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절부 여산송씨 기적비(節婦礪山宋氏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123 hit
【위치】 마령면 계서리 1312. 오동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78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220cm, 너비 50cm, 두께 3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禮經에 云하되 女有三從之道하니 在家從父하고 出嫁從夫하고 夫死從子라하였으나 當今世道가 變遷하야 婦人三從之道가 絶已久矣라 節婦礪山宋氏之行은 可謂盡婦道하며 扶植風敎於頹世者也라 節婦宋氏는 遯壑公諱慶元의 後 嘉善大夫諱鎭杓의 子 秉浩의 女요 天安全氏文平公諱文軾의 後 成均生員諱翊華의 七代孫 永宗의 妻라 夫君이 初聚于全義李氏炳年의 女하야 生一男하고 襁褓中其母李氏가 卒하여 其父永宗이 宋氏에 再娶하야 未得男女 而偶以奇疾로 百藥이 無效而卒하니 婦人宋氏가 同居不過四年에 時年이 二十三이라 卽欲下從이라가 旋念老姑幼孤하고 含痛忍哀하여 送終盡禮하고 晝鋤夜織하야 孝奉老姑하고 善養前室之子以成聚하야 得其多孫하고 潤産家道에 隣保扶助하고 承先裕後에 和睦族戚하니 鄕里가 感服에 屢次褒賞하고 文以闡揚而 南北儒林이 同聲相應하야 屢有薦狀이로되 以時變으로 未蒙褒典이나 實頹世之盛績也라. 天安 全鍾厦 謹撰
【풀이】 예경(禮經)에 이르기를 여자에게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으니 출가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 하였으나 지금은 세도(世道)가 변천하여 여자의 삼종지도가 끊긴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여산송씨의 행실은 부도(婦道)를 다하고 쇠퇴한 세상에 풍기(風紀)와 교화(敎化)를 심어 준 것이라 하겠다. 절부 송씨는 돈학공(遯壑公) 휘 경원(慶元)의 후예인 가선대부(嘉善大夫) 휘 진표(鎭杓)의 아들 병호(秉浩)의 따님이요 천안전씨(天安全氏) 문평공(文平公) 휘문식(文軾)의 후예인 성균생원(成均生員) 휘 익화(翊華)의 7대손 영종(永宗)의 처(妻)이다. 부군(夫君)이 전의이씨(全義李氏) 병년(炳年)의 따님을 초취(初娶)하여 1남을 낳고 그 아들이 강보(襁褓)에 쌓여있을 때에 이씨가 졸하자 영종이 송씨를 재취(再娶)하여 남녀간에 얻기 전에 부군이 우연히 기특한 병을 얻어 모든 약이 효험이 없이 졸하니 부인 송씨는 함께 산 지 4년에 지나지 않고 그때 나이 23세였다. 곧바로 하종(下從: 남편을 따라서 죽음)하려다가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돌이켜 생각하고 통한을 품은 채 슬픔을 참고 송종(送終)에 예(禮)를 다한 뒤에 낮에는 밭을 매고 밤이면 길쌈을 하여 늙은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들고 전실(前室)의 아들을 잘 길러 성취(成娶)를 시켜 많은 손자를 얻고 살림살이도 윤택해져서 조상을 잘 받들고 후손에게 복을 끼쳤으며 이웃간에 서로 부조하고 족척간에 화목하니 향리(鄕里)에서 감복하여 여러차례 포상(褒賞)하고 글로써 천양(闡揚)하였으며 남북(南北)의 유림(儒林)이 같은 목소리로 호응하여 누차 천장(薦狀)을 올렸지만 시대의 변천으로 포전(褒典)을 입지 못하였으나 사실 쇠퇴한 세상의 성대한 행적(行蹟)이라 하겠다. 천안(天安) 전종하(全鍾厦)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