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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임진로(강정리 산 21-1). 강정마을에서 월운마을 쪽으로 900미터 지점 도로변 마이산 기슭 암벽.
【시기】 1924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암벽에는 ‘江亭臺’라는 제하에 ‘天安全氏世居之址 都隱先生杖屨臺 葵菴先生考繁臺 檀君 四千二百五十七 甲子 重陽 后孫永鮮’ 이라고 각자(刻字)되어 있다. 풀이하면 “天安全氏 대대로 살아온 터, 도은(전문식)선생 머문 곳, 규암(전계종)선생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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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강정리 강정마을에서 월운마을쪽으로 900미터 지점 바위 표면.
【시기】 삼계석문 1839년, 남쪽바위 1897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강정마을과 월운마을 사이에 있는 세칭 무남모탱이 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암각서이다. 암벽에 ‘三溪石門’이 크게 각자되어 있고 그 밑에는 만력 18년(1590)에 감사(監司) 신담(申湛) 등 14인이 수계(修契)하였는데 그 후 그들의 이름을 헌종 5년(1839)에 열각(列刻)하였다.
‘三溪石門’이 각자된 바위의 남면에는 또 하나 庚寅後六丁酉(1897년) 四月 별유사(別有司) 지현(知縣, 현감) 李寀, 유사(有司) 진사(進士) 오도한(吳道漢), 참봉(參奉) 송흥렴(宋興濂), 전규석(全圭錫), 전락규(全洛奎) 등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다.
삼계석문의 삼계(三溪)란 백운면 방면에서 흘러오는 섬진강 본류에, 부귀면 세동리에서 발원한 세동천과 진안읍 가림리에서 발원한 가림천이 합수하는 곳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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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江昌五賢洞契遺蹟碑’가 비 상부를 전서로 두른 가운데 비문이 각해 있다.
【위치】 마령면 원강정1길 원강정마을회관 마당.
【시기】 1952년
【형태】 비각 안에 들어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6cm, 너비 58cm, 두께 26cm.
【개요】 이 비에는 강창오현이 임진왜란시 거의한 내력이 각서되어 있다. 한편 이들 오현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1977년 오현사를 세웠다. 비는 비각안에 들어 있는데 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맞배 건물이다. 주인공들의 비(碑) 주인공들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趙宋之時 藍田縣呂氏四兄弟 與鄕人約曰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及違約者 亦書之 三犯而行罰 不悛者絶之 此爲有補世敎大矣遠矣 本朝穆陵之世 鎭安縣江昌里 有義契 前習讀葵菴天安全公繼宗 監察靈山辛公麒 習讀東萊鄭公大壽 縣監南陽洪公滭 雲圃延安宋公大弘所設者也 盖五公 俱以一時名流 志同道合 連墻接屋 遂成是契 每良辰佳節 觴詠風浴 不知老之將至 及壬辰亂 全公倡義勤王 四公俱爲贊劃 募糧漕運 全公竟殉節 特贈工曹參議 享靈溪書院 四公誓圖前進 更爲傳檄 敵退乃止 而絶意名利 講道範世 後承蕃衍 爲郡著族 因以增捐規約 推年德俱邵者三人 爲契首 每講信時 衣冠互接 歲節饋遺 殽羞交錯 至於吉凶患難 莫不救助 年滿一紀 則特排燕饗 自五姓中十年間婚娶者 辨備其需 稱以東床宴 以修親親長長之誼 至今三百餘年 罔或有闕 猗歟盛哉 事載鎭安志 江昌 今之江亭里云 將立石紀蹟 尸其事者 全中權宋相元 董其役者 全義根宋相直 請其文者 全炳寅辛鍾植洪鍾晙鄭貴泳 余辭不獲 爲之銘曰 天作馬耳 雙秀揷雲 峰下有江 其水沄沄 山水鍾靈 五姓芳芬 義契爰立 有條有文 呂約雖異 意則相因 長長親親 寔出義仁 四百載近 石以紀眞 我顧諸家 益敦德隣 神勞豈弟 錫祉無垠
壬辰五月丹陽 完山 崔秉心撰
【풀이】 조송(趙宋 : 중국에는 국호를 송[宋]이라 칭한 왕조가 셋이 있으니, 첫째는 춘추시대의 제후국인 송나라가 있고, 두 번째는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유유[劉裕]가 세운 송나라가 있으며, 세 번째는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나라가 있는데, 세 번째의 나라를 조씨의 송나라라 하여 조송이라 칭한다. 조송은 서기 960년에서 1279년까지 319년을 유지하였다)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씨(呂氏) 4형제( :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았던 여씨의 4형제는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의 셋이고 하나는 미상임)가 고을 사람들과 약속하기를 “덕업으로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과실은 서로 경계시키고[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환난이 있으면 서로 돕기로[患難相恤] 하여, 착한 일이 있으면 문서에 적고, 과실과 위약자가 있으면 이 역시 적으며, 세 번을 범하면 벌을 가하고, 그래도 개전(改悛)의 정이 없으면 절교하기로 하였는데, 이 일이 세교(世敎)에 도움이 된 바가 심대하였다. 본조(本朝) 선조 때, 진안현(鎭安縣) 강창리(江昌里)에 의계(義契)가 있었으니, 전 습독(前習讀) 규암(葵菴) 천안 전공(天安全公) 계종(繼宗)과 감찰 영산 신공(靈山辛公) 기(麒), 습독 동래 정공(東萊鄭公) 대수(大壽), 현감 남양 홍공(南陽洪公) 필(竭), 운포(雲圃) 연안 송공(延安宋公) 대홍(大弘) 등이 창설한 것이다. 대체로 5공(公)은 모두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 뜻도 같고 도의(道義)도 합치하여 담장을 연대고 집을 맞대고 살면서 마침내 계를 만들고, 매양 양신(良辰)과 가절(佳節)을 당하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고 바람도 쐬고 목욕도 하면서 늙음이 닥치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차,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공(全公)이 의병을 일으켜 왕사(王事)에 나서자, 4공이 함께 찬조하여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고 하였다. 전공이 마침내 순절하니, 특별히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다. 4공은 계속 전진(前進)하기로 맹세하고 다시 격문을 발송하였는데, 적이 물러남으로써 그만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명리(名利)에서 마음을 돌리고 도학을 강하고 세속을 바로 잡기에 힘썼는데, 후손이 번창하여 고을의 저족(著族)이 되었다. 이에 규약을 수정하여 연세와 덕이 높은 사람 셋을 뽑아 계의 우두머리로 삼으니 강신(講信)할 때마다 의관(衣冠)이 운집하고, 설 명절에는 음식이 오가서 술과 안주가 쌓이며, 길흉(吉凶)과 환난(患難) 때에는 서로가 구제하였고, 해가 1기(紀, 기는 12년)가 되면 특별히 잔치를 베풀고, 다섯 성씨에서 10년 사이에 새로 장가를 든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동상연(東床宴)이라 칭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어른을 섬기는 뜻을 돈독히 하여 우금 3백여 년에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다. 이 사실은 《鎭安誌》에도 실려 있다. 강창은 지금의 강정리(江亭里)를 말하는데, 앞으로 돌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전중권(全中權)과 송상원(宋相元)이요, 공사를 감독할 이는 전의근(全義根)과 송상직(宋相直)이며, 글을 청하러 온 사람은 전병인(全炳寅)·신종식(辛鍾植)·홍종준(洪鍾晙)·정귀영(鄭貴泳)이다. 나는 사양하다가 이루지 못하여 명을 달기로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마이산 말 들어 / 쌍봉이 구름에 꽂혔네. / 봉우리 아래 강이 있어 / 그 물줄기 출렁거리누나. / 산천이 영기를 길러내어 / 다섯 성씨 향기롭도다. / 이에 의계를 세우니 / 조목 있고 문서 갖췄네. / 여씨 향약과는 다르다 하나 / 그 의도만은 서로 연했다네. / 어른을 어른답게 가까운 이 친함은 / 이는 바로 인의(仁義)에서 나옴이지 / 4백 년이 가까워지니 / 돌에 사적을 새긴다네. / 내가 여러 집안 살펴볼 때 / 덕으로 이웃함이 더욱 독실하매 / 신령들 그 은근스러움 위로하여 / 복을 내림이 끝간데를 모를레라.” 임진(壬辰, 1952) 5월 단오일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이 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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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원강정1길 42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앞
【시기】 187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74cm, 두께 20cm.
【개요】 1868년(고종6년)에 영계사가 훼철된 뒤에 1870년에 인근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다. 전면에 ‘葵菴全先生 諱繼宗 忠景公李先生 諱廷鸞 雙尖李先生 諱仁賢 忠翼公崔先生 諱瀁’ 후면에는 ‘庚午五月日有事 李宇淳 全永升’이라 각자되어 있다. 풀이하면 영계사에 배향되었던 ‘葵菴 全繼宗 忠景公 李廷鸞 雙尖 李仁賢 忠翼公 崔瀁‘의 성명과 후면에 세운 시기와 사람의 이름인 ‘경오(庚午, 1870) 5월 유사(有事) 이우순(李宇淳) 전영승(全永升)’을 각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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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文平公都隱全文軾壇所神道碑(문평공도은전문식단소신도비)
【위치】 마령면 강정리 238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서쪽.
【시기】 192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8cm, 너비 59cm, 두께 17cm.
【개요】 영계사 담장밖 서쪽에는 도은선생의 묘와 1924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으며 영산사 입구 왼쪽에는 1979년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여기에는 1924년에 세운 비를 싣는다.
【비문】 文平公都隱全先生壇所神道碑銘幷序 都隱全先生 當麗季鼎革之際 道學有淵源 忠節如日星 按五祀之禮 宜其百世享之 况其子姓繁衍 圭璋蟬爀 年代杳遠 衣履之藏 遂佚其地 香火不擧 其雲仍慕羹墻而僾然 履霜露而悽悵者 厥惟久矣 頃者 其後孫暢鉉 永鍾 道錫 一相 炳謨諸君 倡議于宗族曰 近世士大夫家 失其墓者 多設壇而致享 此雖以義起 可取以爲 則盍於今日圖之乎 僉曰諾 於是永鮮 東權監督刱建之役 功將告訖 思所以壽其傳 而不可無紀實之辭 理石樹之壇前 謁文於不侫 其意勤矣 不敢以不文辭 謹按先生諱文軾 世稱都隱其號也 系出天安 始祖諱聶 佐百濟溫祚王 以十濟功 臣封歡城君 自是世襲卿相 傳十五世 有諱樂 當勝國太祖時 與從兄旌善君諱以甲 竹山君諱義甲 壯節公申崇謙 同時殉節於桐藪甄萱之亂 贈尙書左僕射 諡忠達 封天安君 遂貫天安 於先生爲八世祖也 七世諱洪述 以麗朝開國勳 策翊贊功臣 諡武康 六世諱忠佑 事成宗 官平章事 諡忠肅 封天城君 五世諱世柱 事德宗有大勳勞 諡文靖 高祖諱仁亮 官左相 年八十 奉使如宋 帝壯而奇之 賜銀紫光祿大夫 進吏部尙書 旣還卒 享年百有二歲 諡武節 封天陽君 曾祖諱旦 判工部事 寧平君 祖諱呂 政堂文學 封兜平君 諡康肅 考諱凞 左僕射封兜陽君 妣貞敬夫人尹氏 侍中殷衡女 先生以至正年間 生于交河里第 先生天姿卓越 學問夙就 力主扶正斤邪之論 爲世模楷 圃隱鄭先生贊之曰 濯世學宗佳公子 恭愍王丁未 創成均館 牧隱李先生 爲國子祭酒 抄選一時經術之士而充之 先生與圃隱鄭先生 惕若齋金公 同與其選 兼學官誨諸生 日進明倫堂 講論經義 必根以程朱之論 孜孜不倦 學者薰陶德性 絶記誦詞章之習 窮心身性理之源 知斯道之可宗 異端之可斥 儒風學術 渙然一新 由是東方之理學 始興焉 辛亥牧隱知貢擧 先生中第 拜政堂文學 在政堂 尤以明達著聞 因陞大司諫 辛耦元年 李仁任 安師琦等 謀迎北使 先生上書駁之 請斬其黨 忤旨 與圃隱先生等十人 幷流遠地 丙寅赦還 拜平安伯 與圃隱諸公定策 迎立恭讓王 行尙書事 壬申與籠巖金公澍 奉使如明 還至鴨綠江 聞我太祖改玉 相對泣下 金公曰 吾不忍還 子欲歸 歸之 歸留雖異 惟其盡節則一也 先生曰 天運順逆 人心異同 正此時可見也 金公留居中國 先生遂還交河之舊居 謝絶人事 杜門屛迹 三徵不就 放浪物外 嘗遊鎭安之江昌里 愛其山水 怡然有占居意 杖屢屢臨而未果 竟以天年考終于交河里第正寢 訃聞 世宗大加痛悼 贈刑曹判書知議政府事 賜諡文平 配貞敬夫人李氏 舍人世徽女也 生二男 長天近 文科大司憲 德行尉然 時人宗師之 贈左贊成 配兵曹判書李世禎女 次天吉 大司憲 子孫居于龜城 天近二男思敏 工曹判書 言事忤旨 謫康津 子孫居于靈巖 思美 文科同知中樞府事 子孫居于鎭安 思敏二男 尙禮直長 孟禮參奉 思美一男 克禮文科戶曹判書 文宗壬申 棄官歸隱於鎭安之江昌里 遵先生遺訓也 以下子孫不盡錄 略擧其著顯者 四世孫 自溫文科 世祖時以扈從端宗 貶鎭邊萬戶 自讓文科司直 兄弟同殉於寧越淸泠浦 貴進士 五世孫益禧 文科府使 以忠參奉 以信參奉 六世孫瓚參奉 奎贈司僕正 斗縣監 七世孫繼宗 文科侍講院習讀 贈工曹參議 忠孝德行 享于鎭安靈溪書院 應禎文科縣監 守瑊贈承旨 景祥監察 鐵樹進士 百齡武科牧使 泓武科嘉善 八世孫烈進士 繼星進士 大昇贈參判 思龍武科都總管 有功於甲子适亂 贈兵曹判書 倫縣監 九世孫東屹 武科四按水臬七拜兵梱 再任統制使 陞捕將 至訓鍊大將 及卒朝廷 遣官致祭 東岦主簿 應鍾僉中樞 應禎監察 應仁嘉善 十世孫夢日萬戶 贈兵曹參議 夢星縣監 贈兵曹參判 穆陵壬辰 與弟夢台 同時殉亂 享靈巖長洞祠 時禎壽陞通政 孝行卓越 十一世孫聖兪營將 孝萊嘉善 翊華進士 刱靈溪書院 南秀宣傳官 堅進士 十二世孫澤文科 灒進士 胤元縣監 舜佐節制使 舜元營將 十三世孫相朝宣傳官 十五世孫翰豊以文章鳴 十六世孫載奎亦以文章鳴 載遠宣傳官 載允秘書院丞 孝行卓異 廷秀進士 十七世孫均基營將 十八世孫仁鎬營將 十九世孫炳郁中軍 嗚呼 先生以純正之學問 彌綸之幹局 遭時不幸 未得展佈所蘊 遁遯全節於鼎革之際 險阻艱難 備嘗而不悔 積躬不食 以遺後昆 故其子孫至今連綿 簪纓繼承 由此而知天道之報施者如此矣 竊惟壇享非古 然子孫之瞻慕殫誠 宜有依歸之地 國學之位牌 郊社之壇壝 禮可考矣 古人云 靈之在天下 如水之在地中 苟能潔誠致享 神其來格 由此論之 壇與墓 豈或有間然也 今來請銘者 興均炳國鍾烈也 是宜銘 銘曰 修厥躬而揚于王庭 德之成也 値鼎革而矢心全節 義之精也 唯其善之積厚 故垂百世而繁榮 瞻彼江昌之里 水爲帶而山作屛 巋然 五尺之壇 模像雨露之封塋 以享以祀 雲仍之誠 垂之無窮 不崩不傾 神其歆 錫之福祿 猗厥盛莫之與京 甲子陽至節 資憲大夫掌禮院卿兼奎章閣學士 驪興閔京鎬撰 資憲大夫掌禮院卿兼弘文館學士 碧珍李愚冕書
【풀이】 도은(都隱) 전 선생(全先生)은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사직(社稷)이 바뀔 즈음에, 도학에는 연원(淵源)이 있고 충절(忠節)은 일성(日星)과 같았으니, 오사(五祀 : 다섯 가지의 제사. 즉 구망[句芒]·욕수[勃收]·현명[玄冥]·축융[祝融]·후토[後土]이다. [周禮, 春官, 大宗伯])의 예(禮)를 상고하여 백세토록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 더구나 그 자손은 번창하고 과관(科官)이 줄을 이었음에랴? 그러나 연대(年代)는 아득히 멀고 묘소도 실전하여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후손들은 갱장(羹墻)의 사모함으로 어렴풋이 마음에 떠올리고, 상로(霜露)를 밟음으로 서글픔을 간직해 온 지 이미 오래였다. 얼마 전에 그 후손 창현(暢鉉)·영종(永鍾)·도석(道錫)·일상(一相)·병모(炳謨) 제군이 종족에게 제의하기를 “근세에는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묘소를 실전하면, 다수가 단(壇)을 묻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는 비록 창시(創始)에 가깝다하겠으나 본받을 만한 일이니, 오늘날 우리가 도모해볼 일이 어찌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모두가 좋다 하였다. 이에 영선(永鮮)과 동권(東權)이 일을 맡아 감독하여 거의 준공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면 기실(紀實)하는 글이 없을 수 없다고 여기고, 돌을 다듬어 단 앞에 세우기로 하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그 성의가 독실하였으므로 감히 글을 못 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는 문식(文軾)이요, 세상에서 일컬은 도은(都隱)은 호이다. 전씨(全氏)는 천안(天安)에서 계출하였으니, 시조 휘 섭(褐)은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되어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대대로 경상(卿相)으로 이어졌는데, 15세(世) 휘락(樂)은 고려 태조(高麗太祖) 때 종형인 정선군(旌善君) 휘 이갑(以甲), 죽산군(竹山君) 휘 의갑(義甲)과 함께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더불어 동수(桐藪, 지명)의 견훤(甄萱)의 난에 순절(殉節)하여 상서(尙書) 좌복야(左僕檀)에 증직되고, 충달(忠達)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다. 그 때에 드디어 천안(天安)으로 관(貫)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에게는 8세조가 된다. 7세조 휘 홍술(洪述)은 고려조의 개국훈(開國勳)으로 익찬공신(翊贊功臣)에 책훈되었고 시호는 무강(武康)이다. 6세조 휘 충좌(忠佐)는 성종(成宗)을 섬겨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천성군(天城君)에 봉해졌다. 5세조 휘 세주(世柱)는 덕종(德宗)을 섬겨 대훈공이 있었고 시호는 문정(文情)이다. 고조 휘 인량(仁亮)은 벼슬이 좌상(左相)인데 나이 80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나라에 들어가니, 송제(宋帝)가 장하고 기특하게 여겨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의 품계를 주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렸으며, 돌아와서 사망하니 향년 102세였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며, 천양군(天陽君)에 봉해졌다. 증조 휘 단(旦)은 판공부사(判工部事)에 영평군(寧平君)이며, 조부 휘 여(呂)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두평군(兜平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강숙(康肅)이다. 고(考)의 휘는 희(熙)이니 좌복야(左僕檀)에 두양군(兜陽君)이요, 비(騙)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는 시중(侍中) 은형(殷衡)의 따님이다. 선생은 지정년간(至正年間, 지정은 원순제[元順帝]의 연호이다)에 교하(交河)의 향제(鄕第)에서 태어났는데, 천품이 탁월하고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다. 힘써 부정(扶正) 척사(斥邪)의 의론을 주장하여 세상의 모범이 되니,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이 찬양하기를 “탁세(濁世)의 학문의 종장(宗匠)이요, 훌륭한 공자(公子)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정미(丁未)에 성균관(成均館)을 창립하고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을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삼아 한 시대의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충원하는데, 선생과 포은 정 선생 및 척약재(脂若齋) 김공(金公, 김구용[金九容]을 말함)이 함께 거기에 뽑혔다. 학관(學官)을 겸하여 제생(諸生)들을 가르쳤는데, 날마다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하되 반드시 정주(程朱)의 의론을 근간으로 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가르치니, 학생들이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하여 글귀만을 읽고 외우는 버릇을 버리고 심신(心身)과 성리(性理)의 근원을 궁구하여 사도(斯道, 유도[儒道]의 뜻)를 종앙(宗仰)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다. 이에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빛나도록 새로워져, 이로 말미암아 동방의 이학(理學)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신해년(辛亥年)에 목은(牧隱)이 지공거(知貢擧)가 되니 선생도 과거에 합격하여 정당문학이 되었고, 정당(政堂)에 있으면서 더욱 명달(明達)하여 이름이 더욱 드러났으며, 그로 인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신우(辛禑) 원년에 이인임(李仁任)과 안사기(安師琦) 등이 모의하여 북사(北使, 원[元]나라 사신)를 영접하려 하니, 선생이 글을 올려 반박하고 그 일당을 참(斬)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포은 정 선생 등 10인과 함께 원지(遠地)로 유배당하였다. 그 뒤 병인년(丙寅年)에 사환(赦還)하여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가 되었는데, 포은(圃隱) 등 제공과 함께 대책(大策)을 정하여 공양왕을 영입(迎立)하고 상서사(尙書事)를 맡아 행하였다. 임신년(壬申年)에는 농암(籠巖) 김공(金公) 주(澍)와 함께 사명을 받들고 명(明)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아태조(我太祖)가 혁명을 일으켰음을 듣고 서로 마주하며 울었다. 김 공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돌아갈 수 없으니 그대는 가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돌아오나 그곳에 머무르나 그 절의(節義)를 다함에 있어서는 일반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천운(天運)의 순역(順逆)과 인심의 동이(同異)는 참으로 이럴 때 보게 된다”고 하였다. 김 공은 중국에 그대로 머무르고 선생은 마침내 교하(交河)의 옛집으로 돌아와 인사(人事)를 사절(謝絶)하였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세상 밖에서 우유(優遊)하였다. 일찍이 진안(鎭安)의 강창리(江昌里)를 둘러보고 그곳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터를 잡아 살고 싶어하였다. 장루(杖爐)로 여러 차례 찾았으나 실행을 못하고 마침내 천수(天壽)를 다하여 교하 향제의 정침(正寢)에서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세종(世宗)께서는 크게 슬퍼하시고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증직하고 문평(文平)의 시호를 내렸다. 배위 정경부인 이씨(李氏)는 사인(舍人) 세휘(世徽)의 따님인데 2남을 낳았다. 맏이의 천근(天近)은 문과 대사헌으로 덕행(德行)이 높아 사람들이 유종(儒宗)으로 섬겼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는데, 배(配)는 병조판서 이세정(李世禎)의 따님이다. 다음 천길(天吉)은 대사헌이요 자손은 구성(龜城)에 살고 있다. 천근(天近)의 2남에서 사민(思敏)은 공조판서인데 일을 말하다가 뜻을 거슬러 강진(康津)으로 귀양가서 자손은 영암(靈巖)에 살고 있고, 사미(思美)는 문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데 자손은 진안에 살고 있다. 사민(思敏)의 2남에서 상례(尙禮)는 직장(直長)이요, 맹례(孟禮)는 참봉이며, 사미(思美)의 1남은 극례(克禮)이니 문과 호조판서로 문종 임신(壬申)에 벼슬을 버리고 진안의 강창리로 돌아와 숨어 지냈으니 선생의 유훈(遺訓)에 따른 것이다. 이하의 자손은 다 기록할 수 없고, 대략 그 드러난 사람만 간추려 기록하자면, 4세손 자온(自溫)은 문과하여 세조 때 단종을 호종(扈從)하였다 하여 진변(鎭邊)의 만호(萬戶)로 좌천되었고, 자양(自讓)은 문과 사직(司直)인데 형제가 영월(寧越)의 청령포(淸寧浦)에서 순절하였으며, 귀(貴)는 진사이다. 5세손 익희(益禧)는 문과 부사(府使)요, 이충(以忠)은 참봉이며, 이신(以信)도 참봉이다. 6세손 찬(瓚)은 참봉이오, 규(奎)는 증 사복정(贈司僕正)이며, 두(斗)는 현감이다. 7세손 계종(繼宗)은 문과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에 증공조참의인데 충효(忠孝)와 덕행(德行)으로 진안의 영계서원(靈溪書院)에 제향(澐享)되었고, 응정(應禎)은 문과 현감이며, 수감(守喀)은 증 승지요, 경상(景祥)은 감찰(監察)이요, 철수(鐵樹)는 진사요, 백령(百齡)은 무과 목사요, 홍(泓)은 무과 가선(嘉善)이다. 8세손 열(烈)은 진사, 계성(繼星)도 진사이며, 대승(大昇)은 증 참판이요, 사룡(思龍)은 무과 도총관(都摠管)인데 갑자년(甲子年) 이괄(李适)의 난에 공이 있어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륜(倫)은 현감이다. 9세손 동흘(東屹)은 무과하여 수사(水使) 네 번과 병사(兵使) 일곱 번, 통제사 두 번을 지내고 포도대장에 올라 훈련대장에 이르렀는데, 사망하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서 제사를 올렸다. 동립(東吏)은 주부(注簿)요, 응종(應鍾)은 첨중추(僉中樞)요, 응정(應禎)은 감찰이요, 응인(應仁)은 가선이다. 10세손 몽일(夢日)은 만호(萬戶)에 증 병조참의요, 몽성(夢星)은 현감에 증 병조참판인데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陵號]) 임진(壬辰)에 아우 몽태(夢台)와 함께 순절(殉節)하여 영암(靈岩)의 장동사(長洞祠)에 모셔졌고, 시정(時禎)은 수직(壽職) 통정(通政)인데 효행이 탁월하였다. 11세손 성유(聖兪)는 영장(營將)이요, 효래(孝萊)는 가선이요, 익화(翊華)는 진사인데 영계서원을 창건하였으며, 남수(南秀)는 선전관(宣傳官)이요, 견(堅)은 진사이다. 12세손 택(澤)은 문과요, 찬(租)은 진사요, 윤원(胤元)은 현감이요, 순좌(舜佐)는 절제사(節制使)요, 순원(舜元)은 영장이다. 13세손 상조(相朝)는 선전관이요, 15세손 한풍(翰豊)은 문장으로 저명하다. 16세손 재규(載奎)도 문장으로 울렸으며 재원(載遠)은 선전관이요, 재윤(載允)은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효행이 탁이(卓異)하였으며, 정수(廷秀)는 진사이다. 17세손 균기(均基)는 영장이요, 18세손 인호(仁鎬)도 영장이며, 19세손 병욱(炳郁)은 중군(中軍)이다. 오호라! 선생께서는 순정(純正)한 학문과 홍대(弘大)한 간국(幹局)으로 불행한 때를 만나 자기의 포부를 펴보지 못하고,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처하여 은둔(隱遁)으로 절의를 온전히 하였다. 위험과 고통을 두루 맛보았으나 후회함이 없었고, 차곡차곡 몸에 쌓았으나 자신이 누리지 않고 후손에게 끼쳐주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지금껏 연면(連綿)히 관면(冠冕)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의 보시(報施)가 이러함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단향(壇享)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손들이 첨모(瞻慕)하고 정성을 쏟으려면 마땅히 대상이 되는 곳이 있어야 하나니 국학(國學)의 위패(位牌)나 교사(郊社)의 단소(壇所)를 예(禮)에서 상고할 수가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신령이 천하에 돌아다니는 것은 물이 땅 속에서 유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참으로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낸다면 신령을 찾아와서 운감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단(壇)과 묘소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지금 나를 찾아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흥균(興均)과 병국(炳國)·종렬(鍾烈)인데 이만하면 명할 만하다 하겠다. 명하기를 “그 몸을 닦아서 왕정(王庭)에서 휘날리는 것은 덕이 이루어진 때문이요, 사직이 바뀌는 때를 당하여 한 마음으로 절의를 지킴은 의가 정하기 때문이라. 오직 그 선(善)의 쌓임이 두텁기 때문에 백세토록 번영하게 된 것이니 저 강창(江昌)의 마을을 보라. 물은 띠 같고 산은 병풍을 둘렀지 않은가. 높다란 오척(五尺)의 단은 그 모양 우로(雨露)의 무덤과 같은데, 받들고 제사지내고 하니 후손들의 정성은 무궁토록 전해지고, 무너지지도 기울지도 않으니 신이 흠향하고 복록을 주어 번창함 비길 데 없다네”
갑자(甲子, 1924) 양지절(陽至節, 음력 11월을 말함)에
자헌대부장예원경겸규장각학사(資憲大夫掌禮院卿兼奎章閣學士) 여흥(驪興) 민경호(閔京鎬)가 찬하고, 자헌대부장례원경겸홍문관학사(資憲大夫掌禮院卿兼弘文館學士) 벽진(碧珍) 이우면(李愚冕)이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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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雙忠臣全公自溫自讓神壇碑(쌍충신전공자온자양신단비)
【위치】 마령면 강정리 238.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서쪽.
【시기】 1923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0cm, 너비 52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嗚呼 國朝莊陵丁丑之變 尙忍言哉 如討其罪 世豈無董狐之筆 欲說其事 時方諱司敗之問 然爲人臣 不幸當此等斁倫逆理之慘禍 初無一分忍痛含怨 迫不得已之心 而只欲爲自身 城狐倉鼠之計者 曾狗彘之不若也 時方奸臣麟趾等 降封上王 爲魯山君 而安置寧越之淸泠浦 三大臣六忠臣 次第就戮 而天安全公諱自溫 獨以文臣諫官 能敢言不諱 上惡之 貶公爲宣武將軍鎭邊萬戶僉使 幷逐其弟司直公諱自讓於淸泠浦 兩公之夫人 安氏申氏 皆不免焉 及上王遭貢生之弦 公之兄弟 引義自決 而二夫人亦皆下從焉 於若全氏一門 雙忠雙烈 凜然若秋霜烈日 而足以書諸信史矣 惜其知德者鮮 使此等忠烈佚而不傳 可勝歎哉 且念 端宗之追復 在肅廟朝 而英宗末年 兩公子孫 屢呈該曺 未蒙褒獎 體魄之在寧越者 世無郭子儀 墓中人 誰復證之 數百年後姓之痛恨 不可形言 歲己未秋 兩公雲仍 合謀同心 就鎭安之鷹峰峙下居士谷先塋下 爲築神壇 歲一祭之 將伐石 用表其壇 兩公之後孫 洪奎 道錫 囑余以叙之 不獲已按其狀 天安之全 以百濟歡城君諱聶 爲上祖 而高麗文平公諱文軾號都隱 爲其高祖也 曾祖諱天近 本朝文科大司憲 祖諱思美 文科同知中樞 考諱克禮 大護軍 妣全州李氏 判書軾女也 子男益禧 文科善山都護府使 孫男瓚 將仕郞智陵參奉 曾孫繼宗 文科侍講院習讀 贈工曹參議 號葵庵 配享于靈溪書院 萬戶公後也 子男以忠 英陵參奉 以信將仕郞 參奉 以忠子參奎曾孫東屹 訓鍊大將 以信子斗 眞寶縣監 司直後也 子孫之世居湖南諸邑者 忠孝相傳 爲天安氏之巨族 此可見兩公漑根食報之餘蔭也已 歲昭陽大淵獻八月佳俳節 後學星州人李道復謹撰
【풀이】 오호라! 국조(國朝, 조선[朝鮮]을 뜻함) 장릉(莊陵, 단종의 능호) 정축(丁丑, 세조 2, 1457)의 변(變)은 차마 말이나 하겠는가? 그 죄를 성토(聲討)하기로 한다면, 세상에 어찌 동호(董狐 :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의 사관[士官]. 진의 신하인 조천[趙穿]이 영공[靈公]을 시해[弑害]하였는데, 대부[大夫]인 조순[趙盾]이 그를 체포하지 않고 도망치게 방치하자 동호가 사기[史記]에 바로 조순이 죽였다고 기술하였다. 공자[孔子]는 이를 직필[直筆]이라 극찬하였다. 사실은 조순이 조천을 사주[使嗾]한 일이었다)와 같은 직필(直筆)이 없겠는가마는, 그 일을 말하려 하면 당시에는 형관(刑官)의 신문(訊問)조차 없애버렸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남의 신하가 되어 그렇듯 인륜(人倫)에 배반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참화(慘禍)를 당해서 애당초 손톱만큼의 비통(悲痛)과 원망이나, 아주 각박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마음이 없이 다만 자신을 위하여 즐겨 성호(城狐) 사서(社鼠 : 여우의 굴을 파헤치려 해도 성이 무너질까 걱정되고, 쥐 구멍에 불을 지르려 해도 사창[社倉]에 화재가 날까 두렵다는 뜻인데, 세력을 빙자하여 나쁜 짓을 하는 관리를 지칭한 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으로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때 바야흐로 간신(奸臣)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왕(上王)을 강봉(降封)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만들고, 영월(寧越)의 청령포(淸寧浦)에 안치(安置)하려 삼대신(三大臣)과 육충신(六忠臣)을 차례로 죽였다. 이 때 천안 전공(天安全公) 휘 자온(自溫)은 유독 문신(文臣)인 간관(諫官)으로 숨김없이 직언(直言)을 하니, 임금이 미워하여 공을 선무장군(宣武將軍) 진변(鎭邊) 만호(萬戶)와 첨사(僉使)로 좌천시키고, 공의 아우 사직공(司直公) 휘 자양(自讓)까지 청령포로 내쫓았다. 두 분의 부인 안씨(安氏)와 신씨(申氏)도 모두 무사할 수가 없었다. 상왕께서 공생(貢生, 고을에서 추천한 태학생[太學生])의 화살을 맞고 흉서(薨逝)하자, 공의 형제는 의리를 들어 자결(自決)하였고, 두 부인도 따라 죽었다. 그러니 전씨 집안의 쌍충(雙忠)과 쌍렬(雙烈)은 늠름(凜凜)하기 추상(秋霜) 열일(烈日)과 같아 족히 역사에 쓰여질만하나, 애석하게도 덕의(德義)를 아는 이가 없어서 이러한 충렬(忠烈)이 유루(遺漏)되고 전해지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겠는가? 또 생각해 보건대, 단종(端宗)의 복위(復位)가 숙종조에 있었기에, 영조 말년에 두 분의 자손들이 누차 해조(該曹)에 진정을 하였으나 포장(鷸奬)을 받지 못하였다. 영월에 있는 체백(體魄)도 찾을 길이 없으니, 우금 수백 년이 지나도록 자손의 통한(痛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지난 기미년(己未年, 1919) 가을에 두 분의 자손이 합심하여 진안(鎭安)의 응봉치(鷹峯峙) 아래의 거사곡(居士谷) 선영(先塋) 아래에 신단(神壇)을 쌓고 세일제(歲一祭)를 지내게 되었다. 돌을 다듬고 단에 표석을 세우려던 두 분의 후손, 홍규(洪奎)와 도석(道錫)이 나에게 서술해 주기를 부탁하였는 바, 사양치 못하여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았다.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백제(百濟)의 환성군(歡城君) 휘 섭(褐)이 상조(上祖)가 되고, 고려(高麗)의 문평공(文平公) 휘 문식(文軾) 호 도은(都隱)이 고조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천근(天近)이니 본조(本朝, 조선[朝鮮]을 말함)의 문과(文科) 대사헌이고, 조부의 휘는 사미(思美)이니 문과 동지중추(同知中樞)이며, 고(考)의 휘는 극례(克禮)이니 대호군(大護軍)이요, 비(騙)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판서 식(軾)의 따님이다. 만호공(萬戶公)의 아들 익희(益禧)는 문과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요, 손자 찬(瓚)은 장사랑(將仕郞)에 지릉참봉(智陵參奉, 지릉은 익조[翌朝]의 능침이다)이며, 증손 계종(繼宗)은 문과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에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요 호는 규암(葵菴)인데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사직공(司直公)의 아들 이충(以忠)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이요, 이신(以信)은 장사랑(將仕郞)에 참봉이며, 이충의 아들은 삼규(參奎)요, 증손 동흘(東屹)은 훈련대장이며, 이신의 아들 두(斗)는 진보현감(眞寶縣監)이다. 자손으로 대대로 호남(湖南)의 여러 고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충효(忠孝)로 전해 내려와 천안씨(天安氏)의 거족(巨族)이 되어 있으니, 이로써 두 분의 근본을 배양하고 복을 직접 누리지는 않은 여음(餘蔭)임을 알 수 있겠다. 계해(癸亥, 1923) 8월 가배절(佳俳節, 嘉竄節) 후학(後學) 성주(星州) 이도복(李道復)이 삼가 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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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임진로 2361-82. 마령체련공원 뒤 구산사 경내.
【시기】 194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49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士之出於賢君之世者 豈皆素賢哉 世敎旣明勸懲之道 旣備 雖有未至者 不得不企而及也 生乎衰世者 上焉莫之率 襲乎邪者 非惟不之懲 而或以取榮 趨乎義者非惟無以勸 而適以取困 故惟賢者之資 不能以自立於其時 而有繇禮秉義者 可不謂難能耶 若退休齋宋先生是已 公諱寶山 字大仁 延安人 上世有諱卿 佐高麗有勳 三韓壁上功臣 封延安府院君 謚肅毅 曾祖諱勛 吏議判書 贈銀紫光祿大夫 祖諱光彦 大司成 出原州牧使 討賊殉職 考諱興道 和寧府少尹 妣靑松沈氏 以 世宗壬子二月三日生公 容儀端莊 尤意於學 遂閉門講習 經傳諸書 無不講貫悟解 而尤深於春秋 世謂之宋春秋 懷贄謁佔畢齋金先生爲師 而與寒暄堂一蠹兩先生 相厚善 質疑商確 開陳條暢 兩先生甚爲敬服 世宗戊辰 魁進士發解 遂登上舍 翌年擢別試 例授成均館典籍 兵禮二曹郞 拜司諫院正言獻納司諫 弘文館修撰校理 時有日蝕冬雷之變 上疏歷陳其弊 請緩刑獄納諫諍厲臣工 其畧以爲 人心者 國家之元氣 敎化 所以養元氣之具也 不任賢才 則敎化不行 不去苛歛則人心不安 失人心而得天下 蔑敎化而求治平 非臣之所敢知也 其目曰 黜豪强 除暴歛 明敎化 振紀綱 平獄訟 開言路 累數千言 又曰 天下之事 不進則退 國家之事 不治則亂 進退治亂 固有其數 而其所以進退治亂者 實由於人 故人君當審其治亂之機 勉其所以治 去其所以亂 期於必治而後已 不可安於小成 局於常規 悠泛度日 任其成敗也 臣伏賭 殿下 臨御以來 非常之灾 可愕之怪 不可殫記 天之譴告警懼 其亦至矣 尙且政踵舊弊 治效渺茫 則傷敗之極 指日可見也 今時政尙未有大慰民心者 皆由於紀綱不振 公道未著 諫官未達 獄訟不平之致也 伏願 殿下 擴乾坤至公之量 昭日月至明之鑑 辨邪正別賢否 而聽其所言 觀其所行 必使是非邪正 無所逃於聖明洞照之下 而知其爲君子 則必引而親之 使之必行其道 知其爲小人 則 必斥而遠之 必絶其根 則直諒剛直之士 爭效其忠 姦邪謏佞之輩 屛息其迹 而紀綱振則公道著 諫官忠則獄訟平矣 上獎其忠正 得大臣軆 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又因虹變上剳 極言灾異酷甚 而上下恬嬉 政令因循 宜先勉强學問 存心克私 以爲修身之本 上虛心嘉納焉 庚午 陞嘉善同知中樞府事 歷都承旨 禮曹判書 時當 光陵朝 權奸秉政 恣行惡毒 見時事日非 鬱鬱歸鄕廬 與村叟野夫 同遊共談笑 若寒士意 曾不以富貴毁譽 擢其心焉 每値花辰楓秋 伴二三友朋 逍遙於泓崢之間 以樂山靜水 動仁智之眞趣常語人曰 學者能見得曾黙意思 則身心將入活潑地 爵祿無動於中 可知矣 甲子十月二日卒 墓在長水縣西 其蕪沒蓋久矣 配貞夫人水原白氏 判書荊玉女 生二子 長公善長城府使 次承衍爲仲父壽山后 之盛平山府使 之殷光州牧使 長房出 裕興藝文館直提學 裕景迪順副尉 次房出 公少以魁科登朝 歷踐淸華 素性坦直 不立邊幅 與人無衆寡大小 待之如一 言論辨說 由衷而發 對門弟子 規範嚴肅 凜乎不可犯 人有片善 亟稱之 至人有過惡 盡言規斥 不少回互 以是見忤於姦黨 然其操志堅確 守正卓立 毅然不爲變 蓋有人所不及知者矣 負此誠明之德 際遇 仁聖之君 敷奏啓沃 至爲該備 聖心特加眷注 不幸凶臣滿朝 弗克厥用 旋見偃蹇而歸 詎意天道陰沴如斯耶 噫 公之德學 昭日星而不昧 凡血氣者 靡不慕仰效法矣 宜膺國家之寬恤旌褒 况惟月岡祀 何可以稱諸盛德也哉 然剛齋宋先生祝文有曰 德學冠世 典禮載鐫 後人覽此 可以追相公矣 公後孫希濂 踰峻嶺遠來 屬以麗牲之文 以余蔑識 何敢當是役 累辭不獲 乃按狀敍之 而系以銘曰 猗歟退翁 嶷然人傑 奧在妙齡 聲聞已揭 淵源旣正 道受師傳 惟友賢儒 寒暄一蠹 學修德明 位顯淸華 陳疏暢達 聖上嗟嗟 功業已著 讒口交棘 榮辱毁譽 弗留于臆 歸來鄕閭 山水成癖 點瑟回琴 歌詠自適 祠高月岡 剛齋頌祝 執此一言驗其所毓 龜淵之上 豊碑巓巓 我銘不誣 用垂千年 潘南朴性陽撰
【풀이】 선비로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 배출된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모두가 본래부터 어질었겠는가? 세상의 교화(敎化)가 밝아지고 권선(勸善) 징악(懲惡)하는 기준이 마련되면 비록 미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득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쇠퇴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위에서 도솔(導率)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정(不正)에 물이 든 사람도 징계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더러는 오히려 영화를 누리고 의리를 따르는 사람은 권선하는 이가 없을 뿐 아니라 곤궁을 자초하기 알맞기 때문에 어진 자질을 지닌 사람도 그런 때에는 자립(自立)할 수가 없다. 예(禮)에 따르고 의(義)를 지킨 사람은 되는 일이 없다고 하겠는데, 퇴휴재(退休齋) 송 선생(宋先生) 같은 분이 바로 그러한 분이다. 공의 휘는 보산(寶山)이요, 자는 대인(大仁)이니, 연안인(延安人)이다. 상대(上代)에 휘 경(卿)이 있어 고려를 도와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훈되고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해졌는 바, 시호는 숙의공(肅毅公)이다. 증조 휘 훈(勛)은 이의판서(吏議判書)에 증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요, 조부 휘 광언(光彦)은 대사성을 지내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가 적을 치다가 순직하였다. 고(考) 휘 흥도(興道)는 화녕부 소윤(和寧府少尹)이요, 비(騙)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인데, 세종 임자(壬子, 세종 14, 1432) 12월 3일 공을 낳았다. 공은 의용(儀容)이 단장(端莊)하고 학문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문을 닫아 붙이고 공부에 열중하여 경전(經傳)과 제가서(諸家書)를 빠짐없이 읽고 이해하였다. 그 중에서도 춘추(春秋)에 더욱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는 ‘송춘추(宋春秋)’라 불렀다. 예물을 싸가지고 점필재(晤畢齋) 김 선생(金先生, 이름은 종직[宗直])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是, 정여창[鄭汝昌]) 양 선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질의(質疑) 검토하고 개진(開陳)함이 시원시원하니, 두 선생께서 매우 경복(敬服)하였다. 세종 무진년(戊辰年, 세종 30, 1448)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례대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으며, 병조와 예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 헌납 사간과 홍문관의 수찬 교리를 지냈다. 그 때 일식(日食)과 동뢰(冬雷)의 변괴가 있어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며, 형옥(刑獄)을 관대하게 다룰 것과 간언(諫言)을 받아드릴 것과 신하들을 단속할 것 등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인심(人心)이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교화(敎化)는 원기를 기르는 방도입니다. 어진 인재를 쓰지 아니하면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사라지지 않으면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법이니, 인심을 잃고 천하를 얻는다거나, 교화를 천시하고 치평(治平)한다는 일은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사목(事目)으로 강포(强暴)를 축출하고, 혹독한 세수(稅收)를 없애고, 교화(敎化)를 넓히고,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옥송(獄訟)을 공평히 하고, 언로(言路)를 여는 등으로 몇 천 자의 글을 이루었다. 또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국가의 일은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그 진퇴(進退)와 치란(治亂)은 사실 기수(氣數, 운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진퇴하고 치란케 하는 원동력은 사람에게 매였기 때문에 임금은 마땅히 치난의 동기를 살펴서 다스려질 수 있는 일은 권장하고 어지러워질 수 있는 일은 제거하여 기어코 다스리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가져야지, 조그마한 성공에 만족하고 평상시의 규율에 구애되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그 성패(成敗)를 기수에만 맡기고 지낼 일이 아니옵니다. 신이 보옵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예사롭지 않은 재앙과 경악할 만한 괴변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하늘의 경고와 꾸짖음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아직까지도 정사(政事)는 옛 폐습을 답습하고 있어 치효(治效)가 막연하니 상패(傷敗)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가 민심을 크게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고, 공평한 도리가 드러나지 아니하고, 언로가 훤히 뚫리지 않고, 옥송이 공정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건곤(乾坤)의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시고, 일월(日月)의 지극히 밝은 통찰력을 발휘하시어 사정(邪正)을 변석하시고, 현부(賢否)를 식별하여 그 말한 바를 듣고 그 행한 바를 보시면 반드시 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으로 하여금 성명(聖明)의 통조(洞照)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가 군자(君子)임을 아시면 반드시 이끌고 친근히 하시어 그 도(道)를 행하게 하시고, 그가 소인(小人)임을 아시면 반드시 배척하고 멀리 하시어 그 뿌리를 뽑아버린다면 강직하고 아량있는 선비는 다투어 충성을 바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연후에라야 기강은 진작되고 공도(公道)는 드러나고 언론은 통달되고 옥송은 공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 충정(忠正)을 가장(嘉奬)하고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하여 통정(通政)에 올려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또 홍변(虹變)을 계기로 차자(箚子)를 올렸다. 재변이 혹심한데도 위 아래에서 모두 예사롭게 여기고, 정령(政令)이 고식적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마땅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사심(私心)을 버림으로써 수신(修身)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니, 상께서 마음을 비우고 가담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는 가선(嘉善, 품계명[品階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도승지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 때에는 세조조를 당하여 권간(權奸)들이 정권을 잡고 악독한 짓을 자행하니, 세상 일이 날로 그르쳐짐을 보고 답답한 마음으로 시골집으로 내려와서 촌로(村老)와 야부(野夫)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함께 담소하며, 마치 한사(寒士)와 같이 지내고 부귀(富貴)와 영욕(榮辱)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또 매양 꽃피는 봄이나 단풍이 든 가을이면, 두서너 사람의 벗들과 어울려서 큰산과 큰물 사이에서 소요하며 산수(山水)를 즐기고 인지(仁智)의 참다운 지취를 만끽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학자가 능히 침묵하는 심경을 터득한다면 몸과 마음이 활달해져서 작록(爵祿)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함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연산 10, 1504) 10월 2일 사망하였고, 묘소는 장수현(長水縣)의 서쪽에 있는데 묵은 지 오래이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판서 형옥(荊玉)의 따님인데, 2남을 낳아 맏이 공선(公善)은 장성부사(長城府使)요, 다음 승연(承衍)은 중부인 수산(壽山)의 뒤를 이었다. 평산부사(平山府使) 지성(之盛)과 광주목사(光州牧使) 지은(之殷)은 큰아들 소생이고, 예문관 직제학 유흥(裕興)과 적순부위(迪順副尉) 유경(裕景)은 작은아들 소생이다. 공은 소시에 과거에 장원하고 조정에 들어가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다. 천성이 솔직하고 꾸밈새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을 많고 적고 높고 낮음을 가림이 없이 한결같이 대하였다. 언론과 변설은 속마음에서 나왔으며, 집안의 자제들에 대해서는 규율이 엄숙하여 범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 작은 착함이라도 있으면 자주 칭찬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끝까지 배척하여 어물어물 넘기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지조는 굳건하고 정도(正道)를 지켜 의연히 굽힘이 없었으니, 대체로 남들이 짐작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이러한 진실된 덕을 지니고 어진 임금을 만나 아뢰고 깨우침이 두루 지극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정을 쏟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흉악한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제대로 쓰이지 못하였고, 또 미구에 보란 듯이 시골로 돌아왔으니, 어찌 천도(天道)의 음산함이 이와 같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공의 덕학(德學)은 일성(日星)처럼 밝고 차착이 없었으므로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우러르고 본받고 하지 않은 이가 없었을 터이니, 나라에서 너그럽게 돌보고 정포(旌褒)함이 있어야 마땅하였을 것이다.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된 것만으로 어떻게 그 성한 덕에 알맞다 하겠는가? 그러나, 강재(剛齋) 송 선생(宋先生, 이름은 치규[穉圭])의 축문(祝文)에 있기를 “덕학은 세상에 뛰어나고 전례(典禮)는 새겨진 바가 있다” 하였으니, 후인들은 이를 보면 가히 공을 추상(追想)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후손 희렴(希濂)이 큰 재를 넘어 멀리 찾아와서 신도비의 글을 청하였으나, 나와 같은 천식(淺識)이 어떻게 감히 이러한 일을 감내하겠는가? 그리하여 누누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행장을 상고하여 서술하고 명(銘)을 다는 바, 명에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퇴휴옹(退休翁)은 / 헌걸찬 인걸(人傑)로 /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 명성은 널리 퍼졌고 / 연원(淵源)도 순정하여 / 도학은 스승에서 전수했고 / 어진 선비를 벗하였으니 /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是)라. / 학문은 이뤄지고 덕도 높아져 / 지위는 청화직(淸華職) 드러났고 / 상소 올려 문장이 통창(通暢)하니 / 성상(聖上)도 차탄(嗟歎)하였다. / 공업(功業)이 이미 드러나니 / 참소하는 말 덩달아 심하였으나 / 영욕(榮辱)과 훼예(毁譽)를 /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았고 / 시골집으로 돌아와서는 / 산수(山水)에 넋을 잃었으며 / 비파 뜯고 거문고를 타면서 / 노래하고 시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네 / 사당은 월강(月岡)에 드높고 / 강재(剛齋)가 송축을 드렸는데 / 그 한 구절만 가지고도 / 공의 간직한 바 알 만하다. / 구연(龜淵)의 물 위에 / 높다란 비 우뚝한데 / 나의 명(銘) 거짓이 아닌지라, / 천년 만년 전해지리라.” 반남(潘南) 박성양(朴性陽)이 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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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계남길 37 계남마을 남쪽 내동산기슭 내산사 경내.
【시기】 1977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6cm, 너비 65cm, 두께 36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德崇業廣하고 學博聞多하야 爲士林領袖요 鄕省著龜則後人이 宗仰之寓慕之를 愈久愈新이니 惟修堂先生鄭公이 亦其人焉라 公諱鍾燁이오 字宅新이오 修堂其號니 籍東萊라 尙書左僕射太府卿諱穆이 爲上祖하야 著於麗라 諱絪이 恭愍朝에 以都指揮使로 樹功하고 生諱暹하니 入李朝에 吏判이오 生諱興嗣하니 禮判이니 三世俱享承芳祠라 禮判이 有五子하니 皆登文科에 玉樹交柯라 長諱坤이니 直學士大司成이라 英陵晟時에 文學이 鳴世하야 賜號復齋하고 命修國史하니 恩眷이 隆重이라 際乎 莊光에 棄官晦采하니 士林이 稱復齋先生而俎豆之하고 繼而爲公爲 卿에 功名事業이 輝映百世라 傳至習讀諱大壽하야 道義學問이 爲儒林帲幪而當壬亂에 與全公繼宗辛公麒洪公滭宋公大弘四友로 擧義討敵하고 敵退而止라 族後孫寅普撰墓銘하고 奉安五賢祠하여 諱東俠號慕齋니 以學行으로 登道剡하나 除官不就라 長陵南漢之變에 擧兵至礪山이라가 聞和成하고 痛哭歸隱하니 享駬山永慕祠라 曾祖諱甲東이니 有文行하고 祖諱寅敏이니 號省齋라 以孝學으로 有鄕薦하다 生二男하니 長春北이니 諱暻謨요 次秋南이니 諱聖謨니 皆以聞望으로 兄難弟難이니 秋南이 是公之皇考요 妣난 天安全氏文平公後龍錫女니 備婦德이라 公이 高宗乙酉生하니 甚岐嶷하야 自幼於兩親에 愛敬이 篤至하고 就學에 誠勤的確하야 自守繩尺에 踔厲不群이라 置心平易난 如橫渠訓하고 徐徐玩味난 如紫陽言하야 弱冠에 學問이 巳成就하니 可以紹德襲美라 父病에 四朔刀圭에 衣不解睫不交하고 遭憂에 盡戚易하고 於內艱에 亦如之라 墳墓稍遠이나 月三省하고 及夫日에 痛如袒括이라 就正於艮齋田翁하야 得聞性理之源하고 講質于郭勉宇奇松沙諸賢하야 益致其知라 神精이 霞擧에 風儀峻正하야 松貞竹秀요 玉潔氷寒이니 望之喬嶽이오 卽之春風이라 養內而不遺外하야 敬義夾持에 平也如準하고 方也如矩라 常曰禮者난 仁之節文이오 義者난 仁之裁制니 非禮義면 不得行仁이라하고 操存省察에 若神明之在側하며 霽潦裘葛에 動止行藏이 不差錙銖斤兩이라 不以外物로 役吾耳目하고 發爲文章에 典雅渢渢이라 簡而詳하고 直而溫하야 掇芬搴芳에 如走盤之珠하야 用副人家金石之誌하고 慨閨範之陵夷하야 編冊古女士嘉言善行하야 爲巾幗明鑑而警覺之하고 愛君憂國之心이 子午指針이라 聞政敎之紕繆에 太息之痛哭之를 不以在野有間이러니 遽當屋社에 志在東海西山이라 括囊含黙하야 視虎吼如蚊咶하고 不籍不稅하야 置死生於度外라 與菊史李柄淵과 松坡全麟權으로 力助靜齋李錫庸海山全基泓擧義旅하고 恐殲倭記事가 見奪島兵하야 請秘藏自家而傳後하야 終得其完璧하고 南遷北徙에 不恒其居하고 本食澗飮하며 緇巾蕙帶로 固守東崗이나 如珠沈淵玉藏櫝하여 問業者隨處塡門이라 巨冶洪爐가 鑄出名器하야 補其黥刖에 虛往實歸하니 月浪之多碩士가 良有以也라 一自啓手足으로 及門之全州崔相冕이 與諸益及其子貴泳으로 設隆親契而寓慕하고 幾年積誠에 建祠以俎豆하고 築齋而講讀이나 猶有未盡這莊할새 使全炳和及其孫相濂으로 來謀玄刻於余하니 是無異反鑑而索照요 却步而圖前이라 固辭不得일새 切念際此虐浪滔滔에 人多梔蠟粉飾하고 狐號鱔舞而僉章甫拔力揚虔하야 尊賢衛道에 發輝斯文正脉하니 感佣殊深이라 遂銘曰
就正長德 講質大賢 學問正路 孝悌爲先 發爲詞章 文垣主盟 不移肘案 造詣益精
吁嗟國步 馬鹿換形 玄黃飜覆 飮泣新亭 東遷西徙 不恒寄栖 玉蘊山輝 桃李成蹊
菁莪長育 棫樸成材 高風逸韻 半夜一雷
檀紀四千三百十年丁巳夷則月上日 晋陽 河千秀 謹撰
【풀이】 덕은 높고 공업(功業)은 넓으며 학문이 넓고 문견이 많아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고 지방의 원로(元老)가 된 분이 있다면 후인들의 추앙하고 사모함이 해가 오래일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법인데 수당선생 정공(政公)은 역시 그러한 분이라 하겠다. 공의 휘는 종엽(鍾燁)이오 자는 택신(宅新)이며 수당은 그 호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상서 좌복야 태부경(尙書左僕耶太府卿) 휘(諱) 인(絪)은 공명왕때에 도지휘사(都指揮社)로 큰 공을 세웠고 이분이 휘 섬(暹)을 낳으니 예조판서인데 3대가 모두 승방사(承芳祠)에 모셔졌다. 예조판서가 아들 다섯 분을 두어 모두 문과에 오르니 그야말로 옥수(玉樹, 남의 자제를 높혀서 부르는말)의 가지가 뒤얽혔다 하겠다. 맏이의 휘는 곤(坤)이니 직학사(直學士)에 대사성이다. 세종조의 융성하던 때에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복재(復齋)라 호는 내리고 국사(國史)를 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은우(恩遇)가 융숭하였다. 그러나 단종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벼슬을 버리고 명성을 숨기니 사람들이 목재선생이라 부르고 제사를 올렸다. 이 뒤로도 대를 이어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공명과 사업이 백세(百世)에 빛났다. 습독(習讀) 휘 대수(大壽)에 이르러서는 도의(道議)와 학문으로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임진란(壬辰亂)을 당해서는 전공 계종(全公繼宗) 신공 기(辛公麒) 홍공 필(洪公熚) 송공 대홍(宋公大弘) 등 네 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야 그만두었는데 족후손(族後孫) 인보(寅普)가 묘갈명을 지었고 오현사(五賢柌)에는 의병을 일으켜 여산(礪山)까지 왔다가 회의(和議)가 이루어졌음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영영 출입을 끊었는데 이산(駬山)의 영모사(永募柌)에 모셔졌다. 증조의 휘는 갑동(甲東)이니 문행(文行)이 있었고 조부의 휘는 인민(寅敏)이니 호는 성재(省齋)이니 효행과 학문으로 향천(鄕薦)을 받았다. 이분이 두 아들을 두어 맏이 춘북(春北)의 휘는 경모(暻謨)요 다음 추남(秋南)의 휘는 성모(聖謨)이며 모두 명망이 있어 난형(難兄) 난재(難弟)라 하였는데 추남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천안전씨(天安全氏)는 문평공(文平公)의 후손인 용석(龍錫)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었다. 공은 고종 을유년(乙酉年, 1885, 고종 22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매우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함이 정확하여 스스로 과정(科程)을 지켰으나 공부의 성취에는 반군(扳群)의 진척이 있었다. 마음가짐이 평이(平易)함은 횡거(橫澽),「송<宋>의 학자 장재<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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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계서리 388-8. 계남마을 진입로변.
【시기】 1923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9cm, 너비 37cm, 두께 11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本所刊 五倫行實 以爲獎善而列郡單子來到 謹按全北鎭安郡馬靈面溪南里 故烈女金海金氏 濯纓先生後 国珉之女 天安大提學 諱翊 曾孫 潭陽府使 諱順生十四世孫 全相燮妻 自幼貞淑 及笄 事舅姑至孝誠 敬君子無違 往在丙戌 夫以時疾 幾至危境 晝夜禱天 願以身代 斫脂注血於口 甦延一日 而終哀痛擗踊因欲下從 時年二十三也 回念宗祀無託 幼孤在襁 强忍含痛 三年執喪 一如袒括 子名炳寔 敎養義方 聘師成就 勤儉治産 克成家道 炳寔妻 南原楊氏 素有淑德 事姑金氏至孝 以盡婦道 炳寔又夭 喪葬祭禮 無所託 永矢守節 兩世烈行 世所罕有 如此卓異之節 宜乎旌表 而但時制有異 尙此未褒 豈不慨然 本所仍爲鋟梓 壽傳百世 使之立碑建閣 永樹風聲 以爲褒狀事
孔子誕降二千四百七十四年 癸亥 月 日
五倫行實重刊所 都有司 都事 鄭敎永, 約長 判書 朴箕陽, 竪 長姪 炳善 炳穆, 孫婿 廉應淳 朴魯涉
【풀이】본소(本所)에서 간행(刊行)하는 오륜행실(五倫行實)은 선행(善行)을 권장하려는 것인데 열군(列郡)의 단자(單子)가 도착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전북(全北) 진안군(鎭安郡) 마령면(馬靈面) 계남리(溪南里)의 고(故) 열녀(烈女) 김해김씨(金海金氏)는 탁영선생(卓纓先生)의 후손인 국민(國珉)의 따님이고, 천안(天安) 대제학 휘 익(翊)의 증손 담양부사(潭陽府使) 휘 순생(順生)의 18세손 전상섭(全相燮)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정숙하였는데 시집을 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부군(夫君)을 존경하여 어김이 없었다. 지난 병술년(丙戌年: 고종23, 1886)에 부군이 시질(時疾: 계절 따라 유행하는 병)로 거의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밤낮으로 하늘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며 손가락을 짓찧어 피를 병자의 입에다 드리우니 소생하여 하루를 더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김씨가 애통하여 가슴을 치고 뛰면서 호곡하여 그길로 하종(下從)하려고 하였으니 그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생각해보니 종사(宗祀)를 부탁할 곳이 없고 어린애는 강보에 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억지로 슬픔을 참고 3년의 집상(執喪)을 마치 처음 상(喪)을 당하였을 때처럼 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병식(炳寔)이다. 의(義)로운 방향으로 가르치고 선생님을 맞아다가 크게 성취시켰는데 그도 근검(勤儉)으로 살림을 하여 가도(家道)를 잘 이루었고 병식의 처 남원양씨(南原楊氏)도 본래 숙덕(淑德)이 있어 시어머니 김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그런데 병식이 또 요사(夭死)하여 상장제례(喪葬祭禮)를 맡길 데가 없으매 또 영영 수절(守節)하기로 굳게 마음을 정하였으니 두 대(代)의 열행(烈行)은 세상에서 아주 드믄 일이다. 이러한 남다른 절의(節義)는 정표(旌表)가 있어야 마땅하지만 다만 시대의 제도가 다름이 있어 아직까지 포양(褒揚)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일이 아니겠는가 본소에서는 이내 책으로 발간하여 백세(百世)토록 전해지게 하고 또 비(碑)로 세우고 각(閣)을 지어 길이 풍성(風聲)을 수립하도록 포장(褒狀)을 지어 주는 바이다.
공자탄강2474(1923)년 계해(癸亥) 월 일
오륜행실중간소(五倫行實重刊所) 도유사(都有司) 도사(都事) 정교영(鄭敎永) 약장(約長) 판서(判書) 박기양(朴箕陽), 수(竪,비석을 세움) 장질(長姪) 병선(炳善) 병목(炳穆), 손서(孫婿) 염응순(廉應淳) 박노섭(朴魯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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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學生天安全公辛權之 配孺人東萊鄭氏孝烈碑(학생천안전공신권지 배유인동래정씨효열비)
【위치】 마령면 계서리 388-8. 계남마을 진입로변.
【시기】 197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5cm, 너비 42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古云孝爲百行之源이라하니 盖五典이 以之而敍하고 三綱이 以之而立이라 故로 孝親敬夫는 爲婦之道요 宜家之本이라 月浪縣二十里許馬靈溪南里故夫人鄭氏는 籍東萊니 翼惠公諱蘭宗后晩谷東朝女요 天安全氏文平公諱文軾后永璣子辛權妻也라 丰姿淑德이 出於天器하여 年十三에 母病이 急危하니 斫指注血하여 延壽七日하고 遭艱에 絶食三日하며 十七而適人하여 孝養舅姑하고 敬奉君子하되 極盡其誠이라 姑氏疚疾委席에 築壇祈天하고 揣摩心志하여 保護懇篤이나 竟終天年하니 含痛哭泣하며 哀毁逾制라 時丁島夷虐政故로 死卽葬魄이 世皆風靡라 夫人이 牢拒曰士之葬以踰月은 禮也라 豈可 畏彼而違禮乎아 하고 遵行古法하고 夫君이 以風靡로 若楚三載에 奉藥祈斗하고 喪葬禮節을 一如姑氏時하니 雖古之賢媛이라도 不是過也라 鄕誦其孝하고 比之曹孟하여 將擬闡揚하니 夫人이 聞卽拒之하고 桑麻業職하여 振其家門이라 吾族注容等諸甫가 抱其薦狀하고 昌炎遠訪曰朱夫子云先世有美에 不知는 不明이요 不傳은 不仁이라 하니 不肖輩不明不仁之尤者也라 幸奉士林指揮하여 謹竪片石하니 願惠之以文하여 俾伸微忱이며 感極幽明이니라 噫라 彰善闡美는 彛性所同이니 不可以耄耋로 辭하여 遂銘曰 風采端莊 玉潔氷淸 指血救母 幼年至誠 以事舅姑 志物備養 贍護病姑 孝莫可狀 竟至大化 痛禁俗尙 遵禮拒夷 踰月厚葬 奉夫風靡 殫竭誠敬 扶綱振紀 寔出天性 成均校宮 褒賞特行 一片穹碑 百歲輝映
大韓民國六十一年己未立秋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옛말에 이르기를,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니 오륜이 이것으로 순서를 정하고 삼강이 이로써 세워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지아비를 공경함은 부인의 도리요 가례의 근본이다. 마령면 계남리 고 부인 정씨는 본관이 동래이니, 익혜(공翼惠公) 휘(諱) 난종(蘭宗)의 후손 만곡(晩谷) 동조(東朝)의 딸이요, 천안 전씨(天安全氏) 문평공(文平公) 휘(諱) 문식(文軾)의 후손 영기(永璣)의 아들 신권(辛權)의 처이다. 예쁜 자태와 정숙한 덕이 천품에서 나온 것이라, 13세에 어미의 병이 위급하니 손가락을 갈라 피를 넣어 수명을 7일간 연장케 하였고, 어미의 상을 당하매 3일을 절식하였다. 17세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지아비를 공경하고 받들매 극진 정성이었다. 시어미가 오랜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단을 쌓아 하늘에 기도하고 시어미의 심지를 헤아려 극진히 모셨으나, 결국 천명을 다하니 통탄 곡읍하며 슬퍼함이 예제를 넘었다. 때는 왜놈의 학정을 당하여 임종하면 곧바로 장사지내는 세태가 풍미하였으나 부인이 딱 잘라 거절하며, 양반의 장례에 달을 넘김은 종래의 예법이다. 어찌 저 사람들이 두려워 예법을 어길 것인가 하고 고법(古法)을 지켰다. 지아비가 중풍으로 3년간 고생하게 되자 약을 받들어 올리고 북두칠성에게 기도하며 상장(喪葬) 예절을 시어미 때와 같게 하니, 비록 옛날의 어진 여인이라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고을에서 그 효를 칭송하고 조맹(曹孟, 조휴[曹休]의 처[妻])에 비견하여 장차 천양하려 하니, 부인이 들은 즉 거절하고 누에치고 삼베 짜며 가업을 일으켜 가문을 떨쳤다. 나의 친족 하주용(河注容) 등 여러 선비가 그 천장(薦狀)을 품고 폭염하에 멀리 찾아왔다 그러면서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선대(先代)에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데 알지 못함은 밝지 못함이요, 전하지 않음은 불인(不仁)이라 하니 불초(不肖) 자기들은 불명불인(不明不仁)이 심한 자”라 하더라. 다행히 사림이 받들어 지휘하여 삼가 편석을 세우고 비문을 원하거늘, 작은 정성이나마 펴서 저승과 이승을 감동시킬 일이다. 희(噫)라! 선을 표창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불변의 도리인 바, 늙은이가 외람되게 사(辭)하여 명하기를 “풍채는 단장하여 옥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았네 / 손가락 피를 어미에 먹여 어미를 구하는 등 유년부터 지성이었네 / 시부모를 섬김에 마음과 몸을 아울러 공궤했네 / 병든 시어미 편안하게 구환하니 그 효성 형용하기 어렵네. / 필경 운명하니 애통을 참고 전래의 풍속을 숭상하여 / 왜놈의 풍속 거부하고 달 넘겨 후히 장사지냈네. / 지아비 풍병 수발에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 기강을 세우고 떨침은 진실로 하늘이 낸 성품일세. / 성균관과 향교에서 특행을 포상하여 / 비 하나를 세우니 백세에 빛나리.” 대한민국 61년 기미(己未) 입추 진양 하천수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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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孝子宋鎭杓紀蹟碑(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효자송진표기적비)
【위치】 마령면 계서리 835-1. 서산마을 앞 관진로 진입로 우측 비탈.
【시기】 1962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30cm, 너비 4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孝者 百行之源 萬善之首也 人或苟有其實 則褒而揚之 紀蹟於貞珉 其於扶綱厚俗 豈可曰少也哉 礪山宋公 諱鎭杓 字永執 松齋別號也 勝國 郎山府院君 諡文肅公 諱琰后 本朝 莊陵節臣 遯壑先生 諱慶元 於公十三世祖 通政諱得運 嘉善諱啓玉 祖若考兩世職銜 公之優老典 追恩也 公誠孝天植 事親有道 愉色惋容 溫凊甘旨 靡不竭力 疾則 嘗糞驗症 目不交睫 及喪哀毁 不致梳沐 不御酒肉 晨夕展省 不避雨雪 遭內艱 亦如前喪 而至老彌篤 鄕人過廬者 莫不流涕焉 奉先以禮 敎子以義 睦於族 信於友 其他餘行 可知其推此無論也 博涉經史 文學德望 見重士友 累登剡薦 桑海日變 未蒙天褒 雲仍齎恨 樹碑閭里也 公之孫柱淳 介梁丈仁權氏 要記紀蹟 貴泳 德迷 而安敢當也 公之孝德高風 慕仰已宿 而懿性所在 不忍固辭 據來狀略敍 盡心力而尸其事者 孫 柱泳 柱彩 曾孫 理燮 玄孫 在鈺云爾 檀君紀元四二九六年 癸卯仲冬日 東萊 鄭貴泳 謹述 南原 梁昌權 書 【풀이】 무릇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다. 사람이 혹 그런 사실이 있으면 포양(褒揚)하고 빗돌에 사적을 새겨둔다면 강상(綱常)을 북돋고 풍속을 두터이 함에 그 공효(功效)가 어찌 적다하겠는가! 여산송공(礖山宋公)의 휘(諱)는 진표(鎭杓)요 자(字)는 영집(永執)이며 송재(松齋)는 그 별호(別號)이니 고려(高麗)의 낭산부원군(郎山府院君) 시초 문숙공(文肅公) 휘 염(琰)의 후예이다. 본조(本朝: 조선을 지칭한 말) 장릉(莊陵)의 절신(節臣) 돈학선생(遯壑先生) 휘 경원(慶元)은 공의 13세조이고, 통정(通政) 휘 득운(得運)과 가선(嘉善) 휘 계옥(啓玉)은 조부와 아버지 양세(兩世)의 직함과 명함인데 공의 우로전(優老典)으로 추은(追恩)한 것이다. 공은 효성을 하늘에서 점지 받아 어버이를 섬김에 도리가 있어 항상 온화한 얼굴빛을 잃지 않았고 거처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 드렸으며 맛있는 음식의 봉양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가 병환이 나면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하였으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하여 목욕과 빗질을 하지 않았고 술과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묘소를 살펴 비가오나 눈이오나 거르는 일이 없었는데 내간상(內艱喪)을 당해서도 전상(前喪)과 똑같이 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니 여막(廬幕)을 지나던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상을 받들기는 예(禮)로써 하고 아들을 가르치기는 의(義)로써 하였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고 벗들에게는 신의가 있었으니 여타의 행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더 논할 것이 없겠다. 경사(經史)에도 널리 섭렵(涉獵)하여 문학과 덕망으로 사우(士友)사이에서 추중(推重)을 받아 여러 차례 천장(薦狀)이 올라갔으나 세상이 날로 변하여 조정의 포장(褒獎)을 받지 못하니 자손들의 한이 쌓여 마을 어귀에 비를 세우려는데, 공의 손자 주순(柱淳)이 양장(梁丈) 인권씨(仁權氏)를 통하여 나에게 기적(紀蹟)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덕이 부족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마는 공의 효덕(孝德)과 고풍(高風)을 익히 듣고 암모해 온 지 오래이고, 나 또한 이성(彝性)이 있는 터에 어떻게 굳이 사양 하겠는가 그리하여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간략히 서술하는 바이니, 심력(心力)을 다하여 그 일을 맡아 추진한 사람은 손자인 주영(柱泳), 주채(柱彩)와 증손 이섭(理燮), 현손 재옥(在鈺)이다. 단기4296(1963)년 (음)11월 일 동래 정귀영(鄭貴泳) 근술(謹述) 남원 양창권(梁昌權)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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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계서리 1312. 오동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78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220cm, 너비 50cm, 두께 3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禮經에 云하되 女有三從之道하니 在家從父하고 出嫁從夫하고 夫死從子라하였으나 當今世道가 變遷하야 婦人三從之道가 絶已久矣라 節婦礪山宋氏之行은 可謂盡婦道하며 扶植風敎於頹世者也라 節婦宋氏는 遯壑公諱慶元의 後 嘉善大夫諱鎭杓의 子 秉浩의 女요 天安全氏文平公諱文軾의 後 成均生員諱翊華의 七代孫 永宗의 妻라 夫君이 初聚于全義李氏炳年의 女하야 生一男하고 襁褓中其母李氏가 卒하여 其父永宗이 宋氏에 再娶하야 未得男女 而偶以奇疾로 百藥이 無效而卒하니 婦人宋氏가 同居不過四年에 時年이 二十三이라 卽欲下從이라가 旋念老姑幼孤하고 含痛忍哀하여 送終盡禮하고 晝鋤夜織하야 孝奉老姑하고 善養前室之子以成聚하야 得其多孫하고 潤産家道에 隣保扶助하고 承先裕後에 和睦族戚하니 鄕里가 感服에 屢次褒賞하고 文以闡揚而 南北儒林이 同聲相應하야 屢有薦狀이로되 以時變으로 未蒙褒典이나 實頹世之盛績也라. 天安 全鍾厦 謹撰
【풀이】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여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으니 출가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하였으나 지금은 세도(世道)가 변천하여 여자의 삼종지도가 끊긴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여산송씨의 행실은 부도(婦道)를 다하고 쇠퇴한 세상에 풍기(風紀)와 교화(敎化)를 심어 준 것이라 하겠다. 절부 송씨는 돈학공(遯壑公) 휘 경원(慶元)의 후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휘 진표(鎭杓)의 아들 병호(秉浩)의 따님이요 천안전씨(天安全氏) 문평공(文平公) 휘문식(文軾)의 후예인 성균생원(成均生員) 휘 익화(翊華)의 7대손 영종(永宗)의 처(妻)이다. 부군(夫君)이 전의이씨(全義李氏) 병년(炳年)의 따님을 초취(初娶)하여 1남을 낳고 그 아들이 강보(襁褓)에 쌓여있을 때에 이씨가 졸하자 영종이 송씨를 재취(再娶)하여 남녀간에 얻기 전에 부군이 우연히 기특한 병을 얻어 모든 약이 효험이 없이 졸하니 부인 송씨는 함께 산 지 4년에 지나지 않고 그때 나이 23세였다. 곧바로 하종(下從: 남편을 따라서 죽음)하려다가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돌이켜 생각하고 통한을 품은 채 슬픔을 참고 송종(送終)에 예(禮)를 다한 뒤에 낮에는 밭을 매고 밤이면 길쌈을 하여 늙은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들고 전실(前室)의 아들을 잘 길러 성취(成娶)를 시켜 많은 손자를 얻고 살림살이도 윤택해져서 조상을 잘 받들고 후손에게 복을 끼쳤으며 이웃간에 서로 부조하고 족척간에 화목하니 향리(鄕里)에서 감복하여 여러차례 포상(褒賞)하고 글로써 천양(闡揚)하였으며 남북(南北)의 유림(儒林)이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여 누차 천장(薦狀)을 올렸지만 시대의 변천으로 포전(褒典)을 입지 못하였으나 사실 쇠퇴한 세상의 성대한 행적(行蹟)이라 하겠다. 천안(天安) 전종하(全鍾厦)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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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계서리 1312. 오동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78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220cm, 너비 5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治南梧桐里에 有一短碣이 兀然立乎洞口하니 卽故孝烈婦 孺人李氏紀蹟之碑也라. 按孺人은 延安氏니 文良公隱峯 諱元發後요 成均生員芝隱 諱龜彩五世孫이요 士人重琬女也니 生而天性이 溫淑하야 事親以孝하니 九族稱誦이러라 及笄에 爲延安金鍾植妻하니 公은 卽 文靖公逸溪諱自知後요 幼學元基子也라 孺人이 旣歸에 上有姑氏在堂하야 以老病委床이어늘 孺人이 晝夜侍側하여 衣不解帶하고 扶持調護十二載에 終始如一日하고 竟遭大故에 遑遑望望하야 致哀盡制하니 於是孝譽가 藉藉益播焉하니라 敬承君子하야 勤儉宜家러니 未幾에 夫子罹疾하야 百藥無靈이어늘 孺人이 致憂不已하야 每夜汲泉하야 祈斗願代하고 及其危谹에 斫脂注血하고 割股煮進하야 漸得回甦라 因欲生魚어늘 孺人이 躬往前川하야 將欲求之하야 方行石洑沙濱之際에 忽得躍鯷하야 持歸而供之하니 遂見夫病得差하야 和樂同居러니 厥後에 又患重病五年에 多方藥餌가 無有可救之術이라 惟願生雉어늘 孺人이 念念求之 當用藥材하야 適採竹葉이러니 忽有飛雉가 墜入於前이어늘 抱歸烹進하야 旋卽奏效하니 鄕里驚歎하야 以爲至誠所感致云이러라 嗚呼라 孺人은 可謂賢孝且烈矣로다 盡孝于姑하고 竭力于所天하야 只知有夫而不知有其身하야 行人所難行 而垂令譽於後世하니 如其躍鯷飛雉之徵이 苟非至誠之格天動地者면 其能致乎哉아 與故人氷鯉幕衝으로 可疋美矣니 豈不偉哉아 惜其行義가 宜蒙天褒이어늘 而只因時與古異하야 尙無綽楔之擧하니 添得士女之齎恨者-久矣라 一鄕章甫가 薦于五倫行實刊所하야 而得有褒狀하니 幸何如之리요 今其冑胤吉泳이 懼懿德泯沒하야 將伐石紀蹟일새 走其再從姪錫柱하야 介全永和甫하야 遠來謁文이어늘 余以不德으로 固辭未獲하고 則只據狀摭實如右而還之하야 刻諸碑陰하야 使後觀感而興起焉하노라 抑斯役也에 全壽南 安導遠甫 亦多賢勞云 垈地獻誠 全海(缺) 檀紀四三一一年 戊午 復月 下澣 奈城 嚴命涉 撰 延安 李湘寧 謹書
孫 海柱 良柱 垣柱 奉柱 萬柱 孫婿 羅州 林鍾允 曲阜 孔文洙
【풀이】 진안(鎭安) 치소(治所)의 남쪽 오동리(梧桐里)의 어귀에 단갈(短碣)이 하나 우뚝 서 있으니 고(故) 효열부(孝烈婦) 유인(孺人) 이씨(李氏)의 기적비이다. 상고하건대 유인은 연안씨(延安氏)이니 문양공(文良公) 은봉(隱峯) 휘 원발(元發)의 후예로 성균생원(成均生員) 지은(芝隱) 휘 구채(龜彩)의 5세손이오, 사인(士人) 중완(重琬)의 따님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온숙(溫淑)하여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니 온 종족들이 칭송하였다. 나이가 차자 연안(延安) 김종식(金鐘植)의 처가 되었는데 김공(金公)은 문정공(文靖公) 일계(逸溪) 휘 자지(自知)의 후예인 규학(糾學) 원기(元基)의 아들이다. 유인이 시집에 와 보니 위로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노병(老病)으로 병석에 있었다. 유인이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간호하기 12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고 마침내 상(喪)을 당해서는 경황없이 슬퍼하고 치상(治喪)에 예제(禮制)를 다하였는데 그러자 칭찬이 자자하여 송성(頌聲)이 널리 퍼졌다. 부군(夫君)을 경건하게 섬기고 근검절약하여 온 집안이 화목하게 지내더니 오래지 않아 부군이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였다. 유인이 끝없이 걱정하여 밤마다 우물물을 새로 떠다가 놓고 북두칠성에 빌기를 자신이 대신하겠다하고 병이 더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입에 드리우고 허벅지의 살을 발라 끓여서 올리니 병이 점차 회복이 되었다. 이윽고 생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유인이 몸소 앞 시내에 나가 잡아보려고 하여 막 돌보[石洑]의 모래 언저리로 가려고 할 즈음에 느닷없이 메기 한 마리가 뛰쳐나와 움켜쥐고 돌아와서 바치니 부군의 병이 차도가 있어 화락하게 잘 지냈다. 그 뒤에 부군이 또 5년간이나 중병을 앓아 다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고 오직 산 꿩만 먹고 싶다고 하였는데 유인이 그 생각을 하면서 우선 달리 약재로 쓰려고 대잎[竹葉]을 따고 있으려니 갑자기 꿩이 날아들어 유인의 앞에 거꾸러지거늘 안고 돌아와 다려서 올리니 곧바로 효과가 있자 인근 마을에서 놀라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지성에 감동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호라! 유인은 가위 어질고 효성스럽고 정렬(貞烈)이 있다하겠다. 시어머니에게는 효성을 다하고 부군에게는 심력을 다하여 다만 부군이 있는 줄만 알고 자기 자신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바를 행하여 슬거운 명예를 후세에 전하였는데 이를테면 메기가 뛰쳐나오고 꿩이 날아든 것 같은 이징(異徵)은 진실로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명케 한 것이 아니면 될 법이나 한 일이던가 옛 사람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오고 새가 저절로 날아들어 천막에 부딪친 일과 훌륭함이 필적(匹敵)하다 하겠으니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애석하게도 그 행의(行義)는 나라의 포장이 있어야 마땅하건만 세상이 옛날과는 다른 까닭으로 아직까지 정려(旌閭)의 거행이 없었으니 사녀(士女)의 억울해함이 더한지 오래였다. 그러던 차에 온 고을 장보(章甫:선비)가 오륜행실간행소(五倫行實刊行所)에 천거하여 포장(褒狀)을 얻었으니 그 다행함이 어떻다하겠는가 지금 그 맏아들 길영(吉泳)이 유인의 아름다운 덕이 민몰(泯沒)할가 두려워하여 돌을 다듬어 사적을 기록하려고 할 즈음 전영화보(全永和甫)의 소개로 그 재종길(再從姞) 석주(錫柱)를 멀리 나에게 보내서 글을 청하였다. 나는 부덕한 사람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다만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사실만 간추려 돌려보내서 비의 뒷면에 각하여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보고 느껴서 진작(振作)하게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전수남(全壽南), 안도원(安導遠) 두 선비의 현로(賢勞)가 많았다 한다. 부지(敷地)를 희사한 사람은 전해■(全海[缺])이다. 단기 4311(1978)년 무오(戊午) 복월(復月) 하한(下澣) 나성(奈城) 엄명섭(嚴命涉) 찬하고, 연안(延安) 이상녕(李湘寧) 삼가 쓰다. 손(孫) 海柱 良柱 垣柱 奉柱 萬柱 손서(孫婿) 나주(羅州) 林鍾允 곡부(曲阜) 孔文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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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탑영제 동쪽 기슭.
【시기】 1983년
【개요】 시비에 담락당의 시 ‘초야 창화(初夜唱和)’와 삼의당의 시 ‘화답의 노래’가 김해강 시인의 번역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1769년(영조45) 남원 서봉방에서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 하립(湛樂堂河氵昱)과 삼의당 김씨(三宜堂金氏) 부인은 혼인 후 마령면 방화리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 분은 드물게도 부부간에 시인이었다. 특히 김삼의당은 규중의 여류문인으로 신사임당과 함께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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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마이산 남로 132[동촌리] 이산묘 비각 내.
【시기】 1956년
【형태】 비각 안에 들어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개요】 이 비의 전면 大韓光復紀念碑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휘호이고 후면 비문은 당시 부통령 함태영(咸台永)이 짓고 배길기(裵吉基)가 글씨를 썼다.
【비문】 돌아보건대 庚戌年 國恥의 날 江山과 黎民이 눈물에 잠긴뒤로 風風雨雨 三十有六年 或은 亡命의 길을 떠나 祖國光復을 爲하여 粉骨碎身한 이 얼마였으며 또 或은 國內에 머물러 志操로써 抗爭하다가 鐵窓下에 犧牲된 이 얼마였더뇨. 그러나 마침내 正義의 公道가 돌아오니 乙酉 八月十五日 先烈의 積功과 自由友邦의 勝利로 日帝의 醜跡은 물러가고 또다시 三年後인 戊子 八月十五日 自主政府를 立하니 이는 三千萬이 모두다 願하던바 湖南의 鎭安 父老들이 또 그 感激을 禁치 못하고 그 고장 馬耳山下에 一片石을 세워 이를 永久紀念코자 하여 李大統領의 題字를 求함과 아울러 내게 記文을 請키로 아직도 國土統一의 大業은 成就되지 못한채나마 이에 光復事蹟을 略記하므로써 諸賢의 참된 뜻을 길이 後世에 傳하는 바다.
檀紀 四二八九(1956)年 一月 日
大韓民國 副統領 咸台永 撰文 裵吉基 篆幷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