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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마령면 원강정1길 42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앞
【시기】 187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74cm, 두께 20cm.
【개요】 1868년(고종6년)에 영계사가 훼철된 뒤에 1870년에 인근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다. 전면에 ‘葵菴全先生 諱繼宗 忠景公李先生 諱廷鸞 雙尖李先生 諱仁賢 忠翼公崔先生 諱瀁’ 후면에는 ‘庚午五月日有事 李宇淳 全永升’이라 각자되어 있다. 풀이하면 영계사에 배향되었던 ‘葵菴 全繼宗 忠景公 李廷鸞 雙尖 李仁賢 忠翼公 崔瀁‘의 성명과 후면에 세운 시기와 사람의 이름인 ‘경오(庚午, 1870) 5월 유사(有事) 이우순(李宇淳) 전영승(全永升)’을 각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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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學生天安全公辛權之 配孺人東萊鄭氏孝烈碑(학생천안전공신권지 배유인동래정씨효열비)
【위치】 마령면 계서리 388-8. 계남마을 진입로변.
【시기】 197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5cm, 너비 42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古云孝爲百行之源이라하니 盖五典이 以之而敍하고 三綱이 以之而立이라 故로 孝親敬夫는 爲婦之道요 宜家之本이라 月浪縣二十里許馬靈溪南里故夫人鄭氏는 籍東萊니 翼惠公諱蘭宗后晩谷東朝女요 天安全氏文平公諱文軾后永璣子辛權妻也라 丰姿淑德이 出於天器하여 年十三에 母病이 急危하니 斫指注血하여 延壽七日하고 遭艱에 絶食三日하며 十七而適人하여 孝養舅姑하고 敬奉君子하되 極盡其誠이라 姑氏疚疾委席에 築壇祈天하고 揣摩心志하여 保護懇篤이나 竟終天年하니 含痛哭泣하며 哀毁逾制라 時丁島夷虐政故로 死卽葬魄이 世皆風靡라 夫人이 牢拒曰士之葬以踰月은 禮也라 豈可 畏彼而違禮乎아 하고 遵行古法하고 夫君이 以風靡로 若楚三載에 奉藥祈斗하고 喪葬禮節을 一如姑氏時하니 雖古之賢媛이라도 不是過也라 鄕誦其孝하고 比之曹孟하여 將擬闡揚하니 夫人이 聞卽拒之하고 桑麻業職하여 振其家門이라 吾族注容等諸甫가 抱其薦狀하고 昌炎遠訪曰朱夫子云先世有美에 不知는 不明이요 不傳은 不仁이라 하니 不肖輩不明不仁之尤者也라 幸奉士林指揮하여 謹竪片石하니 願惠之以文하여 俾伸微忱이며 感極幽明이니라 噫라 彰善闡美는 彛性所同이니 不可以耄耋로 辭하여 遂銘曰 風采端莊 玉潔氷淸 指血救母 幼年至誠 以事舅姑 志物備養 贍護病姑 孝莫可狀 竟至大化 痛禁俗尙 遵禮拒夷 踰月厚葬 奉夫風靡 殫竭誠敬 扶綱振紀 寔出天性 成均校宮 褒賞特行 一片穹碑 百歲輝映
大韓民國六十一年己未立秋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옛말에 이르기를,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니 오륜이 이것으로 순서를 정하고 삼강이 이로써 세워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지아비를 공경함은 부인의 도리요 가례의 근본이다. 마령면 계남리 고 부인 정씨는 본관이 동래이니, 익혜(공翼惠公) 휘(諱) 난종(蘭宗)의 후손 만곡(晩谷) 동조(東朝)의 딸이요, 천안 전씨(天安全氏) 문평공(文平公) 휘(諱) 문식(文軾)의 후손 영기(永璣)의 아들 신권(辛權)의 처이다. 예쁜 자태와 정숙한 덕이 천품에서 나온 것이라, 13세에 어미의 병이 위급하니 손가락을 갈라 피를 넣어 수명을 7일간 연장케 하였고, 어미의 상을 당하매 3일을 절식하였다. 17세에 출가하여 시부모를 효로 섬기고, 지아비를 공경하고 받들매 극진 정성이었다. 시어미가 오랜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단을 쌓아 하늘에 기도하고 시어미의 심지를 헤아려 극진히 모셨으나, 결국 천명을 다하니 통탄 곡읍하며 슬퍼함이 예제를 넘었다. 때는 왜놈의 학정을 당하여 임종하면 곧바로 장사지내는 세태가 풍미하였으나 부인이 딱 잘라 거절하며, 양반의 장례에 달을 넘김은 종래의 예법이다. 어찌 저 사람들이 두려워 예법을 어길 것인가 하고 고법(古法)을 지켰다. 지아비가 중풍으로 3년간 고생하게 되자 약을 받들어 올리고 북두칠성에게 기도하며 상장(喪葬) 예절을 시어미 때와 같게 하니, 비록 옛날의 어진 여인이라도 이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다. 고을에서 그 효를 칭송하고 조맹(曹孟, 조휴[曹休]의 처[妻])에 비견하여 장차 천양하려 하니, 부인이 들은 즉 거절하고 누에치고 삼베 짜며 가업을 일으켜 가문을 떨쳤다. 나의 친족 하주용(河注容) 등 여러 선비가 그 천장(薦狀)을 품고 폭염하에 멀리 찾아왔다 그러면서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선대(先代)에 아름다운 행실이 있는데 알지 못함은 밝지 못함이요, 전하지 않음은 불인(不仁)이라 하니 불초(不肖) 자기들은 불명불인(不明不仁)이 심한 자”라 하더라. 다행히 사림이 받들어 지휘하여 삼가 편석을 세우고 비문을 원하거늘, 작은 정성이나마 펴서 저승과 이승을 감동시킬 일이다. 희(噫)라! 선을 표창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는 것은 불변의 도리인 바, 늙은이가 외람되게 사(辭)하여 명하기를 “풍채는 단장하여 옥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았네 / 손가락 피를 어미에 먹여 어미를 구하는 등 유년부터 지성이었네 / 시부모를 섬김에 마음과 몸을 아울러 공궤했네 / 병든 시어미 편안하게 구환하니 그 효성 형용하기 어렵네. / 필경 운명하니 애통을 참고 전래의 풍속을 숭상하여 / 왜놈의 풍속 거부하고 달 넘겨 후히 장사지냈네. / 지아비 풍병 수발에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 기강을 세우고 떨침은 진실로 하늘이 낸 성품일세. / 성균관과 향교에서 특행을 포상하여 / 비 하나를 세우니 백세에 빛나리.” 대한민국 61년 기미(己未) 입추 진양 하천수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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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진안읍 가림리 산 223-1. 마이산남로 도로변.
【시기】 1907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마이산 남쪽 진입로 입구에서 이산묘 못 미쳐 500m 부근에 있는 바위. 전면에 송병선(宋秉璿), 최명호(崔明鎬), 최제국(崔濟國), 이기회(李起晦), 이호용(李浩瑢), 한창희(韓昌熙), 최제학(崔濟學), 최은상(崔殷相)의 이름과 경자(庚子. 1900년) 8월이라 새겨져 있다.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가 새긴 것이라 한다. 1907년 9월 12일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이 바위 위에 제단을 쌓고 의병을 일으키면서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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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진안읍 가림리 산 223-1. 마이산남로 도로변 용암 뒤 마이산 암벽.
【시기】 1949년 이래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마이동천 암벽은 협소하여 포화 상태인지라 부근에는 이산묘에 직간접으로 공로가 있는 인사들을 기념할 각자(刻字) 장소가 없어 용암(龍巖) 뒤의 암벽이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 있으므로 여기에 이산묘 유공인(有功人)들을 각자하기 시작하여 작업을 수년간에 걸쳐 진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는 각자한 특정 날자를 기재하지 아니하였다. 여기에는 모두 702명의 인명(人名)이 각자되었다.
【龍岩洞門題名錄】 全永祚 宋相吉 朴淵東 李元植 朴魯東 宋日洙 全永云 李順植 全孝基 李康老 金漢表 鄭八文 金會燮 李吉童李奉鉉 宋相辰 宋世煥 朴鍾弼 朱先仲 徐奇奉 全壽權 愼判範 宋正煥 宋幸濂 金容瑞 全奉權 金周烈 李湳根 崔龍錫 宋義濂 宋俊煥 梁公西 朴鍾甲 宋守煥 白奉周 洪在鳳 宋寅煥 金永祿 李佐京 韓益善 金東植 李日南 朴魯成 馬光祿 全炳九 朴鍾彦 金敎南 金榮洙 張永根 全成德 沈泰燮 朴昌圭 韓奉模 金山岩 朴鍾晋 崔殖林 全中相 全南玉 徐奇成 朴弘學 辛安坊 元世昌 宋三文 宋相善 全炳俊 李錫漢 朴順珍 金景坤 元容植 李起福 李点童 李錫薰 全金岩 姜鍾熙 高道成 徐在洪 元喆喜 宋在先 宋奎鎬 金炳龍 朴希俊 姜信國 梁貴男 林相吉 宋在烈 李周淳 朴洛圭 徐炳烈 姜信洪 李金岩 盧奉煥 全永萬 宋相奇 梁禮根 金鍾鳴 姜信甲 金炳琦 元昌喜 宋龍煥 李熙洙 鄭奉星 尹和燮 朴奉玉 梁仁煥 孫炳憲 金永祥 李大根 朴漢奉 李道生 朴先東 安在萬 朴甲辰 全炳國 全炳勳 尹仁燮 李道洪 徐甲錫 辛相萬 韓鍾玉 洪福 丁南洙 全相昊 金明先 愼致晟 李尙九 崔仁太梁在奉 金錫洛 文判南 徐炳用 愼自晟 李昌先 崔淇文 金永吉 金錫基 金鐵同 宋弼煥 崔植溶 全昌龍 全泰成 安八龍 李漢喆 愼永祚 全君伯 愼云晟 愼景範 崔在洙 蘇南泳 朴春錫 全奉權 杜奇鍾 崔相文 全永采 全其權 蘇鎭五 愼萬範 尹贊五 全昌玉 金光洙 朴漢守 李昌三 劉仲吉 劉在燮 全順榮 河龍圖 金判實 金學秀 李根求 洪東錫 金用權 全泰奉 李元裕 張基甲 崔文基 金基承 梁正煥 金鍾烈 全炳浩 張基杓 梁相權 辛榮煥 崔永碩 李圭洪 劉秉五 全永學 余東龍 鄭信模 崔淇春 全大甲 全炳鳳 李炳春 梁元仲 朴漢祚 愼洛晟 全公烈 柳明七 全敎鐸 安炅錫 鄭明朝 李漢植 孫熙京 張東燮 金奉漢 梁在玉 李晙相 辛鍾植 金正洙 孫熙先 李判基 宋在彧 梁鎭權 梁成烈 辛仁泰 金正球 孫熙廷 金成萬 金卜斗 梁聖權 李繪相 梁星鉉 魯鍾桓 孫熙上 辛基南 金容燮 金判山 朴鍾林 安士章 鄭鎭宣 孫俊基 朴箕文 朴昌甲 金炳澤 朴鍾來 宋柱彩 白萬洙 孫洪基 李南宗 孫錫大 梁泰烈 康井五 梁柱鉉 白恭洙 孫鐸基 李海萬 朴鍾洙 康東龍 梁焄承 梁碩鉉 金漢基 張陸燮 趙根濟 朱校 吳明烈 全炳山 權相淑 全慶善 張七燮 林大鳳 朱桓 李尙榮 全炳來 權相泰 林京贊 張烋燮 李希宗 孫公培 李虎榮 申君模 李漢綉 全甲錫 張今燮 金光照 朴鍾根 孫炳基 金祺祥 辛箕寅 安昌玉 姜相植 李琪洪 金元根 李潤雄 朴相吉 安昌孫 金八權 崔吉洪 李東郁 全秉用 金鎬燮 安在鉉 崔漢益 崔周恩 金鎭玹 朴在烈 朴晭德 朱龍吉 鄭德溱 裵聖裕 金永漢 高德基 朴在民 韓龍鎭 金洪烈 姜元基 安瑀烈 金吉龍 安大根 張貴鎬 金桓辰 柳興錫 鄭成南 姜學權 裵炳洙 安在淵 張寬鎬 高在鉉 金泰辰 韓正基 安在七 李福信 安在明 張光三 嚴柱元 薛昌業 金炳柱 尹學東 安次烈 金炳桓 張世國 徐亨煥 安德在 朴順甫 李康賢 安箕烈 鄭觀朝 金南洙 金永來 任泰亨 李東馥 梁正權 安昌辰 鄭學奉 元仁常 李八圭 鄭道弘 孫鍾萬 朴海水 金達柱 梁明洙 全淳万 金炯贊 柳春玉 李圭泰 柳任春 宋柱成 愼鏞琥 高濟三 金鍾百 朴順溶 尹尙煥 愼完範 辛燿泰 愼玉範 李俊儀 李春實 李相烈 白德欽 全亨奎 李湘寧 梁珖鉉 李康周 李琪培 金東圭 梁鍾浩 朴今同 梁官永 愼鏞寅 李康允 金漢喆 嚴玟永 梁叮錫 愼必晟 蔡圭元 金長洙 柳庠珪 金應植 安瑯烈 梁炳瑄 愼判喆 金容信 林炳春 林亨澤 全炳寅 高光文 梁斗煥 河相吉 韓泰洪 嚴仁永 金道基 金完山 金桓栻 愼鎈晟 李尙馥 張基浩 李龍鎬 元重熙 全淳錫 薛鎭南 全鳳九 高在明 全炳薰 吳秉鎔 元鍾淏 李圭燦 金南洙 劉學俊 吳玄錫 金慶南 朴仲植 吳秉箕 柳平秀 劉福南 金榮浩 鄭寅洙 愼德晟 李相儀 吳善其 金庚喜 李昌雨 成京浩 崔台淑 朱權 高泳柱 姜琪煥 金光洙 劉供升 李建永 林鍾熹 文學萬 安桓吉 蔡吉洙 高錫煥 白南虎 蘇仁永 元儒常 朴昌浩 蘇學永 金東郁 吳起烈 全壽南 洪甲龍 元容殖 柳寅善 金炳勳 李根英 吳穆烈 朴成才 朴在緖 元大喜 金永豪 王斗淳 尹錫柱 朴在春 李鍾賢 金相烈 李鍾元 禹濟寬 白柾基 金鍾吉 李鳳玉 朴永云 任義淳 鄭永熙 元容德 朴龍八 金時榮 李命周 朴万鳳 許洪錫 朴榮先 全洪植 朴應喆 金圭鐵 全永澤 金守城 許璨錫 張琪煥 張龍馬 金豪彦 金煥喆 金相烈 韓相倫 李良辰 李榮奎 李鳳煥 朴贊益 李基洙 林鍾澤 韓宗熙 朴鍾弼 徐基永 睦源大 宋貞燮 鄭鎭灄 李判權 李漢淑 張內周 朴淵汀 鄭相三 全昌根 高光祚 金宗鉉 韓甲鉉 張軫龍 梁順一 李權寧 黃載夏 吳在曄 金在華 李安儀 金京洙 柳內龍 崔洙福 李順寧 吳在東 梁星來 金永術 金凡用 朴鍾仁 愼吉鏞 陸炳淑 李圭珣 愼宜晟 李羲鍾 李成裕 崔學順 李漢洙 陸溶基 高官五 辛瀊澈 薛學洙 朴炳德 崔善長 蘇基春 陸鳳基 金容準 韓三熙 孫吉永 黃金鐸 金蒙洙 全炳洙 陸炳天 宋炳用 李相斗 高敬模 程順烈 金基永 李羲錫 金逸鉉 金鍾九 愼聖範 李羲祚 朴昌輔 金基羲 鄭宗黙 黃健周 姜瑾春 奇宇岳 鄭寅鉉 安俊鎬 崔炳澈 鄭元黙 黃燦周 高泳信 尹錫基 徐丙贊 崔光五 李炳壕 金基學 黃龍顯 高應鉉 元彩喜 吳在憲 全良根 鄭淳洪 柳浩錫 李鍾斗 金炳哲 崔昇烈 吳在瑃 鄭漢玉 梁喜喆 李萬器 蔡奎龍 姜凡熙 李錫東 趙永完 吳在洪 柳直養 宋三燮 林奎從 吳在益 梁泰圭 韓台鎬 吳在九 吳一昇 李鍾澤 朴錫喆 李暻澤 朴東宇 朴學根 吳淇鉉 柳根鎬 蘇錫哲 金錫權 柳濟敬 宋二用 吳俊烈 金炯柱 郭漢永 申晩雨 河千秀 鄭益煥 鄭基唐 李治香 宋漢義 黃琫奎 李存亨 許秉烈 申程雨 鄭鳳溱 林文三 金喜權 郭鐸 李道衡 姜采善 宋相浩 金寶鉉 金洪奇 李容沂 李愚軾 任憲濬 高棟晩 李泰淵 宋東準 那貴官 金會吉 曺宗祿 柳仲養 羅琇鉉 權五奉 全大權 金平基 李容燁 許政烈 宋斗燮 林鍾鎬 盧甲俊 崔學鉉 尹命模 崔鎭浩 尹正學 全永和 金正萬 全炳厦 全炳熙 偰昌煥 丁泰鉉 那光郁 趙東官 李炳九 李炳轍 崔周鉉 崔元集 李聖麟 朴學淳 金處重 鄭泰國 金正復 金舜培 梁仁權 河相弼 李一根 金正大 李炳現 崔斗鉉 全炳賢 宋相元 趙昌浩 崔永景 趙秉龍 崔鳳鉉 金正模 全炳朝 宋升煥 崔世泰 李得載 全洪烈 鄭泰善 鄭泰洪 河在倫 尹義燮 朴漢喆
有司 金興烈 梁仁權 宋升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