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九逸梁處士節義碑(구일양처사절의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0. 하미마을회관 못미처 250m 지점.
    【시기】 197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0cm, 너비 35cm, 두께 1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易曰明夷利艱貞 程子釋之曰 不晦其明則被禍不守其貞則非賢君子處世之指南也 惟近古九逸處士梁公庶幾乎此歟 公諱基柱字在英九逸其別號也 取九重菊花中隱逸之意也 南原之梁氏 勝國兵部郎中諱能讓號遯菴 享龍章祠 是爲上祖 李朝吏判諱東弼護軍諱漚 殉于端廟 成均生員諱煜 殉于壬辰護軍諱夏龍號晩休堂 享駬山廟永慕祠 是爲中葉之顯 諱弼浩諱致漢祖若禰 妣全義李榮萬女 以哲廟辛酉生 至孝異凡 父病飛鵝墜鯷 母病螢火導虹 誠感神天與筍鯉等 摳衣乎蘆沙奇先生多蒙獎詡 與梅泉黃公玹講磨道義 文辭贍博抽筆立就屢中鄕解一入場屋見銅臭滿 大歸田里有詩曰 宿昔靑雲志誤知出處時 喜陶靖節集手不釋之 己酉丁內艱 庚戌遭屋社 絶穀涕泣 翌年除禫 卽入德泰山飛獅洞 著帝秦論追魯連之志 且作詩曰 夏變爲夷狄我安是適歸云 名其莊曰三幽莊 寓山水人之俱幽也 所居室壅南窓坐必向北 月白風淸則誦出師表正氣歌及宇宙男兒一個無之句因泣下滿襟 高宗純宗之昇遐 登高望哭鳴咽哽塞 洞人稱其峯曰 望巖 居山三十載 薇蕨療飢麻葛掩身 臨終召諸子曰 吾年近八十死無所憾惟恨不覩天日 復明戒之治家保家正家之道言訖而逝 是丁丑二月十一日 遠近士友如悲親戚 手植數業菊幹而不花翌年不復萌 配居昌愼氏宗祿女 婦德 生三男昌權聖權仁權以下煩不錄 噫竹之遇風雨而不爲催折以節爲固士之逼禍患而不失其正以義爲質 公能守節行義實熱火中眞金 其子聖權翁十舍長程枉屈弊盧責以碑刻之訶 千秀曾有敬慕之忱不可以微辭 遂爲之銘曰 孝感神明 休徵精誠 淚灑新亭 伯仁心情 括囊无咎 遯迹自持 明夷艱貞 庶幾近之 節爲方兮 義爲禮耳 君子人歟 君子人矣
    檀紀四三○七年 甲寅 四月上弦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주역에 이르기를, 명이리간정(明夷利艱貞)이니 정자(程子)가 주석하기를 “밝은 것을 어둡게 하지 않으면 화를 입고, 지조를 지키지 아니하면 현자가 아니다”라고 했으니, 군자의 처세(處世)지침이다. 생각하니, 가까운 옛날에는 구일처사(九逸處士) 양공(梁公)이 거의 여기에 해당되는 분일진저. 공(公)의 휘는 기주(基柱), 자(字)는 재영(在英), 구일(九逸)은 그의 별호(別號)이다. 구월달의 국화중(菊花中) 은일(隱逸)한 뜻을 취한 것이다. 남원(南原)의 양씨(梁氏)는 고려 때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 휘(諱) 능양(能讓) 호(號) 둔암(遯菴)으로 용장사(龍章祠)에 향사된 분이 바로 윗대 선조이다. 조선 때 이조판서 휘(諱) 동필(東弼)과 호군(護軍) 휘(諱) 구순(寮殉)과 단종 때 성균생원(成均生員) 휘(諱) 욱순(煜殉), 임진왜란 때 호군(護軍) 휘(諱) 하룡(夏龍) 호(號) 만휴당(晩休堂)은 이산묘(鎖山廟) 영모사(永慕祠)에 향사되어 있다. 이들은 중엽에 저명한 분들이다. 휘(諱) 필호(弼浩)는 조부이고, 휘(諱) 치한(致漢)은 부이다. 비(騙)는 전의인(全義人) 이영만(李榮萬)의 딸인데, 철종(哲宗) 신유(辛酉, 1861)년 태어났다. 효성이 남다른데 있어, 아비의 병환에 나는 거위가 메기를 떨어뜨렸고, 어미의 병환에는 반딧불과 무지개가 길을 인도하였다. 정성에 귀신도 감동하여 죽순과 잉어 등을 내린 것과 같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에게 사사하여 칭찬과 사랑을 받았고,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더불어 도의(道義)에 관해 강마하였다. 문사(文辭)가 해박하고 붓을 들면 문장을 이루어 여러 번 향시에 들었으나, 한 번 과거시험에 응시하니 돈 냄새가 가득하여 아주 돌아와 버렸다. 시가 있는데, 이르기를 “옛적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나아갈 때를 잘못 알았네”라고 하였다. 《도연명집》을 좋아하여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기유(己酉)년 모상을 당하고 경술(庚戌)년 사직이 망하자 체읍(涕泣)하고, 다음해 모상의 복을 벗고는 곧장 덕태산(德泰山) 비사동(飛獅洞)으로 들어가 제진론(帝秦論)을 지어 노중련(魯仲連)의 뜻을 추모하였다. 또 시를 짓기를 “중국이 변하여 오랑캐가 되니 내가 어디로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사는 집을 ‘삼유장(三幽莊)’이라 이름하였으니, 산도 사람도 물도 모두 그윽하다는 뜻이다. 왜(倭)를 배척하기 위해 거실의 남창은 막고 반드시 북을 향하고 앉았고, 달 밝고 서늘한 밤이면 《출사표》를 읊고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에 우주남아(宇宙男兒) 일개무(一個無)의 자구에 이르면 눈물이 쏟아져 옷깃에 가득하였다.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승하(昇遐)했을 때에는 높은 산에 올라 오열하여 목이 메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암(望巖)’이라 불렀다. 30년간 산에서 살며 고사리 등으로 연명하고, 삼이나 칡으로 몸을 가렸다. 임종에 이르러 자식들을 불러 말하길, “나는 근 팔십을 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오직 한이라면 나라의 광복을 못 보고 죽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치가(治家), 보가(保家), 정가지도(正家之道)를 훈계하고 운명하였다. 그 때가 정축(丁丑, 1937)년 2월 12일이었다.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마치 친척처럼 슬퍼했으며, 손수 심은 국화에서는 꽃이 피지 않고, 이듬해에도 싹이 트지 않았다. 배(配)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종록(宗祿)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삼남(三男)을 낳았으니 창권(昌權)·성권(聖權)·인권(仁權)이다. 이하(以下)는 번다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희(噫)라! 대나무가 풍우를 만나도 꺾이지는 않는다. 지조 굳은 선비에게 화란이 닥쳤으나 바른 길을 잃지 않음은 의로움의 본바탕이다. 공은 능히 지조를 지키고 행의(行義)가 실다워 뜨거운 불속에 진금(眞金)이라 하겠다. 그 아드님 성권(聖權) 옹(翁)이 며칠의 먼 길을 누추한 집에 찾아와 비문을 맡기니, 나 천수(千秀)도 일찍부터 경모하는 마음이 있었던 터라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명하기를, “효성에 신명도 감응하여 좋은 징조는 정성으로 나타났도다. / 신정(新亭, 동진[東晋]시대의 정자)에서 눈물을 뿌리며 백인(伯仁, 진[晉]의 주의[周剡]의 자) 심사로다. / 입을 딱 다물면 허물이 없나니 둔적(遁迹)하여 스스로를 지켰네. / 주역의 명이(주역의 괘명으로 군자가 운이 비색하여 빛을 감추는 상)의 간정(艱貞)이 아마도 근사하다 하겠지. / 절조는 방편이 되고 의로움은 예의이나니 / 군자라 할 것인가, 군자라 할 만하구나.” 단기 4307(1974)년 갑인(甲寅) 4월 상현 진양 하천수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