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향면 진성로 1697(능금리 2203), 용담향교 외삼문 앞 동쪽에 있는 비각. 안에 1928년에 세워진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위성건공고학생순계춘백세기념비(衛聖建功高學生詢啓春百世紀念碑)’와 ‘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비(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碑)’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용담향교가 불에 타게 되자 고계춘(高啓春), 구순(具詢) 두 사람이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위판을 수습하여 주천면 운봉리 구봉산 바위 굴속에 간직하여 난리가 끝나자 무사히 되찾아 온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2016. 12. 28. 진안군문화유산 유형 제 2호로 지정되었다.
  • 【비표】 衛聖建功高學生啓春百世紀念碑(위성건공고학생계춘백세기념비)
    【비표】 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念碑(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념비)

    【위치】 동향면 능금리 2203 동향향교 앞 비각 안.
    【시기】 1928년
    【형태】 비각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개요】 향교 앞 오른쪽에 있는 비각 안에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위성건공고학생순계춘백세기념비(衛聖建功高學生詢啓春百世紀念碑)’이고,‘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비(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碑)’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용담향교가 불에 타게 되자 고계춘(高啓春), 구순(具詢) 두 사람이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위판을 수습하여 주천면 운봉리 구봉산 바위 굴속에 간직하여 난리가 끝나자 무사히 되찾아 온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들의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衛聖建功高學生啓春百世紀急碑
    【비문】 高公 濟州人 其號 石塘也 素有孝友之行 鄕黨稱焉 及丁酉之兵亂 與具公詢 昌炎蹈刃 背負五聖位版 避入九峰山中 奉安於石龕 平亂之日 還奉于文廟 其衛聖建功 不下於被胸當箭者矣 噫 皇天 不佑 公之偉蹟 曾未蒙旋褒 公之後裔 未至繁榮 豈不爲聞知者之慨嘆者乎 今年春 儒論大同經始立石 鄕人數十家 爭先生出義而華裔中高麟相高炳述高相燮三人 慕先竭力出乎 凡衆事之完成 故今於託功之末 略敍其顚末云爾 萬曆丁酉後五戊辰五月五日龍潭鄕校
    【풀이】 고공은 제주인이니 호는 석당이다. 평소 효우의 행실이 있어 향당에서 칭찬하였다. 정유재란 때에 구순과 병화 속에 칼날을 밟고 오성의 위패를 등에 지고서 구봉산 속으로 피하여 석감에 봉안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됨에 돌아와 문묘에 봉안하니 그 성현을 지키고 공을 세운 것이 전쟁에 직접 나가 가슴에 화살을 맞은 이에 뒤지지 않았다. 아! 황천이 돕지 않아 공의 훌륭한 업적이 일찍이 포상 받지 못하고 공의 후예가 번영하지 못하니 어찌 그러한 사실을 들은 자들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년 봄에 유림들의 의론이 크게 같아 입석을 세우기를 시작하니 고을 사람들 수십 집이 돈을 먼저 낼 것을 다투었는데 번영한 후손 중 고인상·고병술·고상섭 3인이 선조를 사모하여 힘을 다해 모든 일의 완성을 내었기 때문에 지금 탁공의 끝에 그 전말을 대략적으로 서술한다.
    만력 정유후 5 무진(1928)년 5월 5일 용담향교

    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念碑
    【비문】 萬曆丁酉兵燹 燃受校宮 公與高公啓春 背負五聖位版 避入九峰山中 奉安於石龕 及其平亂 還奉于文廟 蓋其蒼黃之際 衛聖建功 不下於被胸當箭者矣 當時隣鄕之見燒聖廟者取模於本廟位版 道郡儒生之擧實薦報 非止一再三而未蒙旋襃之典 數百年間 俾此偉蹟 將至泯沒則非特其子孫之抑鬱 是實爲士林慨嘆也 再昨年秋 儒論復起 自孔子通紀績錄刊所 有立碑記蹟之通文 而今年春享時 本郡郡守朱公時憲 與鄕儒發議 永爲紀念之意 使之立石 略採其實 書于其陰後 萬曆丁酉後五戊辰五月五日龍潭鄕校
    【풀이】 정유재란 때에 교궁이 불에 타니 공이 고계춘과 오성의 위패를 등에 지고 구봉산 안으로 피하여 석감(石龕)에 봉안하였다. 난리가 평정됨에 돌아와 문묘에 봉안하니 정신없는 와중에 성현을 지키고 공을 세운 것이 전쟁에 직접 나가 싸운 이에게 뒤지지 않는다. 당시 인근 고을에서 문묘가 전소된 경우 본묘의 위패에서 본을 취하니 도군의 유생들이 사실을 들어 추천하는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었으나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한 지 수 백 년 간이라 이러한 훌륭한 행적을 장차 없앤다면 비단 자손들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사림들이 개탄할 일이다. 재작년 가을에 유림들의 의론이 다시 일어나 공자통기적록간소에서 비를 세우자는 통문이 있어 금년 봄 제사하는 때에 본군의 군수 주시헌이 고을의 유림들과 발의하여 영원토록 기념하려는 뜻으로 비를 세우게 하고 그 사실을 대략적으로 뽑아 그 뒤에 서하였다.
    만력 정유후 5무진(1928)년 5월 5일 용담향교
  • 【비표】 孝烈婦士人趙鍾麟妻孺人密陽朴氏之閭(효열부사인조종린처유인밀양박씨지려)

    【위치】 동향면 능금로(능금리 산 118-1) 도로변 북쪽 산기슭.
    【시기】 1939년 9월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96cm, 너비 32cm, 두께 11cm.
    【개요】 밀양박씨는 15세에 동향면 능금리 하능에 사는 조종린에게 시집왔다. 그러나 시집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하자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길쌈을 하여 시집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던 중 남편이 병들어 활동을 하지 못하자 온갖 약을 다 구해다 주었으나 효험이 없자 사람의 살이 영약이라는 의원의 말을 듣고 자기의 넙적다리살을 베어 먹여
  • 【비표】 孝子成公錫泰子弼源兩世孝子碑(효자성공석태자필원양세효자비)

    【위치】 동향면 능금리 안쇠실 마을 어귀.
    【시기】 1958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46cm, 두께 18cm.
    【개요】 이 비의 건립 이전에 1886(고종23)년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져 동향면 대량리에 동인들의 효자문이 건립된 바 있다.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우므로 뜻이 대동소이한 정려문을 대신 옮겨 싣는다. 비(碑) 주인공들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정려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정려문】 余嘗往來於南峽 稔聞成氏之門 有兩世篤孝 墓前拜跪之處 膝痕雙存 至于今宛然 行路熟觀而嗟異焉 盖其群行卓卓 不惟鄕隣之誦慕 亦有可徵於物者 故孝子諱錫泰 生有至性 長益篤厚 躬耕養親 甘旨溫凊 極其誠敬 祖忌有雉飛入 得以悅親心 父病號泣露禱 斫指進血 及喪哀毁三年 餟塩茹粥 幾至滅性 朝夕省墓 不以雨雪廢 有鵲導虎衛之異 而瓜自生墓庭 結子成熟而供祭需 又篤於友愛 事兄撫侄 靡不用極 一門觀感而興孝興悌 於乎其休哉 公胤子弼源 亦克趾美 生思盡情 死思盡哀 其純至之行 一遵賢父之蹟 家有義狗 省掃之時每隨去 而潦漲則先涉之 雪積則先導之 其果誠感所致也 此豈非生祥下瑞 惟有天翁知者耶 兩公孝德 得於天而見於事者如此 詩曰孝子不匱 永錫爾類 不其信矣乎 聖上丙戌 命旌其父子之閭 綽楔煒煌 觀廳聿新 噫 過此而無咨嗟興感之心者 其亦可謂忍人也 夫 公曾孫憲黙後黙 請余記之 於是乎書 崇禎後五辛卯八月 恩津宋秉璿記
    【풀이】 내가 일찍이 남도의 산중을 왕래하면서 성씨(成氏) 집안에 양세(兩世)의 독실한 효자가 있어, 묘소 앞의 무릎을 꿇은 곳에 무릎의 흔적이 쌍으로 나 있는 바, 지금까지 완연하여 행인들이 익히 보고 이상하게 여기고 차탄(嗟歎)하고 있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대체로 여러 가지 행실이 탁이(卓異)하여 인근에서 전송(傳誦)하고 사모할 뿐 아니라 물증(物證) 또한 많이 있다고 한다. 고 효자(故孝子)의 휘는 석태(錫泰)이니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한 천성을 지녔고, 커갈수록 더욱 돈독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맛있는 음식과 따듯하고 서늘한 거처의 조절에 정성을 다하였다. 조부의 기일(忌日)에는 꿩이 저절로 집안에 날아 들어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고, 아버지가 병이 나자 호읍(號泣)하고 노천(露天)에서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드렸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애훼(哀毁)하며 염장(斧醬)만 가지고 죽을 먹어 거의 본성을 잃을 뻔하였고, 조석으로 성묘하는데 비나 눈이 와도 거르는 일이 없으니, 까치가 길을 인도하고 호랑이가 호위하는 기적이 있었으며, 참외가 묘정(墓庭)에서 나서 열매가 열고 익어 제수로 쓰기도 하였다. 또 우애가 두터워 형을 섬기고 조카를 어루만짐에 두루 극진하니, 온 집안이 보고 느껴서 효가 일어나고 제(悌)가 일어났으니 아! 훌륭할진저! 공의 아들 필원(弼源) 역시 그 훌륭한 자취를 잘 본받아 살아서는 정(情)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였으니, 그 순수하고 지극한 행실은 한결같이 어진 아버지의 사적을 따랐다. 집에 의구(義狗)가 한 마리 있는데, 성소(省掃)할 때면 으레 따라가서 물이 창일(漲溢)하면 먼저 건너고 눈이 쌓이면 앞에서 인도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정성에 감복한 소치가 아니겠으며, 이 어찌 상서(祥瑞)를 내림은 오직 하늘만이 안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양공(兩公)의 효도와 덕행은 하늘에서 점지받아 일에 나타남이 이와 같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으매, 길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점지하리라” 하였으니, 어찌 진실된 말이 아니겠는가? 성상(聖上) 병술(丙戌, 고종 23. 1886)에 부자의 정려(旌閭)를 명하시니, 작설(綽楔, 정려한 집)이 휘황(輝煌)하고 관청(觀聽)이 새로워졌다. 아! 이 곳을 지나면서 자차(咨嗟, 탄성을 발하다)하고 고무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가위 매정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증손 헌묵(憲默)과 준묵(俊默)이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청하였기에, 이와 같이 써주는 바이다. 숭정후(崇禎後) 다섯 번째 신묘(辛卯, 고종 28. 1891)에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이 기술하다.
  • 【비표】 縣令李侯光德永世不忘碑(현령이후광덕영세불망비)

    【위치】 동향면 창촌길 56(대량리) 창촌마을회관 마당.
    【시기】 1786년(정조10) 10월
    【형태】 높이 167cm, 너비 37cm, 두께 12cm.
    【개요】 이 마을에는 원래 7~8기의 영세불망비가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을 할 때 다리를 놓는데 쓰였고 현재는 마을회관 앞뜰에 2기만 남아 있다. 이광덕(李光德)은 금부도사였다가 용담현령으로 1771년 6월에 부임하여 1775년 12월에 임기만료로 체임되었다.
  • 【비표】 縣令李侯敏恒永世不忘碑(현령이후민항영세불망비)

    【위치】 동향면 창촌길 56(대량리) 창촌마을회관 마당.
    【시기】 1875년
    【형태】 높이 95cm, 너비 37cm, 두께 12cm.
    【개요】 이 마을에는 원래 7~8기의 영세불망비가 있었으나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을 할 때 다리를 놓는데 쓰였고 현재는 마을회관 앞뜰에 2기만 남아 있다. 이민항(李敏恒)은 용담현령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9월에 처가 죽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