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松齋處士天安全公 孺人全州李氏 夫婦孝行碑(송재처사천안전공유인전주이씨부부효행비)

    【위치】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 진입로 우측변
    【시기】 1982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子曰孝悌也者爲仁之本 仁本於孝忠本於孝百行萬善無一不本於孝 此一綱擧衆目張者也 所以一有其人則載之竹帛表之門閭以爲人柯則 嗟呼 世方異敎鴟張彛倫沮喪而長夜一燭群於燭陽者 百濟歡城君聶後 光國將軍嘉齋諱東屹八世孫 號麗山 諱基學子 天安全公 奉鎬是也 公風采秀麗 性行端雅 動靜云爲 暗合規矩 而夫人全州李氏 亦閨門女士也 産業苟艱夫耕婦織 容有菜色衣無完布於兩親怡愉洞屬味之甘衣之良 必備有餘父母常安樂稱父罹貞疾藥之供粥之奉 夫婦共之井花祈禱 夫於山 婦於壇 丁艱盡易戚而夫哭墓婦哭殯三燧一如 母氏八旬 老病呻吟數載 有聞則夫口于耳而聽之有味則婦手于口而啖之性 嗜川鮮雖刀風虐雪 夫叩氷婦携筌得之間 有妄言指幼兒 爲雞命烹而供 夫婦割雞進之尿屎之遺相扶滌之唾洟食餘 對共啜勿之棄擲 遭故葬祭如禮 有時興哀而淚下 夫人讓寧大君後士彦女 其陰訓有自來矣 噫 一鄕之一人難 况一家二孝乎 且兼董之廚 王之鯉 邕之哀 連之居果 叔世絶無之孝也 列郡之褒薦 是秉彛之極天罔墜而 其子泰成 亦以孝見重此所謂鳳無凡毛之理也 月浪士人 宋升煥 崔昶鉉 李聖麟 諸彦 以籲天無地竪一貞珉 以代箭門而世無韓子之筆 鎭安鄕校 典校安導遠 與全炯順 齎狀軸索 銘於余 余孤陋烏敢當辭不得則揚摧實德之梗槪以待外史氏繩正 銘曰 百行萬善 本之於孝 所以聖賢 垂之名敎 一鄕難一 一家有二 半夜聲雷 一世標幟 事生之董 居喪之連 河淸何時 欲問于天
    壬戌如月上日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유자(有子,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가 말하기를 “효제(孝悌)는 인(仁)의 근본이다. 인(仁)은 효(孝)에 뿌리를 두고 충(忠)도 효에 뿌리를 두나니,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이 효(孝)에 뿌리를 두지 않음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이 강령은 사람들의 눈을 틔게 하는 것이라,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에 그 이름을 올리고 정려를 내려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차호(嗟呼)라, 세상은 지금 이교(異敎)가 퍼져 이륜(彛倫)을 무너뜨리는데 긴긴 밤에 빛나는 촛불이 하나 있으니, 백제 환성군(百濟歡城君) 섭(褐)의 후손 광국장군(光國將軍) 가재(嘉齋) 동흘(東屹)의 8세손, 여산(麗山) 기학(基學)의 아들 천안(天安) 전공(全公) 봉호(奉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은 풍채가 수려하고 성정과 행실이 단아하며 입이 무거워 본보기가 되었고,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또한 규문(閨門)의 여사(女士)였다. 집안이 비록 가난하여 공은 밭 갈고 부인은 베를 짜며 얼굴은 마르고 옷은 기워 입었으나, 양친에게는 즐거이 좋은 음식과 옷으로 공양하였고, 반드시 여분을 준비하여 항상 부모를 안락하게 하였다. 부친이 병에 걸렸을 때는 부부가 같이 약시중을 들었는데, 부인은 단에서 공은 산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진정으로 슬퍼하였으며, 공은 묘에서 곡하고 부인은 집안에서 곡하기를 3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모친이 팔순으로 늙어 병에 신음하기를 수년 동안에,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공이 듣고 부인이 손수 만들어 공양하였다. 모친이 싱싱한 천어(川魚)를 좋아하므로 공은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었으며, 부인은 통발을 들고 고기를 잡았다. 모친이 노망으로 어린애를 가리키며 저놈 잡아 달라 하니 예예하고 닭을 잡아 봉양하였고, 변이 묻은 빨래는 서로 도와 씻었으며, 모친의 침과 콧물이 들어간 음식도 버리지 않고 부부가 마주앉아 먹었다. 상을 당하매 장제를 예에 따라 치렀으며,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인 사언(士彦)의 따님으로 그 음훈(陰訓)을 따랐으니, 희(噫)라! 한 고을에 한 사람이 있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한 집안에 이효(二孝)이리오. 이는 동소남(董召南)의 부엌에 꿩이 날라 들어온 고사와 왕상(王祥)의 얼음 속의 잉어 고사와 채옹(邕)의 슬퍼함이나 대련과 소련 형제가 초상 치르는 고사에 비하여 말세에도 끊어지지 않을 효이다. 열군(列郡)에서 천거하였으니 이는 이륜(彛倫)의 지극함을 붙잡아 천도(天道)가 떨어지지 않게 함이다. 그 아들 태성(泰成) 역시 효성으로 추중함을 받았으니, 이는 소위 봉(鳳)에게는 평범한 터럭이 하나도 없는 이치이다. 진안의 선비 송승환(宋升煥)과 최창현(崔昶鉉)·이성린(李聖麟) 등 제 선비들이 하늘에 호소할 길 없어 하나의 비석을 세워 홍살문에 대신하려 하나, 세상에는 한창려(韓昌黎) 같은 문장이 없어 진안 향교의 전교(典校) 안도원(安導遠)과 전형순(全炯順)이 장축(狀軸)을 정리하여 내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여 감당하지 못 하노라고 사양하였지만, 부득이 하여 그 실덕(實德)의 대강을 천양(闡揚)하노니 이를 바루어 줄 사람을 기다리노라. 명(銘)하기를 “효는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의 근본이라 / 성현께서도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라고 가르치는 까닭이네. / 한 고을에 하나도 어려우나 한 집안에 둘이 있었네. / 어두운 밤에 등촉이요, 사람을 경계하는 우렛소리이니 일세의 본보기일세 / 살아서 섬김이 동소남과 같았고, 상을 당하매 뜻이 연(連)형제와 같았네 / 황하수가 언제 맑아질까[황하가 맑아지면 태평성대가 된다고 함] 하늘에 묻고 싶네.” 임술(壬戌) 여월( 如月) 상일(上日) 진양(晉陽) 하천수 근찬(河千秀謹撰)
  • 【비표】 美溪愼先生義連遺蹟碑(미계신선생의련유적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0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180cm, 두께 59cm, 두께 3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愼主事宗奎 一日持先狀來曰 吾祖之卓行異蹟 至蒙 旌褒 而世遠家替 文不足徵 所存者 斷爛數紙 疑信相間之語 所憑者 樵牧傳述之說而已 吾懼夫愈久而愈失泯也 將竪石而表之 余辭不獲 遂按其狀而節之 先生諱義連 字宜叔 生鎭安縣之美溪村 故因而自號焉 愼氏籍居昌 鼻祖諱修 宋開封府人 高麗文宗朝 東來登第 官至左僕射 入我 朝 有諱以衷 位列卿 贈贊成 謚襄烈 爲名流 是於公爲七代祖 考諱舜 妣全州李氏 公以 明廟丙午生 幼有異質 旣長 內服庭訓 外資師友 專心性理之學 窮居養親 而華聞遠播 先大人嘗病篤 欲生雉灸 倉卒難獲 方焦泣求之 忽有一雉 飛入庭中 乃供而瘳 龍蛇之變 列城失守 士民駭竄 公方在侍湯 賊猝至 凶鋒將犯病親 公以身翼蔽 哀乞身代 賊曰此孝子也 問姓名 書于紙 投于火則不焚而騰空 賊大驚異 傳告黨類 俾勿傷害 榜于洞口曰 孝子所居之地 環其境而不入 遠近避亂來者 無不全活 丁酉再燹 賊又戒而不入 前後賴活者 殆五萬人 名其洞曰五萬洞 名其坪曰免禍坪 稱其山曰德泰山 海平尹相公 啓聞于 朝 宣廟嘉之 傳達于 皇朝 贈階修義副尉 命旌其閭 哲廟丙辰 士林設俎豆於忠孝祠 嗚呼壬丁之亂 生靈魚肉 湖南尤酷 孝子仁人 不能全其親族者 踵相接也 而公之誠孝所孚 獨能父子全獲 又因以庇濟鄕邑 何其盛也 且閱狀中所錄 尹公啓辭 有移孝爲忠之語 則公之蹟 似不止是也 而今無可稽 甚可恨也 然一臠可以知全鼎 又何必多也 銘曰 鯉崔呈異 豹虺示耳毒 誠之格也 性之篤也 仁聲所感澤被五萬 功德之偉 軼于節閫 遺裔記蹟 石屹于洞 何用碑爲 萬口猶誦
    光武十一年(丁未)暮春 崇政大夫弘文館提學東陽申箕善撰
    【풀이】 신주사(愼主事) 종규(宗奎)가 하루는 선대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종사의 탁행(卓行)과 이적(異蹟)은 정려(旌閭)를 세워 포장함을 입게 되었으나, 세대는 멀어지고 가세(家勢)는 침체하여 문헌의 징신(徵信)이 부족하고, 남은 것이라곤 너덜너덜한 몇 쪽의 종이에 적힌 의신(疑信)이 반반인 말과 빙거(憑據)할 바는 초부(樵夫) 목동(牧童)의 전설뿐이니, 세월이 오래 가면 더욱 묻혀버릴까 걱정이 되어 돌을 세워 표하려 합니다.”하였다. 나는 처음에 사절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그 장문을 참조하여 간추리기로 하였다. 선생의 휘는 의련(義連)이요, 자는 의숙(宜叔)이니 진안현(鎭安縣) 미계촌(美溪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대로 미계를 호로 하였다. 신씨(愼氏)의 본관은 거창(居昌)이요, 시조의 휘는 수(修)이니,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동으로 건너와 과거에 등제하여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휘 이충(以衷)은 열경(列卿)에 올라 찬성에 증직되었고, 양렬(襄烈)이란 시호가 내려져 명류(名流)가 되었는데, 이 분이 7대조가 된다. 고(考)의 휘는 순(舜)이요, 비(騙)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니, 명종 병오년(丙午年, 명종 원, 154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커서는 안으로는 가정 교육을 받고 밖으로는 사우(師友)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性理學)에 전력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니, 소문이 멀리 퍼졌다. 일찍이 선대인(先大人)의 병이 위독한 중에 산 꿩 구이를 먹고 싶어하였으나, 졸지에 구할 수 없어 한창 초조하게 울면서 구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꿩 한 마리가 마당 가운데로 날아 들어왔다. 그것을 요리해서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임진년 난리에 열군(列郡)이 함락되니 사민(士民)이 놀라서 도망쳤으나, 공은 그때 바야흐로 부모의 병을 구완하고 있었다. 그 때 적들이 졸지에 들이닥쳐 사나운 칼날이 병든 아버지를 겨냥하자, 공이 몸으로 아버지를 감싸고 자신을 대신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적들이 말하기를 “이 자는 효자이다” 하고 성명을 물어서 종이에 적어 불 속에 던지자 불에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가니, 적들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저희 패거리들에게 전하여 해치지 말라 하고, 동구밖에 방을 붙여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고, 그 지경을 빙 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원근에서 피난해 와서 산 이들이 모두 온전히 살아났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또 적들이 경계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전후로 거기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거의 5만인에 가까워 그 골짜기를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은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평(海平) 윤상공(尹相公, 이름은 두수[斗壽])이 조정에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 가상히 여기셔 수의 부위(修義副尉)의 품계를 내리고 정려를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이 사실은 명(明)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철종 병진년(丙辰年, 철종 7, 1856)에는 사림이 충효사(忠孝祠)에 배향하였다. 오호라! 임진 정유의 난리에 백성이 어육(魚肉)됨은 호남쪽이 훨씬 혹독하여 효자와 인인(仁人)으로 그 친족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 이가 즐비하였건만, 공만은 효성의 감응으로 부자가 온전히 살아났고, 또 그로 인하여 온 고을이 구제되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일이던가! 또 장문을 보니, 윤공(尹公)의 계사에 효를 미루어 충(忠)을 이루었다는 말이 있으니, 공의 사적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닌 듯하나 지금에 와서는 상고할 길이 없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전체의 고기 맛을 아는 법이니, 어찌 꼭 많아야만 한다 하겠는가? 명(銘)하기를 “잉어와 꿩이 기적을 나타내고 / 표범과 뱀들이 독을 풀지 못함은 / 효성이 하늘에 닿음이요 / 천성이 독실하였기 때문이다. / 인성(仁聲)의 감응에서 / 은혜가 오만(五萬)에 미쳤으니 / 공덕의 드높음이 / 병, 수사(兵水使)와 맞먹는다. / 후손들 사적을 기록하니 / 동구에 빗돌 드높으나 / 구태여 비를 할 것 무언가 / 만구(萬口)가 전송(傳誦)할 것을” 광무(光武) 11년 정미(丁未) 모춘(暮春) 숭정대부홍문관제학(崇政大夫弘文館提學) 동양(東陽) 신기선(申箕善)이 찬하다.
  • 【비표】 烈婦孺人昌寧成氏紀蹟碑(열부유인창녕성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55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53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韓紀元丙寅에 孺人昌寧成氏-卒于鎭安之蘆村하니 鄕之知不知咸曰烈婦라하야 有爲褒狀者와 有爲立傳者-何其盛哉오 若其紀績碑-今焉始圖는 嗚呼其晩矣라 到此綱紀蔑如之秋에 使此貞節로 不有以紀하면 奸人淫婦之肝膽이 孰有以雷破이요 雖然이나 孺人은 果何修而至此오 年十八에 爲居昌愼公疇範再配하야 奉舅事夫에 孝敬이 備至하고 居無何에 喪夫하야 撫前室子를 如己出이러니 一日에 路上에 暴漢이 欲㥘이어늘 孺人이 慢罵矢拒하고 兼賴行商過救하야 得免歸하야 謂家人曰以婦女로 接他男子手하니 吾何忍生이리요 歸拜九天之良人하야 以訴吾心이라하고 遂三刃其項而死하니 修堂處士鄭鍾曄이 贊曰王凝之妻-爲人牽臂에 引斧斷臂러니 今成氏는 永殞其命하니 其節이 可與氷霜으로 同其皎潔이라하니 吾於此에 亦無異辭焉하노라 愼公은 襄烈公以衷의 后요 同敦寧鎰晟의 子也오 孺人은 文景公獨谷石磷之后也라 沒後에 鄕儒全載敏 梁基柱李炳淵吳基烈諸公의 特書烈婦而竪于通街하고 今爲之紀蹟者는 愼氏擧宗而來請文者亮晟景範은 愼門季士而宰哲이 亦與焉하니 於孺人에 孫也라 余爲遣宰哲하야 乞銘于裕齋宋公基冕하니 其銘에 曰 狂瀾이 滔天하고 邪說이 鴟張이라 掃廉蕩耻에 禮敬이 粃糠이라 嗟嗟烈婦-獨任綱常이라 突遇惡漢에 獲救行商이라 適耶偶耶아 鑑自彼蒼이라 猶抱羞惡-寔天之良이라 刃頸昭義-凜若秋霜이라 歸對吾夫에 夫曰吾婦로다 峙其碑之에 鄕士倡首로다 疇其尸之에 宗黨克終이로다 孰芳不彰이며 孰媺不崇이리요 屹彼片石이 日星萬歷이로다
    西紀一九五五年 乙未二月上澣
    全義 李炳殷 撰
    【풀이】 1926년 병인에 유인 창녕 성씨가 진안 노촌에서 돌아가시니, 향리에서 모든 사람이 열부라 하여 포상을 위하여 서장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말로 전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성하지 않으리오. 그 기적비를 이제 비로소 세우고 전하니 슬프고, 늦은 감이 있도다. 기강이 없어져 가는 때에 굳은 절개로 하여금 기강을 세우지 아니하면, 간사한 사람과 음란한 여자의 속마음을 누가 깨뜨릴 것인가? 유인은 과연 어떻게 수신을 하여 이렇게 됐으리오. 나이 18세에 거창 신공 주범의 재배가 되어, 시아버지를 받들고 남편을 섬기어 효도하고 공경함이 갖추어져 있더니, 혼인한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의 상을 당하여 전실의 아들을 자기가 낳은 친아들과 같이 하였다. 어느 날 길가에서 흉악한 사람이 겁탈하고자 하거늘 유인이 엄하게 꾸짖어 똑바로 막고, 마침 지나가던 행인의 구원에 힘입어 화를 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부녀자로 다른 남자의 손을 잡으니 내가 어찌 참고 살으리오. 구천의 남편에게 돌아가 내 마음을 호소하리라 하고 드디어 그 목에 세 번 칼로 찔러 죽으니, 수당처사 정종엽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왕응지의 아내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팔을 끌어당김에 도끼로 자기의 팔을 끊어버리더니, 지금 성씨는 영원히 죽어버리니, 그 절개가 얼음과 서리 같으므로 그 희고 맑음이 같다. 내가 이에 또한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더라. 신공은 양렬공 이충의 후손이요, 동돈녕 익성의 아들이다. 유인은 문경공 독곡 석린의 후손이다. 돌아가신 후에 고향의 선비 전재민, 양기주, 이병연, 오기열 제공이 특별히 열부라 써서 큰길가에 세우고, 이제 기적을 위하는 자는 신씨의 여러 종친이요, 글을 청하러 오는 자는 양성 경범이니 신문중의 수재 선비이며, 재철이 또한 같으니 유인의 손이다. 내가 재철를 보내어 유재 송공 기면에게 명(銘)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그 명에 이르기를 “사나운 물결이 하늘까지 창일하고 간악한 사람들이 말을 속이는지라 / 청렴도 쓸어서 버리고 치욕도 없애 버리니 예의와 경건이 빈쭉정이로 변하였다. / 슬프고 슬프다. 열부여 삼강과 오상을 홀로 맡았도다. / 뜻밖에 악한을 만났으나 행상이 구해주었도다. / 마침이랴, 우연이랴 스스로 저 하늘에 비치더라. / 오히려 자기의 나쁜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나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 이는 저 하늘의 남편 때문이라. / 목을 칼로 찌르고 의리를 밝게 하니 추상(秋霜) 같은 차가움이다. / 돌아가 나의 남편을 대함에 남편이 말하기를 과연 나의 부인이로다. / 그 고개에 비석을 세우니 고향 선비들이 인도하였도다. / 누가 그것을 주관했으리요. 종당(宗黨, 일가)이 마쳤도다. / 누가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아니하며 누가 그 착함을 높이지 않으리오. / 높은 저 비석이 해와 별처럼 만년을 지내리로다.” 서기 1955년 을미(乙未) 2월 상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 찬(撰)
  •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68년
    【형태】 높이 140cm, 너비 48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愼公俊範의 配具氏之卓孝者著于家而鄕爲之褒나 然이나 其子鏞八이 恐或世久不傳之爲不孝하야 竪碑閭里하야 以表紀蹟할새 使貴泳之不文으로 文之어늘 乃不顧不文은 而同居一鄕塾世交而然耶아 辭不獲己하야 按孺狀也에 具氏籍은 綾城이요 三重大匡檢校諱存裕의 后요 宗仁의 女라 孺人이 自幼로 異凡하야 在家孝親而女工諸節을 無所不能하니 族戚鄰里莫不稱其善閨範이러니 及歸其嫁에 家貧親老하야 菽水難繼라 與夫君으로 共挽鹿車而或鋤或傭하고 桑麻爲業하니 自是로 一無供養之憂러라 舅氏平日所嗜者는 川魚而雖隆冬極寒이라도 叩永求魚하야 三供進饌에 川漁不絶하고 若有捐攝則致其憂하야 問何適口而進其食飮하고 竭誠用藥하고 夜禱星斗하야 見效以後에 己러라 畢天年終也에 哀毁過度하고 送終奉凡之節을 不顧家勢而極其誠하고 葬祭를 一遵禮制하야 使無憾焉하고 至於奉君子之道에 承順無違하야 一動一靜이 不下於古之賢媛淑女之懿行耳러라 嗚呼라 風潮日變하고 綱倫이 頹敗而子孝其親도 斯世罕聞이어늘 況婦孝其舅也리요 孝當旌褒而今無國典하니 可恨이로다 俊範은 居昌后人이니 襄烈公諱以衷美溪諱義連은 其顯祖也라 鏞八이 介吾友愼吉晟하야 要以刻碑之辭어늘 遂書如此云이로다
    大韓光復戊申天中節東萊鄭貴泳述
    【풀이】 신공(愼公) 준범(俊範)의 처 구씨(具氏)의 탁이한 효성은 집안에서 드러나고 고을에서 포상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용팔(鏞八)이 혹시 세월이 오래되어 전해지지 못하면 불효가 될까 두려워하여 마을 앞에 비를 세우고 사적을 나 귀영(貴泳)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달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이 아니지만 불고(不顧)하는 것은 같은 고향에 살면서 같이 배우고 세교가 있는 까닭에 사양치 못함이다. 유장(孺狀)을 살펴보니 구씨(具氏)의 본관은 능성(綾城)이요 삼중대광검교(三重大匡檢校) 휘(諱) 존유(存裕)의 후손 종인(宗仁)의 딸이다. 유인(孺人)이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아니하여 집에서부터 효친하고 길쌈과 바느질 솜씨를 익혀 능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족척(族戚)과 마을 사람이 그 규범(閨範)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출가하여 보니 시집은 구차하고 시부모가 있으나 숙수(菽水 / 험한 음식)일망정 끼니를 대기가 어려웠다. 지아비와 더불어 조그마한 수레를 끌고 혹은 호미질, 혹은 품팔이하며 누에치고 삼베 짜며 가업에 힘쓰니 이로부터 음식을 올림에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시아비는 평소에 좋아하는 것이 물고기라. 비록 엄동극한이라도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 세끼 반찬으로 물고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만일 자시지 않으면 그 연유를 물어 입맛에 맞도록 진지를 올렸다. 정성을 다하여 약을 끓여 올리고 밤에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으나 결국 천수를 다하여 임종함에 슬퍼함이 법도를 넘고, 장례 절차는 가세를 돌아보지 않고 극진한 정성으로 하였으며, 예제를 지켜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지아비 섬기는 도리에 따르고 거스름이 없어 일동 일정(一動一靜)이 옛적의 어진 숙녀의 아름다운 행실에 비하여 못하지 않았다. 오호(嗚呼)라! 세상의 풍조가 날로 변하고 강륜(綱倫)이 퇴폐하여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함도 이 세대에는 듣기 어렵거늘, 하물며 며느리의 시부에 대한 효성이리요. 한되도다. 준범(俊範)은 거창(居昌)이 본관이니 양렬공(襄烈公) 휘(諱) 이충(以衷), 미계(美溪) 휘(諱) 의련(義連)은 그의 저명한 선조이다. 용팔(鏞八)이 내 벗 신길성(愼吉晟)으로 하여금 비문을 부탁하거늘 이처럼 쓰노라. 대한광복(大韓光復) 무신( 戊申) 천중절(天中節)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술(述)
  • 【비표】 晩休堂梁先生遺墟碑(만휴당양선생유허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0. 하미마을회관 못미처 250m 지점.
    【시기】 1960년
    【형태】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16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此故晩休堂梁先生杖屨之所也 公素生長於南原之竹谷而其遷于鎭安之蘆溪 以山水奇而靜養宜也 方其遷之之日 崔養黙 陳德洞 梁松齋 尹梅軒 諸賢迭爲歌頌而送之曰 吾道北矣 以生屛時居同谷道相合也 生而英邁 不群惟學是力其居廬也 膝處坎而草樹不花孝之出於人 有如是者方弱冠時蔚有聲譽 以親命應進士擧累而不中 執友盧持平學夏者 累致書 以歛華就實勸之遂不應擧就權遂菴文純公之門專心篤學期以成就 鄭丈巖一見器之相尙以道二十餘載蒙薦階嘉善後又腏 享于駬山廟永慕祠 粱氏南原巨姓也 兵部郎中遯菴諱能讓 麗之世顯 祖有諱堅進賢館大提學諱俊 成均祭酒諱東弼 吏曹判書諱克信 文科縣監其七世以上也 高祖諱煜 成均生員 曾祖諱以寬 通德郞 祖諱擎日 成均生員 考諱禹鼎 妣東萊鄭氏 配居昌愼氏 顯泰顯重其二男也 道海宗海滿海其三孫也 公所著 經學要旨蒙學指南及家訓遺稿四冊 不幸入于火有口傳萬東廟詩如今始到華陽洞後見大明天日光而己 後孫以無闡發其潛德世以爲恨將以碑于溪上使人知遺墟之尙存亦見其追遠之至矣 聖權以余之相善也 願有以序之書 大槩如此素之 以銘曰 有溪淸深 有山峻極 君子棲遲 可欲可濯 珠雖藏淵 光輝乃發 賢者遯跡 名聲未沒 今云己古 孚人者德 蒙資嘉善 以其經術 妥享駬山 非賢曷克 仁人所憩 草木猶惜 而其遺址 豈忍視忽 我有銘詞 崇碑斯立 垂之萬世 傳之無極
    世庚子五月上澣全義李炳殷撰
    【풀이】 이곳은 만휴당(晩休堂) 양 선생(梁先生)의 장구지소(杖爐之所)이다. 공은 남원(南原)의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산수가 빼어나고 정양(靜養)하기 좋은 진안의 노계(蘆溪)로 이거하였다. 이거하던 날 최양묵(崔養默), 진덕동(陳德洞), 양송재(梁松齋), 윤회헌(尹梅軒) 제현(諸賢)이 노래를 부르며 송별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道)가 북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은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동네에 살며 도가 상합했던 까닭이다. 공은 나면서 영매(英邁)하여 또래들과 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시묘할 때는 무릎 닿았던 자리에 구덩이가 생겨 풀이 자라지 않았으니, 효성의 출중함이 이와 같았다. 약관의 나이에 칭송하는 소리가 많아 부모의 명에 의해 진사시에 나아갔으나 입격(入格)하지는 못하였다. 뜻이 통하는 지평(持平) 노학하(盧學夏)는 여러 번 글을 보내 꽃이 피었으니 열매를 거두라고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고, 권수암(權遂菴) 문순공(文純公)의 문하에서 전심(專心)으로 학문을 하여 성취하였다. 정장암(鄭丈巖)이 공을 한 번 보고 국량을 알아 20년간을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으며, 천거를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후에 이산묘 영모사(鎖山廟永慕祠)에 배향되었다. 양씨는 남원의 거성이다. 병부낭중(部郎中) 둔암(遯菴) 능양(能讓)은 고려에 두드러졌던 조상이며, 견(堅)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요, 준(俊)은 성균관 좨주(成均祭酒), 동필(東弼)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극신(克信)은 문과로 현감인데 모두 공의 7대조 이상이다. 고조(高祖)는 욱(煜)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증조(曾祖)는 이관(以寬)으로 통덕랑(通德郞)이요, 조부는 경일(擎日)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고(考)는 우정(禹鼎)이다.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며, 배(配)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고, 현태(顯泰)와 현중(顯重)은 아들이다. 도해(道海)·종해(宗海)·만해(滿海)는 손자이다. 공의 경학요지(經學要旨)는 학문을 계몽하는 지침으로 두드러졌다. 가훈과 유고 4책은 불행히도 화재로 불타 버렸고, 구전하는 《만동묘시(萬東廟詩)》에 즉, “이제 처음으로 화양동(華陽洞)에 이르니 비로소 대명(大明)의 천일(天日) 빛남을 보겠도다”가 있을 뿐이다. 아주 환한 하늘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보는 듯하다. 후손들이 공의 숨겨진 덕을 천양(闡揚)할 길이 없음을 대대로 한으로 여겼더니, 장차 계곡의 위에 이 비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유적지를 알게 하고, 또한 추원(追遠)하게 하려 한다. 성권(聖權)은 나와 잘 지내는 사이로 글의 서(序)를 써주기 바랬다. 그 대략은 이와 같으니 명하기를 “계곡물은 맑고 깊으며 산은 높이 뻗쳐 있어 / 가히 군자가 깃들어 살 만하구나. / 깊은 못 속에 구슬을 감추어도 마침내 빛을 발하나니 / 현자(賢者)의 둔적(遯跡)한 명성은 민몰되지 않는구나. / 지금 와서 옛사람의 덕을 말하노니 / 경학에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내려졌고 / 이산묘(鎖山廟)에 배향되었으니 현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러겠는가. / 어진 사람은 쉬어 가고 초목도 애석해 한다. / 유적지가 소홀하게 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 나는 명을 하여 이렇게 비를 세우는 바이니 / 만세에 드리워지고 무극(無極)토록 전하라.” 경자(庚子)년 5월 상한(上澣) 전의 이병은(全義李炳殷) 찬(撰)
  • 【비표】 九逸梁處士節義碑(구일양처사절의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0. 하미마을회관 못미처 250m 지점.
    【시기】 197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0cm, 너비 35cm, 두께 1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易曰明夷利艱貞 程子釋之曰 不晦其明則被禍不守其貞則非賢君子處世之指南也 惟近古九逸處士梁公庶幾乎此歟 公諱基柱字在英九逸其別號也 取九重菊花中隱逸之意也 南原之梁氏 勝國兵部郎中諱能讓號遯菴 享龍章祠 是爲上祖 李朝吏判諱東弼護軍諱漚 殉于端廟 成均生員諱煜 殉于壬辰護軍諱夏龍號晩休堂 享駬山廟永慕祠 是爲中葉之顯 諱弼浩諱致漢祖若禰 妣全義李榮萬女 以哲廟辛酉生 至孝異凡 父病飛鵝墜鯷 母病螢火導虹 誠感神天與筍鯉等 摳衣乎蘆沙奇先生多蒙獎詡 與梅泉黃公玹講磨道義 文辭贍博抽筆立就屢中鄕解一入場屋見銅臭滿 大歸田里有詩曰 宿昔靑雲志誤知出處時 喜陶靖節集手不釋之 己酉丁內艱 庚戌遭屋社 絶穀涕泣 翌年除禫 卽入德泰山飛獅洞 著帝秦論追魯連之志 且作詩曰 夏變爲夷狄我安是適歸云 名其莊曰三幽莊 寓山水人之俱幽也 所居室壅南窓坐必向北 月白風淸則誦出師表正氣歌及宇宙男兒一個無之句因泣下滿襟 高宗純宗之昇遐 登高望哭鳴咽哽塞 洞人稱其峯曰 望巖 居山三十載 薇蕨療飢麻葛掩身 臨終召諸子曰 吾年近八十死無所憾惟恨不覩天日 復明戒之治家保家正家之道言訖而逝 是丁丑二月十一日 遠近士友如悲親戚 手植數業菊幹而不花翌年不復萌 配居昌愼氏宗祿女 婦德 生三男昌權聖權仁權以下煩不錄 噫竹之遇風雨而不爲催折以節爲固士之逼禍患而不失其正以義爲質 公能守節行義實熱火中眞金 其子聖權翁十舍長程枉屈弊盧責以碑刻之訶 千秀曾有敬慕之忱不可以微辭 遂爲之銘曰 孝感神明 休徵精誠 淚灑新亭 伯仁心情 括囊无咎 遯迹自持 明夷艱貞 庶幾近之 節爲方兮 義爲禮耳 君子人歟 君子人矣
    檀紀四三○七年 甲寅 四月上弦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주역에 이르기를, 명이리간정(明夷利艱貞)이니 정자(程子)가 주석하기를 “밝은 것을 어둡게 하지 않으면 화를 입고, 지조를 지키지 아니하면 현자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군자의 처세(處世)지침이다. 생각하니, 가까운 옛날에는 구일처사(九逸處士) 양공(梁公)이 거의 여기에 해당되는 분일진저. 공(公)의 휘는 기주(基柱), 자(字)는 재영(在英), 구일(九逸)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구월달의 국화중(菊花中) 은일(隱逸)한 뜻을 취한 것이다. 남원(南原)의 양씨(梁氏)는 고려 때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휘(諱) 능양(能讓) 호(號) 둔암(遯菴)으로 용장사(龍章祠)에 향사된 분이 바로 윗대 선조이다. 조선 때 이조판서 휘(諱) 동필(東弼)과 호군(護軍) 휘(諱) 구순(寮殉)과 단종 때 성균생원(成均生員) 휘(諱) 욱순(煜殉), 임진왜란 때 호군(護軍) 휘(諱) 하룡(夏龍) 호(號) 만휴당(晩休堂)은 이산묘(鎖山廟) 영모사(永慕祠)에 향사되어 있다. 이들은 중엽에 저명한 분들이다. 휘(諱) 필호(弼浩)는 조부이고, 휘(諱) 치한(致漢)은 부이다. 비(騙)는 전의인(全義人) 이영만(李榮萬)의 딸인데, 철종(哲宗) 신유(辛酉, 1861)년 태어났다. 효성이 남다른데 있어, 아비의 병환에 나는 거위가 메기를 떨어뜨렸고, 어미의 병환에는 반딧불과 무지개가 길을 인도하였다. 정성에 귀신도 감동하여 죽순과 잉어 등을 내린 것과 같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에게 사사하여 칭찬과 사랑을 받았고,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더불어 도의(道義)에 관해 강마하였다. 문사(文辭)가 해박하고 붓을 들면 문장을 이루어 여러 번 향시에 들었으나, 한 번 과거시험에 응시하니 돈 냄새가 가득하여 아주 돌아와 버렸다. 시가 있는데, 이르기를 “옛적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나아갈 때를 잘못 알았네”라고 하였다. 《도연명집》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유(己酉)년 모상을 당하고 경술(庚戌)년 사직이 망하자 체읍(涕泣)하고, 다음해 모상의 복을 벗고는 곧장 덕태산(德泰山) 비사동(飛獅洞)으로 들어가 제진론(帝秦論)을 지어 노중련(魯仲連)의 뜻을 추모하였다. 또 시를 짓기를 “중국이 변하여 오랑캐가 되니 내가 어디로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사는 집을 ‘삼유장(三幽莊)’이라 이름하였으니, 산도 사람도 물도 모두 그윽하다는 뜻이다. 왜(倭)를 배척하기 위해 거실의 남창은 막고 반드시 북을 향하고 앉았고, 달 밝고 서늘한 밤이면 《출사표》를 읊고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에 우주남아(宇宙男兒) 일개무(一個無)의 자구에 이르면 눈물이 쏟아져 옷깃에 가득하였다.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승하(昇遐)했을 때에는 높은 산에 올라 오열하여 목이 메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암(望巖)’이라 불렀다. 30년간 산에서 살며 고사리 등으로 연명하고, 삼이나 칡으로 몸을 가렸다. 임종에 이르러 자식들을 불러 말하길, “나는 근 팔십을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오직 한이라면 나라의 광복을 못 보고 죽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치가(治家), 보가(保家), 정가지도(正家之道)를 훈계하고 운명하였다. 그 때가 정축(丁丑, 1937)년 2월 12일이었다.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마치 친척처럼 슬퍼했으며, 손수 심은 국화에서는 꽃이 피지 않고, 이듬해에도 싹이 트지 않았다. 배(配)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종록(宗祿)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삼남(三男)을 낳았으니 창권(昌權)·성권(聖權)·인권(仁權)이다. 이하(以下)는 번다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희(噫)라! 대나무가 풍우를 만나도 꺾이지는 않는다. 지조 굳은 선비에게 화란이 닥쳤으나 바른 길을 잃지 않음은 의로움의 본바탕이다. 공은 능히 지조를 지키고 행의(行義)가 실다워 뜨거운 불속에 진금(眞金)이라 하겠다. 그 아드님 성권(聖權) 옹(翁)이 며칠의 먼 길을 누추한 집에 찾아와 비문을 맡기니, 나 천수(千秀)도 일찍부터 경모하는 마음이 있었던 터라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명하기를, “효성에 신명도 감응하여 좋은 징조는 정성으로 나타났도다. / 신정(新亭, 동진[東晋]시대의 정자)에서 눈물을 뿌리며 백인(伯仁, 진[晉]의 주의[周剡]의 자) 심사로다. / 입을 딱 다물면 허물이 없나니 둔적(遁迹)하여 스스로를 지켰네. / 주역의 명이(주역의 괘명으로 군자가 운이 비색하여 빛을 감추는 상)의 간정(艱貞)이 아마도 근사하다 하겠지. / 절조는 방편이 되고 의로움은 예의이나니 / 군자라 할 것인가, 군자라 할 만하구나.” 단기 4307(1974)년 갑인(甲寅) 4월 상현 진양 하천수 근찬
  • 【비표】 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順天金公道成之紀念碑(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순천김공도성지기념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7-1. 평노길 하미마을회관 100m 못 미친 지점 노변
    【시기】 1982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두께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 김도성(金道成)이 200년 전에 경남 합천에서 이 동네에 이거하여 많은 자손이 퍼져나간 사실을 기록 기념한 비.

    【비문】 湖南之鎭安郡 白雲面 美峙里 順天金公 諱道成之歿이 今甲子가 三周餘而公之曾若孫이 爲紀念乃祖之德하야 將治貞珉하야 而竪于通衢할새 余友愼君鏞權은 公之曾孫婿로 同其曾孫 平淵 甲淵甫하야 踵門要役이어늘 余固陋하야 恐累人키로 辭하니 言益勤하야 謹按譜하니 公이 以壽로 贈折衝将軍龍驤衛副護軍이요 襄景公 諱承霔后며 諱啓源子也라 公이 以平陽華閥로 世居 慶南 陜川之億三洞할새 自有遠志하야 離十世桑梓之鄕하야 卜菟裘於月浪者는 慮其人繁地狹하야 將有生業之艱하며 久住一洞하면 自輕親疎之分하야 乃相基而遷하니 寔出於明敏之勇斷也라 公이 以名賢之裔로 種闇然自修之德而子姓이 蕃衍하야 爲一鄕之稱하니 豈不休哉아 今於是役에 公之玄孫 東喆君이 最多用力云
    檀紀四千三百十五(1982)年 壬戌 小春 首陽 吳炳根 撰 居昌愼寬範書
  • 【위치】 백운면 덕현리 456-1. 덕현로 동산마을 앞 덕현로변.
    【시기】 197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 높이 145cm, 두께 56cm, 두께 25cm.
    【개요】 최관석(崔涫錫)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충익공(忠翼公) 만육선생(晩六先生) 후손 재의(在義)의 장남이다. 수신(修身)과 교우(交友)에 범절이 있고, 문사(文辭)에 뛰어났다. 백운면 덕현리 동산마을에 서당을 열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비문】 厚山李公 修堂鄭公은 月浪之長德也라 硯下에 多執經之士如曉天曙星而 東隱全州崔涫錫 翁도 亦其一也라 余曾面於駬山이냐 以未遂 琢磨之益으로 爲恨也러니 金佑坤甫 以同窓僉意로 袖翠軒李友湘寧之所草狀하고 謁余田舍하니 乃東隱門生也라 以其事一之誠으로 將竪石而 請其隂記어늘 余以樗櫪으로 辭不得이라 窃惟東翁은 忠翼公晩六先生後 春菴公在義 長胤也라 其世德이 爲國之甲乙族이라 翁이 承庭訓遵師範하니 孝友忠信은 箕天性이오 存養省察은 其自修也라 儀表는 端而正하고 文辭는 典而雅하고 言論은 博而温하고 事親에 先忠後物하고 交友에 直諒多聞하며 學問에 必自下學而上達 曰 南溟先生所云 人不知 灑掃而談性理로爲憂는 千古至訓이라 當孜孜玩索하여 益求其未至면 庶幾到昭曠之界라 하고 以一誠一敬이 足而銷萬僞敵千邪로 爲針頂戒라 하더라 生丁不辰에 做山澤間 一枯癯者而 桃李不言成蹊라 學者塡門하니 翁이 諄諄教導하여 隨材加鞭에 各光其量하니 是猶繩墨之加而曲直이 不棄하고 鑢錘之就而大小가 皆用也라 諸學者 慕其德 仰其風하여 遂設契而顔爲隆師라 하고 且竪碑而紀其績하니 噫라 此時何時오 南侵이 逆起하고 西潮橫流하여 視倫常如逽廬하고 以禮義 爲芻狗而 今諸君의 尊師興學之誠은 令人可感이라 前賢有云師者는 所以正禮오 禮者는 所以正身이라 하니 此 可謂諸君先獲之言也라 師道之廢久而 今諸君이 復古道明彛倫하니 東翁之門에 可謂 有人이로다 子曰 學不厭이면 教不倦이라 하시니 諸君은 銘心㦲인저
    檀紀四千三百七(1974)年 甲寅 三月 日
    晉陽 河千秀 謹記 海州 吳榮根書
  • 【비표】 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충익공만육최선생양둔적유허비)

    【위치】 백운면 반송리 360-2. 반송마을앞 백장로 큰길가.
    【시기】 1871년
    【형태】 구남각 내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60cm.
    【개요】 이 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다. 노사 기정진(盧沙奇正鎭)이 글을 지었으며 구남각(龜南閣) 내에 세워져 있다.

    【비문】 晩六崔公 於我 聖祖 有嚴陵之契 幸宮一進 世疑之犯座客星 然公罔僕之義 又不但嚴之高尙其事 故尙論者又或以爲 伯夷嚴光合爲一人 此其遯跡之地 權近誌文所稱中臺山者是也 後移鳳崗墓下以終 中臺之山不平 先生之風與之俱長 何以碑爲 碑焉者 雲仍私也 來求銘者 崔氏二秀鳳翊鍾大 銘曰 遯入麗末 壬申前乎 社屋曾不幾旬 瓦後鳳崗 自玆徙倚 考終于 寶籙三十三年甲辰 碑于聖上辛未之春 嗚呼首尾未五百者二十年
    幸州奇正鎭撰
    【풀이】 만육(晩六) 최공(崔公)은 우리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리킨 말)에게는 엄자릉(嚴子陵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때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가 자릉이다. 광무제가 천하를 얻은 뒤 벼슬길에 나와달라고 불렀으나, 그는 나오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이나 하면서 생을 마쳤다)과 같은 우의(友誼)가 있었다. 행궁(幸宮, 행행할 때 거처하는 궁궐)에 한번 입궐하니 세상에서는 어좌(御座)를 범한 객성(客星)에 비기었다. 그러나 공의 망복(罔僕, 신하가 되지 않음)한 절의는 엄자릉의 그 일을 높이 추켜세우려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상론자(尙論者, 평론자와 같은 뜻)는 혹 이르기를 “백이(伯夷)와 엄광(嚴光)을 합쳐서 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은 그 분이 자취를 숨기고 살던 곳이니, 권근(權近, 호는 양촌[陽村])의 지문(誌文)에서 칭한 바 중대산(中臺山)이 바로 이곳이다. 뒤에는 봉강(鳳崗)의 묘소 아래로 옮겨와 살다가 생을 마쳤다. 중대산은 펼쳐질 수 없으니 선생의 풍도(風度)와 수명을 같이 할 텐데 비는 무엇을 하려 세울까? 비를 세운 것은 자손이 사사로이 한 것이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최씨의 두 수재(秀才)인 봉익(鳳翊)과 종대(鍾大)이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 숨었다니 / 임신년(壬申年 :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임신년[공민왕 4, 1392] 7월 17일 고려를 멸하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이전이던가 / 사직이 망한 지 얼마 후이라네. / 와해(瓦解 : 기와가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나다. 생활이 그런 것인지 혹 죽음을 말함인지는 미상임)한 후일의 봉강(鳳崗)은 / 이 곳에서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오. / 보록(寶擁 : 임금의 역년[歷年]을 높혀서 부른 말) 33년 갑진(甲辰 : 조선 개국 33년째인 세종 6년 갑진[甲辰]을 말함인 듯)에 고종(考終)하여 / 성상의 신미년(辛未年 : 고종 8년 신미[辛未]를 말함인 듯 하나 연수[年數]는 맞지 않음) 봄에 비를 세우니 / 아! 전후로 5백 년에서 20년이 모자라는구려.”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이 찬하다.
  • 【위치】 백운면 반송리 353. 대광수련원 입구 백장로변
    【시기】 18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좌측 비신 높이 87cm, 너비 32cm, 두께 12cm., 우측 비신 높이 88cm, 너비 30cm, 두께 12cm.,
    【개요】 기록에 의하면 이 정려는 광서(光緖) 12(1886)년 1월 28일 진안의 사노(私奴) 순득(順得)이란 자가 임금의 어가행차에 징을 두드려 박리풍 부자의 효행사실을 원정하므로써 내려졌다한다. 두 기의 정려문이 모두 석조로 되어있다. 왼쪽은
  • 【비표】 濟龍橋 / 先達宋敬模施主碑(제룡교선달송경모시주비)

    【위치】 백운면 반송리 360-2. 구남각 뒤.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101cm, 너비 31cm, 두께 12cm.
    【개요】 비의 앞면에는 상단에 ‘濟龍橋’라 각자되어 있고 그 밑에 ‘先達宋公敬模施主碑’가 각자되어 있다. 후면에는 ‘同治 八年(1869) 乙巳 九月 日’과 유학(幼學) 최봉엽(崔鳳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두원마을과 연결되는 다리를 송경모가 놓은 사실을 기념하는 비인데 그 다리가 섶다리인지 돌다리인지는 알 수 없다.
  • 【비표】 小山先生金公紀績碑(소산선생김공기적비)

    【위치】 백운면 신암리 백장로 대전마을 동쪽 진입로변
    【시기】 197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3cm, 너비 46cm, 두께 22cm.
    【개요】 김상두(金相斗, 1853~1924)는 호가 소산(小山)이다. 신암리 대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하고, 재예(才藝)가 출중하였다. 먼저 의(義)를 행하고 뒤에 학문(學問)을 하여 배우러 오는 사람이 원근(遠近)에서 끊이지 않았다.

    【비문】 仁人志士學優德崇하여 知行一致에 以義爲質하고 秉義不撓가 哲宗癸丑十月十日로 生于大田舊第하니 儀表秀麗하고 才藝敏悟라 以志物로 備養﨎親하고 篤志劬勤하여 博覧強記에 各軆著述이 金精玉潤하여 每於文垣騷壇에 獨步一時라 臨紙揮毫에 不甚思索하고 便同宿搆하니 人以謫仙昌黎를 一身兼全으로 稱而時値國步九卵에 無意榮途이러니 及至冠裳倒懸에 深入中隠谷하여 心不戴讎天日月하고 與全駬東斗鎬 梁八隠鍾植 朴又淸聖必로 交契益宻하여 同盟罔僕之策而玉蘊山輝에 皷篋諸生이 遠近沓至라 先行義而次文學하여 自有條理하고 自有間架하여 銖累寸積에 皆成名器하니 實一方長德이라 甲子三月十八日卒하니 葵任實屯南君只谷艮坐라 配綾城具氏珪和女니 壬子二月二十三日生이라 婦德克正에 以女士로 稱이라 丁卯二月二十四日卒하니 墓는 大田新田麓艮坐라 生一男三女하니 男은 容哲이니 娶延安宋氏仁叔女하여 生仲坤良坤善坤正坤하고 女는 適文泳丞尹鍾顔崔季鉉이라 炯植東植鍾植은 文出이요 正漢은 尹出이요 永鐸은 崔出이라 餘는 煩不錄이라 噫라 以公學問志槪로 不遇其時하여 䓁田父漁翁而止하니 人皆惜之라 然이나 與其一時之榮譽론 易若百後之食報也리요 夫積厚而大發은 理之常이라 今其孫曾이 有充閭之慶而仲坤이 與諸弟及外裔文炯植東植鍾植尹正漢崔永鐸으로 輸誠竭力하여 将竪石紀績일새 袖崔昶鉉所爲狀하여 來余請其銘하니 余曾聞公之風而欽慕者也라 不得以人微로 辭하고 遂爲之銘曰 藍田玉出麗水金 生而孝而學大器 早成文詞贍麗世 罕其倫謫仙昌黎 兼備一身國步艱 危隠遯泉石斯文 己任菁莪長育櫽 括公頌竪此貞珉 於休偉蹟可詔千春
    檀紀四千三百十二(1979)年 己未 三月 哉生魄 晉陽河千秀撰 首陽吳炳根書
    監董族弟 永國 族孫 雲坤 成坤 宰坤 京坤 來坤 允坤 箕坤 炳坤 鍾燮 孫婿朴基洙
  • 【비표】 士人文化柳英均之妻節婦兆陽林氏紀蹟碑(사인문화류영균지처절부조양임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운교리 산 114-2. 금동진입로 좌측.
    【시기】 196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8cm, 너비 4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謹按列郡文通則鎭安之白雲有節婦林氏 貫兆陽士人明先女 文化柳英均妻 其夫委臥數載 祝天願代 竟至無効割股裂指 天命不助 遭其艱哀毁踰禮 有幼孤未得下從而未機乳孤夭折 節婦絶食數日旋自念曰宛之無益 春採夏鋤秋收冬織 無一時閒安而成其家定其嗣使其夫後無泉臺之憾 有士林之薦 親族伐珉紀蹟云
    歲辛丑仲秋 錦城吳大善謹書
    【풀이】 열군에서 보내온 통문을 살펴보니, 진안(鎭安)의 백운(白雲)면에 절부(節婦) 임씨(林氏)가 있으니, 조양인(兆陽人) 사인(士人) 명선(明先)의 여(女)요, 문화(文化) 유영균(柳英均)의 처(妻)이다. 지아비가 수년을 와병하니, 자신을 대신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고, 허벅지 살을 떼어 먹이고 손가락 피를 먹였으나 결국 천명은 어쩔 수 없어 지아비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 슬퍼함이 예제를 벗어났다. 어린애가 있어 지아비를 뒤따라 죽지 못했으나 얼마 아니하여 아이가 요절함으로 음식 끊기를 수일간 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이것은 무익한 일이다”라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뒤 봄이면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호미질하며 가을에는 추수하고 겨울이면 베를 짜는 등 잠시도 한가하고 편안한 시간이 없이 일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을 일으켰으며, 양자를 들여 지아비의 뒤를 잇게 하였으니, 어찌 감동됨이 없으리요. 사림에서 추천하고 친족이 비를 세우고자 하여 그 사실을 적는다. 세 신축(歲辛丑, 1961) 중추(仲秋) 금성(錦城) 오대선(吳大善) 근서(謹書)
  • 비표 : 學生達城徐光南妻/節婦孺人全州李氏紀蹟碑(학생달성서광남처절부유인전주이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운교리 산29-5. 신전마을 어귀.
    【시기】 1959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8cm, 너비 4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人子之於事親 孝不可一日墜地也 人婦之於從夫 節不可一日墜地也 若卓孝高節 通天地亘萬古綱常之大義也 故昔者 漢陳孝婦之賢 褒而獎之 而先儒之編小學也 垂之簡策 以爲來學 肄業之資焉 今於徐門節婦李孺人 亦是見之矣 節婦系出全州 我世宗朝 大宗伯封星山君 諱軾后 學生閏植女 達城君 諱潁後 故淑陵參奉諱相來之子 光南妻也 幼有淑德 閨範 早著 及其嫁也 勢甚貧寒 日出而鋤 日入而織 事親以孝 奄遭舅喪 初終奉祀之節 竭力辦備 使無憾焉 其夫君偶作遠旅 有年不知所向 而婦人之時年二十五也 家貧無依 偏姑在堂 克誠克孝 旨養倍勝 臥病有年 尿屎自擔 藥餌不絶 以天年終 一如前喪 際是 夫君之畢爲 祟風歸家 以委牀九禩 迎醫救療 百方調護 夜禱星斗 願以身代 昊天不恤 竟而崩城 傍觀者恐或就義之慮 而婦人忍痛停悲而言曰 旣失所天 死雖無惜 旋念家世孤孑 無夫君之兄弟 而亦無嗣續耳 罪在三千無後爲大 不如頑命苟存 立嗣續奉宗祀之爲重也 襲斂之具 祭奠之節 莫不致誠 以從姪廷奎爲後 敎之義方 無墜家聲 專勤桑麻 稍起家業 以保守墓 奉祭之無憂焉 秉彛攸同 屢有薦剡 尙未蒙褒貤 惜我惜哉 一日 蘆隱梁斯文仁權氏 以節婦之男弟 吾友化春甫之託囑 介于不佞曰 李孺人至孝貞節 婦孺所共知 而世久則 似或有泯 故其實鐫石於里邊云者 乃廷奎之固請也 感其孝子之誠 誼不敢辭 略敍如右 【풀이】 무릇 아들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안 되고 지어미가 지아비를 섬김에는 정절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아니 된다. 탁효(卓孝)와 고절(高節)은 천지(天地)를 싸잡고 만고(萬古)를 통틀어 강상(綱常)의 가장 큰 의리(義理)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한(漢)나라에서는 진효부(陳孝婦)의 현행(賢行)을 포장(褒獎)하였고, 또 선유(先儒)가 『소학(小學)』을 편집하면서 그 책속에 넣어 후학(後學)들의 공부 자료로 삼았는데 지금 서씨(徐氏) 집안의 절부(節婦) 이유인(李孺人)에게서 또 보게 되었다. 절부는 전주(全州)에서 계출(系出) 하였으니 우리 세종조(世宗朝)의 예조판서 성산군(星山君) 휘 식(軾)의 후예인 학생(學生) 윤식(閏植)의 따님으로 달성군(達城君) 휘 영(穎)의 후손인 고(故) 숙릉참봉(淑陵參奉) 휘 상래(相來)의 아들 광남(光南)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숙덕(淑德)이 있어 규범(閨範: 여자의 범절)이 일찍 드러났는데 출가하여 보니 시가(媤家)의 집안 형편이 심히 가난하여 해가 뜨면 나가서 밭을 매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길쌈을 하여 시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초종(初終: 초상<初喪>에서 종상<終喪>까지)과 제사의 범절을 힘을 다해 마련하여 서운함이 없게 하였다. 그런데 그 부군이 우연히 멀리 출행(出行)을 하여 몇 년이 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부인의 나이는 그때 25세였다. 집은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홀시어머니만 계셨으므로 효성을 지극히 하여 음식 공양과 뜻을 받듬에 갑절 더 잘 하였고 병으로 몇 해를 앓아눕게 되니 대소변 수발을 혼자 도맡아 하면서 약을 끊이지 않았다. 천명으로 돌아가시니 치상(治喪)을 시아버지의 상과 똑같이 하였다. 이때에 부군의 객지 생활이 끝나 풍수(風祟)를 지니고 집으로 돌아와 9년 동안을 병석에 누웠는데 의원을 초빙하여 진료를 하고 백방으로 간호하였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하늘이 무심하여 마침내 붕성(崩城: 남편의 죽음을 뜻함)의 슬픔을 당하니 주위 사람들은 혹 따라 죽지나 않으려나 하고 걱정하였으나 부인은 비통함을 참고 이르기를 “이미 남편을 잃었으니 설사 죽는다 한들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집안이 고단하여 남편의 형제 하나도 없고 또 후사(後嗣)도 없다. 3천 가지 죄목 중에 무후(無後)가 제일 크다 하였다.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라도 후사를 세우고 종사(宗祀)를 받들게 한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염습(殮襲)할 차비와 제전(祭奠)의 범절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한편으론 종질(從姪) 정규(廷奎)로 뒤를 이어 옳은 도리로 가르쳐서 집안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고 근실히 길쌈을 하여 살림을 일으켜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걱정이 없게 하였다. 사람의 이성(彝性)은 같은 바라서 여러차례 천장(薦狀)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포정(褒旌)을 입지 못하였으니 거듭 애석할 일이다. 어느 날 노은(蘆隱) 양사문(梁斯文) 인권씨(仁權氏)가 절부의 남동생이자 나의 벗인 화춘보(化春甫: 보는 아칭<雅稱>임)의 부탁으로 넌지시 나에게 말하기를 “이유인의 지극한 효성과 정절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세대가 오래면 혹 묻혀버릴 수도 있으니 그 사실을 돌에 새기어 마을 언저리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정규의 간청이었다. 효자의 정성에 감동도 되고 정리로도 사양 할 수 없어 간략하나마 위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단기4292(1959)년 기해(己亥) 동지절에 동래 정귀영(鄭貴泳) 짓고, 남원 양성권(梁聖權) 쓰다.
  • 【위치】 백운면 평장리 124-1. 평노길 노변.
    【시기】 불명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0cm, 너비 42cm.
    【개요】 이곳에는 본디 1758년까지는 오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후 어느 때인가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비문을 보아 알 수 있다. 정자 이름을 오암정(五巖亭)이라 한 것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가 5개 있었기 때문이다.

    【비문】 鎭安李君廷鵬 作五巖亭於平章坪 將與其村秀子弟 讀書于其中 徒步五百里 來請余文 盛言居觀之勝 記余少時 登赤裳之山 見雲際縹渺 雙尖如馬耳者曰 鎭之望也 不知所謂五巖者 去馬耳幾里 余老矣 無由一臨眺是亭 徒想見其星出碁置於淸川大野之間也 然李君之求余言 豈爲記其形勝而已 盖余聞之 五者河圖之中數 在天爲五星 在地爲五行 而鍾其精秀者爲人 其賦於性 則仁義禮智信 叙於倫 則父子之親 君臣之義 夫婦之別 長幼之序 朋友之信 著於事 則貌之恭 言之從 視之明 聽之聰 思之睿也 今巖之數 偶與之符 豈天地之理 自然形見於融峙之間耶 李君嘗讀小學矣 小學是做人底樣子 而人之所以爲人 惟是敬數者而已 夫子論忠信篤敬以爲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余於登是亭讀是書者 深以是望焉 辛亥二月淸明前一日 寒泉病叟書
    右陶菴李先生 爲門人五巖李公作也 甲戌冬 余宰任實 任與鎭 隣邑也 李公數相訪 說先生敎人節度甚熟 一日袖此文來示之 相與讀之 怳然若復承謦欬於函丈之間也 遂敬書而刻之 使揭于亭 戊寅季夏 後學西河任聖周謹識
    【풀이】 진안(鎭安)의 이군(李君) 정붕(廷鵬)이 평장평(平章坪)에 오암정(五巖亭)을 짓고, 장차 마을의 뛰어난 자제들과 함께 그 곳에서 글을 읽기로 작정하고, 5백 리 길을 걸어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면서 푸짐하게 경치가 뛰어남을 자랑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소시에 적상산(赤裳山)에 올라 구름 사이로 아득히 말의 귀처럼 쌍으로 치솟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진안의 명물이구나!” 하였는데, 이른바 오암(五巖)이란 것이 마이산에서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나도 늙어서 이 정자에 한번 올라가 볼 길은 없고, 그저 맑은 시내와 큰 들판 사이에 별처럼 나열하고 바둑알처럼 벌려진 산천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군이 나의 글을 청하는 취지가 어찌 그 산천의 경개만 기록하는 데 있겠는가? 대체로 내가 듣건대, 오(五)란 것은 하도(河圖 : 옛날 복희씨[伏羲氏] 때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던 도형[圖形]. 낙서[洛書]와 함께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다)의 한 가운데 숫자로, 하늘에 있어서는 오성(五星)이 되고 땅에 있어서는 오행(五行)이 되는데, 그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 사람이 되고, 그 성질로 부여받는 것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며, 윤기(倫紀)로 말하자면 부자의 친(親), 군신의 의(義), 부부의 별(別), 장유(長幼)의 서(序), 붕우의 신(信)이고, 행위로 나타난 것은 모습의 온공스러움[貌之恭], 말의 조용함[言之從], 관찰의 밝음[視之明], 들음의 분명함[聽之聰], 생각의 슬기로움[思之睿]이다. 지금 바위의 수효가 우연히 위의 숫자와 부합하는데, 어쩌면 천지의 이치가 자연히 산수 사이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군은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었다. 소학은 사람의 모양을 만드는 책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직 이 경(敬) 등 몇 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부자(夫子, 공자를 지칭함)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섰을 때는 남의 앞에 나란히 섰는가를 보고, 수레에 있을 때는 굴대에 기대는 것을 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정자에 올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 점에 유의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신해(辛亥, 영조 7, 1731) 2월 청명전(淸明前) 1일 한천병수(寒泉病璟)가 쓰다.
    위는 도암(陶菴) 이선생(李先生, 이재[李縡])이 문인인 오암(五巖) 이선생(李先生)을 위하여 지어 준 글이다. 갑술년(甲戌年) 겨울에 나는 임실(任實)을 맡고 있었는데, 임실은 진안의 이웃 고을이다. 이공(李公)이 자주 찾아와서 선생의 사람 가르치는 법도를 매우 자상하게 말하였는데, 하루는 이 글을 가지고 와서 내놓고 함께 읽으니, 어렴풋이 사석간(師席間)에 선생님의 기침소리를 다시 듣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이 글을 경건하게 써 각하여 정자에 걸게 하였다. 무인(戊寅, 1758) 계하(季夏)에 후학(後學) 서하(西河) 임성주(任聖周)가 삼가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