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효자 성석태 자 필원 양세효자비(孝子成錫泰子弼源兩世孝子碑)
운영자 23-12-22 14:20 67 hit
【비표】 孝子成公錫泰子弼源兩世孝子碑(효자성공석태자필원양세효자비)

【위치】 동향면 능금리 안쇠실 마을 어귀.
【시기】 1958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46cm, 두께 18cm.
【개요】 이 비의 건립 이전에 1886(고종23)년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져 동향면 대량리에 동인들의 효자문이 건립된 바 있다. 비문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려우므로 뜻이 대동소이한 정려문을 대신 옮겨 싣는다. 비(碑) 주인공들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정려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정려문】 余嘗往來於南峽 稔聞成氏之門 有兩世篤孝 墓前拜跪之處 膝痕雙存 至于今宛然 行路熟觀而嗟異焉 盖其群行卓卓 不惟鄕隣之誦慕 亦有可徵於物者 故孝子諱錫泰 生有至性 長益篤厚 躬耕養親 甘旨溫凊 極其誠敬 祖忌有雉飛入 得以悅親心 父病號泣露禱 斫指進血 及喪哀毁三年 餟塩茹粥 幾至滅性 朝夕省墓 不以雨雪廢 有鵲導虎衛之異 而瓜自生墓庭 結子成熟而供祭需 又篤於友愛 事兄撫侄 靡不用極 一門觀感而興孝興悌 於乎其休哉 公胤子弼源 亦克趾美 生思盡情 死思盡哀 其純至之行 一遵賢父之蹟 家有義狗 省掃之時每隨去 而潦漲則先涉之 雪積則先導之 其果誠感所致也 此豈非生祥下瑞 惟有天翁知者耶 兩公孝德 得於天而見於事者如此 詩曰孝子不匱 永錫爾類 不其信矣乎 聖上丙戌 命旌其父子之閭 綽楔煒煌 觀廳聿新 噫 過此而無咨嗟興感之心者 其亦可謂忍人也 夫 公曾孫憲黙後黙 請余記之 於是乎書 崇禎後五辛卯八月 恩津宋秉璿記
【풀이】 내가 일찍이 남도의 산중을 왕래하면서 성씨(成氏) 집안에 양세(兩世)의 독실한 효자가 있어, 묘소 앞의 무릎을 꿇은 곳에 무릎의 흔적이 쌍으로 나 있는 바, 지금까지 완연하여 행인들이 익히 보고 이상하게 여기고 차탄(嗟歎)하고 있다는 말을 익히 들었다. 대체로 여러 가지 행실이 탁이(卓異)하여 인근에서 전송(傳誦)하고 사모할 뿐 아니라 물증(物證) 또한 많이 있다고 한다. 고 효자(故孝子)의 휘는 석태(錫泰)이니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한 천성을 지녔고, 커갈수록 더욱 돈독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맛있는 음식과 따듯하고 서늘한 거처의 조절에 정성을 다하였다. 조부의 기일(忌日)에는 꿩이 저절로 집안에 날아 들어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고, 아버지가 병이 나자 호읍(號泣)하고 노천(露天)에서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드렸다. 상(喪)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애훼(哀毁)하며 염장(斧醬)만 가지고 죽을 먹어 거의 본성을 잃을 뻔하였고, 조석으로 성묘하는데 비나 눈이 와도 거르는 일이 없으니, 까치가 길을 인도하고 호랑이가 호위하는 기적이 있었으며, 참외가 묘정(墓庭)에서 나서 열매가 열고 익어 제수로 쓰기도 하였다. 또 우애가 두터워 형을 섬기고 조카를 어루만짐에 두루 극진하니, 온 집안이 보고 느껴서 효가 일어나고 제(悌)가 일어났으니 아! 훌륭할진저! 공의 아들 필원(弼源) 역시 그 훌륭한 자취를 잘 본받아 살아서는 정(情)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였으니, 그 순수하고 지극한 행실은 한결같이 어진 아버지의 사적을 따랐다. 집에 의구(義狗)가 한 마리 있는데, 성소(省掃)할 때면 으레 따라가서 물이 창일(漲溢)하면 먼저 건너고 눈이 쌓이면 앞에서 인도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정성에 감복한 소치가 아니겠으며, 이 어찌 상서(祥瑞)를 내림은 오직 하늘만이 안다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양공(兩公)의 효도와 덕행은 하늘에서 점지받아 일에 나타남이 이와 같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으매, 길이 그대와 같은 사람을 점지하리라” 하였으니, 어찌 진실된 말이 아니겠는가? 성상(聖上) 병술(丙戌, 고종 23. 1886)에 부자의 정려(旌閭)를 명하시니, 작설(綽楔, 정려한 집)이 휘황(輝煌)하고 관청(觀聽)이 새로워졌다. 아! 이 곳을 지나면서 자차(咨嗟, 탄성을 발하다)하고 고무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가위 매정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증손 헌묵(憲默)과 준묵(俊默)이 나에게 기(記)를 써 달라고 청하였기에, 이와 같이 써주는 바이다. 숭정후(崇禎後) 다섯 번째 신묘(辛卯, 고종 28. 1891)에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이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