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衛聖建功高學生啓春百世紀念碑(위성건공고학생계춘백세기념비)
    【비표】 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念碑(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념비)

    【위치】 동향면 능금리 2203 동향향교 앞 비각 안.
    【시기】 1928년
    【형태】 비각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개요】 향교 앞 오른쪽에 있는 비각 안에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위성건공고학생순계춘백세기념비(衛聖建功高學生詢啓春百世紀念碑)’이고,‘위성건공구학생순백세기비(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碑)’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용담향교가 불에 타게 되자 고계춘(高啓春), 구순(具詢) 두 사람이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5성위판을 수습하여 주천면 운봉리 구봉산 바위 굴속에 간직하여 난리가 끝나자 무사히 되찾아 온 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들의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衛聖建功高學生啓春百世紀急碑
    【비문】 高公 濟州人 其號 石塘也 素有孝友之行 鄕黨稱焉 及丁酉之兵亂 與具公詢 昌炎蹈刃 背負五聖位版 避入九峰山中 奉安於石龕 平亂之日 還奉于文廟 其衛聖建功 不下於被胸當箭者矣 噫 皇天 不佑 公之偉蹟 曾未蒙旋褒 公之後裔 未至繁榮 豈不爲聞知者之慨嘆者乎 今年春 儒論大同經始立石 鄕人數十家 爭先生出義而華裔中高麟相高炳述高相燮三人 慕先竭力出乎 凡衆事之完成 故今於託功之末 略敍其顚末云爾 萬曆丁酉後五戊辰五月五日龍潭鄕校
    【풀이】 고공은 제주인이니 호는 석당이다. 평소 효우의 행실이 있어 향당에서 칭찬하였다. 정유재란 때에 구순과 병화 속에 칼날을 밟고 오성의 위패를 등에 지고서 구봉산 속으로 피하여 석감에 봉안하였다가 난리가 평정됨에 돌아와 문묘에 봉안하니 그 성현을 지키고 공을 세운 것이 전쟁에 직접 나가 가슴에 화살을 맞은 이에 뒤지지 않았다. 아! 황천이 돕지 않아 공의 훌륭한 업적이 일찍이 포상 받지 못하고 공의 후예가 번영하지 못하니 어찌 그러한 사실을 들은 자들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년 봄에 유림들의 의론이 크게 같아 입석을 세우기를 시작하니 고을 사람들 수십 집이 돈을 먼저 낼 것을 다투었는데 번영한 후손 중 고인상·고병술·고상섭 3인이 선조를 사모하여 힘을 다해 모든 일의 완성을 내었기 때문에 지금 탁공의 끝에 그 전말을 대략적으로 서술한다.
    만력 정유후 5 무진(1928)년 5월 5일 용담향교

    衛聖建功具學生詢百世紀念碑
    【비문】 萬曆丁酉兵燹 燃受校宮 公與高公啓春 背負五聖位版 避入九峰山中 奉安於石龕 及其平亂 還奉于文廟 蓋其蒼黃之際 衛聖建功 不下於被胸當箭者矣 當時隣鄕之見燒聖廟者取模於本廟位版 道郡儒生之擧實薦報 非止一再三而未蒙旋襃之典 數百年間 俾此偉蹟 將至泯沒則非特其子孫之抑鬱 是實爲士林慨嘆也 再昨年秋 儒論復起 自孔子通紀績錄刊所 有立碑記蹟之通文 而今年春享時 本郡郡守朱公時憲 與鄕儒發議 永爲紀念之意 使之立石 略採其實 書于其陰後 萬曆丁酉後五戊辰五月五日龍潭鄕校
    【풀이】 정유재란 때에 교궁이 불에 타니 공이 고계춘과 오성의 위패를 등에 지고 구봉산 안으로 피하여 석감(石龕)에 봉안하였다. 난리가 평정됨에 돌아와 문묘에 봉안하니 정신없는 와중에 성현을 지키고 공을 세운 것이 전쟁에 직접 나가 싸운 이에게 뒤지지 않는다. 당시 인근 고을에서 문묘가 전소된 경우 본묘의 위패에서 본을 취하니 도군의 유생들이 사실을 들어 추천하는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었으나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한 지 수 백 년 간이라 이러한 훌륭한 행적을 장차 없앤다면 비단 자손들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사림들이 개탄할 일이다. 재작년 가을에 유림들의 의론이 다시 일어나 공자통기적록간소에서 비를 세우자는 통문이 있어 금년 봄 제사하는 때에 본군의 군수 주시헌이 고을의 유림들과 발의하여 영원토록 기념하려는 뜻으로 비를 세우게 하고 그 사실을 대략적으로 뽑아 그 뒤에 서하였다.
    만력 정유후 5무진(1928)년 5월 5일 용담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