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戶曹判書浪軒先生全克禮神道碑(호조판서낭헌선생전극례신도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180. 산주 거사곡 영사재 앞
    【시기】 1946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5cm, 너비 55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國朝 莊 光之際 事有至難言者 而惟其舊臣之誅戮殆盡 未必非 光廟之志 則觀於萬世忠臣之聖敎 可知矣 是以南秋江 趙漁溪諸賢 皆得有生六之名 于時以地部正卿 遁身于荒閒寂寞之濱 與秋江漁溪 跡同義合 自靖而獻者 浪軒先生全公是己 歿後數百年 掩晦而泯 始懶枕李文淸公憲琦 狀其德而表章之 其蹟逸而其辭畧 然足可徵於竢百 據而序之曰 公諱克禮 號浪軒 天安氏 以歡城君聶爲始祖 歷羅迄麗 名公巨卿 代不絶書 遂爲東方著族 高祖熙 文直提學 曾祖文軾 文刑判 贈左贊成謚文平 與圃牧諸先生相推重 世所稱都隱先生 祖天近 文大司憲 考諱思美 文判中樞 妣貞夫人全州崔氏 禮參盤女 公生而崎嶷俊偉 自幼識度異凡兒 才藝超倫 文辭夙就 與黃厖村喜 許敬菴稠 相師友之擢 世宗朝廷試嵬科 權知承文院正字 陞正言持平掌令諸曹正郞直講校理修撰司成獻納 皆極選 言論風裁 儕僚屬目 上眷超常 間以吏才薦 屢典州牧 愛民束吏 剸煩除劇 尤用心於學政 儒風鬱興 皆有去後思 立碑頌之 以 恭靖大王國恤時都廳勞 陞通政承政院同副承旨 歷兵戶兩曹參議 以戶議監董 健元陵補築 以其勞 陞嘉善 參判戶工刑三曹 至大護軍 蒙優老恩 陞資憲 判戶曹兼經筵春秋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及至 端廟遜位之日 公方休官家食 不勝痛寃 哭于白岳靜僻處 卽日挈眷南下 爰至于鎭安馬靈之江亭 已自文平公 有菟裘之營于此地 蓋承其遺訓也 遂放浪于山水間 扁軒以浪 日與溪叟野翁爭坐 不省知爲舊日宰相 惟南秋江孝溫 趙漁溪旅 道義相許 往復酬唱 共紓噎鬱之懷 某甲考終于寢 葬鎭安聖壽面居士谷直南之原 蓋公性行純粹 志氣豪邁 律身以謹嚴正直 治家以淸簡儉約 詳信禮讓 其接人也 忠讜義直 其事君也 紛華聲色 不經於心 辭受取予 惟視之義 一自遐遯 不與讌樂 不聽聲樂 食無兼味 坐無完席 深憂儹看居常悒悒 如貞女自守 凝塵滿座 處之遑遑 如窮人無歸 不復終南一夢 而時抱橫琴 其音忉忉 使人不忍聞 其胸懷可知也 公尤篤於內行 事親務其承順 奉先極其愴懿 對妻如賓 敎子以義 閏門斬斬如也 公著述 歲久爛散 藏于家者畧干 而罔非忠憤攸激 至今讀者 往往涕流焉 配全州李氏 禮判栻女 受貞夫人眞詰 墓合窆 擧五男 自溫文司諫 自良監察 贈刑參 自恭郞廳 自儉 自讓文司直 二女縣令楊廷茂 李枝福 司諫男益禧 文府使 監察男守憲 蔭工參 用憲 贈戶參 郎廳男益俊 通德郞 益喆奉事 益明參奉 益行益謙 女適許璜司直 男以忠以信 俱參奉 曾孫斗縣監 玄孫繼宗 忠孝著世 文習讀 贈工議 享靈溪院 景祚監察 五世孫烈生員 六世孫東屹 武訓練大將 忠義特著 享駬山祠 十四世孫垂庸 庚戌倡義殉節 享駬山祠 各房子姓 蕃衍不盡錄 余竊惟 世之論公者 以爲公之才 足以經緯邦國 公之文 足以黼黻王猷 是以 公之位 致躋乎卿宰 公之德 彌彰乎今古 皆非所以知公者也 惟公之一身 扶持乎綱常 撑柱乎宇宙 上焉而昭乎日星 下焉而崒乎泰嵩 而以嚴萬世臣子之大防 其功存乎社稷 其義貫乎金石 公之進退 卽世道之汙隆 蓋宜乎太常節惠之典 而尙今未遑 自有任其責者也 矧復公子司諫司直 端廟愚害之日 同殉于淸泠津 後以士林公議 幷享于駬山祠 司諫妻安氏 司直妻申氏 亦從而殉於烈 其亦可謂有所授 而有所受矣 公之墓 準格據禮 當立神道大碑 后孫炳寅 責余文 是役也 麟權中權 實尸之 而良根寔公主鬯孫云 繼以銘曰 歡城大族云煇爀 碩輔嵬勳聯世德 生得浪翁岐且嶷 胚胎前烈類其錫 瑚璉之器兼圭璧 驪頷明珠手蚤摘 際遇明時方大闢淸班宰樞周遍歷 涓埃圖報一心赤 不知有身知有國 天意終然難究識 帝星失座移宸極 西山已許夷齊陟 虞夏歿兮安所適 南遁遑遑太寂寞 東望苦苦長歎息 屈騷讀罷哽尤塞 死六其心生六迹 居士谷中崇四尺 騰騰光氣封窀穸 維水汪洋山崱屴 淸風百世與無泐 我作銘詩昭萬億 遺君之者泚其額 歲在丙戌四月上澣 嘉義大夫行內部協辦原任奎章閣直閣 維楊趙重穆撰
    通政大夫秘書院秘書監丞 安東金鼎鎭篆
    通政大夫侍講院從官 完山李璇鎬書
    【풀이】 국조(國朝, 본조[本朝]와 같은 뜻) 장릉(莊陵, 단종의 능호), 광릉(光陵, 세조의 능호) 시대에 극히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으나, 오직 하나 구신(舊臣)들을 거의 남김없이 죽인 일은 세조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만세(萬世)의 충신이란 성교(聖敎)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추강(南秋江, 이름은 효온[孝溫])과 조어계(趙漁溪, 이름은 여[旅]) 제현(諸賢)이 모두 생육신(生六臣)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때 호조의 판서로 몸을 황량하고 적막한 물가에 숨기고, 남추강·조어계와 형적이 같고 도의(道義)가 일치하도록 자정(自靖)하고, 자헌(自獻, 스스로 몸을 바치다)한 사람은 낭헌 선생(浪軒先生) 전공(全公)이 바로 그 분이다. 공이 몰한 후로 수백 년 동안 가려지고 묻혀오다가 맨 처음 나침(懶枕) 이문청공(李文淸公) 헌기(憲琦)가 행장을 지어 세상에 드러냈는데, 사적은 누락되고 사의(辭意)는 간략하였다. 그러나 족히 내후의 백세에 징신(徵信)이 될 만하기에 거기에 의거하여 서술하려 한다. 공의 휘는 극례(克禮)요, 호는 낭헌(浪軒)이다.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환성군(歡城君) 섭(褐)으로 시조를 삼고 있는데,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도록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대대로 역사에 끊이지 않아 마침내 동방에서 두드러진 씨족이 되었다. 고조 희(熙)는 문과 직제학이요, 증조 문식(文軾)은 문과 형조판서에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문평(文平)으로 포은(圃隱)과 목은(牧隱) 제선생과 더불어 서로 추중(推重)되니, 세상에서 일컬은 바 도은 선생(都隱先生)이다. 조부 천근(天近)은 문과 대사헌이요, 고(考) 휘 사미(思美)는 문과 판중추(判中樞)요, 비(騙) 정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예조참판 반(盤)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슬기롭고 헌걸찼으며, 어려서부터 견식(見識)과 도량(度量)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고, 재주는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글공부는 일찍 성취하여 황방촌(黃蔯村) 희(熹)와 허경암(許敬菴) 조(稠)와 함께 서로 사우(師友)를 삼고 지냈다. 세종조에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가 되고, 정언에 올라 지평·장령·제조(諸曹)의 정랑·직강(直講)·교리·수찬·사성·헌납 등을 두루 거쳤는데, 모두가 극선(極選)이다. 언론(言論)과 풍재(風裁)가 두드러져 동료들이 눈여겨보았고, 임근의 권우(眷遇)도 지극하였다. 그 사이 사이에는 이재(吏才, 행정 능력)로 천거되어 여러 고을의 수령을 맡았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아전들을 단속하여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잘 처리하였다. 더욱이 교육에 힘을 써서 유풍(儒風)이 크게 이니, 간 곳마다 떠난 뒤에 사모함이 있어 비를 세워 기렸다.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의 국상 때, 도청(都廳, 낭관[郎官]의 우두머리)을 맡은 공로로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병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쳤는데, 호조 참의 때 건원릉(健元陵, 이태조의 능침)의 보수를 주관하여 그 공로로 가선(嘉善)에 올라 호조와 공조에 이르렀다. 또 우로(優老)의 은전을 입어 자헌(資憲)에 올라 호조의 판서가 되었고, 경연(經筵)과 춘추관(春秋館)의 일을 겸직하였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도 겸대하였다. 단종이 양위(讓位)할 때 공은 벼슬을 내놓고 집에서 쉬고 있을 무렵이었다. 공은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백악(白岳)의 궁벽한 곳에 들어가 통곡을 하고, 그 날로 가족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진안(鎭安) 마령(馬靈)의 강정(江亭)에 정착하였다. 강정은 이미 문평공 때부터 은거지로 마련하고 모든 일을 경영해 왔었으니, 대체로 그 유훈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후 산수 사이에서 방랑(放浪)하였으며, 거처의 명칭까지 낭헌(浪軒)으로 내어 걸고 날마다 계수(溪璟) 야옹(野翁)들과 어울려 지내니, 아무도 지난 날의 재상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다만 남추강 효온(孝溫)과 조어계 여(旅)와는 도의(道義)로 서로 허여하고 왕래하면서 수창(酬唱)하여 함께 답답한 회포를 풀었다. 모년(某年)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여 진안 성수면(聖壽面) 거사곡(居士谷) 직남(直南)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성품이 순수하고 지기(志氣)가 호탕하였는데, 자신을 간직하기는 근엄(謹嚴)과 정직으로 하고, 집안 다스리기는 청렴과 검소로 하였다. 자상스럽고 신의 있고 겸손함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고, 충의롭고 정직함은 임금을 섬기는 요체였다. 분화(紛華)와 성색(聲色)은 마음에 담아본 일이 없고,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줌에 한결같이 의(義)에 비추어 처신하였다. 한번 세상과 인연을 끊은 후로 남의 잔치 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성악(聲樂)은 듣지도 않았으며, 식사는 반찬을 곁들여서 먹지 않았고, 거처하는 자리는 꿰매가면서 썼으며, 깊은 시름에 눈썹을 찌푸리고 항상 걱정에 쌓여 마치 수절하는 여자가 자신을 지키는 것과 같이 하여 수북히 쌓인 먼지가 자리에 가득하였다. 마음에 경황이 없어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 없는 듯이 처신하면서도 다시는 서울 생각을 하지 않고 때때로 거문고를 무릎에 얹고 탔는데, 그 음성이 처절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으니, 그 심회를 가히 알 만하다. 더욱이 공은 내행(內行, 가정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김에는 뜻을 받들기에 힘썼고, 선영을 받듦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아내 대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하고, 자녀는 의롭게 가르쳐 집안의 질서가 항상 정연하였다. 공의 저술은 세월이 오래되어 해지고 유실되고 하여 집에 보관중인 것이 얼마 되지 않으나, 모두가 충분(忠憤)에 복받친 것이어서 지금도 읽는 이들이 왕왕 눈물을 흘리곤 한다. 배위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예조판서 식(龜)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의 고명(誥命)을 받았는데, 묘소는 합폄하였다. 5남을 두어 자온(自溫)은 문과 사간이요, 자양(自良)은 감찰에 증 형조참판이며, 자공(自恭)은 남청(郎廳)이요, 자검(自儉)과 자양(自讓)은 문과 사직(司直)이다. 두 딸은 현령 양정무(楊廷茂)와 이지복(李枝福)에게 출가하였다. 사간의 아들 익희(益禧)는 문과 부사이나 감찰의 아들 수헌(守憲)은 음(蔭) 공조 참판이요, 용헌(用憲)은 증 호조참판이다. 낭청의 아들 익준(益俊)은 통덕랑이요, 익철(益喆)은 봉사(奉事)이며, 익명(益明)은 참봉이다. 그리고 익행(益行)과 익겸(益謙)이며, 딸은 사직(司直) 허황(許璜)에게 출가하였고, 그 아들 이충(以忠)과 이신(以信)은 모두 참봉이다. 증손 두(斗)는 현감이요, 현손 계종(繼宗)은 충효로 세상에 저명한데, 문과 습독(習讀)에 증 공조참의로 영계원(靈溪院)에 배향되었고, 현손 경상(景祥)은 감찰이며, 5세손 열(烈)은 생원이요, 6세손 동흘(東屹)은 무과 훈련대장으로 충의가 특별히 드러나 이산묘(鎖山廟)에 배향되었다. 14세손 수용(垂庸)은 경술년(庚戌年)에 창의(倡義) 순절하여 이산묘에 배향되었다. 각방(各房)의 자손은 하도 번창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세상에서 공을 논한 사람들에 따르면, 공의 재주는 족히 나라를 경륜(經綸)할 수 있고, 공의 문장은 족히 왕사(王事)를 보필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공의 지위는 경재(卿宰)에 올라갈 수 있었고, 공의 덕은 고금에 더욱 드러날 수 있었다. 말하지만 모두가 공을 제대로 안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어떠했는가? 공의 한 몸은 강상(綱常)을 부축하고 우주(宇宙)를 지탱하여, 위로는 일성(日星)처럼 빛나고 아래로는 태산 숭산(嵩山)처럼 드높았다. 만세의 신하로 대절(大節)을 엄히 세움으로 그 공로는 사직에 존재하고, 그 의기는 금석(金石)도 꿰뚫었으므로 공의 진퇴(進退)는 바로 세도(世道)의 오융(汚隆, 선하고 선하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하겠다. 공의 행의(行義)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였건만, 아직까지 그러한 경황이 없었던 것은 유사(有司)가 책임을 져야 마땅할 일이다. 더구나 공의 아들 사간(司諫)과 사직(司直)은 단종께서 시해를 당할 때 청령포(淸寧浦)에서 함께 순절하였다. 뒤에 사림의 공의(公議)로 나란히 이산사(鎖山祠)에 배향되고, 사간의 처 안씨(安氏)와 사직의 처 신씨(申氏) 역시 따라서 순절하여 열(烈)을 이루었으니, 가위 남편에게 배운 바가 있고 실천한 바가 있다 하겠다. 공의 묘소에는 격식으로 보나 제도로 보나 신도비가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후손 병인(炳寅)이 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이 일은 인권(麟權)과 중권(中權)이 실질적으로 주관하였고, 양근(良根)은 봉사손(奉祀孫)이라 한다. 이어 명을 달기를 “환성(歡城 : 천안 전씨[天安全氏]의 시조인 환성군[歡城君]을 지칭한 말)의 큰 씨족 혁혁도 하여 / 석보(碩輔)와 위훈(偉勳)이 대를 이었는데 / 낭헌(浪軒)과 같은 분 또 태어나 특출하니 / 전열(前烈)로 잉태하여 같은 부류 점지함이지 / 호련(瑚璉 : 종묘[宗廟]에서 쓰는 제기[祭器]를 말하는데, 국가에 유익하게 쓰이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쓰임) 같은 기국에 규벽(圭璧 : 서옥[瑞玉]을 말하는데, 사람의 덕행[德行]이 잘 다듬어짐에 비유됨)을 겸하여 / 용(龍)의 턱에 있는 여의주(如意珠) 일찍도 땄다네. / 청명(淸明)한 시대를 만나 운세도 한창 열려 / 청반(淸班)이고 재추(宰樞 : 공경[公卿]과 같은 뜻)고 두루 거쳤는데 / 조금이나마 나라에 보답하려고 한 마음 불태워 / 자신은 돌보지 않고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다네. / 그러나 하늘의 뜻은 결국 알 수 없는 것이라서 / 제성(帝星)은 자리를 잃고 신극(宸極 : 황극[皇極]. 국가의 정상[頂上]을 뜻함)도 옮겨졌네 / 서산(西山 : 수양산[首陽山]의 이칭.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장안[長安]의 서쪽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은 이미 백이(伯夷) 숙제(叔齊) 올라갔고 / 우하(虞夏, 우순[虞舜]과 하우[夏禹])도 몰하였으니 어디로 갈 것인가 / 남으로 경황없이 숨으니 너무도 적막하였고 / 뚫어지도록 동쪽(영월[寧越]이 서울의 동쪽에 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임) 바라보고 길이 탄식만 하였으며 / 굴원(屈原 : 전국시대 초[楚]의 충신이자 문장가. 자는 영균[靈均]이고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내서 굴삼려[屈三閭]라고도 칭함)의 이소경(離騷經 : 굴원[屈原]이 지은 글의 편명[篇名]. 나라는 쇠약해지고 자신은 참소를 당함이 서글퍼서 지은 글) 읽고 목메여 하였으니 / 사육신(死六臣)의 심지에 생육신(生六臣)의 발자취일세. / 거사곡(居士谷) 속엔 사척봉(四尺封) 높다란데 / 등등(騰騰)한 광채 무덤을 에워쌓네 / 강물은 출렁출렁 산은 우람하고 드높으니 / 청풍(淸風)은 백세(百世)토록 다함이 없으리라. / 나는 명시(銘詩) 지어 만억인(萬億人)에게 알리나니 / 임금을 버린 사람 이마에 땀방울 맺히리라.” 세재(歲在) 병술(丙戌, 1946) 4월 하순 가의대부행내부협판원임규장각직각(嘉義大夫行內部協辨原任奎章閣直閣) 유양(維楊, 양주[楊州]의 고호인 듯)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비서원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院秘書監丞) 안동(安東) 김정진(金鼎鎭)이 전액(篆額)을 쓰고, 통정대부시강원시종관(通政大夫侍講院侍從官) 완산(完山)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