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표】 雙忠臣全公自溫自讓神壇碑(쌍충신전공자온자양신단비)
【위치】 마령면 강정리 238. 원강정마을 북서쪽 영계사 담장 서쪽.
【시기】 1923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0cm, 너비 52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嗚呼 國朝莊陵丁丑之變 尙忍言哉 如討其罪 世豈無董狐之筆 欲說其事 時方諱司敗之問 然爲人臣 不幸當此等斁倫逆理之慘禍 初無一分忍痛含怨 迫不得已之心 而只欲爲自身 城狐倉鼠之計者 曾狗彘之不若也 時方奸臣麟趾等 降封上王 爲魯山君 而安置寧越之淸泠浦 三大臣六忠臣 次第就戮 而天安全公諱自溫 獨以文臣諫官 能敢言不諱 上惡之 貶公爲宣武將軍鎭邊萬戶僉使 幷逐其弟司直公諱自讓於淸泠浦 兩公之夫人 安氏申氏 皆不免焉 及上王遭貢生之弦 公之兄弟 引義自決 而二夫人亦皆下從焉 於若全氏一門 雙忠雙烈 凜然若秋霜烈日 而足以書諸信史矣 惜其知德者鮮 使此等忠烈佚而不傳 可勝歎哉 且念 端宗之追復 在肅廟朝 而英宗末年 兩公子孫 屢呈該曺 未蒙褒獎 體魄之在寧越者 世無郭子儀 墓中人 誰復證之 數百年後姓之痛恨 不可形言 歲己未秋 兩公雲仍 合謀同心 就鎭安之鷹峰峙下居士谷先塋下 爲築神壇 歲一祭之 將伐石 用表其壇 兩公之後孫 洪奎 道錫 囑余以叙之 不獲已按其狀 天安之全 以百濟歡城君諱聶 爲上祖 而高麗文平公諱文軾號都隱 爲其高祖也 曾祖諱天近 本朝文科大司憲 祖諱思美 文科同知中樞 考諱克禮 大護軍 妣全州李氏 判書軾女也 子男益禧 文科善山都護府使 孫男瓚 將仕郞智陵參奉 曾孫繼宗 文科侍講院習讀 贈工曹參議 號葵庵 配享于靈溪書院 萬戶公後也 子男以忠 英陵參奉 以信將仕郞 參奉 以忠子參奎曾孫東屹 訓鍊大將 以信子斗 眞寶縣監 司直後也 子孫之世居湖南諸邑者 忠孝相傳 爲天安氏之巨族 此可見兩公漑根食報之餘蔭也已 歲昭陽大淵獻八月佳俳節 後學星州人李道復謹撰
【풀이】 오호라! 국조(國朝, 조선[朝鮮]을 뜻함) 장릉(莊陵, 단종의 능호) 정축(丁丑, 세조 2, 1457)의 변(變)은 차마 말이나 하겠는가? 그 죄를 성토(聲討)하기로 한다면, 세상에 어찌 동호(董狐 :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의 사관[士官]. 진의 신하인 조천[趙穿]이 영공[靈公]을 시해[弑害]하였는데, 대부[大夫]인 조순[趙盾]이 그를 체포하지 않고 도망치게 방치하자 동호가 사기[史記]에 바로 조순이 죽였다고 기술하였다. 공자[孔子]는 이를 직필[直筆]이라 극찬하였다. 사실은 조순이 조천을 사주[使嗾]한 일이었다)와 같은 직필(直筆)이 없겠는가마는, 그 일을 말하려 하면 당시에는 형관(刑官)의 신문(訊問)조차 없애버렸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남의 신하가 되어 그렇듯 인륜(人倫)에 배반되고, 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참화(慘禍)를 당해서 애당초 손톱만큼의 비통(悲痛)과 원망이나, 아주 각박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마음이 없이 다만 자신을 위하여 즐겨 성호(城狐) 사서(社鼠 : 여우의 굴을 파헤치려 해도 성이 무너질까 걱정되고, 쥐 구멍에 불을 지르려 해도 사창[社倉]에 화재가 날까 두렵다는 뜻인데, 세력을 빙자하여 나쁜 짓을 하는 관리를 지칭한 말)가 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으로 개나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 때 바야흐로 간신(奸臣) 정인지(鄭麟趾) 등이 상왕(上王)을 강봉(降封)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만들고, 영월(寧越)의 청령포(淸寧浦)에 안치(安置)하려 삼대신(三大臣)과 육충신(六忠臣)을 차례로 죽였다. 이 때 천안 전공(天安全公) 휘 자온(自溫)은 유독 문신(文臣)인 간관(諫官)으로 숨김없이 직언(直言)을 하니, 임금이 미워하여 공을 선무장군(宣武將軍) 진변(鎭邊) 만호(萬戶)와 첨사(僉使)로 좌천시키고, 공의 아우 사직공(司直公) 휘 자양(自讓)까지 청령포로 내쫓았다. 두 분의 부인 안씨(安氏)와 신씨(申氏)도 모두 무사할 수가 없었다. 상왕께서 공생(貢生, 고을에서 추천한 태학생[太學生])의 화살을 맞고 흉서(薨逝)하자, 공의 형제는 의리를 들어 자결(自決)하였고, 두 부인도 따라 죽었다. 그러니 전씨 집안의 쌍충(雙忠)과 쌍렬(雙烈)은 늠름(凜凜)하기 추상(秋霜) 열일(烈日)과 같아 족히 역사에 쓰여질만하나, 애석하게도 덕의(德義)를 아는 이가 없어서 이러한 충렬(忠烈)이 유루(遺漏)되고 전해지지 않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겠는가? 또 생각해 보건대, 단종(端宗)의 복위(復位)가 숙종조에 있었기에, 영조 말년에 두 분의 자손들이 누차 해조(該曹)에 진정을 하였으나 포장(鷸奬)을 받지 못하였다. 영월에 있는 체백(體魄)도 찾을 길이 없으니, 우금 수백 년이 지나도록 자손의 통한(痛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지난 기미년(己未年, 1919) 가을에 두 분의 자손이 합심하여 진안(鎭安)의 응봉치(鷹峯峙) 아래의 거사곡(居士谷) 선영(先塋) 아래에 신단(神壇)을 쌓고 세일제(歲一祭)를 지내게 되었다. 돌을 다듬고 단에 표석을 세우려던 두 분의 후손, 홍규(洪奎)와 도석(道錫)이 나에게 서술해 주기를 부탁하였는 바, 사양치 못하여 가장(家狀)을 상고해 보았다.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백제(百濟)의 환성군(歡城君) 휘 섭(褐)이 상조(上祖)가 되고, 고려(高麗)의 문평공(文平公) 휘 문식(文軾) 호 도은(都隱)이 고조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천근(天近)이니 본조(本朝, 조선[朝鮮]을 말함)의 문과(文科) 대사헌이고, 조부의 휘는 사미(思美)이니 문과 동지중추(同知中樞)이며, 고(考)의 휘는 극례(克禮)이니 대호군(大護軍)이요, 비(騙)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판서 식(軾)의 따님이다. 만호공(萬戶公)의 아들 익희(益禧)는 문과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요, 손자 찬(瓚)은 장사랑(將仕郞)에 지릉참봉(智陵參奉, 지릉은 익조[翌朝]의 능침이다)이며, 증손 계종(繼宗)은 문과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에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요 호는 규암(葵菴)인데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사직공(司直公)의 아들 이충(以忠)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이요, 이신(以信)은 장사랑(將仕郞)에 참봉이며, 이충의 아들은 삼규(參奎)요, 증손 동흘(東屹)은 훈련대장이며, 이신의 아들 두(斗)는 진보현감(眞寶縣監)이다. 자손으로 대대로 호남(湖南)의 여러 고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충효(忠孝)로 전해 내려와 천안씨(天安氏)의 거족(巨族)이 되어 있으니, 이로써 두 분의 근본을 배양하고 복을 직접 누리지는 않은 여음(餘蔭)임을 알 수 있겠다. 계해(癸亥, 1923) 8월 가배절(佳俳節, 嘉竄節) 후학(後學) 성주(星州) 이도복(李道復)이 삼가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