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강창오현 동계유적비(江昌五賢洞契遺蹟碑)
운영자 23-12-22 14:20 154 hit
【비표】 ‘江昌五賢洞契遺蹟碑’가 비 상부를 전서로 두른 가운데 비문이 각해 있다.

【위치】 마령면 원강정1길 원강정마을회관 마당.
【시기】 1952년
【형태】 비각 안에 들어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6cm, 너비 58cm, 두께 26cm.
【개요】 이 비에는 강창오현이 임진왜란시 거의한 내력이 각서되어 있다. 한편 이들 오현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1977년 오현사를 세웠다. 비는 비각안에 들어 있는데 비각은 전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맞배 건물이다. 주인공들의 비(碑) 주인공들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趙宋之時 藍田縣呂氏四兄弟 與鄕人約曰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 有善則書于籍 有過及違約者 亦書之 三犯而行罰 不悛者絶之 此爲有補世敎大矣遠矣 本朝穆陵之世 鎭安縣江昌里 有義契 前習讀葵菴天安全公繼宗 監察靈山辛公麒 習讀東萊鄭公大壽 縣監南陽洪公滭 雲圃延安宋公大弘所設者也 盖五公 俱以一時名流 志同道合 連墻接屋 遂成是契 每良辰佳節 觴詠風浴 不知老之將至 及壬辰亂 全公倡義勤王 四公俱爲贊劃 募糧漕運 全公竟殉節 特贈工曹參議 享靈溪書院 四公誓圖前進 更爲傳檄 敵退乃止 而絶意名利 講道範世 後承蕃衍 爲郡著族 因以增捐規約 推年德俱邵者三人 爲契首 每講信時 衣冠互接 歲節饋遺 殽羞交錯 至於吉凶患難 莫不救助 年滿一紀 則特排燕饗 自五姓中十年間婚娶者 辨備其需 稱以東床宴 以修親親長長之誼 至今三百餘年 罔或有闕 猗歟盛哉 事載鎭安志 江昌 今之江亭里云 將立石紀蹟 尸其事者 全中權宋相元 董其役者 全義根宋相直 請其文者 全炳寅辛鍾植洪鍾晙鄭貴泳 余辭不獲 爲之銘曰 天作馬耳 雙秀揷雲 峰下有江 其水沄沄 山水鍾靈 五姓芳芬 義契爰立 有條有文 呂約雖異 意則相因 長長親親 寔出義仁 四百載近 石以紀眞 我顧諸家 益敦德隣 神勞豈弟 錫祉無垠
壬辰五月丹陽 完山 崔秉心撰
【풀이】 조송(趙宋 : 중국에는 국호를 송[宋]이라 칭한 왕조가 셋이 있으니, 첫째는 춘추시대의 제후국인 송나라가 있고, 두 번째는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유유[劉裕]가 세운 송나라가 있으며, 세 번째는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나라가 있는데, 세 번째의 나라를 조씨의 송나라라 하여 조송이라 칭한다. 조송은 서기 960년에서 1279년까지 319년을 유지하였다)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씨(呂氏) 4형제( : 송[宋]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았던 여씨의 4형제는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의 셋이고 하나는 미상임)가 고을 사람들과 약속하기를 “덕업으로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과실은 서로 경계시키고[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환난이 있으면 서로 돕기로[患難相恤] 하여, 착한 일이 있으면 문서에 적고, 과실과 위약자가 있으면 이 역시 적으며, 세 번을 범하면 벌을 가하고, 그래도 개전(改悛)의 정이 없으면 절교하기로 하였는데, 이 일이 세교(世敎)에 도움이 된 바가 심대하였다. 본조(本朝) 선조 때, 진안현(鎭安縣) 강창리(江昌里)에 의계(義契)가 있었으니, 전 습독(前習讀) 규암(葵菴) 천안 전공(天安全公) 계종(繼宗)과 감찰 영산 신공(靈山辛公) 기(麒), 습독 동래 정공(東萊鄭公) 대수(大壽), 현감 남양 홍공(南陽洪公) 필(竭), 운포(雲圃) 연안 송공(延安宋公) 대홍(大弘) 등이 창설한 것이다. 대체로 5공(公)은 모두 한 시대의 명류(名流)로 뜻도 같고 도의(道義)도 합치하여 담장을 연대고 집을 맞대고 살면서 마침내 계를 만들고, 매양 양신(良辰)과 가절(佳節)을 당하면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고 바람도 쐬고 목욕도 하면서 늙음이 닥치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차,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공(全公)이 의병을 일으켜 왕사(王事)에 나서자, 4공이 함께 찬조하여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고 하였다. 전공이 마침내 순절하니, 특별히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다. 4공은 계속 전진(前進)하기로 맹세하고 다시 격문을 발송하였는데, 적이 물러남으로써 그만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명리(名利)에서 마음을 돌리고 도학을 강하고 세속을 바로 잡기에 힘썼는데, 후손이 번창하여 고을의 저족(著族)이 되었다. 이에 규약을 수정하여 연세와 덕이 높은 사람 셋을 뽑아 계의 우두머리로 삼으니 강신(講信)할 때마다 의관(衣冠)이 운집하고, 설 명절에는 음식이 오가서 술과 안주가 쌓이며, 길흉(吉凶)과 환난(患難) 때에는 서로가 구제하였고, 해가 1기(紀, 기는 12년)가 되면 특별히 잔치를 베풀고, 다섯 성씨에서 10년 사이에 새로 장가를 든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동상연(東床宴)이라 칭하고 친목을 도모하고 어른을 섬기는 뜻을 돈독히 하여 우금 3백여 년에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일이다. 이 사실은 《鎭安誌》에도 실려 있다. 강창은 지금의 강정리(江亭里)를 말하는데, 앞으로 돌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전중권(全中權)과 송상원(宋相元)이요, 공사를 감독할 이는 전의근(全義根)과 송상직(宋相直)이며, 글을 청하러 온 사람은 전병인(全炳寅)·신종식(辛鍾植)·홍종준(洪鍾晙)·정귀영(鄭貴泳)이다. 나는 사양하다가 이루지 못하여 명을 달기로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마이산 말 들어 / 쌍봉이 구름에 꽂혔네. / 봉우리 아래 강이 있어 / 그 물줄기 출렁거리누나. / 산천이 영기를 길러내어 / 다섯 성씨 향기롭도다. / 이에 의계를 세우니 / 조목 있고 문서 갖췄네. / 여씨 향약과는 다르다 하나 / 그 의도만은 서로 연했다네. / 어른을 어른답게 가까운 이 친함은 / 이는 바로 인의(仁義)에서 나옴이지 / 4백 년이 가까워지니 / 돌에 사적을 새긴다네. / 내가 여러 집안 살펴볼 때 / 덕으로 이웃함이 더욱 독실하매 / 신령들 그 은근스러움 위로하여 / 복을 내림이 끝간데를 모를레라.” 임진(壬辰, 1952) 5월 단오일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