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마령면 임진로 2361-82. 마령체련공원 뒤 구산사 경내.
    【시기】 194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49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士之出於賢君之世者 豈皆素賢哉 世敎旣明勸懲之道 旣備 雖有未至者 不得不企而及也 生乎衰世者 上焉莫之率 襲乎邪者 非惟不之懲 而或以取榮 趨乎義者非惟無以勸 而適以取困 故惟賢者之資 不能以自立於其時 而有繇禮秉義者 可不謂難能耶 若退休齋宋先生是已 公諱寶山 字大仁 延安人 上世有諱卿 佐高麗有勳 三韓壁上功臣 封延安府院君 謚肅毅 曾祖諱勛 吏議判書 贈銀紫光祿大夫 祖諱光彦 大司成 出原州牧使 討賊殉職 考諱興道 和寧府少尹 妣靑松沈氏 以 世宗壬子二月三日生公 容儀端莊 尤意於學 遂閉門講習 經傳諸書 無不講貫悟解 而尤深於春秋 世謂之宋春秋 懷贄謁佔畢齋金先生爲師 而與寒暄堂一蠹兩先生 相厚善 質疑商確 開陳條暢 兩先生甚爲敬服 世宗戊辰 魁進士發解 遂登上舍 翌年擢別試 例授成均館典籍 兵禮二曹郞 拜司諫院正言獻納司諫 弘文館修撰校理 時有日蝕冬雷之變 上疏歷陳其弊 請緩刑獄納諫諍厲臣工 其畧以爲 人心者 國家之元氣 敎化 所以養元氣之具也 不任賢才 則敎化不行 不去苛歛則人心不安 失人心而得天下 蔑敎化而求治平 非臣之所敢知也 其目曰 黜豪强 除暴歛 明敎化 振紀綱 平獄訟 開言路 累數千言 又曰 天下之事 不進則退 國家之事 不治則亂 進退治亂 固有其數 而其所以進退治亂者 實由於人 故人君當審其治亂之機 勉其所以治 去其所以亂 期於必治而後已 不可安於小成 局於常規 悠泛度日 任其成敗也 臣伏賭 殿下 臨御以來 非常之灾 可愕之怪 不可殫記 天之譴告警懼 其亦至矣 尙且政踵舊弊 治效渺茫 則傷敗之極 指日可見也 今時政尙未有大慰民心者 皆由於紀綱不振 公道未著 諫官未達 獄訟不平之致也 伏願 殿下 擴乾坤至公之量 昭日月至明之鑑 辨邪正別賢否 而聽其所言 觀其所行 必使是非邪正 無所逃於聖明洞照之下 而知其爲君子 則必引而親之 使之必行其道 知其爲小人 則 必斥而遠之 必絶其根 則直諒剛直之士 爭效其忠 姦邪謏佞之輩 屛息其迹 而紀綱振則公道著 諫官忠則獄訟平矣 上獎其忠正 得大臣軆 陞通政 拜承政院同副承旨 又因虹變上剳 極言灾異酷甚 而上下恬嬉 政令因循 宜先勉强學問 存心克私 以爲修身之本 上虛心嘉納焉 庚午 陞嘉善同知中樞府事 歷都承旨 禮曹判書 時當 光陵朝 權奸秉政 恣行惡毒 見時事日非 鬱鬱歸鄕廬 與村叟野夫 同遊共談笑 若寒士意 曾不以富貴毁譽 擢其心焉 每値花辰楓秋 伴二三友朋 逍遙於泓崢之間 以樂山靜水 動仁智之眞趣常語人曰 學者能見得曾黙意思 則身心將入活潑地 爵祿無動於中 可知矣 甲子十月二日卒 墓在長水縣西 其蕪沒蓋久矣 配貞夫人水原白氏 判書荊玉女 生二子 長公善長城府使 次承衍爲仲父壽山后 之盛平山府使 之殷光州牧使 長房出 裕興藝文館直提學 裕景迪順副尉 次房出 公少以魁科登朝 歷踐淸華 素性坦直 不立邊幅 與人無衆寡大小 待之如一 言論辨說 由衷而發 對門弟子 規範嚴肅 凜乎不可犯 人有片善 亟稱之 至人有過惡 盡言規斥 不少回互 以是見忤於姦黨 然其操志堅確 守正卓立 毅然不爲變 蓋有人所不及知者矣 負此誠明之德 際遇 仁聖之君 敷奏啓沃 至爲該備 聖心特加眷注 不幸凶臣滿朝 弗克厥用 旋見偃蹇而歸 詎意天道陰沴如斯耶 噫 公之德學 昭日星而不昧 凡血氣者 靡不慕仰效法矣 宜膺國家之寬恤旌褒 况惟月岡祀 何可以稱諸盛德也哉 然剛齋宋先生祝文有曰 德學冠世 典禮載鐫 後人覽此 可以追相公矣 公後孫希濂 踰峻嶺遠來 屬以麗牲之文 以余蔑識 何敢當是役 累辭不獲 乃按狀敍之 而系以銘曰 猗歟退翁 嶷然人傑 奧在妙齡 聲聞已揭 淵源旣正 道受師傳 惟友賢儒 寒暄一蠹 學修德明 位顯淸華 陳疏暢達 聖上嗟嗟 功業已著 讒口交棘 榮辱毁譽 弗留于臆 歸來鄕閭 山水成癖 點瑟回琴 歌詠自適 祠高月岡 剛齋頌祝 執此一言驗其所毓 龜淵之上 豊碑巓巓 我銘不誣 用垂千年 潘南朴性陽撰
    【풀이】 선비로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세상에 배출된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모두가 본래부터 어질었겠는가? 세상의 교화(敎化)가 밝아지고 권선(勸善) 징악(懲惡)하는 기준이 마련되면 비록 미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득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쇠퇴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위에서 도솔(導率)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정(不正)에 물이 든 사람도 징계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더러는 오히려 영화를 누리고 의리를 따르는 사람은 권선하는 이가 없을 뿐 아니라 곤궁을 자초하기 알맞기 때문에 어진 자질을 지닌 사람도 그런 때에는 자립(自立)할 수가 없다. 예(禮)에 따르고 의(義)를 지킨 사람은 되는 일이 없다고 하겠는데, 퇴휴재(退休齋) 송 선생(宋先生) 같은 분이 바로 그러한 분이다. 공의 휘는 보산(寶山)이요, 자는 대인(大仁)이니, 연안인(延安人)이다. 상대(上代)에 휘 경(卿)이 있어 고려를 도와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훈되고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해졌는 바, 시호는 숙의공(肅毅公)이다. 증조 휘 훈(勛)은 이의판서(吏議判書)에 증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요, 조부 휘 광언(光彦)은 대사성을 지내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가 적을 치다가 순직하였다. 고(考) 휘 흥도(興道)는 화녕부 소윤(和寧府少尹)이요, 비(騙)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인데, 세종 임자(壬子, 세종 14, 1432) 12월 3일 공을 낳았다. 공은 의용(儀容)이 단장(端莊)하고 학문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문을 닫아 붙이고 공부에 열중하여 경전(經傳)과 제가서(諸家書)를 빠짐없이 읽고 이해하였다. 그 중에서도 춘추(春秋)에 더욱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는 ‘송춘추(宋春秋)’라 불렀다. 예물을 싸가지고 점필재(晤畢齋) 김 선생(金先生, 이름은 종직[宗直])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是, 정여창[鄭汝昌]) 양 선생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질의(質疑) 검토하고 개진(開陳)함이 시원시원하니, 두 선생께서 매우 경복(敬服)하였다. 세종 무진년(戊辰年, 세종 30, 1448)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관례대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제수되었으며, 병조와 예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 헌납 사간과 홍문관의 수찬 교리를 지냈다. 그 때 일식(日食)과 동뢰(冬雷)의 변괴가 있어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며, 형옥(刑獄)을 관대하게 다룰 것과 간언(諫言)을 받아드릴 것과 신하들을 단속할 것 등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인심(人心)이란 국가의 원기(元氣)이고, 교화(敎化)는 원기를 기르는 방도입니다. 어진 인재를 쓰지 아니하면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사라지지 않으면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법이니, 인심을 잃고 천하를 얻는다거나, 교화를 천시하고 치평(治平)한다는 일은 신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사목(事目)으로 강포(强暴)를 축출하고, 혹독한 세수(稅收)를 없애고, 교화(敎化)를 넓히고, 기강(紀綱)을 진작시키고, 옥송(獄訟)을 공평히 하고, 언로(言路)를 여는 등으로 몇 천 자의 글을 이루었다. 또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국가의 일은 다스려지지 않으면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그 진퇴(進退)와 치란(治亂)은 사실 기수(氣數, 운수)가 있기 마련이지만, 진퇴하고 치란케 하는 원동력은 사람에게 매였기 때문에 임금은 마땅히 치난의 동기를 살펴서 다스려질 수 있는 일은 권장하고 어지러워질 수 있는 일은 제거하여 기어코 다스리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가져야지, 조그마한 성공에 만족하고 평상시의 규율에 구애되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그 성패(成敗)를 기수에만 맡기고 지낼 일이 아니옵니다. 신이 보옵건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예사롭지 않은 재앙과 경악할 만한 괴변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하늘의 경고와 꾸짖음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아직까지도 정사(政事)는 옛 폐습을 답습하고 있어 치효(治效)가 막연하니 상패(傷敗)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가 민심을 크게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기강이 진작되지 못하고, 공평한 도리가 드러나지 아니하고, 언로가 훤히 뚫리지 않고, 옥송이 공정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건곤(乾坤)의 지극히 공정한 도량을 넓히시고, 일월(日月)의 지극히 밝은 통찰력을 발휘하시어 사정(邪正)을 변석하시고, 현부(賢否)를 식별하여 그 말한 바를 듣고 그 행한 바를 보시면 반드시 그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으로 하여금 성명(聖明)의 통조(洞照)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그가 군자(君子)임을 아시면 반드시 이끌고 친근히 하시어 그 도(道)를 행하게 하시고, 그가 소인(小人)임을 아시면 반드시 배척하고 멀리 하시어 그 뿌리를 뽑아버린다면 강직하고 아량있는 선비는 다투어 충성을 바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는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연후에라야 기강은 진작되고 공도(公道)는 드러나고 언론은 통달되고 옥송은 공평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 충정(忠正)을 가장(嘉奬)하고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하여 통정(通政)에 올려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 또 홍변(虹變)을 계기로 차자(箚子)를 올렸다. 재변이 혹심한데도 위 아래에서 모두 예사롭게 여기고, 정령(政令)이 고식적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마땅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사심(私心)을 버림으로써 수신(修身)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니, 상께서 마음을 비우고 가담하였다. 경오년(庚午年)에는 가선(嘉善, 품계명[品階名])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라 도승지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 때에는 세조조를 당하여 권간(權奸)들이 정권을 잡고 악독한 짓을 자행하니, 세상 일이 날로 그르쳐짐을 보고 답답한 마음으로 시골집으로 내려와서 촌로(村老)와 야부(野夫)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함께 담소하며, 마치 한사(寒士)와 같이 지내고 부귀(富貴)와 영욕(榮辱)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또 매양 꽃피는 봄이나 단풍이 든 가을이면, 두서너 사람의 벗들과 어울려서 큰산과 큰물 사이에서 소요하며 산수(山水)를 즐기고 인지(仁智)의 참다운 지취를 만끽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학자가 능히 침묵하는 심경을 터득한다면 몸과 마음이 활달해져서 작록(爵祿)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함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연산 10, 1504) 10월 2일 사망하였고, 묘소는 장수현(長水縣)의 서쪽에 있는데 묵은 지 오래이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수원 백씨(水原白氏)는 판서 형옥(荊玉)의 따님인데, 2남을 낳아 맏이 공선(公善)은 장성부사(長城府使)요, 다음 승연(承衍)은 중부인 수산(壽山)의 뒤를 이었다. 평산부사(平山府使) 지성(之盛)과 광주목사(光州牧使) 지은(之殷)은 큰아들 소생이고, 예문관 직제학 유흥(裕興)과 적순부위(迪順副尉) 유경(裕景)은 작은아들 소생이다. 공은 소시에 과거에 장원하고 조정에 들어가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다. 천성이 솔직하고 꾸밈새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을 많고 적고 높고 낮음을 가림이 없이 한결같이 대하였다. 언론과 변설은 속마음에서 나왔으며, 집안의 자제들에 대해서는 규율이 엄숙하여 범할 수 없었다. 사람에게 작은 착함이라도 있으면 자주 칭찬하였으나,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끝까지 배척하여 어물어물 넘기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간사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나, 지조는 굳건하고 정도(正道)를 지켜 의연히 굽힘이 없었으니, 대체로 남들이 짐작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이러한 진실된 덕을 지니고 어진 임금을 만나 아뢰고 깨우침이 두루 지극하니 임금께서 특별히 정을 쏟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흉악한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제대로 쓰이지 못하였고, 또 미구에 보란 듯이 시골로 돌아왔으니, 어찌 천도(天道)의 음산함이 이와 같을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공의 덕학(德學)은 일성(日星)처럼 밝고 차착이 없었으므로 혈기(血氣)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우러르고 본받고 하지 않은 이가 없었을 터이니, 나라에서 너그럽게 돌보고 정포(旌褒)함이 있어야 마땅하였을 것이다. 월강사(月岡祠)에 배향된 것만으로 어떻게 그 성한 덕에 알맞다 하겠는가? 그러나, 강재(剛齋) 송 선생(宋先生, 이름은 치규[穉圭])의 축문(祝文)에 있기를 “덕학은 세상에 뛰어나고 전례(典禮)는 새겨진 바가 있다” 하였으니, 후인들은 이를 보면 가히 공을 추상(追想)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의 후손 희렴(希濂)이 큰 재를 넘어 멀리 찾아와서 신도비의 글을 청하였으나, 나와 같은 천식(淺識)이 어떻게 감히 이러한 일을 감내하겠는가? 그리하여 누누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행장을 상고하여 서술하고 명(銘)을 다는 바, 명에 이르기를 “훌륭하도다 퇴휴옹(退休翁)은 / 헌걸찬 인걸(人傑)로 /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 명성은 널리 퍼졌고 / 연원(淵源)도 순정하여 / 도학은 스승에서 전수했고 / 어진 선비를 벗하였으니 /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是)라. / 학문은 이뤄지고 덕도 높아져 / 지위는 청화직(淸華職) 드러났고 / 상소 올려 문장이 통창(通暢)하니 / 성상(聖上)도 차탄(嗟歎)하였다. / 공업(功業)이 이미 드러나니 / 참소하는 말 덩달아 심하였으나 / 영욕(榮辱)과 훼예(毁譽)를 /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았고 / 시골집으로 돌아와서는 / 산수(山水)에 넋을 잃었으며 / 비파 뜯고 거문고를 타면서 / 노래하고 시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네 / 사당은 월강(月岡)에 드높고 / 강재(剛齋)가 송축을 드렸는데 / 그 한 구절만 가지고도 / 공의 간직한 바 알 만하다. / 구연(龜淵)의 물 위에 / 높다란 비 우뚝한데 / 나의 명(銘) 거짓이 아닌지라, / 천년 만년 전해지리라.” 반남(潘南) 박성양(朴性陽)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