‘만인에게 덕을 쌓은 이아무개(萬人積德李某)’라 부른다. 공은 어려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님께서 묻기 전에 먼저 그 뜻을 받들어 승순(承順)하였다. 성동(成童 15세)이 되기 전에 먼 지방에 사는 빈궁한 종인(宗人)을 보고는 그를 불쌍하게 여겨 감역공(監役公)에게 말씀드려 전택(田宅)을 마련해 주고 같은 마을에서 살게 하였다. 19세가 되던 해에 한재(旱災)가 매우 심해 원근(遠近)의 소작인들이 도조(賭租)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공이 또 말씀드려 그 반을 줄여 주고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주어 자작(自作)하게 하니, 고을과 이웃이 함께 그 덕을 칭송하여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공이 말하기를, “가산(家産)이 넉넉하면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어찌 감히 과분한 칭송을 받겠는가.”라고 하고는 사람을 시켜 비를 뽑아 땅에 묻게 했다. 21세에 성균관 진사로 천거되어 큰일을 할 듯했으나 오랫동안 쌓은 학식을 펴기도 전에 그 다음해인 신사년에 갑자기 기세(棄世)하였다. 오호라, 애석하도다. 의인 정씨는 하동(河東) 사람이니 문헌공(文獻公) 일두 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 휘(諱) 기현(耆鉉)의 따님이다. 어릴 때부터 예쁘고 어질고 효성스러워 규방(閨房)의 법도를 일찍 드러내었다. 이공(李公)에게 시집갔다가 몇 년 되지 않아 부군(夫君)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의인은 하늘과 땅에 기도하고 약을 쓰는 데 정성을 다하며 힘써 구호(救護)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위급한 지경에 이르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으나 이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스스로 차라리 남편을 대신해 죽어서 남편의 수명을 연장하게 하고 싶다고 말하고 높은 처마에서 섬돌로 몸을 던진 것이 두 번이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남편의 상을 당했는데 의인의 나이 22세였다. 애통해 하며 죽고자 하였으나 곧바로 늙은 시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혈손(血孫)이 어리며 늙은이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순사(殉死)하여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슬픔을 참고 집안일을 보았다. 시부모 봉양을 더욱 효성스럽게 하고 남은 자식을 기르는 데 매우 애를 썼으며, 동서를 대하고 노비를 거느리는 데 은혜와 의리가 함께 지극하여 가문이 화평하였다. 나이 28세가 되던 병술년에 병으로 졸(卒)하니 아마도 근심과 피로로 초췌했으나 몸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 오호라, 참으로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 할 만하다. 무릇 세상 사람들이 한 가지 잘한 일과 한 가지 못한 일이 있으면 모두가 명예를 구함이 세상의 흐름이로되 이공이나 정씨는 어릴 때부터 능히 큰 근본을 알고 선한 일을 베품에 오직 남이 들을 까 두려워하고 몸을 돌보지 않고 실천함은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니 이 어찌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리오. 대개 타고난 본심이 지성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옛날 세상이 좋았을 때는 뛰어난 일을 한 자가 있으면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이를 표창하여 풍속을 교화하여 사람에게 선을 권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함을 탓한들 어쩌리오. 그러나 지방 사림(士林)들의 공론이 있고 유림(儒林)들이 이를 포양(褒揚)하나 글이 책에만 적혀 있을 따름인즉 어찌 비(碑)에 자세히 새겨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보고 느끼게 하여 이를 사모하게 함만 같으리오. 이에 장차 고인의 옛집 동구 밖에 조부이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諱) 재준(載準)의 효행비와 선고(先考)이신 감역공의 공덕비 및 아우인 주서공의 창의비와 같이 세우게 되니 훌륭하고 성(盛)하도다. 공의 손자인 현기(現基)씨가 유생들의 글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돌아보건대 사람됨이나 글재주가 모두 모자라 이를 굳이 사양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이와 같이 적도다.
    단기 4319(1986)년 동지절
    여산(礪山) 송하영(宋河英撰)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
  • 【비표】 注書砥山李公倡義碑(주서지산이공창의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忠臣義士 爲國赤誠 要在其心志 眞僞如何耳 不可以成敗死生差殊觀也 方我韓社之將屋也 數百義士 蜂起於全國 坊坊曲曲 或擧義於國內 竄身於海外 以銃以彈 甚至以空拳赤手 期欲鏖敵乃已 自有人類史以來 不多見其例 此豈非吾民族 一大誇張耶 而其中能立 旋乾轉坤之功 櫛風沐雨之績 赫赫然與日星爭光 山岳增重者 固無可論 獨抱孤高之志 無蹟可見 無功可稱 將與草木同歸 澌盡磨滅而已者 其志誠可悲也 砥山李公 抑其非其一人也歟 公諱湖溶 字乃習 砥山自號也 公州之李 顯於羅麗兩朝 入李朝 簪纓雖遜而以文學行誼 爲世推重者譜不絶書 如諱光弼 諱公迪 諱元奭 是以 曾祖 諱周瑀贈戶參 祖諱載準 中司馬同樞 考諱禹欽繕工監役 公以高宗甲子六月七日 生于鳳浦里第 自幼嶷偉其在諸兒中殆若 群鶴之一鶴焉 年未弱冠 文藻蔚然 聲噪場屋 高宗戊子秋 擢文科 爲承政院注書 若將活步於天衢 旣而 時事大非耳 所謂開化之風 席捲天地 而至上自朝廷下及閭巷莫不靡然 於是 公不復留意䆠達 退而構千仞亭於鳳凰臺上 以寓飢不啄粟之意 淵齋宋文忠公 作記美之 間與淵齋朴芸牕崔勉菴諸賢 優游乎名勝之間 以洩幽憂 丙午 勉菴先生擧義淳昌也 先生手書前注書李某爲湖南倡義大將者 而任公以一方之責 公亦奮勇自擔 誓死報國 會先生被俘浮海 則事皆蒼荒 有不可抖擻者 因循躊躇之際 突然倭騎一隊來襲公邸宅 搜索諸秘藏文件 且致鞫于全州之獄 盖以有偵探者密爲告發耳 萬死一生之餘 得保首領以釋放焉 自是之後 神精脫落 軀殼徒存 然每痛飮斗酒 自作正氣長恨之歌 以放聲浪吟 聞者爲起英雄千載不遇之感 噫 若使公得肆其平日敵愾之氣 而與讐賊大決勝負於一場 則誓不與之共戴一天審矣 昔乎 未也 公之大節如是 在家細瑣宜可略之 公沒六十七年丙寅 湖南章甫某某等 追慕公益深 將竪其碑於故里之傍 命余以文之 顧余淺薄 安敢哉 屢辭不獲 略述梗槪如右 庶或慰公之遺恨於九原否也
    檀君紀元 四千三百十九年 丙寅 大雪之節 羅州 羅鉀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무릇 충신과 의사가 나라를 위하는 붉은 적성(赤誠)의 요체는 그 심지(心志)의 진위(眞僞)가 어찌한가에 있을 따름이지 성패(成敗)나 사생(死生)에 따라 달리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 대한 사직이 장차 기울어짐에 수백 의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봉기(蜂起)하여 혹은 국내에서 거의(擧義)하고 혹은 해외로 몸을 숨겨 총탄으로 심지어 적수공권으로 적을 무찌르고자 하였다. 인류사 이래 그런 사례는 많지 않았으니 이 어찌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그중에는 능히 건곤(乾坤)을 뒤바꿀 만큼 큰 공을 세워 밝기로는 일성(日星)과 다투고 무게로는 산악과 견줄만한 공로는 달리 논할 것이 없지만, 홀로 고고한 뜻을 지녔으나 볼만한 업적이 없고 이를만한 공적이 없어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고 마멸되어 없어진다면 그 지성(志誠)이 슬픈 일인데 지산(砥山) 이공(李公)이 그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공의 휘(諱)는 호용(浩溶)이고 자는 내습(乃習)이고 지산은 자호(自號)이다. 공주이씨는 신라, 고려 양조(兩朝)에서 드러나고 본조(本朝)에 들어서는 벼슬과 문학, 행의(行誼)로 세상에 드러난 자가 족보에서처럼 끊이지 않았다. 휘(諱) 광필(光弼) 휘(諱) 공적(公迪), 휘(諱) 원석(元奭)에 이어 바로 증조(曾祖)이신 휘(諱) 주우(周瑀)는 증직으로 호참(戶參), 조(祖)는 휘(諱) 재준(載準)으로 중사마동추(中司馬同樞)였고, 부(父) 휘(諱) 우흠(禹欽)은 선공감역(繕工監役)이었다. 공은 고종 갑자(1864)년 6월 7일 좌포리 봉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다른 아이에 비하여 군계일학이었다. 약관에 이르기 전부터 문장이 아름답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고종 무자년(1888 고종25) 가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어 하늘을 활보할 듯하였으나 이윽고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되었으니 이른바 개화(開化) 바람이라는 것이 천지를 석권(席捲)하여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휩쓸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공은 다시는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물러나 봉황대(鳳凰臺) 옆에 천인정(千仞亭)을 지었는데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 먹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인데, 연재(淵齋) 송문충공(宋文忠公, 宋秉璿)이 기문(記文)을 지어 아름답게 여겼다. 간간이 송 연재, 박운창(朴芸牕, 朴性陽), 최면암(崔勉菴, 崔益鉉) 등 여러 현자와 함께 명승지(名勝地)를 찾아 한가롭게 지내며 가슴속 깊은 근심을 드러내었다. 병오년(1906 고종43) 면암 선생이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이 손수 전 주서(前注書) 이(李) 아무개를 호남 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으로 삼는다고 쓰고 공에게 한 지방의 책임을 맡겼다. 공 또한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했다. 마침 면암 선생이 포로가 되어 바다를 떠돌게 되니 일이 모두 급작스레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진작(振作)할 수 없게 되었다.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을 때 갑자기 왜(倭)의 기병(騎兵) 1개 부대가 공의 저택을 습격하여 비장(秘藏)하고 있던 여러 문건을 수색하고 또 전주의 감옥에서 공을 국문(鞠問)했는데 이는 정탐하는 자가 밀고했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그 우두머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로부터 정신이 빠져나가고 껍데기인 몸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말술을 통음(痛飮)할 때마다 스스로 지은 정기 장한(正氣長恨)의 노래를 목을 놓아 눈을 흘리며 읊어서 듣는 사람들이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에 대한 느낌을 가졌다. 아, 만약 공으로 하여금 평소에 적에게 분노하던 기개를 마음껏 발휘하여 원수의 도적과 한바탕 크게 승부를 겨루게 하였다면 맹세코 그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애석하다, 그러지 못했구나. 공의 대절(大節)은 이와 같으나 집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생략하는 것이 가하다. 공(公)의 별세 후 67년이 지난 병인(丙寅, 1986)년에 호남의 선비 모모 등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 깊어져 향리(鄕吏) 옆에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구하매 내 글이 천박하여 어찌 감당하겠는가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여 대략 우와 같이 약술하니 혹 구원(九原, 저승)에서라도 공의 유한(遺恨)에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단기 4319(1986)년 대설절에 나주(羅州) 나갑주(羅鉀柱)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
  •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4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있다.

    【비문】 在昔先聖先王制五敎 而婦人之行曰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此三者 天之經地之義也 故若能行之者 謂之烈而烈者 人人難行之事 故有一於此則 鄕有闡揚之文 國有旌褒之典 世降淑季 三綱九法 掃地無餘 能守先王之遺法 而特行彛性者 鮮有聞焉 以若少婦 不失秉彛之天性 遵行先王之遺法 爲世之謨楷 起敬稱烈者 吾於金氏夫人見之矣 夫人籍延安 文靖公諱自知後鳳基之女也 在家以孝順聞 及笄 歸于文孝公諱孫順后吉永家 事偏姑以禮 承君子以敬 壼範甚嚴 夫偶以痰症委席 沈綿幾朔 夫人晝宵扶護 迎醫合藥 竟得快差 越翌年甲申 夫又以赤痢 變之黃疸 委席三霜 百方救治 神扁殫技 空靑罔效 夫人築壇後園 夜禱北斗 願以身代 症至孔急 斷脂注口 漸而復蘇 其間三四星霜 不拘嚴寒雪夜 回救百方 手足浮凍 爪皮俱脫 少無痛苦之狀 豈不壯哉 其夫得生者 金氏之誠烈 可以感於神明之致也 玆以紀蹟短碑而壽傳 石雖可泐 名不可泯 其至行懿德 永久遺芳 宋斯文幸濂氏 遠來囑余 固辭不獲 謹書此而俾歸刻焉. 屠維大淵獻 小春哉生魄 全義 李丙殷 撰.
    【풀이】 옛날 선성(先聖)과 선왕(先王)이 오교(五敎: 오륜<五倫>의 가르침)를 펼치면서 부인(婦人)의 행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친정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하였다. 이 세 가지는 하늘의 경위(經緯)이고 땅의 의리(義理)이다. 그러기 때문에 능히 행하는 자를 열(烈)이라 이르나 열이 저마다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여기에 하나라도 행한 바가 있으면 고을에서는 천양(闡揚)하는 글이 있고 나라에서는 정포(旌褒)하는 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말세(末世)로 내려오면서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홍범<洪範>의 구주<九疇>와 같음)이 땅을 쓸다시피 없어져 능히 선왕의 유법(遺法)을 지키고 이성(彝性: 윤리<倫理>에 합당한 성품)을 남달리 행한 자는 들어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앳된 부녀자로서 병이(秉彝)의 천성을 잃지 않고 선왕의 유법을 준행(遵行)하여 세상의 모범이 됨으로써 남의 존경심을 일으키고 서슴없이 열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을 김씨부인(金氏夫人)에게서 보게 되었다. 부인의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이니 문정공(文靖公) 휘 자지(自知)의 후예인 봉기(鳳基)의 따님이다. 친가(親家)에 있어서는 효순(孝順)으로 소문이 났고 혼기(婚期)가 되어서는 문효공(文孝公) 휘 손순(孫順)의 후예인 길영(吉永)의 집으로 시집가서 홀시어머니를 예(禮)로써 섬기고 부군(夫君)을 경(敬)으로써 받들어 곤범(壼範: 부녀자의 법도)이 매우 엄하였다. 부군이 우연히 담증(痰症)으로 자리에 누워 몇 달을 위중하게 지내니 부인이 밤낮으로 간호하여 의원을 청해다가 보이고 약을 구해 써서 마침내 쾌히 나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갑신년(甲申年)에 부군이 또 적리(赤痢)를 얻어 점차 황달(黃疸)로 변하여 3년간을 자리에 누웠는데 백방으로 구료(求療)하였으나 편작(扁鵲: 옛날의 신의<神醫>)도 묘방(妙方)이 없고 공청(空靑: 광물질<鑛物質>인 약재)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부인이 후원에다 단(壇)을 쌓고 밤이면 북두(北斗)에 빌어 자기가 대신 죽기를 바랐으며 병증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병자의 입에 피를 드리워 점차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그 동안 3~4년간을 엄한 추위와 눈 내리는 밤을 구애하지 않고 백방으로 병간호를 하여 손과 발은 얼어 부르트고 손톱과 피부는 모두 빠지고 벗겨졌으나 조금도 아픈 줄을 몰랐으니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그 부군이 삶을 얻은 것은 김씨의 성열(誠烈)이 신명(神明)을 감동케 한 소치이다. 이에 단비(短碑)에 사적을 적어 구원토록 전하노니 돌은 비록 부스러져도 이름은 묻히지 않고 그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송사문(宋斯文) 행렴씨(幸濂氏)가 멀리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기에 굳이 사피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이 글을 써서 돌아가 각(刻)하게 하였다. 기해(己亥, 1959) (음) 10월 16일 전의(全義) 이병은(李丙殷) 찬(撰)
  • 【비표】 縣監李侯益應永世不忘碑(현감이후익응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79년 8월
    【형태】 95cm, 두께 50cm, 두께 16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 【비표】 孝子密陽孫公諱錫祐紀蹟碑(효자밀양손공휘석우기적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40cm, 두께 1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余友孫判永甫 世居鎭安之佐浦 與余有舊 日訪余于完城寓舍 斂膝而言曰 吾從叔諱錫祐 三歲失怙 事母誠孝 先意承順 無違其志採山釣水 供之必甘 母氏疾病 裂脂注血 氣絶復甦者數日 及喪號擗不食 頓絶方蘇 葬則廬于墓下 泥首苫塊 而朝夕上塚跪拜 悲哀三年如一日 其臂膝處 宛然陷下 而草不生雪不封 人行過者必環視咨嗟 至終喪前夕 設奠靈幃 而燭倒火延 勢將盡爇 公呼天痛哭 反風滅火 鄕人感歎曰 誠孝格天 有此神異 遂相與狀聞于朝 而時則光武年間 以政變 未蒙褒旌之典 而閭里婦孺 說其事 至今慨惜焉 嗚呼 判永雖不敏 忍令吾從叔出天孝行之泯沒 而不之顧耶 將立石紀蹟 以圖久傳 子其爲文以惠我 余感孫公之仁孝格天 而悲其身後寂寞 且難孤判永甫爲先裕後之誠 撰次如右 孫氏系出密陽 文孝公諱順之後云. 壬寅十月 日 平澤 林熙昌 撰 竝書. 有司 秉烈 秉昌 秉先 秉鉉 秉鉉 秉寔 秉鮮 判燁 明燁 九燁 琪燁 正燁 光燁.
    【풀이】 나의 친구 손판영보(孫判永甫)는 대대로 진안(鎭安)의 좌포(佐浦)에 살아, 나와는 구의(舊誼)가 있다. 하루는 전주(全州)의 우사(寓舍: 부쳐 사는 집)로 나를 찾아와 자세를 바로하고 이르기를 “우리 종숙(從叔) 휘 석우(錫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 그의 뜻을 앞서 짐작하고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반드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깨서 피를 드리워 숨이 끊겼다가 다시 살아나기 며칠을 하였는데 정작 상(喪)을 당하자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고 먹지를 않아 숨이 끊겼다가 다시 살아났었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묘소 아래에 여막(廬幕)을 치고 머리를 땅에 묻고 거적자리와 흙 베개로 지냈으며 아침저녁으로는 묘소에 올라 꿇어 앉아 절하고 슬퍼하기를 3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는데 팔과 무릎이 닿은 곳은 완연히 오묵하게 파여져 풀도 나지 않고 눈(雪)도 쌓이지 않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반드시 둘러보고 자탄(咨歎)하였습니다. 또 종상(終喪)의 전날 밤 영연(靈筵)에 제(祭)를 올렸는데 촛불이 넘어져 불이 붙어 곧 전체를 태울 뻔했으나 공이 하늘을 부르면서 호곡(號哭)을 하니 바람이 반대로 불어 불이 저절로 꺼지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기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런 신이(神異)로운 일이 있었다 하고 서로 들고 일어나 조정에 글을 올렸는데 그때는 광무연간(光武年間: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이라 정치가 바뀌어 포정(褒旌)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나 마을의 부녀자와 어린이까지도 그 일을 말하고 지금까지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미욱하지만 어찌 참아 우리 종숙의 출천(出天)한 효성이 묻혀버려도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돌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여 영구히 전해지도록 하려하니 그대가 글을 지어 나를 도와주시오” 하였다. 나는 손공(孫公)의 출천한 인효(仁孝)에 감동하고 그의 신후(身後)가 적막한 것을 슬피 여겼으며 또 판영보의 조선(祖先)을 위하고 후손을 돌보는 정성을 저버리기 어려워 위와 같이 서차(序次)하는 바이다. 손씨는 밀양(密陽)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의 후예라 한다. 임인(壬寅, 1962) 10월 일 평택(平澤) 임희창(林熙昌) 짓고 쓰다.(이하 원문참조)
  •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높이 106cm, 너비 37cm, 두께 13cm.
    【개요】 손학영(孫學永)의 자는 경찬(京贊). 본관은 밀양으로써 문효공(文孝公) 순(順)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세상을 위해 적선하는 것이었으니 세상에 드문 바로 이를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비의 양 옆으로‘天性慈惠 積善好施 鄕隣頌德 萬口成碑’라 새겨 있는데 풀이하면 ‘천성이 자혜(慈惠)롭고 적선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지라 향린에서 칭송하고 많은 사람이 비를 세우자 했다.’라는 뜻이다.

    【시기】 1962년
    【형태】 높이 106cm, 너비 37cm, 두께 13cm.
    【개요】 손학영(孫學永)의 자는 경찬(京贊). 본관은 밀양으로써 문효공(文孝公) 순(順)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세상을 위해 적선하는 것이었으니 세상에 드문 바로 이를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비의 양 옆으로‘天性慈惠 積善好施 鄕隣頌德 萬口成碑’라 새겨 있는데 풀이하면 ‘천성이 자혜(慈惠)롭고 적선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지라 향린에서 칭송하고 많은 사람이 비를 세우자 했다.’라는 뜻이다.
  • 【비표】 縣監李侯重翼永世不忘碑(현감이후중익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89년 1월
    【형태】 120cm, 두께 37cm, 두께 10cm.
    【개요】 이중익(李重翼)은 진안현감으로 1888년 4월에 부임하여 1889년 6월 화순현감으로 전임하였다.
  • 【비표】 學生天安全公泰翼妻烈婦慶州金氏紀蹟碑(학생천안전공태익처열부경주김씨기적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172전. 원구신마을 남쪽 농로 어귀 우측.
    【시기】 196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있다.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昔先王之制 夫人有三從之道 今能行此從之道者 惟天安全公訓練大將諱東屹之後 盛鎬子泰翼之妻 慶州金氏 樹隱諱冲漢後 明國女 是也 金氏自齠齡 孝從父母 嫁歸孝尊嫜敬夫君 坊里極稱其孝 夫君嬰疾委席數年 兼以眼昏百方醫治 産業整竭 生計無路 乃負兒行傭 甘旨之供 未嘗乏絶 忽於夫君疾革 將至殞命 蒼黃罔措 裂指注血 終不得回天命焉 與其從夫殉義 曷若善育幼孤 永保夫家 終身不改 固守一與齊之義也 不强然含痛 未遂常義 此卽不喪 生而行益 顯不隨死而節益彰者也 故鄕里揚其德而賞狀 列郡嘉其義而褒獎 可見公議之不泯也 其子宗根龍根元根 將竪石欲彰母德 袖列郡儒狀而來請 余以記文 於戱仁聲所聞之 令人有感 莫若孝烈也 故特書烈婦紀蹟碑 字使歸而刻之焉
    乙酉光復後辛丑 正月 日 南原 梁昌權序
    【풀이】 옛날 선왕의 법도에는 부인들이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 삼종지도를 능히 행하는 사람은 오직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훈련대장(訓練大將) 동흘(東屹)의 후손인 천안(天安) 전성호(全盛鎬)의 아들 태익(泰翼)의 처이다. 김씨는 수은(樹隱) 충한(態漢)의 후손 명국(明國)의 따님인데, 어려서부터 효로 부모를 섬겼고,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존봉(尊奉)하고 지아비를 공경하니 고을에서 그 효를 매우 칭찬하였다. 지아비가 병에 걸려 수년 동안 자리를 보전하여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방으로 치료하였고, 가산이 바닥나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이를 등에 업고 품팔이를 하며 감지(甘旨)로 봉양하되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부군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지자 열지(裂指)하여 피를 넣어 주었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천명을 다하였다. 또한 부군을 따라 죽기보다 어린 자식을 잘 키워 집안을 보전하게 하였으며, 종신토록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강하지 못하여 애통함을 참고 따라 죽지 못한 것이나, 이는 죽지 않고 살아서 행실이 더욱 두드러지며 절개가 더욱 빛난 것이다. 고로 고을에 덕이 떨치고 열군(列郡)에서 의를 가상히 여겨 상과 추천장을 내렸으며, 공의(公議)를 거쳐 불민(不泯)하도록 포장(褒狀)하였다. 아들 종근(宗根)·용근(龍根)·원근(元根)이 장차 비석을 세워 모친의 덕을 빛내려 하여, 열군의 유장(儒狀)을 가지고 찾아와 나에게 글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이와 같은 효열을 보고 감동을 받을 것이니, 오호라! 어진 행의가 들리는 바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함이 효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이에 특별히 ‘烈婦紀蹟碑’라고 써서 돌아가 새기게 하노라. 광복 후 신축(光復後辛丑)년 정월 일 남원(南原) 양창권(梁昌權) 서(序)
  • 【비표】 烈女淑夫人金海金氏之碑(열녀숙부인김해김씨지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28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있다. 높이 116cm, 너비 41cm, 두께 1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烈女淑夫人金海金氏 濯纓先生後裔炳眞女 全州人 李昌華之妻 溫寧君諱裎 壬亂功臣 司果諱天斗 漢城左尹諱亨春 通德郞諱之邦 承旨諱致煥 夫之父祖以上 夫亦至通政大夫 金氏自幼有賢淑之譽及于歸事舅姑以孝 相君子以禮 夫偶嬰疾 竭力調治 時値冬節 不避風雪夜登白馬山 禱天祈神願以身代之際 虎吼燐飜少不畏忌數月餘一日 至甚谹 割剮屑口暫甦 後五日金氏身遭奇疾 謂其夫曰 善保稚子禎弼 以成家道言訖而歿 時年二十七也 噫 凜凜其烈以身代夫死 爲千古女士中模楷 所以士林感薦 郡道褒題事載郡道誌及網獻文獻錄 揆其實蹟允合綽楔闡揚而時異制變尙在湮沒無聞矣 秉彛具性者先此表彰而千里繭足 求余記實之文 其言哽咽有足以憾人者 余何能不文辭 略綴其言以爲記
    崇祿大夫禮曹判書 奎章閣提士 金宗漢 序
    正憲大夫 前 議政府兼 奎章閣判書 朴箕陽 書
    【풀이】 열녀 숙부인(조선 헌종 12년[1846]〜고종 11년[1874])은 김해 김씨 탁영 선생의 후손인 병진(炳眞)의 따님으로 전주 후인 이창화(李昌華, 헌종 4년, 1838년〜1912년)의 처이다. 온녕군 휘 정(遼)과 임진란(壬辰亂) 공신(功臣)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휘 천두(天斗), 그리고 한성좌윤을 지낸 휘 형춘(亨春), 통덕랑을 지낸 휘 지방(之邦), 승지를 지낸 휘 치환(致煥)이 지아비의 부조(父祖) 이상이고, 지아비 또한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열녀 김씨는 어려서부터 어질고 행실이 바르기로 이름이 났으며, 시집을 와서도 시부모님 섬기기를 효로써 다하고, 남편 받들기를 예로써 다 하였다. 어느 날 지아비가 우연히 질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보살피던 중, 추운 겨울을 맞아 눈바람 몰아치는 한밤중도 무릅쓰고 백마산에 올라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지아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며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호랑이가 으르렁대고 도깨비불이 번쩍거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수개월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 하였다. 그래도 지아비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자신의 살을 베어내어 가루를 내어 입맛에 맞게 지아비에게 먹이니 소생하였다. 그 후 5일 뒤 열녀 김씨는 할고(割股)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아주 기이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지아비를 불러 이르기를 어린 아들 정필(禎弼)을 잘 보살펴서 가풍을 잘 이루시라고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운명하니, 그 때의 나이가 27세였다. 아 슬프도다! 늠름한 열녀의 기상이여! 자신이 지아비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쳐 죽으니 천고 여인의 역사에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인 바, 이런 연유로 유림 학자들이 감동하여 군과 도에 추천하여 포상하고 기록하니, 이 일이 군지와 도지와 강헌문헌록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을 헤아려 보니 진실로 열녀문을 세워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나게 함이 합당하나, 세월이 바뀌고 제도가 변하여 위의 사실들이 오히려 묻히고 소문이 사라지니, 천성을 곧게 지키고 품성을 갖춘 뜻 있는 후손들이 우선적으로 조상의 이러한 일을 드러내 밝히고자 천리길을 발이 부르트게 와서 나에게 이 사실을 글로 기록해 줄 것을 바라니, 그 말이 목을 메이게 하고 족히 사람을 감탄케 하고 슬프게 하는 바, 내 어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 사실을 간략히 요약하고 다듬어서 이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예조판서규장각제사 김종한이 서문을 짓고, 정헌대부전의정부겸규장각판서 박기양이 글씨를 쓰다. 공자 탄생 2479(1928)년 무진(戊辰) 3월 일
  • 【비표】 淑夫人金海金氏孝烈紀蹟碑(숙부인김해김씨효열기적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82년 4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0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孝烈은 婦德之源이라 言卽雖易나 行卽實難이라 然이나 惟我先大夫人께서는 本是 鎭安面 梧川里 金海金氏 文愍公 濯纓先生 諱 馹孫의 後裔이신 孝益之女也로 一八九六年에 太宗大王第七男 顯錄大夫 溫寧君 諱 裎의 後裔 十四代孫인 純陵參奉 諱 明弼과 結婚 入門後에 舅姑에게 孝養하고 夫君에게 恭待하며 治産規模는 勤儉節約으로 至於成家하니 隣近宗戚간에 稱頌이 藉藉터라 年甫三十에 夫忽 沈病跨朔에 百方求療나 終無效果로 斷指授血하여 漸次 甦生하시어 唱隨偕樂터니 不過幾年에 又復發病危篤하여 亦是 斷指注血이나 僅保數日에 未得回生하고 竟至殞命하시니 命亦天也라 奈何오 仰天哀痛에 卽欲從夫去나 上有媤母하고 下有穉子等에 未能遂志하고 喪葬을 依禮旣畢後에 固心守節하여 上奉下率로 苦生多年에 媤母께서 不意得病하여 數年苦痛에 大小便을 受出하여 侍湯供養을 誠心竭力하여 漸次 快甦하시어 年踰 八十餘에 卒하시니 如此 孝烈을 孰不感歎哉아 下率은 三男五女중 長男 羲暎은 出系伯父하고 其餘子女는 愛育成長하여 嫁娶旣畢하고 庚戌 十二月十六日 卒하시니 是年 九十四라 墓在 長城洞酒幕峙 癸坐原이라 然이나 生前所行實蹟이 苟非孝烈之誠意면 豈能如是具備乎아 是故로 本郡文廟表彰과 成均館 讚揚文이 下達하여 不肖子孫等이 永久不忘키 爲하여 長城洞 媤母 旌門內에 立碑 記念하나이다.
    一九八二年 壬戌 四月 日
    平岡後人 蔡東式 謹書
    【풀이】 무릇 효열은 부덕(婦德)의 근원이지만, 말로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본시 진안면 오천리 김해 김씨 문민공 탁영 선생 휘 일손(馹孫)의 후예이신 효익(孝益)의 따님으로 1896년 태종대왕의 제7남이신 현록대부 온녕군 휘 정(遼)의 14대손인 순릉참봉 휘 명필(明弼)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님께 효도로써 봉양하고, 남편을 공대하며, 집안의 모든 살림을 근검 절약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문을 일으키니, 인근 일가 친척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나이 30세인 지아비가 갑자기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맬 때, 백방으로 보살피고 간호하였으나, 효과가 전혀 없어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이니, 점차 소생하시어 부부가 함께 즐겁게 지내셨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아 또 다시 발병하여 위독하게 되었다. 역시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였으나 겨우 며칠을 못 버티고 결국 운명하니, 사람의 수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어찌 하리요. 하늘을 우러러 슬퍼하며, 남편의 뒤를 따라 죽고 싶었으나, 위로는 시어머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들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로서 장례를 마친 뒤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절개를 지키며 웃어른을 봉양하고 아랫사람을 지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여러 해를 지나 또 시어머니께서 뜻밖에 병이 들어 수년간 고통을 하시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손수 약을 달여 공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니, 점차 소생하여 80세가 넘도록 살다 졸(卒)하셨다. 이러한 효성과 열녀의 정신을 그 누가 감탄하지 않으리오. 자녀는 3남 5녀인 바 장남 희영은 백부에게 양자로 가고, 그 외의 자녀는 잘 길러 성장하여 모두 결혼을 시킨 후, 1970년 12월 16일 졸(卒)하시니 그 때 나이가 94세였다. 묘소는 장성동 주막재 언덕에 있는 바, 생전의 소행실적이 진실한 효심과 열녀의 성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와 같이 다 갖출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본군 문묘의 표창과 성균관 찬양문을 보내와 불초 자손들이 영구히 잊지 않기 위하여 장성동 시어머니 정문 안에 비를 세워 기념하는 바이다. 1982(壬戌)년 4월 일 평강후인 채동식 삼가 글씨를 쓰다.
  •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83년 5월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5cm, 너비 56cm, 두께 3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孟子曰事孰大焉고 事親爲大라하시니 人能盡其道於事之大者則外他百千萬務는 皆仁餘裔而世級日下에 甚難其人焉이러니 幸於月浪에 以孝延譽於淸流者는 卽靑田處士李公諱羲祚是矣니 豈非五夜之孤燭과 地雷之一聲也耶아 李氏籍全州니 奕世大著而溫寧君諱程은 其十五代祖也라 公이 纔學語問字로 極儇慧하고 讀書之暇에 甘旨斑衣로 供歡雙親하니 人以董老深誠이 備於一身으로 稱之라 其大人公이 以七旬隆老로 司視失明하고 荐遭風患에 奄奄床席하야 起居須人이라 藥餌之奉과 尿屎之滌과 祈禱之誠이 愈往愈勤하고 或有差强이면 負步庭園하여 玩物隨景으로 慰悅心志가 以至十五年而及其危篤에 指血延三日之壽하고 竟歸觀化에 毁瘠骨立而口不近葷辛之物하고 墓無闕展省之日이라 恒切風樹之痛하여 後喪亦如之라 上自成均으로 以及各郡校宮이 薦狀이 成軸이라 其子日載가 亦以孝繼孝하야 積屢經營에 命其弟得載永載眞相銘相與典學崔昶鉉典校全泰成泰各項書籍及宋升煥全永哲安道遠三斯文聯函하고 來請銘詞曰先君行義는 備在文字而不肖誠薄識淺하여 奉置篋笥에 深恐蠹蟫之或侵하여 雖一片石이나 表以圖不朽하야 承儒林大義來請하니 願惠琬琰之文하야 伸不明不仁之誅則受賜大矣로다 嗚呼라 鼎鐺이 有耳에 余亦聞公之懿蹟이 夙矣라 居在涯角에 常恨無一面之雅而遽作存歿之感者久矣러니 今於貞珉之役에 豈以昏耗하야 筆硯生塵으로 牢拒하여 以孤諸賢之意孝子之誠也리요 遂爲銘曰 董廚萊衣其孝旣極十五年病贍護愈篤王氏氷魚公以指血其物雖殊其誠直一中外薦狀積成卷軸一片貞珉昏衢孤燭
    檀紀四千三百十六年癸亥五月念三日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무엇을 섬김이 큰 일인고, 부모를 섬김이 큰일이다”라고 하시니, 사람이 능히 그 도리를 다하여 큰일을 행하면 나머지 백천만 가지의 일은 모두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나 날로 세상은 저급해져 그런 사람은 심히 찾기 어려우나, 다행히도 효성을 기리는 아름다운 풍속을 행한 영예스러운 사람이 진안에 있으니, 바로 청전처사(靑田處士) 이공(李公)으로 휘(諱) 희조(羲祚)가 바로 그이다. 어찌 깊은 밤의 등촉 하나와 세상을 깨우치는 뇌성 벽력소리라 아니하랴. 이씨(李氏)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온령군(溫寧君) 휘(諱) 정(程)은 15대조이다. 공이 겨우 말을 배울 때부터 지극히 영리하였고 독서하는 틈에 색동옷을 입고 양친을 즐겁게 하니, 사람들이 동로(董老 / 董召南)같은 깊은 정성을 한 몸에 갖췄다고 하였다. 공의 부친이 칠십을 넘긴 노인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돼, 거듭 풍환을 만나매, 병상을 떠나지 않고 시탕과 음식을 받들며 오줌똥 세탁과 기도의 정성이 갈수록 근실하였다. 혹시 차도가 있으면 업고 뜰을 거닐어 경치를 즐기게 하므로 위로하는 심지가 15년에 이르렀다. 위독함에 이르러 손가락 피로 3일간 수를 연장케 하였고, 결국 별세함에 이르자 뼈만 앙상하게 남고 양념 든 음식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묘에는 성묘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항상 풍수지통(風樹之痛, 부모 잃은 슬픔)하여 후상(後喪)도 역시 이와 같았다. 위로는 성균관에서 각 군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천장이 성축을 이루었다. 아들 일재(日載)가 역시 효를 계승하여 오랜 세월 경영(經營)함에, 아우 득재(得載)·영재·진상(眞相)·명상(銘相)에게 명하고, 더불어 전학(典學) 최창현(崔昶鉉)과 전교(典校) 전태성(全泰成)이 각 서책을 받들고, 송승환(宋升煥)·전영철(全永哲)·안도원(安道遠) 세 선비가 연명으로 편지를 써서 비문을 청하였다. “선군(先君)의 행의(行義)는 이미 문자(文字)로 되어 있으나, 불초들은 성의가 박하고 배움이 짧아 상자에 넣어두면 좀이나 쓸까 몹시 두려워하여 비록 일편석(一片石)에나마 기록하여 불후하도록 유림이 대의로 와서 청하니, 원컨대 좋은 글을 주셔서 불명(不明)하고 불인(不仁)한 허물을 면하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오호(嗚呼)라! 솥에도 귀가 있어 나도 역시 공의 아름다운 행적은 일찍이 들었소. 외지고 먼땅[涯角]에 살아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문득 돌아가셨다하여 아쉬워 한지 오래 되었소. 이제 비석을 세우는 일에 어찌 혼모한 늙은이로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하고 잘라 거절하여 제현의 뜻과 효자의 정성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이에 명하니 “동소남(董召南)이 색동옷으로 효도하듯 그 효성은 극진했네 / 15년간의 병석에 잘 보살피고 독실히 했네 / 왕씨(王氏, 王祥)가 빙어(氷魚)를 구한 것이나 공이 손가락의 피를 먹인 것은 / 방법은 달랐으나 정성은 똑같았네 / 안팎의 천장이 권축으로 쌓여져 / 일편의 비석을 세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 하나가 되네”
    단기 4316(1983)년 계해(癸亥) 5월 3일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