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효자 송진표 기적비(孝子宋鎭杓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123 hit
【비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孝子宋鎭杓紀蹟碑(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효자송진표기적비)

【위치】 마령면 계서리 835-1. 서산마을 앞 관진로 진입로 우측 비탈.
【시기】 1962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30cm, 너비 4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孝者 百行之源 萬善之首也 人或苟有其實 則褒而揚之 紀蹟於貞珉 其於扶綱厚俗 豈可曰少也哉 礪山宋公 諱鎭杓 字永執 松齋別號也 勝國 郎山府院君 諡文肅公 諱琰后 本朝 莊陵節臣 遯壑先生 諱慶元 於公十三世祖 通政諱得運 嘉善諱啓玉 祖若考兩世職銜 公之優老典 追恩也 公誠孝天植 事親有道 愉色惋容 溫凊甘旨 靡不竭力 疾則 嘗糞驗症 目不交睫 及喪哀毁 不致梳沐 不御酒肉 晨夕展省 不避雨雪 遭內艱 亦如前喪 而至老彌篤 鄕人過廬者 莫不流涕焉 奉先以禮 敎子以義 睦於族 信於友 其他餘行 可知其推此無論也 博涉經史 文學德望 見重士友 累登剡薦 桑海日變 未蒙天褒 雲仍齎恨 樹碑閭里也 公之孫柱淳 介梁丈仁權氏 要記紀蹟 貴泳 德迷 而安敢當也 公之孝德高風 慕仰已宿 而懿性所在 不忍固辭 據來狀略敍 盡心力而尸其事者 孫 柱泳 柱彩 曾孫 理燮 玄孫 在鈺云爾 檀君紀元四二九六年 癸卯仲冬日 東萊 鄭貴泳 謹述 南原 梁昌權 書 【풀이】 무릇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으뜸이다. 사람이 혹 그런 사실이 있으면 포양(褒揚)하고 빗돌에 사적을 새겨둔다면 강상(綱常)을 북돋고 풍속을 두터이 함에 그 공효(功效)가 어찌 적다하겠는가! 여산송공(礖山宋公)의 휘(諱)는 진표(鎭杓)요 자(字)는 영집(永執)이며 송재(松齋)는 그 별호(別號)이니 고려(高麗)의 낭산부원군(郎山府院君) 시초 문숙공(文肅公) 휘 염(琰)의 후예이다. 본조(本朝: 조선을 지칭한 말) 장릉(莊陵)의 절신(節臣) 돈학선생(遯壑先生) 휘 경원(慶元)은 공의 13세조이고, 통정(通政) 휘 득운(得運)과 가선(嘉善) 휘 계옥(啓玉)은 조부와 아버지 양세(兩世)의 직함과 명함인데 공의 우로전(優老典)으로 추은(追恩)한 것이다. 공은 효성을 하늘에서 점지 받아 어버이를 섬김에 도리가 있어 항상 온화한 얼굴빛을 잃지 않았고 거처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해 드렸으며 맛있는 음식의 봉양에도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부모가 병환이 나면 변(便)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하였으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상(喪)을 당해서는 애훼(哀毁)하여 목욕과 빗질을 하지 않았고 술과 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묘소를 살펴 비가오나 눈이오나 거르는 일이 없었는데 내간상(內艱喪)을 당해서도 전상(前喪)과 똑같이 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니 여막(廬幕)을 지나던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조상을 받들기는 예(禮)로써 하고 아들을 가르치기는 의(義)로써 하였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고 벗들에게는 신의가 있었으니 여타의 행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므로 더 논할 것이 없겠다. 경사(經史)에도 널리 섭렵(涉獵)하여 문학과 덕망으로 사우(士友)사이에서 추중(推重)을 받아 여러 차례 천장(薦狀)이 올라갔으나 세상이 날로 변하여 조정의 포장(褒獎)을 받지 못하니 자손들의 한이 쌓여 마을 어귀에 비를 세우려는데, 공의 손자 주순(柱淳)이 양장(梁丈) 인권씨(仁權氏)를 통하여 나에게 기적(紀蹟)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덕이 부족한 사람인데 어떻게 감히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마는 공의 효덕(孝德)과 고풍(高風)을 익히 듣고 암모해 온 지 오래이고, 나 또한 이성(彝性)이 있는 터에 어떻게 굳이 사양 하겠는가 그리하여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간략히 서술하는 바이니, 심력(心力)을 다하여 그 일을 맡아 추진한 사람은 손자인 주영(柱泳), 주채(柱彩)와 증손 이섭(理燮), 현손 재옥(在鈺)이다. 단기4296(1963)년 (음)11월 일 동래 정귀영(鄭貴泳) 근술(謹述) 남원 양창권(梁昌權)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