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마령면 계남길 37 계남마을 남쪽 내동산기슭 내산사 경내.
【시기】 1977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6cm, 너비 65cm, 두께 36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德崇業廣하고 學博聞多하야 爲士林領袖요 鄕省著龜則後人이 宗仰之寓慕之를 愈久愈新이니 惟修堂先生鄭公이 亦其人焉라 公諱鍾燁이오 字宅新이오 修堂其號니 籍東萊라 尙書左僕射太府卿諱穆이 爲上祖하야 著於麗라 諱絪이 恭愍朝에 以都指揮使로 樹功하고 生諱暹하니 入李朝에 吏判이오 生諱興嗣하니 禮判이니 三世俱享承芳祠라 禮判이 有五子하니 皆登文科에 玉樹交柯라 長諱坤이니 直學士大司成이라 英陵晟時에 文學이 鳴世하야 賜號復齋하고 命修國史하니 恩眷이 隆重이라 際乎 莊光에 棄官晦采하니 士林이 稱復齋先生而俎豆之하고 繼而爲公爲 卿에 功名事業이 輝映百世라 傳至習讀諱大壽하야 道義學問이 爲儒林帲幪而當壬亂에 與全公繼宗辛公麒洪公滭宋公大弘四友로 擧義討敵하고 敵退而止라 族後孫寅普撰墓銘하고 奉安五賢祠하여 諱東俠號慕齋니 以學行으로 登道剡하나 除官不就라 長陵南漢之變에 擧兵至礪山이라가 聞和成하고 痛哭歸隱하니 享駬山永慕祠라 曾祖諱甲東이니 有文行하고 祖諱寅敏이니 號省齋라 以孝學으로 有鄕薦하다 生二男하니 長春北이니 諱暻謨요 次秋南이니 諱聖謨니 皆以聞望으로 兄難弟難이니 秋南이 是公之皇考요 妣난 天安全氏文平公後龍錫女니 備婦德이라 公이 高宗乙酉生하니 甚岐嶷하야 自幼於兩親에 愛敬이 篤至하고 就學에 誠勤的確하야 自守繩尺에 踔厲不群이라 置心平易난 如橫渠訓하고 徐徐玩味난 如紫陽言하야 弱冠에 學問이 巳成就하니 可以紹德襲美라 父病에 四朔刀圭에 衣不解睫不交하고 遭憂에 盡戚易하고 於內艱에 亦如之라 墳墓稍遠이나 月三省하고 及夫日에 痛如袒括이라 就正於艮齋田翁하야 得聞性理之源하고 講質于郭勉宇奇松沙諸賢하야 益致其知라 神精이 霞擧에 風儀峻正하야 松貞竹秀요 玉潔氷寒이니 望之喬嶽이오 卽之春風이라 養內而不遺外하야 敬義夾持에 平也如準하고 方也如矩라 常曰禮者난 仁之節文이오 義者난 仁之裁制니 非禮義면 不得行仁이라하고 操存省察에 若神明之在側하며 霽潦裘葛에 動止行藏이 不差錙銖斤兩이라 不以外物로 役吾耳目하고 發爲文章에 典雅渢渢이라 簡而詳하고 直而溫하야 掇芬搴芳에 如走盤之珠하야 用副人家金石之誌하고 慨閨範之陵夷하야 編冊古女士嘉言善行하야 爲巾幗明鑑而警覺之하고 愛君憂國之心이 子午指針이라 聞政敎之紕繆에 太息之痛哭之를 不以在野有間이러니 遽當屋社에 志在東海西山이라 括囊含黙하야 視虎吼如蚊咶하고 不籍不稅하야 置死生於度外라 與菊史李柄淵과 松坡全麟權으로 力助靜齋李錫庸海山全基泓擧義旅하고 恐殲倭記事가 見奪島兵하야 請秘藏自家而傳後하야 終得其完璧하고 南遷北徙에 不恒其居하고 本食澗飮하며 緇巾蕙帶로 固守東崗이나 如珠沈淵玉藏櫝하여 問業者隨處塡門이라 巨冶洪爐가 鑄出名器하야 補其黥刖에 虛往實歸하니 月浪之多碩士가 良有以也라 一自啓手足으로 及門之全州崔相冕이 與諸益及其子貴泳으로 設隆親契而寓慕하고 幾年積誠에 建祠以俎豆하고 築齋而講讀이나 猶有未盡這莊할새 使全炳和及其孫相濂으로 來謀玄刻於余하니 是無異反鑑而索照요 却步而圖前이라 固辭不得일새 切念際此虐浪滔滔에 人多梔蠟粉飾하고 狐號鱔舞而僉章甫拔力揚虔하야 尊賢衛道에 發輝斯文正脉하니 感佣殊深이라 遂銘曰
就正長德 講質大賢 學問正路 孝悌爲先 發爲詞章 文垣主盟 不移肘案 造詣益精
吁嗟國步 馬鹿換形 玄黃飜覆 飮泣新亭 東遷西徙 不恒寄栖 玉蘊山輝 桃李成蹊
菁莪長育 棫樸成材 高風逸韻 半夜一雷
檀紀四千三百十年丁巳夷則月上日 晋陽 河千秀 謹撰
【풀이】 덕은 높고 공업(功業)은 넓으며 학문이 넓고 문견이 많아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고 지방의 원로(元老)가 된 분이 있다면 후인들의 추앙하고 사모함이 해가 오래일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법인데 수당선생 정공(政公)은 역시 그러한 분이라 하겠다. 공의 휘는 종엽(鍾燁)이오 자는 택신(宅新)이며 수당은 그 호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니 상서 좌복야 태부경(尙書左僕耶太府卿) 휘(諱) 인(絪)은 공명왕때에 도지휘사(都指揮社)로 큰 공을 세웠고 이분이 휘 섬(暹)을 낳으니 예조판서인데 3대가 모두 승방사(承芳祠)에 모셔졌다. 예조판서가 아들 다섯 분을 두어 모두 문과에 오르니 그야말로 옥수(玉樹, 남의 자제를 높혀서 부르는말)의 가지가 뒤얽혔다 하겠다. 맏이의 휘는 곤(坤)이니 직학사(直學士)에 대사성이다. 세종조의 융성하던 때에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복재(復齋)라 호는 내리고 국사(國史)를 현수하도록 명하였는데 은우(恩遇)가 융숭하였다. 그러나 단종 세조조에 이르러서는 벼슬을 버리고 명성을 숨기니 사람들이 목재선생이라 부르고 제사를 올렸다. 이 뒤로도 대를 이어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공명과 사업이 백세(百世)에 빛났다. 습독(習讀) 휘 대수(大壽)에 이르러서는 도의(道議)와 학문으로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임진란(壬辰亂)을 당해서는 전공 계종(全公繼宗) 신공 기(辛公麒) 홍공 필(洪公熚) 송공 대홍(宋公大弘) 등 네 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야 그만두었는데 족후손(族後孫) 인보(寅普)가 묘갈명을 지었고 오현사(五賢柌)에는 의병을 일으켜 여산(礪山)까지 왔다가 회의(和議)가 이루어졌음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영영 출입을 끊었는데 이산(駬山)의 영모사(永募柌)에 모셔졌다. 증조의 휘는 갑동(甲東)이니 문행(文行)이 있었고 조부의 휘는 인민(寅敏)이니 호는 성재(省齋)이니 효행과 학문으로 향천(鄕薦)을 받았다. 이분이 두 아들을 두어 맏이 춘북(春北)의 휘는 경모(暻謨)요 다음 추남(秋南)의 휘는 성모(聖謨)이며 모두 명망이 있어 난형(難兄) 난재(難弟)라 하였는데 추남이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 천안전씨(天安全氏)는 문평공(文平公)의 후손인 용석(龍錫)의 따님인데 부덕(婦德)을 두루 갖추었었다. 공은 고종 을유년(乙酉年, 1885, 고종 22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매우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함이 정확하여 스스로 과정(科程)을 지켰으나 공부의 성취에는 반군(扳群)의 진척이 있었다. 마음가짐이 평이(平易)함은 횡거(橫澽),「송<宋>의 학자 장재<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