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郡守鄭侯喆謨善政碑(군수정후철모선정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958년
    【형태】 높이 163cm, 너비 48cm, 두께 15cm.
    【개요】 정철모(鄭喆謨)는 1956. 12. 17~1959. 1. 10. 진안군수로 재임하였다.
  • 【비표】 縣監趙秉燮永世不忘碑(현감조병섭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0년
    【형태】 높이 152cm, 너비 56cm, 두께 14cm.
    【개요】 조병섭(趙秉燮)은 진안현감이었다. 1857년 7월에 부임하여 1857년 11월에 수원판관으로 전임하였다.
  • 【위치】 진안읍 마이산로(군하리 356) 진안 이씨 세천 내
    【시기】 188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37cm, 너비 78cm, 두께 1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金氏卽進士重龜之女也 十六婦焉事舅姑 與夫克盡孝 頃十九當庚午 遭夫喪以其夫帶自縊幾絶 舅知急救之曰 汝雖欲死 汝腹中兒何金氏 始悟而止 强延日月 果生男撫之曰 汝若十歲無母能生 吾當從汝父 兒之三歲而夭 又以其帶縊項 家人急解則曰 此帶卽吾夫帶 至今深藏 要以一決也 吾死後以帶納棺仍不食不言七日而死 死之日昏霧漫室房闥如漆夜者一晝夜 四日而欽顔貌如生矣 以孝烈 戊寅春 本官轉報 己卯三月二十六日 遂下禮曹旌之
    崇禎紀元後 歲在辛巳六月 日
    【풀이】 김씨는 진사 중구(重龜)의 딸이다. 16세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효로 극진히 섬겼고, 지아비를 공경하였다. 19세 되던 경오(庚午)년에 지아비의 상을 당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지경이 된 것을, 시아버지가 살려놓고 말하기를 “너는 죽으려 하나, 네 뱃속의 아이가 어찌 김씨이겠느냐” 하니, 비로소 깨닫고 그만두었다. 시간이 흘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키우며 말하기를 “네가 10세가 되면 어미 없이도 능히 살 수 있으니, 나는 응당 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하였는데, 아이가 3세에 요절하자 허리끈으로 목을 매었다. 집안 사람들이 급히 달려와 허리끈을 풀으니, 말하기를 “이 끈은 내 지아비의 것인데, 깊이 감추었다가 지금 끝을 내려 하오. 내가 죽거든 관에 넣어주오.” 하고는 7일 동안 먹지 않고 말하지 않더니 끝내 죽고 말았다. 그 날 짙은 안개가 방에 가득하여 온종일 방안이 칠흑같이 어두웠고, 4일이 지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무인(戊寅)년 봄 본관이 위에 보고하였으며, 기묘(己卯)년 3월 26일 드디어 예조에서 정려가 내렸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세재 신사(歲在辛巳, 1881) 6월 일
  • 【비표】 學生鎭安李公柄基配烈婦竹山安氏紀蹟碑(학생진안이공병기배열부죽산안씨기적비)

    【위치】 진안읍 마이산로(군하리 356) 진안 이씨 세천 내.
    【시기】 1958년
    【형태】 개석(蓋石)과 대석(臺石)이 있다. 높이 143cm, 너비 54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一日에 吾鄕中李丈元有氏가 携其叔母安孺人烈行之籍而來言曰我叔母烈行卓節이 雖爲一鄕所共知나 時不遇而未遑旌褒之典하고 纔有搢紳之表章이나 然이나 世久而泯其實固耳라 爲先紀蹟竪碑하야 以待淸平立綱之日하노니 願得子之一言而圖不朽어늘 予以不德不文으로 固辭不獲己라 夫人은 籍竹山이니 文惠公諱元衡之后原錫之女라 年有及笄에 歸于故鎭安李公柄基하니 公은 是司成雙尖堂諱仁賢之后永洙之子也니 世有儒行이라 夫人이 幼有淑德하야 及嫁에 家道淸貧하여 與公으로 夫耕婦織하야 孝養舅姑하니 遠近이 稱其賢이라 倭政癸亥春에 公이 與村人으로 董役治道할새 突然一倭漢이 負銃醉到하야 叱辱諸衆하고 忽發銃丸하야 直射於公하야 因卽致死하니 目參人士 促取厥漢하야 將欲依法而夫人이 聞輒帶劍하고 剔殺倭漢의라 官憲輩急至하야 甚加威脅호대 夫人이 少無失色하고 辭氣森嚴하야 自訟以訴寃於城崩而意欲自刎이나 事覺未果하고 至大邱獄하니 慨然吁歎하야 辭於傍人曰吾東이 以禮義之邦으로 爲倭所倂은 士女共念이라 至於吾身하야 夫死於倭之手하고 婦人於倭之獄하니 徹天忿恨이 豈有須臾生存之義哉아 不粒食七日而逝하니 捨生取義之道於斯極矣라 嗚呼라 報夫讎於刀刃之快하고 立身節於刑獄之危하니 安氏之貞烈이 凜凜然若秋霜朔雪이요 亭亭乎如晩松寒竹而足可謂流芳千秋矣라 感歎之餘에 不揆文拙하고 書此歸之而俾爲刻焉하노라
    檀君紀元四千二百九十一年戊戌季冬 東萊 鄭貴泳記
    【풀이】 하루는 우리 고을 어르신네 이원유(李元有)께서 그 숙모(叔母) 안유인(安孺人)의 열행(烈行)을 담은 문적을 가지고 와서 말씀하시기를 “내 숙모(叔母)의 열행탁절(烈行卓節)이 비록 한 고을에서는 두루 아는 바지만, 시대가 아니라 정려의 은전은 받을 수 없고, 겨우 관(官)에서 내린 표장이 있지만 그러나 오래 되면 사실이 민몰될 것임은 확실하니, 먼저 기적비를 세워 청평(淸平)한 때에 입강(立綱)할 날을 기다리고자 하니, 그대가 한 말씀 써서 불후토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부덕하고 문장이 부족하여 고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夫人)은 본관이 죽산(竹山)이니 문혜공(文惠公) 휘(諱) 원형(元衡)의 후손 원석(原錫)의 딸이다. 나이가 차서 진안인(鎭安人) 이병기(李柄基)에게 출가하니, 공(公)은 사성(司成) 쌍첨당(雙尖堂) 휘(諱) 인현(仁賢)의 후손 영수(永洙)의 아들인 바, 대대로 유림(儒林)이다. 부인(夫人)은 어릴 적부터 숙덕(淑德)하여 출가해서도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공(公)과 더불어 지아비는 밭 갈고 지어미는 길쌈하여 효도로 시부모를 공궤하니 원근이 그들을 어질다 하였다. 왜정(倭政) 계해(癸亥, 1923)년 봄, 공(公)이 마을 사람들과 도로 부역을 감독할 때, 갑자기 왜놈 하나가 총을 메고 취해서 나타나 제중에게 욕설로 꾸짖고 갑자기 총탄을 발사하였다. 그 때 공이 총탄에 맞아 즉사에 이르니, 이를 본 사람들이 그 자를 붙잡아 법에 넘기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부인이 칼을 들고 와 왜놈을 척살(刺殺)하니, 관헌이 급히 와서 심히 위협(威脅)을 가했지만, 부인(夫人)은 얼굴색이 조금도 변치 않고 말과 얼굴빛이 삼엄(森嚴)하여 스스로 시비곡절을 다투고, 또 하소연하며 억울하게 지아비가 죽었으니 자진하려 하였으나 미리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고 대구(大邱)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에 분개하고 탄식하며 옆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지국으로 왜놈과 다투는 것은 남녀가 같으나, 내 처지는 지아비가 왜놈의 손에 죽고, 처는 왜놈의 감옥에 갇혔으니, 하늘에 사무치게 분하고 한스러우니 어찌 조금이라도 더 살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7일간을 먹지 않고 죽으니, 생을 버려 의를 취한 도리가 이처럼 지극하였다. “오호라! 지아비의 원수를 칼로 통쾌하게 갚고 / 자신의 절개를 형옥의 고통에서 세우니 / 안(安)씨의 정열(貞烈)이 늠름하고 추상(秋霜) 삭설(朔雪)과 같고 / 우뚝하기는 만송(晩松)과 한죽(寒竹) 같으니 / 가히 천추에 꽃다운 이름이 전하리라.” 감탄하는 사이에 문졸(文拙)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글을 써 이대로 돌아가 각하게 하노라. 단군기원 4291년 무술(戊戌) 계동(季冬)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기(記)
  • 【비표】 有明朝鮮國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金公旌閭(유명조선국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김공정려)

    【위치】 진안읍 반월길 83-4. 원반월마을 뒤(북쪽) 밭 가운데
    【시기】 1929년 5월
    【형태】 비각(碑閣)에 들어있으며 비갓이 있다.
    【개요】 효자 김상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1년에 세운 비이다. 1868년 정려가 명하여졌다. 정려기는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金公尙鉉之門 上之五年(1868) 戊辰 十二月 日 命旌閭’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上之五年戊辰 三月 日 儒生李元孝等上言 閏四月日 知縣李復信査報 九月日 觀察使徐相鼎査啓據 十二月 日 禮曹判書李豊翼 同副承旨 金宗泰 入啓承傳 內全羅道 鎭安 金尙鉉 卽駕洛王後裔 金寧君牧卿十六世孫 佐翼原從功臣永堅十世也 自在孩提 篤於孝親 父年八耋 病勢沈重 朝夕嘗糞 以驗差劇 而奄奄之中 思食水芹 時値嚴冬 叩氷號泣 靑芹秀出 簿言采歸以遂 其願 及夫丁憂廬墓 枕苫垢面 啜粥 不梳不襪 又丁內艱 一如前喪 未及禫闋 偶得沈疴戒 其諸子曰 我以不肖 未能從孝 汝須黽勉 勿替孝思 似此卓異 世所罕有 特加褒典 事奉敎矣 自營邑飭役立旌 以示闡揚之義事
    孫 崇政大夫 明植 永植 曾孫 顯國 顯重 顯豊 顯謀 顯佐 顯杓
    玄孫 有培 光培 乙培 晟培 弼培 達培 禮培 甲培 學培 文培 安培 丙培
    五世孫 (이하판독불명)
    己巳 五月 十四日 立旌 八月 十四日 竪碑
    主事 曾孫 顯國 從事 顯謨
    【풀이】 금상(今上) 5년 무진(戊辰: 고종 5, 1868) 3월 일자 유생(儒生) 이원효(李元孝) 등의 상언(上言)과 윤 4월 일자 지현(知縣) 이복신(李復信)의 사보(査報)와 9월 일자 관찰사 서상정(徐相鼎)의 사계(査啓)에 의거하여 예조판서 이풍익(李豊翼)과 동부승지 김종태(金宗泰)가 입계(入啓) 하였더니 승전(承傳)에 “전라도 진안의 김상현(金尙鉉)은 가락왕(駕洛王)의 후예로서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의 16세손인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영견(永堅)의 10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나이 팔십여 세로 병세가 위중하니 아침 저녁으로 변(便)을 맛보아 병세의 더하고 덜함을 증험하였는데 위중한 중에도 미나리를 먹고 싶어 하니 그때는 엄동설한인지라 얼음을 깨고 울부짖고 있으려니 푸른 미나리가 솟아나와 그것을 캐다가 올렸다. 이윽고 상(喪)을 당하니 여묘(廬墓)를 하는데 흙 베개와 거적자리로 얼굴도 씻지 않고 죽만 먹고 지냈으며 빗질도 하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았다. 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전상(前喪)과 똑같이 하였는데 미처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 우연히 중병을 얻자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어질지 못하여 종효(終孝: 효도를 끝까지 함)를 못하나 너희들은 힘써서 효심(孝心)이 흐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와 같은 탁이(卓異)한 행실은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이므로 특별히 포전(褒典)을 내리노라” 하였다. 이에 영읍(營邑)에서 역사(役事)를 신칙하여 정려를 세워 천양(闡揚)하는 뜻을 보이는 바이다.
    손 (孫) 숭정대부(崇政大夫) 명식(明植)(이하 원문참조)
    기사(己巳, 1929) 5월 14일 정려를 세우고, 8월 14일 비를 세우다(이하 비 원문참조)
  • 【비표】 孝子水原白公致洙之閭(효자수원백공치수지려)
    【비표】 孝子通訓大夫忠訓府都事白公樂元之閭(효자통훈대부충훈부도사백공낙원지려)

    【위치】 진안읍 정곡리 산 149-2 연장저수지 제방 옆 도로변
    【시기】 1925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150cm, 너비 54cm.
    【개요】 이 비는 왼쪽으로부터
  • 【비표】 縣監李侯益應愛民善政碑(현감이후익응애민선정비)

    【위치】 진안읍 연장리 산 237-6임. 농공단지 모롱이 언덕
    【시기】 1877년
    【형태】 높이 132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중 사망하였다.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194-1. 유산마을 북쪽.
    【시기】 193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110cm, 너비 8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禮云 婦人之道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如斯而已矣 若夫死 而不顧夫之身後 徑情而直行 自經於溝瀆 是傷勇也 世或以此爲烈 然聖人之所不許 而史氏之所不書者矣 近故雲山居士金公甲鎭妻 密陽朴氏 可謂行三從之道 而孝烈兼備者也 夫人以文敬公忠元後孫萬弼之女 幼有婦德 事父母孝 承順無違 及笄嫁于金門 金乃端宗名節忠毅公白村先生之玄冑也 夫人事舅姑 如事父母 溫凊定省 夙夜靡懈 年甫二十 夫嬰奇疾 數月彌留 漸至凘頓 迎醫合藥 空靑罔効 夫人爲之斷指注血 旣甦而旋絶 靑年孤孀 失我所天 不死何斯 乃欲自經下從 而反思之 上有二老在堂 下有一幼在褓 是所不忍也 自是動心忍性 終養二老 敎育孤兒 得保金氏之宗事 竟以天年終 鄕里感歎 取比漢之陳孝婦也 遠近士林 聞而嘉之 相繼襃獎焉 此可見百世之公議不泯也 公之嗣孫允秀 請余文以侈之 辭不獲已 謹書此而俾歸刻焉 歲柔兆困敦載陽節 小華遺民李道復記
    【풀이】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인의 도리는 집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고 하였다. 만일 지아비가 죽었을 때, 지아비의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지레 마음 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여 스스로 개천에서 목을 맨다면, 이는 상용(傷勇, 만용[蠻勇]으로 일을 그르치다)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열(烈)이라 말하나, 이는 성인이 허여하지 않은 바이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는 일이다. 근세에 작고한 운산거사(雲山居士) 김공(金公) 갑진(甲鎭)의 처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가위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행하고 효와 열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부인은 문경공(文敬公) 충원(忠元)의 후손인 만필(萬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덕(婦德)이 있어 부모를 효성으로 모셔 순종하며 어김이 없었고, 계년(忌年, 20세)이 되어서는 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는데, 김씨는 단종의 명절신(名節臣)인 충의공(忠毅公) 백촌 선생(白村先生)의 후손이다. 부인은 시부모 섬기기를 마치 친부모 섬기듯이 하여 온정(溫砦)과 정성(定省)을 아침 저녁으로 해이함이 없이 하였다. 나이 겨우 20세에 부군이 괴이한 병에 들었다. 몇 달을 끌더니 점차 시들고 기울어져 의원을 맞아 약을 썼으나 공청(空靑, 희귀한 선약이라고 일컬어진 약)도 효과가 없었다. 이에 부인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아 넣었으나 깨어났다가 도로 운절(隕絶)하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하늘과 같이 의지하던 남편을 잃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바로 목을 매어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위로는 두 노인네가 당(堂)에 계시고, 아래로는 한 어린이가 강보에 싸여 있으니 이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 이로부터 슬픔을 참고 모진 마음을 먹고, 두 노인네를 끝까지 봉양하며 홀로 된 어린이를 교육시켜 김씨의 후사(後事)를 보전하게 하였다. 그 뒤 마침내 천명을 다하고 죽으니 향리(鄕里)에서 모두 감탄하여 한(漢)나라의 진효부(陳孝婦)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원근의 사림(士林)도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뒤를 이어 서로 포장(褒奬)하였으니, 이로써 가히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는 없어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부인의 사손(嗣孫) 윤수(允秀)가 나의 글을 청하여 치장하려 하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글을 써서 주어 돌아가서 새기게 하였다. 병자(丙子, 1936) 재양절(載陽節, 음력 11월) 소화유민(小華遺民) 이도복(李道復)이 기술하다.
  •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에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진사현 자선비, 문기주 선덕비, 김직현 영세불망비, 이복신 영세불망비 등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진안읍으로부터 정천, 용담으로 왕래하는 길손이 빈번한 곳으로 불망비가 들어설 만한 적지라 할 수 있다.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915년 2월(大正五年 二月 日)
    【형태】 높이 105cm, 너비 35cm, 두께 10cm.
    【개요】 문기주에 대한 기록은 불상이다.
  • 【비표】 前參奉陳公士鉉慈善碑(전참봉진공사현자선비)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928년 5월(昭和三年 五月 日)
    【형태】 높이 105cm, 너비 35cm, 두께 8cm.
    【개요】 진사현(陳士鉉)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873년 11월(光緖三年 丁丑 十一月)
    【형태】 높이 85cm, 너비 40cm, 두께 8cm.
    【개요】 김직현(金稷鉉)은 진안현감으로 1872년 9월∼1874년 11월까지 재임하였다.
  • 【비표】 縣監李侯復信永世不忘碑(현감이후복신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871년(辛未 三月 二十六日)
    【형태】 높이 85cm, 너비 40cm, 두께 8cm.
    【개요】 이복신(李復信)은 진안현감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6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