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孝子宋鎭杓紀蹟碑(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효자송진표기적비)

    【위치】 마령면 계서리 835-1. 서산마을 앞 관진로 진입로 우측 비탈.
    【시기】 1962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30cm, 너비 4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孝者 百行之源 萬善之首也 人或苟有其實 則褒而揚之 紀蹟於貞珉 其於扶綱厚俗 豈可曰少也哉 礪山宋公 諱鎭杓 字永執 松齋別號也 勝國 郎山府院君 諡文肅公 諱琰后 本朝 莊陵節臣 遯壑先生 諱慶元 於公十三世祖 通政諱得運 嘉善諱啓玉 祖若考兩世職銜 公之優老典 追恩也 公誠孝天植 事親有道 愉色惋容 溫凊甘旨 靡不竭力 疾則 嘗糞驗症 目不交睫 及喪哀毁 不致梳沐 不御酒肉 晨夕展省 不避雨雪 遭內艱 亦如前喪 而至老彌篤 鄕人過廬者 莫不流涕焉 奉先以禮 敎子以義 睦於族 信於友 其他餘行 可知其推此無論也 博涉經史 文學德望 見重士友 累登剡薦 桑海日變 未蒙天褒 雲仍齎恨 樹碑閭里也 公之孫柱淳 介梁丈仁權氏 要記紀蹟 貴泳 德迷 而安敢當也 公之孝德高風 慕仰已宿 而懿性所在 不忍固辭 據來狀略敍 盡心力而尸其事者 孫 柱泳 柱彩 曾孫 理燮 玄孫 在鈺云爾 檀君紀元四二九六年 癸卯仲冬日 東萊 鄭貴泳 謹述 南原 梁昌權 書 【풀이】 무릇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다. 사람이 혹 그런 사실이 있으면 포양(褒揚)하고 빗돌에 사적을 새겨둔다면 강상(綱常)을 북돋고 풍속을 두터이 함에 그 공효(功效)가 어찌 적다하겠는가! 여산송공(礖山宋公)의 휘(諱)는 진표(鎭杓)요 자(字)는 영집(永執)이며 송재(松齋)는 그 별호(別號)이니 고려(高麗)의 낭산부원군(郎山府院君) 시초 문숙공(文肅公) 휘 염(琰)의 후예이다. 본조(本朝: 조선을 지칭한 말) 장릉(莊陵)의 절신(節臣) 돈학선생(遯壑先生) 휘 경원(慶元)은 공의 13세조이고, 통정(通政) 휘 득운(得運)과 가선(嘉善) 휘 계옥(啓玉)은 조부와 아버지 양세(兩世)의 직함과 명함인데 공의 우로전(優老典)으로 추은(追恩)한 것이다. 공은 효성을 하늘에서 점지 받아 어버이를 섬김에 도리가 있어 항상 온화한 얼굴빛을 잃지 않았고 거처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 드렸으며 맛있는 음식의 봉양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가 병환이 나면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하였으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하여 목욕과 빗질을 하지 않았고 술과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묘소를 살펴 비가오나 눈이오나 거르는 일이 없었는데 내간상(內艱喪)을 당해서도 전상(前喪)과 똑같이 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니 여막(廬幕)을 지나던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상을 받들기는 예(禮)로써 하고 아들을 가르치기는 의(義)로써 하였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고 벗들에게는 신의가 있었으니 여타의 행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더 논할 것이 없겠다. 경사(經史)에도 널리 섭렵(涉獵)하여 문학과 덕망으로 사우(士友)사이에서 추중(推重)을 받아 여러 차례 천장(薦狀)이 올라갔으나 세상이 날로 변하여 조정의 포장(褒獎)을 받지 못하니 자손들의 한이 쌓여 마을 어귀에 비를 세우려는데, 공의 손자 주순(柱淳)이 양장(梁丈) 인권씨(仁權氏)를 통하여 나에게 기적(紀蹟)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덕이 부족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마는 공의 효덕(孝德)과 고풍(高風)을 익히 듣고 암모해 온 지 오래이고, 나 또한 이성(彝性)이 있는 터에 어떻게 굳이 사양 하겠는가 그리하여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간략히 서술하는 바이니, 심력(心力)을 다하여 그 일을 맡아 추진한 사람은 손자인 주영(柱泳), 주채(柱彩)와 증손 이섭(理燮), 현손 재옥(在鈺)이다. 단기4296(1963)년 (음)11월 일 동래 정귀영(鄭貴泳) 근술(謹述) 남원 양창권(梁昌權) 씀
  • 【위치】 마령면 계서리 1312. 오동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78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220cm, 너비 5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治南梧桐里에 有一短碣이 兀然立乎洞口하니 卽故孝烈婦 孺人李氏紀蹟之碑也라. 按孺人은 延安氏니 文良公隱峯 諱元發後요 成均生員芝隱 諱龜彩五世孫이요 士人重琬女也니 生而天性이 溫淑하야 事親以孝하니 九族稱誦이러라 及笄에 爲延安金鍾植妻하니 公은 卽 文靖公逸溪諱自知後요 幼學元基子也라 孺人이 旣歸에 上有姑氏在堂하야 以老病委床이어늘 孺人이 晝夜侍側하여 衣不解帶하고 扶持調護十二載에 終始如一日하고 竟遭大故에 遑遑望望하야 致哀盡制하니 於是孝譽가 藉藉益播焉하니라 敬承君子하야 勤儉宜家러니 未幾에 夫子罹疾하야 百藥無靈이어늘 孺人이 致憂不已하야 每夜汲泉하야 祈斗願代하고 及其危谹에 斫脂注血하고 割股煮進하야 漸得回甦라 因欲生魚어늘 孺人이 躬往前川하야 將欲求之하야 方行石洑沙濱之際에 忽得躍鯷하야 持歸而供之하니 遂見夫病得差하야 和樂同居러니 厥後에 又患重病五年에 多方藥餌가 無有可救之術이라 惟願生雉어늘 孺人이 念念求之 當用藥材하야 適採竹葉이러니 忽有飛雉가 墜入於前이어늘 抱歸烹進하야 旋卽奏效하니 鄕里驚歎하야 以爲至誠所感致云이러라 嗚呼라 孺人은 可謂賢孝且烈矣로다 盡孝于姑하고 竭力于所天하야 只知有夫而不知有其身하야 行人所難行 而垂令譽於後世하니 如其躍鯷飛雉之徵이 苟非至誠之格天動地者면 其能致乎哉아 與故人氷鯉幕衝으로 可疋美矣니 豈不偉哉아 惜其行義가 宜蒙天褒이어늘 而只因時與古異하야 尙無綽楔之擧하니 添得士女之齎恨者-久矣라 一鄕章甫가 薦于五倫行實刊所하야 而得有褒狀하니 幸何如之리요 今其冑胤吉泳이 懼懿德泯沒하야 將伐石紀蹟일새 走其再從姪錫柱하야 介全永和甫하야 遠來謁文이어늘 余以不德으로 固辭未獲하고 則只據狀摭實如右而還之하야 刻諸碑陰하야 使後觀感而興起焉하노라 抑斯役也에 全壽南 安導遠甫 亦多賢勞云 垈地獻誠 全海(缺) 檀紀四三一一年 戊午 復月 下澣 奈城 嚴命涉 撰 延安 李湘寧 謹書
    孫 海柱 良柱 垣柱 奉柱 萬柱 孫婿 羅州 林鍾允 曲阜 孔文洙
    【풀이】 진안(鎭安) 치소(治所)의 남쪽 오동리(梧桐里)의 어귀에 단갈(短碣)이 하나 우뚝 서 있으니 고(故) 효열부(孝烈婦) 유인(孺人) 이씨(李氏)의 기적비이다. 상고하건대 유인은 연안씨(延安氏)이니 문양공(文良公) 은봉(隱峯) 휘 원발(元發)의 후예로 성균생원(成均生員) 지은(芝隱) 휘 구채(龜彩)의 5세손이오, 사인(士人) 중완(重琬)의 따님인데 태어나면서부터 천성이 온숙(溫淑)하여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니 온 종족들이 칭송하였다. 나이가 차자 연안(延安) 김종식(金鐘植)의 처가 되었는데 김공(金公)은 문정공(文靖公) 일계(逸溪) 휘 자지(自知)의 후예인 규학(糾學) 원기(元基)의 아들이다. 유인이 시집에 와 보니 위로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노병(老病)으로 병석에 있었다. 유인이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간호하기 12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고 마침내 상(喪)을 당해서는 경황없이 슬퍼하고 치상(治喪)에 예제(禮制)를 다하였는데 그러자 칭찬이 자자하여 송성(頌聲)이 널리 퍼졌다. 부군(夫君)을 경건하게 섬기고 근검절약하여 온 집안이 화목하게 지내더니 오래지 않아 부군이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하였다. 유인이 끝없이 걱정하여 밤마다 우물물을 새로 떠다가 놓고 북두칠성에 빌기를 자신이 대신하겠다하고 병이 더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받아 입에 드리우고 허벅지의 살을 발라 끓여서 올리니 병이 점차 회복이 되었다. 이윽고 생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여 유인이 몸소 앞 시내에 나가 잡아보려고 하여 막 돌보[石洑]의 모래 언저리로 가려고 할 즈음에 느닷없이 메기 한 마리가 뛰쳐나와 움켜쥐고 돌아와서 바치니 부군의 병이 차도가 있어 화락하게 잘 지냈다. 그 뒤에 부군이 또 5년간이나 중병을 앓아 다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고 오직 산 꿩만 먹고 싶다고 하였는데 유인이 그 생각을 하면서 우선 달리 약재로 쓰려고 대잎[竹葉]을 따고 있으려니 갑자기 꿩이 날아들어 유인의 앞에 거꾸러지거늘 안고 돌아와 다려서 올리니 곧바로 효과가 있자 인근 마을에서 놀라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지성에 감동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오호라! 유인은 가위 어질고 효성스럽고 정렬(貞烈)이 있다하겠다. 시어머니에게는 효성을 다하고 부군에게는 심력을 다하여 다만 부군이 있는 줄만 알고 자기 자신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여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바를 행하여 슬거운 명예를 후세에 전하였는데 이를테면 메기가 뛰쳐나오고 꿩이 날아든 것 같은 이징(異徵)은 진실로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명케 한 것이 아니면 될 법이나 한 일이던가 옛 사람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나오고 새가 저절로 날아들어 천막에 부딪친 일과 훌륭함이 필적(匹敵)하다 하겠으니 어찌 훌륭하지 아니한가 애석하게도 그 행의(行義)는 나라의 포장이 있어야 마땅하건만 세상이 옛날과는 다른 까닭으로 아직까지 정려(旌閭)의 거행이 없었으니 사녀(士女)의 억울해함이 더한지 오래였다. 그러던 차에 온 고을 장보(章甫:선비)가 오륜행실간행소(五倫行實刊行所)에 천거하여 포장(褒狀)을 얻었으니 그 다행함이 어떻다하겠는가 지금 그 맏아들 길영(吉泳)이 유인의 아름다운 덕이 민몰(泯沒)할가 두려워하여 돌을 다듬어 사적을 기록하려고 할 즈음 전영화보(全永和甫)의 소개로 그 재종길(再從姞) 석주(錫柱)를 멀리 나에게 보내서 글을 청하였다. 나는 부덕한 사람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다만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사실만 간추려 돌려보내서 비의 뒷면에 각하여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보고 느껴서 진작(振作)하게 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전수남(全壽南), 안도원(安導遠) 두 선비의 현로(賢勞)가 많았다 한다. 부지(敷地)를 희사한 사람은 전해■(全海[缺])이다. 단기 4311(1978)년 무오(戊午) 복월(復月) 하한(下澣) 나성(奈城) 엄명섭(嚴命涉) 찬하고, 연안(延安) 이상녕(李湘寧) 삼가 쓰다. 손(孫) 海柱 良柱 垣柱 奉柱 萬柱 손서(孫婿) 나주(羅州) 林鍾允 곡부(曲阜) 孔文洙
  • 【비표】 縣監李侯重翼永世不忘碑(현감이후중익영세불망비)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불명
    【형태】 높이 10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중익(李重翼)은 진안현
  • 【비표】 縣監李侯益應永世不忘碑(현감이후익응영세불망비)

    【위치】 마령면 마령면 서평로 173-6(평지리 965-2). 자연사박물관 앞마당.
    【시기】 1877년 10월(光緖三年 丁丑 十月 日)
    【형태】 높이 110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