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追慕齋崔公斗七墓道碑(추모재최공두칠묘도비)

    【위치】 마령면 평지리 162. 원평지마을 동쪽끝 임진로변
    【시기】 1945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57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櫟泉宋文敬公 講道懷川之上 及門士 多彬彬 慕齋崔公其一也 公諱斗七 字子建 姓崔 崔之籍完山者 冑于完山府院君文忠公諱群玉 自是封君顯貴 代有聞人 有王柔平章事謚文肅 至諱瀁官贊成與 藝祖有子陵契 而守伯夷節 卒謚忠翼公 世稱晩六先生 三傳諱琮 以壯元進士 見 莊陵禍 不仕晦處鎭安山中 曰德立 秉節校尉 曰璡 階三品職 曰以岌 有儒行 延安金以粹女 三世諱若妣 慶州朴文龜女 其本生父母也 公以 肅廟癸亥生 生有異質 語黙作止 動遵規雘 及長就學 嗜讀書心近四字 循環熟複 而尤用力庸學 如天人性命義 厚封外王父祭田 使之永世不餒 性於周急 見人凍餒 推衣食之 値歲大饑 收人棄兒鞠育 娶婦以家之 具資裝棺廓 以遂親戚知舊婚葬者多 英廟丙子四月十二日 壽七十四 終于平地里第 葬于里後掛陽山艮坐原 配延安金氏 父世圭 葬祔墓下 育三男二女 男玄暐 有二子 曰述 逌 玄暉有二子 曰逵 逄 玄曜有一子曰邃 女行晉州姜昌震 慶州李昌根 公資稟旣異 孝友成性 事親有道 存養深熟 操履端確 誠信孚于朋舊 恩義浹於鄕黨 士林列其學術孝行 祭于社薦于朝 至 高宗乙卯 特加褒崇 贈司憲府監察 公之六世孫相冕 以當時門人縣監蘇公洙中狀 千里蹐門 徵余藥石之銘 余病臥江上 萬念灰寒 獨於公孝義之感人深 不忍終辭 剔狀而繫之銘 銘曰 甘白其質 孝自天植 學而充之 操履克篤 而學而孝 爲世矜式 襟紳俎豆 王國褒嘉 槩公終始名實無差 我銘不愧 可詔無涯
    高宗甲子後八十二年乙酉肇夏下浣 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副提學同知 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 世子侍講院檢校輔德驪興閔丙承撰 通政大夫前秘書院丞安東金寗漢篆
    【풀이】 역천(櫟泉) 송문경공(宋文敬公, 명흠[明欽])이 회천(懷川) 위에서 도학을 강의하고 있을 때, 문하에는 빈빈(彬彬, 문채나는 모양)한 선비들이 많았는데, 추모재(追慕齋) 최공(崔公)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공의 휘는 두칠(斗七)이요, 자는 자건(子建)이며, 성은 최씨(崔氏)이다. 최씨로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한 사람들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휘 군옥(群玉)에게서 비롯하였다. 그로부터 군(君)에 봉해지고 현달하여 대대로 드러난 사람이 있었는데, 휘 유(王柔)는 평장사(平章事)에 시호는 문숙(文肅)이요, 찬성(贊成) 휘 양(瀁)에 이르러서는 이태조(李太祖)와 자릉(子陵, 후한[後漢] 엄광[嚴光]의 자)과 같은 절개를 지켰다. 사망하자 충익공(忠翼公)의 시호가 내렸는데 세상에서는 만육 선생(晩六先生)이라 부른다. 3대를 내려와 휘 종(琮)은 장원진사(狀元進士)로 단종의 화(禍)를 보고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진안(鎭安)의 산중으로 들어와 숨어서 살았다. 이름하여 덕립(德立)은 병절교위(秉節校尉)요, 진(璡)은 벼슬이 3품직(三品職)이며, 이급(以叛)은 유행(儒行)이 있었는데, 공 이상의 3대의 휘함(諱銜)이다. 연안(延安) 김이수(金以粹)의 따님은 어머니이고, 휘 이구(以山久)와 경주(慶州) 박문구(朴文龜)의 따님은 생가(生家)의 부모이다. 공은 숙종 계해년(癸亥年, 숙종 9, 1683)에 태어났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동지(動止) 어묵(語默)에 법도를 따랐다. 커서 서당에 들어갔는데, 글읽기를 좋아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돌려가면서 숙독하였고,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더욱 힘을 써 천인(天人)의 성명(性命,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에 대하여 깊이 궁리하였다. 성품이 남의 위급을 구제함을 좋아하여 외조부의 위토를 후히 장만하여 길이 궐향(闕享)치 않게 하였고, 남이 굶주리고 헐벗음을 보면 자기의 밥과 옷을 먹이고 입히고 하였다. 때마침 큰 흉년이 들자 남이 버린 아이들을 거두어 기르고 키워서 시집 장가를 들였으며, 혼수(婚需)와 관곽(棺廓)을 마련하여 친척과 친구들의 혼인과 상장(喪葬)을 도운 적이 매우 많았다. 영조 병조(丙子, 영조 32, 1756) 4월 12일 향년 74세로 평지리(平地里)의 자택에서 사망하여 마을 뒤 괘양산(掛陽山) 간좌원(艮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세규(世圭)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 아래에 장사지냈는데 3남 2녀를 길렀다. 아들 현위(玄暐)는 2남을 두니 술(述)과 유(賜)요, 현휘(玄暉)는 2남을 두어 규(逵)와 방(澄)이며, 현요(玄曜)는 1남을 두어 수(遂)이고, 딸은 진주(晉州) 강창진(姜昌震)과 경주(慶州) 이창근(李昌根)에게 출가하였다. 공은 자질이 특이하고 효우(孝友)가 천성을 이루어 어버이 섬김에 도리가 있었고, 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이 깊고 조리(操履)가 굳건하여 성신(誠信)은 붕우간에 믿음을 주었고, 은애(恩愛)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사림이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도 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기묘년(己卯年, 고종 16, 1879)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포숭(褒崇)을 가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되었다. 공의 6세손 상면(相冕)이 당시의 문인이었던 현감 소공(蘇公) 수중(洙中)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천리 길에 나의 집을 찾아와서 나에게 묘비(墓碑)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병으로 교외(郊外)에 나와 지내면서 모든 생각이 다 식어버린 처지이나 유독 공의 효성과 의로움이 깊이 사람을 감명시키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차마 끝까지 사절하지 못하고 행장에서 간추려서 서술하고 명을 다는 바이다. 명하기를 “청백(淸白)을 좋아함은 그 천성이요 / 효성도 천성에서 뿌리를 내렸는데 / 배우고 확충(擴充)하여 조리(操履)가 독실하였다. / 그 학문과 그 효성 / 세상의 모범이 되니 / 선비들 제사를 올리고 / 나라에선 포상하였네 / 공의 시종을 더듬어보면 / 명성과 실지 다름 없으매 / 나의 명 부끄러움 없이 / 무궁토록 깨우쳐 주리로다.”
    고종 갑자(甲子, 즉위년) 후 82년 을유(乙酉, 1945) 4월 하순
    가선대부이조참판겸홍문관부제학동지 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성균관 사규장각 직제학 세자시강원 검교보덕(嘉善大夫吏曹參判兼弘文館副提學同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世子侍講院檢校輔德)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通政大夫前秘書院丞) 안동(安東)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