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표】 文平公都隱全文軾壇所神道碑(문평공도은전문식단소신도비)
【위치】 마령면 강정리 238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서쪽.
【시기】 192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8cm, 너비 59cm, 두께 17cm.
【개요】 영계사 담장밖 서쪽에는 도은선생의 묘와 1924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으며 영산사 입구 왼쪽에는 1979년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여기에는 1924년에 세운 비를 싣는다.
【비문】 文平公都隱全先生壇所神道碑銘幷序 都隱全先生 當麗季鼎革之際 道學有淵源 忠節如日星 按五祀之禮 宜其百世享之 况其子姓繁衍 圭璋蟬爀 年代杳遠 衣履之藏 遂佚其地 香火不擧 其雲仍慕羹墻而僾然 履霜露而悽悵者 厥惟久矣 頃者 其後孫暢鉉 永鍾 道錫 一相 炳謨諸君 倡議于宗族曰 近世士大夫家 失其墓者 多設壇而致享 此雖以義起 可取以爲 則盍於今日圖之乎 僉曰諾 於是永鮮 東權監督刱建之役 功將告訖 思所以壽其傳 而不可無紀實之辭 理石樹之壇前 謁文於不侫 其意勤矣 不敢以不文辭 謹按先生諱文軾 世稱都隱其號也 系出天安 始祖諱聶 佐百濟溫祚王 以十濟功 臣封歡城君 自是世襲卿相 傳十五世 有諱樂 當勝國太祖時 與從兄旌善君諱以甲 竹山君諱義甲 壯節公申崇謙 同時殉節於桐藪甄萱之亂 贈尙書左僕射 諡忠達 封天安君 遂貫天安 於先生爲八世祖也 七世諱洪述 以麗朝開國勳 策翊贊功臣 諡武康 六世諱忠佑 事成宗 官平章事 諡忠肅 封天城君 五世諱世柱 事德宗有大勳勞 諡文靖 高祖諱仁亮 官左相 年八十 奉使如宋 帝壯而奇之 賜銀紫光祿大夫 進吏部尙書 旣還卒 享年百有二歲 諡武節 封天陽君 曾祖諱旦 判工部事 寧平君 祖諱呂 政堂文學 封兜平君 諡康肅 考諱凞 左僕射封兜陽君 妣貞敬夫人尹氏 侍中殷衡女 先生以至正年間 生于交河里第 先生天姿卓越 學問夙就 力主扶正斤邪之論 爲世模楷 圃隱鄭先生贊之曰 濯世學宗佳公子 恭愍王丁未 創成均館 牧隱李先生 爲國子祭酒 抄選一時經術之士而充之 先生與圃隱鄭先生 惕若齋金公 同與其選 兼學官誨諸生 日進明倫堂 講論經義 必根以程朱之論 孜孜不倦 學者薰陶德性 絶記誦詞章之習 窮心身性理之源 知斯道之可宗 異端之可斥 儒風學術 渙然一新 由是東方之理學 始興焉 辛亥牧隱知貢擧 先生中第 拜政堂文學 在政堂 尤以明達著聞 因陞大司諫 辛耦元年 李仁任 安師琦等 謀迎北使 先生上書駁之 請斬其黨 忤旨 與圃隱先生等十人 幷流遠地 丙寅赦還 拜平安伯 與圃隱諸公定策 迎立恭讓王 行尙書事 壬申與籠巖金公澍 奉使如明 還至鴨綠江 聞我太祖改玉 相對泣下 金公曰 吾不忍還 子欲歸 歸之 歸留雖異 惟其盡節則一也 先生曰 天運順逆 人心異同 正此時可見也 金公留居中國 先生遂還交河之舊居 謝絶人事 杜門屛迹 三徵不就 放浪物外 嘗遊鎭安之江昌里 愛其山水 怡然有占居意 杖屢屢臨而未果 竟以天年考終于交河里第正寢 訃聞 世宗大加痛悼 贈刑曹判書知議政府事 賜諡文平 配貞敬夫人李氏 舍人世徽女也 生二男 長天近 文科大司憲 德行尉然 時人宗師之 贈左贊成 配兵曹判書李世禎女 次天吉 大司憲 子孫居于龜城 天近二男思敏 工曹判書 言事忤旨 謫康津 子孫居于靈巖 思美 文科同知中樞府事 子孫居于鎭安 思敏二男 尙禮直長 孟禮參奉 思美一男 克禮文科戶曹判書 文宗壬申 棄官歸隱於鎭安之江昌里 遵先生遺訓也 以下子孫不盡錄 略擧其著顯者 四世孫 自溫文科 世祖時以扈從端宗 貶鎭邊萬戶 自讓文科司直 兄弟同殉於寧越淸泠浦 貴進士 五世孫益禧 文科府使 以忠參奉 以信參奉 六世孫瓚參奉 奎贈司僕正 斗縣監 七世孫繼宗 文科侍講院習讀 贈工曹參議 忠孝德行 享于鎭安靈溪書院 應禎文科縣監 守瑊贈承旨 景祥監察 鐵樹進士 百齡武科牧使 泓武科嘉善 八世孫烈進士 繼星進士 大昇贈參判 思龍武科都總管 有功於甲子适亂 贈兵曹判書 倫縣監 九世孫東屹 武科四按水臬七拜兵梱 再任統制使 陞捕將 至訓鍊大將 及卒朝廷 遣官致祭 東岦主簿 應鍾僉中樞 應禎監察 應仁嘉善 十世孫夢日萬戶 贈兵曹參議 夢星縣監 贈兵曹參判 穆陵壬辰 與弟夢台 同時殉亂 享靈巖長洞祠 時禎壽陞通政 孝行卓越 十一世孫聖兪營將 孝萊嘉善 翊華進士 刱靈溪書院 南秀宣傳官 堅進士 十二世孫澤文科 灒進士 胤元縣監 舜佐節制使 舜元營將 十三世孫相朝宣傳官 十五世孫翰豊以文章鳴 十六世孫載奎亦以文章鳴 載遠宣傳官 載允秘書院丞 孝行卓異 廷秀進士 十七世孫均基營將 十八世孫仁鎬營將 十九世孫炳郁中軍 嗚呼 先生以純正之學問 彌綸之幹局 遭時不幸 未得展佈所蘊 遁遯全節於鼎革之際 險阻艱難 備嘗而不悔 積躬不食 以遺後昆 故其子孫至今連綿 簪纓繼承 由此而知天道之報施者如此矣 竊惟壇享非古 然子孫之瞻慕殫誠 宜有依歸之地 國學之位牌 郊社之壇壝 禮可考矣 古人云 靈之在天下 如水之在地中 苟能潔誠致享 神其來格 由此論之 壇與墓 豈或有間然也 今來請銘者 興均炳國鍾烈也 是宜銘 銘曰 修厥躬而揚于王庭 德之成也 値鼎革而矢心全節 義之精也 唯其善之積厚 故垂百世而繁榮 瞻彼江昌之里 水爲帶而山作屛 巋然 五尺之壇 模像雨露之封塋 以享以祀 雲仍之誠 垂之無窮 不崩不傾 神其歆 錫之福祿 猗厥盛莫之與京 甲子陽至節 資憲大夫掌禮院卿兼奎章閣學士 驪興閔京鎬撰 資憲大夫掌禮院卿兼弘文館學士 碧珍李愚冕書
【풀이】 도은(都隱) 전 선생(全先生)은 고려(高麗) 말엽(末葉)의 사직(社稷)이 바뀔 즈음에, 도학에는 연원(淵源)이 있고 충절(忠節)은 일성(日星)과 같았으니, 오사(五祀 : 다섯 가지의 제사. 즉 구망[句芒]·욕수[勃收]·현명[玄冥]·축융[祝融]·후토[後土]이다. [周禮, 春官, 大宗伯])의 예(禮)를 상고하여 백세토록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 더구나 그 자손은 번창하고 과관(科官)이 줄을 이었음에랴? 그러나 연대(年代)는 아득히 멀고 묘소도 실전하여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후손들은 갱장(羹墻)의 사모함으로 어렴풋이 마음에 떠올리고, 상로(霜露)를 밟음으로 서글픔을 간직해 온 지 이미 오래였다. 얼마 전에 그 후손 창현(暢鉉)·영종(永鍾)·도석(道錫)·일상(一相)·병모(炳謨) 제군이 종족에게 제의하기를 “근세에는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묘소를 실전하면, 다수가 단(壇)을 묻고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는 비록 창시(創始)에 가깝다하겠으나 본받을 만한 일이니, 오늘날 우리가 도모해볼 일이 어찌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모두가 좋다 하였다. 이에 영선(永鮮)과 동권(東權)이 일을 맡아 감독하여 거의 준공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사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면 기실(紀實)하는 글이 없을 수 없다고 여기고, 돌을 다듬어 단 앞에 세우기로 하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그 성의가 독실하였으므로 감히 글을 못 한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휘는 문식(文軾)이요, 세상에서 일컬은 도은(都隱)은 호이다. 전씨(全氏)는 천안(天安)에서 계출하였으니, 시조 휘 섭(褐)은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되어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대대로 경상(卿相)으로 이어졌는데, 15세(世) 휘락(樂)은 고려 태조(高麗太祖) 때 종형인 정선군(旌善君) 휘 이갑(以甲), 죽산군(竹山君) 휘 의갑(義甲)과 함께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과 더불어 동수(桐藪, 지명)의 견훤(甄萱)의 난에 순절(殉節)하여 상서(尙書) 좌복야(左僕檀)에 증직되고, 충달(忠達)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다. 그 때에 드디어 천안(天安)으로 관(貫)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에게는 8세조가 된다. 7세조 휘 홍술(洪述)은 고려조의 개국훈(開國勳)으로 익찬공신(翊贊功臣)에 책훈되었고 시호는 무강(武康)이다. 6세조 휘 충좌(忠佐)는 성종(成宗)을 섬겨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이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천성군(天城君)에 봉해졌다. 5세조 휘 세주(世柱)는 덕종(德宗)을 섬겨 대훈공이 있었고 시호는 문정(文情)이다. 고조 휘 인량(仁亮)은 벼슬이 좌상(左相)인데 나이 80세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나라에 들어가니, 송제(宋帝)가 장하고 기특하게 여겨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의 품계를 주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렸으며, 돌아와서 사망하니 향년 102세였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며, 천양군(天陽君)에 봉해졌다. 증조 휘 단(旦)은 판공부사(判工部事)에 영평군(寧平君)이며, 조부 휘 여(呂)는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두평군(兜平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강숙(康肅)이다. 고(考)의 휘는 희(熙)이니 좌복야(左僕檀)에 두양군(兜陽君)이요, 비(騙) 정경부인(貞敬夫人) 윤씨(尹氏)는 시중(侍中) 은형(殷衡)의 따님이다. 선생은 지정년간(至正年間, 지정은 원순제[元順帝]의 연호이다)에 교하(交河)의 향제(鄕第)에서 태어났는데, 천품이 탁월하고 학문이 일찍 성취되었다. 힘써 부정(扶正) 척사(斥邪)의 의론을 주장하여 세상의 모범이 되니,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이 찬양하기를 “탁세(濁世)의 학문의 종장(宗匠)이요, 훌륭한 공자(公子)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 정미(丁未)에 성균관(成均館)을 창립하고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을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삼아 한 시대의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충원하는데, 선생과 포은 정 선생 및 척약재(脂若齋) 김공(金公, 김구용[金九容]을 말함)이 함께 거기에 뽑혔다. 학관(學官)을 겸하여 제생(諸生)들을 가르쳤는데, 날마다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경전(經傳)의 뜻을 강론하되 반드시 정주(程朱)의 의론을 근간으로 하여 부지런히 쉬지 않고 가르치니, 학생들이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하여 글귀만을 읽고 외우는 버릇을 버리고 심신(心身)과 성리(性理)의 근원을 궁구하여 사도(斯道, 유도[儒道]의 뜻)를 종앙(宗仰)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다. 이에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빛나도록 새로워져, 이로 말미암아 동방의 이학(理學)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 신해년(辛亥年)에 목은(牧隱)이 지공거(知貢擧)가 되니 선생도 과거에 합격하여 정당문학이 되었고, 정당(政堂)에 있으면서 더욱 명달(明達)하여 이름이 더욱 드러났으며, 그로 인하여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신우(辛禑) 원년에 이인임(李仁任)과 안사기(安師琦) 등이 모의하여 북사(北使, 원[元]나라 사신)를 영접하려 하니, 선생이 글을 올려 반박하고 그 일당을 참(斬)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포은 정 선생 등 10인과 함께 원지(遠地)로 유배당하였다. 그 뒤 병인년(丙寅年)에 사환(赦還)하여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가 되었는데, 포은(圃隱) 등 제공과 함께 대책(大策)을 정하여 공양왕을 영입(迎立)하고 상서사(尙書事)를 맡아 행하였다. 임신년(壬申年)에는 농암(籠巖) 김공(金公) 주(澍)와 함께 사명을 받들고 명(明)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아태조(我太祖)가 혁명을 일으켰음을 듣고 서로 마주하며 울었다. 김 공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돌아갈 수 없으니 그대는 가고 싶으면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돌아오나 그곳에 머무르나 그 절의(節義)를 다함에 있어서는 일반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천운(天運)의 순역(順逆)과 인심의 동이(同異)는 참으로 이럴 때 보게 된다”고 하였다. 김 공은 중국에 그대로 머무르고 선생은 마침내 교하(交河)의 옛집으로 돌아와 인사(人事)를 사절(謝絶)하였다. 그리고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세 번이나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세상 밖에서 우유(優遊)하였다. 일찍이 진안(鎭安)의 강창리(江昌里)를 둘러보고 그곳 산수(山水)를 사랑하여 터를 잡아 살고 싶어하였다. 장루(杖爐)로 여러 차례 찾았으나 실행을 못하고 마침내 천수(天壽)를 다하여 교하 향제의 정침(正寢)에서 작고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세종(世宗)께서는 크게 슬퍼하시고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에 증직하고 문평(文平)의 시호를 내렸다. 배위 정경부인 이씨(李氏)는 사인(舍人) 세휘(世徽)의 따님인데 2남을 낳았다. 맏이의 천근(天近)은 문과 대사헌으로 덕행(德行)이 높아 사람들이 유종(儒宗)으로 섬겼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는데, 배(配)는 병조판서 이세정(李世禎)의 따님이다. 다음 천길(天吉)은 대사헌이요 자손은 구성(龜城)에 살고 있다. 천근(天近)의 2남에서 사민(思敏)은 공조판서인데 일을 말하다가 뜻을 거슬러 강진(康津)으로 귀양가서 자손은 영암(靈巖)에 살고 있고, 사미(思美)는 문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데 자손은 진안에 살고 있다. 사민(思敏)의 2남에서 상례(尙禮)는 직장(直長)이요, 맹례(孟禮)는 참봉이며, 사미(思美)의 1남은 극례(克禮)이니 문과 호조판서로 문종 임신(壬申)에 벼슬을 버리고 진안의 강창리로 돌아와 숨어 지냈으니 선생의 유훈(遺訓)에 따른 것이다. 이하의 자손은 다 기록할 수 없고, 대략 그 드러난 사람만 간추려 기록하자면, 4세손 자온(自溫)은 문과하여 세조 때 단종을 호종(扈從)하였다 하여 진변(鎭邊)의 만호(萬戶)로 좌천되었고, 자양(自讓)은 문과 사직(司直)인데 형제가 영월(寧越)의 청령포(淸寧浦)에서 순절하였으며, 귀(貴)는 진사이다. 5세손 익희(益禧)는 문과 부사(府使)요, 이충(以忠)은 참봉이며, 이신(以信)도 참봉이다. 6세손 찬(瓚)은 참봉이오, 규(奎)는 증 사복정(贈司僕正)이며, 두(斗)는 현감이다. 7세손 계종(繼宗)은 문과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에 증공조참의인데 충효(忠孝)와 덕행(德行)으로 진안의 영계서원(靈溪書院)에 제향(澐享)되었고, 응정(應禎)은 문과 현감이며, 수감(守喀)은 증 승지요, 경상(景祥)은 감찰(監察)이요, 철수(鐵樹)는 진사요, 백령(百齡)은 무과 목사요, 홍(泓)은 무과 가선(嘉善)이다. 8세손 열(烈)은 진사, 계성(繼星)도 진사이며, 대승(大昇)은 증 참판이요, 사룡(思龍)은 무과 도총관(都摠管)인데 갑자년(甲子年) 이괄(李适)의 난에 공이 있어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륜(倫)은 현감이다. 9세손 동흘(東屹)은 무과하여 수사(水使) 네 번과 병사(兵使) 일곱 번, 통제사 두 번을 지내고 포도대장에 올라 훈련대장에 이르렀는데, 사망하니 조정에서 관원을 보내서 제사를 올렸다. 동립(東吏)은 주부(注簿)요, 응종(應鍾)은 첨중추(僉中樞)요, 응정(應禎)은 감찰이요, 응인(應仁)은 가선이다. 10세손 몽일(夢日)은 만호(萬戶)에 증 병조참의요, 몽성(夢星)은 현감에 증 병조참판인데 목릉(穆陵, 선조의 능호[陵號]) 임진(壬辰)에 아우 몽태(夢台)와 함께 순절(殉節)하여 영암(靈岩)의 장동사(長洞祠)에 모셔졌고, 시정(時禎)은 수직(壽職) 통정(通政)인데 효행이 탁월하였다. 11세손 성유(聖兪)는 영장(營將)이요, 효래(孝萊)는 가선이요, 익화(翊華)는 진사인데 영계서원을 창건하였으며, 남수(南秀)는 선전관(宣傳官)이요, 견(堅)은 진사이다. 12세손 택(澤)은 문과요, 찬(租)은 진사요, 윤원(胤元)은 현감이요, 순좌(舜佐)는 절제사(節制使)요, 순원(舜元)은 영장이다. 13세손 상조(相朝)는 선전관이요, 15세손 한풍(翰豊)은 문장으로 저명하다. 16세손 재규(載奎)도 문장으로 울렸으며 재원(載遠)은 선전관이요, 재윤(載允)은 비서원승(秘書院丞)으로 효행이 탁이(卓異)하였으며, 정수(廷秀)는 진사이다. 17세손 균기(均基)는 영장이요, 18세손 인호(仁鎬)도 영장이며, 19세손 병욱(炳郁)은 중군(中軍)이다. 오호라! 선생께서는 순정(純正)한 학문과 홍대(弘大)한 간국(幹局)으로 불행한 때를 만나 자기의 포부를 펴보지 못하고,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처하여 은둔(隱遁)으로 절의를 온전히 하였다. 위험과 고통을 두루 맛보았으나 후회함이 없었고, 차곡차곡 몸에 쌓았으나 자신이 누리지 않고 후손에게 끼쳐주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지금껏 연면(連綿)히 관면(冠冕)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하늘의 보시(報施)가 이러함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단향(壇享)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손들이 첨모(瞻慕)하고 정성을 쏟으려면 마땅히 대상이 되는 곳이 있어야 하나니 국학(國學)의 위패(位牌)나 교사(郊社)의 단소(壇所)를 예(禮)에서 상고할 수가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신령이 천하에 돌아다니는 것은 물이 땅 속에서 유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참으로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낸다면 신령을 찾아와서 운감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단(壇)과 묘소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지금 나를 찾아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흥균(興均)과 병국(炳國)·종렬(鍾烈)인데 이만하면 명할 만하다 하겠다. 명하기를 “그 몸을 닦아서 왕정(王庭)에서 휘날리는 것은 덕이 이루어진 때문이요, 사직이 바뀌는 때를 당하여 한 마음으로 절의를 지킴은 의가 정하기 때문이라. 오직 그 선(善)의 쌓임이 두텁기 때문에 백세토록 번영하게 된 것이니 저 강창(江昌)의 마을을 보라. 물은 띠 같고 산은 병풍을 둘렀지 않은가. 높다란 오척(五尺)의 단은 그 모양 우로(雨露)의 무덤과 같은데, 받들고 제사지내고 하니 후손들의 정성은 무궁토록 전해지고, 무너지지도 기울지도 않으니 신이 흠향하고 복록을 주어 번창함 비길 데 없다네”
갑자(甲子, 1924) 양지절(陽至節, 음력 11월을 말함)에
자헌대부장예원경겸규장각학사(資憲大夫掌禮院卿兼奎章閣學士) 여흥(驪興) 민경호(閔京鎬)가 찬하고, 자헌대부장례원경겸홍문관학사(資憲大夫掌禮院卿兼弘文館學士) 벽진(碧珍) 이우면(李愚冕)이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