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마령면 계서리 388-8. 계남마을 진입로변.
【시기】 1923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9cm, 너비 37cm, 두께 11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本所刊 五倫行實 以爲獎善而列郡單子來到 謹按全北鎭安郡馬靈面溪南里 故烈女金海金氏 濯纓先生後 国珉之女 天安大提學 諱翊 曾孫 潭陽府使 諱順生十四世孫 全相燮妻 自幼貞淑 及笄 事舅姑至孝誠 敬君子無違 往在丙戌 夫以時疾 幾至危境 晝夜禱天 願以身代 斫脂注血於口 甦延一日 而終哀痛擗踊因欲下從 時年二十三也 回念宗祀無託 幼孤在襁 强忍含痛 三年執喪 一如袒括 子名炳寔 敎養義方 聘師成就 勤儉治産 克成家道 炳寔妻 南原楊氏 素有淑德 事姑金氏至孝 以盡婦道 炳寔又夭 喪葬祭禮 無所託 永矢守節 兩世烈行 世所罕有 如此卓異之節 宜乎旌表 而但時制有異 尙此未褒 豈不慨然 本所仍爲鋟梓 壽傳百世 使之立碑建閣 永樹風聲 以爲褒狀事
孔子誕降二千四百七十四年 癸亥 月 日
五倫行實重刊所 都有司 都事 鄭敎永, 約長 判書 朴箕陽, 竪 長姪 炳善 炳穆, 孫婿 廉應淳 朴魯涉
【풀이】본소(本所)에서 간행(刊行)하는 오륜행실(五倫行實)은 선행(善行)을 권장하려는 것인데 열군(列郡)의 단자(單子)가 도착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전북(全北) 진안군(鎭安郡) 마령면(馬靈面) 계남리(溪南里)의 고(故) 열녀(烈女) 김해김씨(金海金氏)는 탁영선생(卓纓先生)의 후손인 국민(國珉)의 따님이고, 천안(天安) 대제학 휘 익(翊)의 증손 담양부사(潭陽府使) 휘 순생(順生)의 18세손 전상섭(全相燮)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정숙하였는데 시집을 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부군(夫君)을 존경하여 어김이 없었다. 지난 병술년(丙戌年: 고종23, 1886)에 부군이 시질(時疾: 계절 따라 유행하는 병)로 거의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밤낮으로 하늘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며 손가락을 짓찧어 피를 병자의 입에다 드리우니 소생하여 하루를 더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김씨가 애통하여 가슴을 치고 뛰면서 호곡하여 그길로 하종(下從)하려고 하였으니 그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한편 돌이켜 생각해보니 종사(宗祀)를 부탁할 곳이 없고 어린애는 강보에 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억지로 슬픔을 참고 3년의 집상(執喪)을 마치 처음 상(喪)을 당하였을 때처럼 하였다. 아들의 이름은 병식(炳寔)이다. 의(義)로운 방향으로 가르치고 선생님을 맞아다가 크게 성취시켰는데 그도 근검(勤儉)으로 살림을 하여 가도(家道)를 잘 이루었고 병식의 처 남원양씨(南原楊氏)도 본래 숙덕(淑德)이 있어 시어머니 김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부도(婦道)를 다하였다. 그런데 병식이 또 요사(夭死)하여 상장제례(喪葬祭禮)를 맡길 데가 없으매 또 영영 수절(守節)하기로 굳게 마음을 정하였으니 두 대(代)의 열행(烈行)은 세상에서 아주 드믄 일이다. 이러한 남다른 절의(節義)는 정표(旌表)가 있어야 마땅하지만 다만 시대의 제도가 다름이 있어 아직까지 포양(褒揚)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일이 아니겠는가 본소에서는 이내 책으로 발간하여 백세(百世)토록 전해지게 하고 또 비(碑)로 세우고 각(閣)을 지어 길이 풍성(風聲)을 수립하도록 포장(褒狀)을 지어 주는 바이다.
공자탄강2474(1923)년 계해(癸亥) 월 일
오륜행실중간소(五倫行實重刊所) 도유사(都有司) 도사(都事) 정교영(鄭敎永) 약장(約長) 판서(判書) 박기양(朴箕陽), 수(竪,비석을 세움) 장질(長姪) 병선(炳善) 병목(炳穆), 손서(孫婿) 염응순(廉應淳) 박노섭(朴魯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