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美溪愼先生義連遺蹟碑(미계신선생의련유적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0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180cm, 두께 59cm, 두께 3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愼主事宗奎 一日持先狀來曰 吾祖之卓行異蹟 至蒙 旌褒 而世遠家替 文不足徵 所存者 斷爛數紙 疑信相間之語 所憑者 樵牧傳述之說而已 吾懼夫愈久而愈失泯也 將竪石而表之 余辭不獲 遂按其狀而節之 先生諱義連 字宜叔 生鎭安縣之美溪村 故因而自號焉 愼氏籍居昌 鼻祖諱修 宋開封府人 高麗文宗朝 東來登第 官至左僕射 入我 朝 有諱以衷 位列卿 贈贊成 謚襄烈 爲名流 是於公爲七代祖 考諱舜 妣全州李氏 公以 明廟丙午生 幼有異質 旣長 內服庭訓 外資師友 專心性理之學 窮居養親 而華聞遠播 先大人嘗病篤 欲生雉灸 倉卒難獲 方焦泣求之 忽有一雉 飛入庭中 乃供而瘳 龍蛇之變 列城失守 士民駭竄 公方在侍湯 賊猝至 凶鋒將犯病親 公以身翼蔽 哀乞身代 賊曰此孝子也 問姓名 書于紙 投于火則不焚而騰空 賊大驚異 傳告黨類 俾勿傷害 榜于洞口曰 孝子所居之地 環其境而不入 遠近避亂來者 無不全活 丁酉再燹 賊又戒而不入 前後賴活者 殆五萬人 名其洞曰五萬洞 名其坪曰免禍坪 稱其山曰德泰山 海平尹相公 啓聞于 朝 宣廟嘉之 傳達于 皇朝 贈階修義副尉 命旌其閭 哲廟丙辰 士林設俎豆於忠孝祠 嗚呼壬丁之亂 生靈魚肉 湖南尤酷 孝子仁人 不能全其親族者 踵相接也 而公之誠孝所孚 獨能父子全獲 又因以庇濟鄕邑 何其盛也 且閱狀中所錄 尹公啓辭 有移孝爲忠之語 則公之蹟 似不止是也 而今無可稽 甚可恨也 然一臠可以知全鼎 又何必多也 銘曰 鯉崔呈異 豹虺示耳毒 誠之格也 性之篤也 仁聲所感澤被五萬 功德之偉 軼于節閫 遺裔記蹟 石屹于洞 何用碑爲 萬口猶誦
    光武十一年(丁未)暮春 崇政大夫弘文館提學東陽申箕善撰
    【풀이】 신주사(愼主事) 종규(宗奎)가 하루는 선대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종사의 탁행(卓行)과 이적(異蹟)은 정려(旌閭)를 세워 포장함을 입게 되었으나, 세대는 멀어지고 가세(家勢)는 침체하여 문헌의 징신(徵信)이 부족하고, 남은 것이라곤 너덜너덜한 몇 쪽의 종이에 적힌 의신(疑信)이 반반인 말과 빙거(憑據)할 바는 초부(樵夫) 목동(牧童)의 전설뿐이니, 세월이 오래 가면 더욱 묻혀버릴까 걱정이 되어 돌을 세워 표하려 합니다.”하였다. 나는 처음에 사절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그 장문을 참조하여 간추리기로 하였다. 선생의 휘는 의련(義連)이요, 자는 의숙(宜叔)이니 진안현(鎭安縣) 미계촌(美溪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대로 미계를 호로 하였다. 신씨(愼氏)의 본관은 거창(居昌)이요, 시조의 휘는 수(修)이니, 송(宋)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동으로 건너와 과거에 등제하여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휘 이충(以衷)은 열경(列卿)에 올라 찬성에 증직되었고, 양렬(襄烈)이란 시호가 내려져 명류(名流)가 되었는데, 이 분이 7대조가 된다. 고(考)의 휘는 순(舜)이요, 비(騙)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니, 명종 병오년(丙午年, 명종 원, 154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고, 커서는 안으로는 가정 교육을 받고 밖으로는 사우(師友)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性理學)에 전력하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니, 소문이 멀리 퍼졌다. 일찍이 선대인(先大人)의 병이 위독한 중에 산 꿩 구이를 먹고 싶어하였으나, 졸지에 구할 수 없어 한창 초조하게 울면서 구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꿩 한 마리가 마당 가운데로 날아 들어왔다. 그것을 요리해서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임진년 난리에 열군(列郡)이 함락되니 사민(士民)이 놀라서 도망쳤으나, 공은 그때 바야흐로 부모의 병을 구완하고 있었다. 그 때 적들이 졸지에 들이닥쳐 사나운 칼날이 병든 아버지를 겨냥하자, 공이 몸으로 아버지를 감싸고 자신을 대신 죽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에 적들이 말하기를 “이 자는 효자이다” 하고 성명을 물어서 종이에 적어 불 속에 던지자 불에 타지 않고 하늘로 날아가니, 적들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저희 패거리들에게 전하여 해치지 말라 하고, 동구밖에 방을 붙여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고, 그 지경을 빙 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원근에서 피난해 와서 산 이들이 모두 온전히 살아났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또 적들이 경계하여 들어가지 못하게 하니, 전후로 거기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거의 5만인에 가까워 그 골짜기를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은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평(海平) 윤상공(尹相公, 이름은 두수[斗壽])이 조정에 장계를 올리니, 선조께서 가상히 여기셔 수의 부위(修義副尉)의 품계를 내리고 정려를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이 사실은 명(明)나라에까지 전해졌다. 철종 병진년(丙辰年, 철종 7, 1856)에는 사림이 충효사(忠孝祠)에 배향하였다. 오호라! 임진 정유의 난리에 백성이 어육(魚肉)됨은 호남쪽이 훨씬 혹독하여 효자와 인인(仁人)으로 그 친족을 온전히 보호하지 못한 이가 즐비하였건만, 공만은 효성의 감응으로 부자가 온전히 살아났고, 또 그로 인하여 온 고을이 구제되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일이던가! 또 장문을 보니, 윤공(尹公)의 계사에 효를 미루어 충(忠)을 이루었다는 말이 있으니, 공의 사적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닌 듯하나 지금에 와서는 상고할 길이 없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전체의 고기 맛을 아는 법이니, 어찌 꼭 많아야만 한다 하겠는가? 명(銘)하기를 “잉어와 꿩이 기적을 나타내고 / 표범과 뱀들이 독을 풀지 못함은 / 효성이 하늘에 닿음이요 / 천성이 독실하였기 때문이다. / 인성(仁聲)의 감응에서 / 은혜가 오만(五萬)에 미쳤으니 / 공덕의 드높음이 / 병, 수사(兵水使)와 맞먹는다. / 후손들 사적을 기록하니 / 동구에 빗돌 드높으나 / 구태여 비를 할 것 무언가 / 만구(萬口)가 전송(傳誦)할 것을” 광무(光武) 11년 정미(丁未) 모춘(暮春) 숭정대부홍문관제학(崇政大夫弘文館提學) 동양(東陽) 신기선(申箕善)이 찬하다.
  • 【비표】 晩休堂梁先生遺墟碑(만휴당양선생유허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0. 하미마을회관 못미처 250m 지점.
    【시기】 1960년
    【형태】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16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此故晩休堂梁先生杖屨之所也 公素生長於南原之竹谷而其遷于鎭安之蘆溪 以山水奇而靜養宜也 方其遷之之日 崔養黙 陳德洞 梁松齋 尹梅軒 諸賢迭爲歌頌而送之曰 吾道北矣 以生屛時居同谷道相合也 生而英邁 不群惟學是力其居廬也 膝處坎而草樹不花孝之出於人 有如是者方弱冠時蔚有聲譽 以親命應進士擧累而不中 執友盧持平學夏者 累致書 以歛華就實勸之遂不應擧就權遂菴文純公之門專心篤學期以成就 鄭丈巖一見器之相尙以道二十餘載蒙薦階嘉善後又腏 享于駬山廟永慕祠 粱氏南原巨姓也 兵部郎中遯菴諱能讓 麗之世顯 祖有諱堅進賢館大提學諱俊 成均祭酒諱東弼 吏曹判書諱克信 文科縣監其七世以上也 高祖諱煜 成均生員 曾祖諱以寬 通德郞 祖諱擎日 成均生員 考諱禹鼎 妣東萊鄭氏 配居昌愼氏 顯泰顯重其二男也 道海宗海滿海其三孫也 公所著 經學要旨蒙學指南及家訓遺稿四冊 不幸入于火有口傳萬東廟詩如今始到華陽洞後見大明天日光而己 後孫以無闡發其潛德世以爲恨將以碑于溪上使人知遺墟之尙存亦見其追遠之至矣 聖權以余之相善也 願有以序之書 大槩如此素之 以銘曰 有溪淸深 有山峻極 君子棲遲 可欲可濯 珠雖藏淵 光輝乃發 賢者遯跡 名聲未沒 今云己古 孚人者德 蒙資嘉善 以其經術 妥享駬山 非賢曷克 仁人所憩 草木猶惜 而其遺址 豈忍視忽 我有銘詞 崇碑斯立 垂之萬世 傳之無極
    世庚子五月上澣全義李炳殷撰
    【풀이】 이곳은 만휴당(晩休堂) 양 선생(梁先生)의 장구지소(杖爐之所)이다. 공은 남원(南原)의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산수가 빼어나고 정양(靜養)하기 좋은 진안의 노계(蘆溪)로 이거하였다. 이거하던 날 최양묵(崔養默), 진덕동(陳德洞), 양송재(梁松齋), 윤회헌(尹梅軒) 제현(諸賢)이 노래를 부르며 송별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道)가 북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은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동네에 살며 도가 상합했던 까닭이다. 공은 나면서 영매(英邁)하여 또래들과 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시묘할 때는 무릎 닿았던 자리에 구덩이가 생겨 풀이 자라지 않았으니, 효성의 출중함이 이와 같았다. 약관의 나이에 칭송하는 소리가 많아 부모의 명에 의해 진사시에 나아갔으나 입격(入格)하지는 못하였다. 뜻이 통하는 지평(持平) 노학하(盧學夏)는 여러 번 글을 보내 꽃이 피었으니 열매를 거두라고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고, 권수암(權遂菴) 문순공(文純公)의 문하에서 전심(專心)으로 학문을 하여 성취하였다. 정장암(鄭丈巖)이 공을 한 번 보고 국량을 알아 20년간을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으며, 천거를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후에 이산묘 영모사(鎖山廟永慕祠)에 배향되었다. 양씨는 남원의 거성이다. 병부낭중(部郎中) 둔암(遯菴) 능양(能讓)은 고려에 두드러졌던 조상이며, 견(堅)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요, 준(俊)은 성균관 좨주(成均祭酒), 동필(東弼)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극신(克信)은 문과로 현감인데 모두 공의 7대조 이상이다. 고조(高祖)는 욱(煜)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증조(曾祖)는 이관(以寬)으로 통덕랑(通德郞)이요, 조부는 경일(擎日)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고(考)는 우정(禹鼎)이다.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며, 배(配)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고, 현태(顯泰)와 현중(顯重)은 아들이다. 도해(道海)·종해(宗海)·만해(滿海)는 손자이다. 공의 경학요지(經學要旨)는 학문을 계몽하는 지침으로 두드러졌다. 가훈과 유고 4책은 불행히도 화재로 불타 버렸고, 구전하는 《만동묘시(萬東廟詩)》에 즉, “이제 처음으로 화양동(華陽洞)에 이르니 비로소 대명(大明)의 천일(天日) 빛남을 보겠도다”가 있을 뿐이다. 아주 환한 하늘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보는 듯하다. 후손들이 공의 숨겨진 덕을 천양(闡揚)할 길이 없음을 대대로 한으로 여겼더니, 장차 계곡의 위에 이 비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유적지를 알게 하고, 또한 추원(追遠)하게 하려 한다. 성권(聖權)은 나와 잘 지내는 사이로 글의 서(序)를 써주기 바랬다. 그 대략은 이와 같으니 명하기를 “계곡물은 맑고 깊으며 산은 높이 뻗쳐 있어 / 가히 군자가 깃들어 살 만하구나. / 깊은 못 속에 구슬을 감추어도 마침내 빛을 발하나니 / 현자(賢者)의 둔적(遯跡)한 명성은 민몰되지 않는구나. / 지금 와서 옛사람의 덕을 말하노니 / 경학에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내려졌고 / 이산묘(鎖山廟)에 배향되었으니 현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러겠는가. / 어진 사람은 쉬어 가고 초목도 애석해 한다. / 유적지가 소홀하게 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 나는 명을 하여 이렇게 비를 세우는 바이니 / 만세에 드리워지고 무극(無極)토록 전하라.” 경자(庚子)년 5월 상한(上澣) 전의 이병은(全義李炳殷) 찬(撰)
  • 【비표】 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충익공만육최선생양둔적유허비)

    【위치】 백운면 반송리 360-2. 반송마을앞 백장로 큰길가.
    【시기】 1871년
    【형태】 구남각 내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60cm.
    【개요】 이 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다. 노사 기정진(盧沙奇正鎭)이 글을 지었으며 구남각(龜南閣) 내에 세워져 있다.

    【비문】 晩六崔公 於我 聖祖 有嚴陵之契 幸宮一進 世疑之犯座客星 然公罔僕之義 又不但嚴之高尙其事 故尙論者又或以爲 伯夷嚴光合爲一人 此其遯跡之地 權近誌文所稱中臺山者是也 後移鳳崗墓下以終 中臺之山不平 先生之風與之俱長 何以碑爲 碑焉者 雲仍私也 來求銘者 崔氏二秀鳳翊鍾大 銘曰 遯入麗末 壬申前乎 社屋曾不幾旬 瓦後鳳崗 自玆徙倚 考終于 寶籙三十三年甲辰 碑于聖上辛未之春 嗚呼首尾未五百者二十年
    幸州奇正鎭撰
    【풀이】 만육(晩六) 최공(崔公)은 우리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리킨 말)에게는 엄자릉(嚴子陵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때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가 자릉이다. 광무제가 천하를 얻은 뒤 벼슬길에 나와달라고 불렀으나, 그는 나오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이나 하면서 생을 마쳤다)과 같은 우의(友誼)가 있었다. 행궁(幸宮, 행행할 때 거처하는 궁궐)에 한번 입궐하니 세상에서는 어좌(御座)를 범한 객성(客星)에 비기었다. 그러나 공의 망복(罔僕, 신하가 되지 않음)한 절의는 엄자릉의 그 일을 높이 추켜세우려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상론자(尙論者, 평론자와 같은 뜻)는 혹 이르기를 “백이(伯夷)와 엄광(嚴光)을 합쳐서 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은 그 분이 자취를 숨기고 살던 곳이니, 권근(權近, 호는 양촌[陽村])의 지문(誌文)에서 칭한 바 중대산(中臺山)이 바로 이곳이다. 뒤에는 봉강(鳳崗)의 묘소 아래로 옮겨와 살다가 생을 마쳤다. 중대산은 펼쳐질 수 없으니 선생의 풍도(風度)와 수명을 같이 할 텐데 비는 무엇을 하려 세울까? 비를 세운 것은 자손이 사사로이 한 것이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최씨의 두 수재(秀才)인 봉익(鳳翊)과 종대(鍾大)이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 숨었다니 / 임신년(壬申年 :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임신년[공민왕 4, 1392] 7월 17일 고려를 멸하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이전이던가 / 사직이 망한 지 얼마 후이라네. / 와해(瓦解 : 기와가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나다. 생활이 그런 것인지 혹 죽음을 말함인지는 미상임)한 후일의 봉강(鳳崗)은 / 이 곳에서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오. / 보록(寶擁 : 임금의 역년[歷年]을 높혀서 부른 말) 33년 갑진(甲辰 : 조선 개국 33년째인 세종 6년 갑진[甲辰]을 말함인 듯)에 고종(考終)하여 / 성상의 신미년(辛未年 : 고종 8년 신미[辛未]를 말함인 듯 하나 연수[年數]는 맞지 않음) 봄에 비를 세우니 / 아! 전후로 5백 년에서 20년이 모자라는구려.”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