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 鳳岡崔先生紀績碑(봉강최선생기적비)

    【위치】 백운면 평장리 462. 정천마을 동쪽 평가로변 소나무숲 내.
    【시기】 1978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22cm.

    【개요】 최진형(崔進亨)의 호는 봉강(鳳岡), 전주인(全州人)이다. 고려조 문충공(文忠公) 군옥(群玉)의 후예로 충익공(忠翼公) 만육(晩六) 양(瀁)의 차남이다. 정훈(庭訓)을 이어받아 견문이 넓고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14~1388)의 문인으로 많은 기림을 받았다. 판서(判書) 이식(李軾)은 공의 처부(妻父)였으나 공을 심중히 여겨 마치 사우(師友)처럼 여겼다 하니, 공의 높은 인격(人格)과 도덕(道德)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의리(義理)의 학문에 정심(精深)하여 형상형하(形上形下)의 도리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전현(前賢)이 아직 밝혀내지 아니한 오지(奧旨)를 명쾌(明快)히 드러내 많은 문인들이 뒤따른 바, 자사(刺事) 하연(河演)의 천달(薦達)로 응양위 상호군(鷹揚衛上護軍)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도연명(陶淵明)의 고아(高雅)한 풍도(風度)를 지키며 충효전가(忠孝傳家)의 가통(家統)을 굳게 지켰다. 이와 같이 임하(林下)의 은사(隱士)로 자처하며 의론이 청직(淸直)한 바, 백씨(伯氏)인 진명(進明), 종씨(從氏)인 진성(進誠)과 함께 많은 이름을 남기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선공(先公)의 충절과 둔촌(遁村)의 학문을 아울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