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松齋處士天安全公 孺人全州李氏 夫婦孝行碑(송재처사천안전공유인전주이씨부부효행비)

    【위치】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 진입로 우측변
    【시기】 1982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子曰孝悌也者爲仁之本 仁本於孝忠本於孝百行萬善無一不本於孝 此一綱擧衆目張者也 所以一有其人則載之竹帛表之門閭以爲人柯則 嗟呼 世方異敎鴟張彛倫沮喪而長夜一燭群於燭陽者 百濟歡城君聶後 光國將軍嘉齋諱東屹八世孫 號麗山 諱基學子 天安全公 奉鎬是也 公風采秀麗 性行端雅 動靜云爲 暗合規矩 而夫人全州李氏 亦閨門女士也 産業苟艱夫耕婦織 容有菜色衣無完布於兩親怡愉洞屬味之甘衣之良 必備有餘父母常安樂稱父罹貞疾藥之供粥之奉 夫婦共之井花祈禱 夫於山 婦於壇 丁艱盡易戚而夫哭墓婦哭殯三燧一如 母氏八旬 老病呻吟數載 有聞則夫口于耳而聽之有味則婦手于口而啖之性 嗜川鮮雖刀風虐雪 夫叩氷婦携筌得之間 有妄言指幼兒 爲雞命烹而供 夫婦割雞進之尿屎之遺相扶滌之唾洟食餘 對共啜勿之棄擲 遭故葬祭如禮 有時興哀而淚下 夫人讓寧大君後士彦女 其陰訓有自來矣 噫 一鄕之一人難 况一家二孝乎 且兼董之廚 王之鯉 邕之哀 連之居果 叔世絶無之孝也 列郡之褒薦 是秉彛之極天罔墜而 其子泰成 亦以孝見重此所謂鳳無凡毛之理也 月浪士人 宋升煥 崔昶鉉 李聖麟 諸彦 以籲天無地竪一貞珉 以代箭門而世無韓子之筆 鎭安鄕校 典校安導遠 與全炯順 齎狀軸索 銘於余 余孤陋烏敢當辭不得則揚摧實德之梗槪以待外史氏繩正 銘曰 百行萬善 本之於孝 所以聖賢 垂之名敎 一鄕難一 一家有二 半夜聲雷 一世標幟 事生之董 居喪之連 河淸何時 欲問于天
    壬戌如月上日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유자(有子,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가 말하기를 “효제(孝悌)는 인(仁)의 근본이다. 인(仁)은 효(孝)에 뿌리를 두고 충(忠)도 효에 뿌리를 두나니,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이 효(孝)에 뿌리를 두지 않음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이 강령은 사람들의 눈을 틔게 하는 것이라, 이를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에 그 이름을 올리고 정려를 내려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다. 차호(嗟呼)라, 세상은 지금 이교(異敎)가 퍼져 이륜(彛倫)을 무너뜨리는데 긴긴 밤에 빛나는 촛불이 하나 있으니, 백제 환성군(百濟歡城君) 섭(褐)의 후손 광국장군(光國將軍) 가재(嘉齋) 동흘(東屹)의 8세손, 여산(麗山) 기학(基學)의 아들 천안(天安) 전공(全公) 봉호(奉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은 풍채가 수려하고 성정과 행실이 단아하며 입이 무거워 본보기가 되었고,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또한 규문(閨門)의 여사(女士)였다. 집안이 비록 가난하여 공은 밭 갈고 부인은 베를 짜며 얼굴은 마르고 옷은 기워 입었으나, 양친에게는 즐거이 좋은 음식과 옷으로 공양하였고, 반드시 여분을 준비하여 항상 부모를 안락하게 하였다. 부친이 병에 걸렸을 때는 부부가 같이 약시중을 들었는데, 부인은 단에서 공은 산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진정으로 슬퍼하였으며, 공은 묘에서 곡하고 부인은 집안에서 곡하기를 3년 동안 한결같이 하였다. 모친이 팔순으로 늙어 병에 신음하기를 수년 동안에, 드시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공이 듣고 부인이 손수 만들어 공양하였다. 모친이 싱싱한 천어(川魚)를 좋아하므로 공은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얼음을 깨었으며, 부인은 통발을 들고 고기를 잡았다. 모친이 노망으로 어린애를 가리키며 저놈 잡아 달라 하니 예예하고 닭을 잡아 봉양하였고, 변이 묻은 빨래는 서로 도와 씻었으며, 모친의 침과 콧물이 들어간 음식도 버리지 않고 부부가 마주앉아 먹었다. 상을 당하매 장제를 예에 따라 치렀으며,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인 사언(士彦)의 따님으로 그 음훈(陰訓)을 따랐으니, 희(噫)라! 한 고을에 한 사람이 있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한 집안에 이효(二孝)이리오. 이는 동소남(董召南)의 부엌에 꿩이 날라 들어온 고사와 왕상(王祥)의 얼음 속의 잉어 고사와 채옹(邕)의 슬퍼함이나 대련과 소련 형제가 초상 치르는 고사에 비하여 말세에도 끊어지지 않을 효이다. 열군(列郡)에서 천거하였으니 이는 이륜(彛倫)의 지극함을 붙잡아 천도(天道)가 떨어지지 않게 함이다. 그 아들 태성(泰成) 역시 효성으로 추중함을 받았으니, 이는 소위 봉(鳳)에게는 평범한 터럭이 하나도 없는 이치이다. 진안의 선비 송승환(宋升煥)과 최창현(崔昶鉉)·이성린(李聖麟) 등 제 선비들이 하늘에 호소할 길 없어 하나의 비석을 세워 홍살문에 대신하려 하나, 세상에는 한창려(韓昌黎) 같은 문장이 없어 진안 향교의 전교(典校) 안도원(安導遠)과 전형순(全炯順)이 장축(狀軸)을 정리하여 내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여 감당하지 못 하노라고 사양하였지만, 부득이 하여 그 실덕(實德)의 대강을 천양(闡揚)하노니 이를 바루어 줄 사람을 기다리노라. 명(銘)하기를 “효는 백행(百行)과 만선(萬善)의 근본이라 / 성현께서도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라고 가르치는 까닭이네. / 한 고을에 하나도 어려우나 한 집안에 둘이 있었네. / 어두운 밤에 등촉이요, 사람을 경계하는 우렛소리이니 일세의 본보기일세 / 살아서 섬김이 동소남과 같았고, 상을 당하매 뜻이 연(連)형제와 같았네 / 황하수가 언제 맑아질까[황하가 맑아지면 태평성대가 된다고 함] 하늘에 묻고 싶네.” 임술(壬戌) 여월( 如月) 상일(上日) 진양(晉陽) 하천수 근찬(河千秀謹撰)
  • 【비표】 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順天金公道成之紀念碑(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순천김공도성지기념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7-1. 평노길 하미마을회관 100m 못 미친 지점 노변
    【시기】 1982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두께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 김도성(金道成)이 200년 전에 경남 합천에서 이 동네에 이거하여 많은 자손이 퍼져나간 사실을 기록 기념한 비.

    【비문】 湖南之鎭安郡 白雲面 美峙里 順天金公 諱道成之歿이 今甲子가 三周餘而公之曾若孫이 爲紀念乃祖之德하야 將治貞珉하야 而竪于通衢할새 余友愼君鏞權은 公之曾孫婿로 同其曾孫 平淵 甲淵甫하야 踵門要役이어늘 余固陋하야 恐累人키로 辭하니 言益勤하야 謹按譜하니 公이 以壽로 贈折衝将軍龍驤衛副護軍이요 襄景公 諱承霔后며 諱啓源子也라 公이 以平陽華閥로 世居 慶南 陜川之億三洞할새 自有遠志하야 離十世桑梓之鄕하야 卜菟裘於月浪者는 慮其人繁地狹하야 將有生業之艱하며 久住一洞하면 自輕親疎之分하야 乃相基而遷하니 寔出於明敏之勇斷也라 公이 以名賢之裔로 種闇然自修之德而子姓이 蕃衍하야 爲一鄕之稱하니 豈不休哉아 今於是役에 公之玄孫 東喆君이 最多用力云
    檀紀四千三百十五(1982)年 壬戌 小春 首陽 吳炳根 撰 居昌愼寬範書
  • 【비표】 濟龍橋 / 先達宋敬模施主碑(제룡교선달송경모시주비)

    【위치】 백운면 반송리 360-2. 구남각 뒤.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101cm, 너비 31cm, 두께 12cm.
    【개요】 비의 앞면에는 상단에 ‘濟龍橋’라 각자되어 있고 그 밑에 ‘先達宋公敬模施主碑’가 각자되어 있다. 후면에는 ‘同治 八年(1869) 乙巳 九月 日’과 유학(幼學) 최봉엽(崔鳳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 두원마을과 연결되는 다리를 송경모가 놓은 사실을 기념하는 비인데 그 다리가 섶다리인지 돌다리인지는 알 수 없다.
  • 【비표】 小山先生金公紀績碑(소산선생김공기적비)

    【위치】 백운면 신암리 백장로 대전마을 동쪽 진입로변
    【시기】 197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3cm, 너비 46cm, 두께 22cm.
    【개요】 김상두(金相斗, 1853~1924)는 호가 소산(小山)이다. 신암리 대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하고, 재예(才藝)가 출중하였다. 먼저 의(義)를 행하고 뒤에 학문(學問)을 하여 배우러 오는 사람이 원근(遠近)에서 끊이지 않았다.

    【비문】 仁人志士學優德崇하여 知行一致에 以義爲質하고 秉義不撓가 哲宗癸丑十月十日로 生于大田舊第하니 儀表秀麗하고 才藝敏悟라 以志物로 備養﨎親하고 篤志劬勤하여 博覧強記에 各軆著述이 金精玉潤하여 每於文垣騷壇에 獨步一時라 臨紙揮毫에 不甚思索하고 便同宿搆하니 人以謫仙昌黎를 一身兼全으로 稱而時値國步九卵에 無意榮途이러니 及至冠裳倒懸에 深入中隠谷하여 心不戴讎天日月하고 與全駬東斗鎬 梁八隠鍾植 朴又淸聖必로 交契益宻하여 同盟罔僕之策而玉蘊山輝에 皷篋諸生이 遠近沓至라 先行義而次文學하여 自有條理하고 自有間架하여 銖累寸積에 皆成名器하니 實一方長德이라 甲子三月十八日卒하니 葵任實屯南君只谷艮坐라 配綾城具氏珪和女니 壬子二月二十三日生이라 婦德克正에 以女士로 稱이라 丁卯二月二十四日卒하니 墓는 大田新田麓艮坐라 生一男三女하니 男은 容哲이니 娶延安宋氏仁叔女하여 生仲坤良坤善坤正坤하고 女는 適文泳丞尹鍾顔崔季鉉이라 炯植東植鍾植은 文出이요 正漢은 尹出이요 永鐸은 崔出이라 餘는 煩不錄이라 噫라 以公學問志槪로 不遇其時하여 䓁田父漁翁而止하니 人皆惜之라 然이나 與其一時之榮譽론 易若百後之食報也리요 夫積厚而大發은 理之常이라 今其孫曾이 有充閭之慶而仲坤이 與諸弟及外裔文炯植東植鍾植尹正漢崔永鐸으로 輸誠竭力하여 将竪石紀績일새 袖崔昶鉉所爲狀하여 來余請其銘하니 余曾聞公之風而欽慕者也라 不得以人微로 辭하고 遂爲之銘曰 藍田玉出麗水金 生而孝而學大器 早成文詞贍麗世 罕其倫謫仙昌黎 兼備一身國步艱 危隠遯泉石斯文 己任菁莪長育櫽 括公頌竪此貞珉 於休偉蹟可詔千春
    檀紀四千三百十二(1979)年 己未 三月 哉生魄 晉陽河千秀撰 首陽吳炳根書
    監董族弟 永國 族孫 雲坤 成坤 宰坤 京坤 來坤 允坤 箕坤 炳坤 鍾燮 孫婿朴基洙
  • 비표 : 學生達城徐光南妻/節婦孺人全州李氏紀蹟碑(학생달성서광남처절부유인전주이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운교리 산29-5. 신전마을 어귀.
    【시기】 1959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8cm, 너비 4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人子之於事親 孝不可一日墜地也 人婦之於從夫 節不可一日墜地也 若卓孝高節 通天地亘萬古綱常之大義也 故昔者 漢陳孝婦之賢 褒而獎之 而先儒之編小學也 垂之簡策 以爲來學 肄業之資焉 今於徐門節婦李孺人 亦是見之矣 節婦系出全州 我世宗朝 大宗伯封星山君 諱軾后 學生閏植女 達城君 諱潁後 故淑陵參奉諱相來之子 光南妻也 幼有淑德 閨範 早著 及其嫁也 勢甚貧寒 日出而鋤 日入而織 事親以孝 奄遭舅喪 初終奉祀之節 竭力辦備 使無憾焉 其夫君偶作遠旅 有年不知所向 而婦人之時年二十五也 家貧無依 偏姑在堂 克誠克孝 旨養倍勝 臥病有年 尿屎自擔 藥餌不絶 以天年終 一如前喪 際是 夫君之畢爲 祟風歸家 以委牀九禩 迎醫救療 百方調護 夜禱星斗 願以身代 昊天不恤 竟而崩城 傍觀者恐或就義之慮 而婦人忍痛停悲而言曰 旣失所天 死雖無惜 旋念家世孤孑 無夫君之兄弟 而亦無嗣續耳 罪在三千無後爲大 不如頑命苟存 立嗣續奉宗祀之爲重也 襲斂之具 祭奠之節 莫不致誠 以從姪廷奎爲後 敎之義方 無墜家聲 專勤桑麻 稍起家業 以保守墓 奉祭之無憂焉 秉彛攸同 屢有薦剡 尙未蒙褒貤 惜我惜哉 一日 蘆隱梁斯文仁權氏 以節婦之男弟 吾友化春甫之託囑 介于不佞曰 李孺人至孝貞節 婦孺所共知 而世久則 似或有泯 故其實鐫石於里邊云者 乃廷奎之固請也 感其孝子之誠 誼不敢辭 略敍如右 【풀이】 무릇 아들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안 되고 지어미가 지아비를 섬김에는 정절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아니 된다. 탁효(卓孝)와 고절(高節)은 천지(天地)를 싸잡고 만고(萬古)를 통틀어 강상(綱常)의 가장 큰 의리(義理)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한(漢)나라에서는 진효부(陳孝婦)의 현행(賢行)을 포장(褒獎)하였고, 또 선유(先儒)가 『소학(小學)』을 편집하면서 그 책속에 넣어 후학(後學)들의 공부 자료로 삼았는데 지금 서씨(徐氏) 집안의 절부(節婦) 이유인(李孺人)에게서 또 보게 되었다. 절부는 전주(全州)에서 계출(系出) 하였으니 우리 세종조(世宗朝)의 예조판서 성산군(星山君) 휘 식(軾)의 후예인 학생(學生) 윤식(閏植)의 따님으로 달성군(達城君) 휘 영(穎)의 후손인 고(故) 숙릉참봉(淑陵參奉) 휘 상래(相來)의 아들 광남(光南)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숙덕(淑德)이 있어 규범(閨範: 여자의 범절)이 일찍 드러났는데 출가하여 보니 시가(媤家)의 집안 형편이 심히 가난하여 해가 뜨면 나가서 밭을 매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길쌈을 하여 시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초종(初終: 초상<初喪>에서 종상<終喪>까지)과 제사의 범절을 힘을 다해 마련하여 서운함이 없게 하였다. 그런데 그 부군이 우연히 멀리 출행(出行)을 하여 몇 년이 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부인의 나이는 그때 25세였다. 집은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홀시어머니만 계셨으므로 효성을 지극히 하여 음식 공양과 뜻을 받듬에 갑절 더 잘 하였고 병으로 몇 해를 앓아눕게 되니 대소변 수발을 혼자 도맡아 하면서 약을 끊이지 않았다. 천명으로 돌아가시니 치상(治喪)을 시아버지의 상과 똑같이 하였다. 이때에 부군의 객지 생활이 끝나 풍수(風祟)를 지니고 집으로 돌아와 9년 동안을 병석에 누웠는데 의원을 초빙하여 진료를 하고 백방으로 간호하였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하늘이 무심하여 마침내 붕성(崩城: 남편의 죽음을 뜻함)의 슬픔을 당하니 주위 사람들은 혹 따라 죽지나 않으려나 하고 걱정하였으나 부인은 비통함을 참고 이르기를 “이미 남편을 잃었으니 설사 죽는다 한들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집안이 고단하여 남편의 형제 하나도 없고 또 후사(後嗣)도 없다. 3천 가지 죄목 중에 무후(無後)가 제일 크다 하였다.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라도 후사를 세우고 종사(宗祀)를 받들게 한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염습(殮襲)할 차비와 제전(祭奠)의 범절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한편으론 종질(從姪) 정규(廷奎)로 뒤를 이어 옳은 도리로 가르쳐서 집안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고 근실히 길쌈을 하여 살림을 일으켜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걱정이 없게 하였다. 사람의 이성(彝性)은 같은 바라서 여러차례 천장(薦狀)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포정(褒旌)을 입지 못하였으니 거듭 애석할 일이다. 어느 날 노은(蘆隱) 양사문(梁斯文) 인권씨(仁權氏)가 절부의 남동생이자 나의 벗인 화춘보(化春甫: 보는 아칭<雅稱>임)의 부탁으로 넌지시 나에게 말하기를 “이유인의 지극한 효성과 정절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세대가 오래면 혹 묻혀버릴 수도 있으니 그 사실을 돌에 새기어 마을 언저리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정규의 간청이었다. 효자의 정성에 감동도 되고 정리로도 사양 할 수 없어 간략하나마 위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단기4292(1959)년 기해(己亥) 동지절에 동래 정귀영(鄭貴泳) 짓고, 남원 양성권(梁聖權) 쓰다.
  • 【비표】 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 石亭李公元孝遺蹟碑(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석정이공원효유적비)

    【위치】 백운면 평장리 88. 평장초등학교 앞.
    【시기】 1974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0cm, 너비 60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孔子曰仁者는 必得其壽라하시고 孟子曰脩天爵이면 人爵이 從之라하시니 惟大人君자라야 可以當之而 贈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石亭李公이 是矣라 公諱는 元孝요 字는 舜卿이요 石亭은 其號이니 鎭安之氏는 以寶文閣直提學士諱校로 爲上祖라 當麗季하야 以直見忤하야 貶于鎭安이러니 社爲屋에 隱居求志以終하니 子孫이 仍籍而居焉이라 三傳하야 諱達孫은 號幽溪니 成廟朝에 以文章德行으로 歷宣務郞訓導安岳郡守하다 是生三男하니 曰光俊은 副司果요 曰英俊은 號水軒이니 兩試文科하야 官至副正하고 曰終俊은 安州敎授라 司果公이 有一子하니 諱는 公謹이니 智陵參奉이요 水軒公이 有三子하니 曰仁賢은 號雙尖이니 兩試文科하야 官至司成하며 享靈溪院이요 曰義賢은 官修義副尉요 曰禮賢은 官禦侮將軍矣라 參奉이 無嗣하야 以副尉公第三房諱尙白으로 爲後하니 於公에 八代祖也라 繼而碩德이 相望而贈軍資監正諱揆聖과 贈工曹參議諱龜蓮과 贈漢城判尹諱受森은 曾若祖彌니 皆以公貴로 蒙恩하다 妣는 贈貞夫人通川崔氏니 應泰女요 有婦德이라 正廟甲辰에 生公于平章村하니 天姿純粹하고 誠孝篤至라 六歲에 丁父憂하야 哀痛從禮를 如老成하니 遠近이 咸服이더라 値先世忌辰에 灑掃滌器烹臠等節을 身親莅之하고 求堪輿師하야 得明堂하야 以安數世體魄하고 奉萱闈에 克敬克誠하여 遭艱에 廬墓三年할새 不脫衰不食稻하며 服闋而展省如一하고 備石儀置塋田하야 伊昔未遑을 事多成就하다 讀書에 以三省四勿과 九容九思로 爲座右銘하고 一出場屋은 爲親之故而不得於有司에 卷而懷之하고 沈潛性理之書하야 玩索精微之蘊하야 內外交養에 知行이 竝進하고 於諸子百家에도 亦皆曲暢傍通하야 行去厓異而所守則確如하고 愛人之心은 如陽春之潤物이나 難奪之志는 如泰山之厚重하며 居敬存誠으로 爲立心之本하고 明善行義로 爲進德之方하며 不喜著述而時或應酬文字나 旨遠辭簡하야 華實이 兼全이라는 其氣는 良玉之溫和요 其色은 精金之輝煌이며 不設皐此而學者坌集하니 垢刮葷洗하야 隨症磨礱을 莫不獲河飮而各充하고 有行誼之可尙者는 雖卑幼나 禮貌之하며 稱揚之하고 有四窮之無依者는 助婚資하며 賻喪需하고 立齋修契하며 延師敎幼하다 家雖淸寒이나 座上에 客常滿이요 時以山巾野服으로 吟詠乎山水間하야 多留勝蹟하다 刺史守令이 存問之호대 各恥其或後러라 葵堂鄭相公範朝가 稱以百里樹風에 望閭必式이라하고 兵使李公觀淵이 薦壽하야 陞崇政階하니 皐鶴聞天이 其理不差라 高宗庚午에 卒하니 葬鼠走洞先塋下坤向原할새 輓誄哭奠者는 塡路러라 配는 貞敬夫人全義李氏範羽의 女라 葬水中臺丑坐하다 生四男하니 伯은 鎭龍이니 以孝學으로 累登道剡하고 仲季는 鎭鳳鎭麟이니 早夭하고 叔은 鎭龜니라 噫라 以公邃學廉直으로 闊步雲梯댄 功施普澤流遠이어늘 而擧世相違하야 蟄伏畎畝而止하니 甚可慨야라 然이나 師表鄕省에 警覺來裔하야 興起斯文하니 去彼取此가 尤有光焉이로다 後孫正信聖麟二友가 袖菊史柄淵翁所述家狀하고 訪余하야 責不朽銘이어늘 菊翁之馨風懿德이 望重一方이라 余 不敢以人微로 辭하야 略綴狀文而敍之하고 繼而銘하니 曰 誠深百行之源學篤性理之宗育英材喜施與天爵修人爵從百里樹風式閭前賢已有明徵靈芝焚而香聞寶刀埋而氣騰
    檀紀四千三百七年甲寅捌月之晦에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공자께서 말하기를 “인자(仁者)는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라고 하셨고, 맹자께서 말하기를 “천작(天爵, 덕[德])을 닦으면 인작(人爵)이 따라온다”고 하였다. 오직 대인군자(大人君子)라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데, 증숭정대부동지중추부사(贈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석정(石亭) 이공(李公)이 그런 사람이다. 공의 휘는 원효(元孝)요, 자는 순경(舜卿)이요, 석정(石亭)은 호이다. 진안 이씨(鎭安李氏)는 보문각 직제학사(寶文閣直提學士) 교(校)를 시조로 하는데, 고려 말엽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미움을 받아 진안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 곳에 은거하며 생을 마치니 자손이 이로 인해 적(籍)을 삼고 살게 되었다. 3대를 내려와 달손(達孫)의 호는 유계(幽溪)인데, 성종조(成廟朝)에 문장과 덕행으로 선무랑(宣務郞) 훈도(訓導)와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역임하였다. 이 분이 3남을 낳으니 광준(光俊)은 부사과(副司果)요, 영준(英俊)은 호가 수헌(水軒)으로 문과하여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종준(終俊)은 안주교수(安州敎授)이다. 사과공(司果公)의 아들은 공근(公謹)이니 지릉참봉(智陵參奉)이다. 수헌공(水軒公)은 3남을 낳았는데 인현(仁賢)은 호가 쌍첨(雙尖)이니 문과하여 사성(司成)에 이르고 영계서원(靈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의현(義賢)은 수의부위(修義副尉)요, 예현(禮賢)은 어모장군(禦侮將軍)이다. 참봉은 자식이 없어 부위(副尉公)의 3자 상백(尙白)으로 후사를 잇게 하니 공의 8대조가 된다. 석덕(碩德)으로 이어져 오다가 증 군자감정(贈軍資監正) 규성(揆聖)과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 귀련(龜蓮)과 증 한성판윤(贈漢城判尹) 수삼(受森)은 공의 증조, 조부, 부친이니 모두 공이 벼슬함으로 인해 몽은(蒙恩)을 입었다. 비(騙)는 증정부인(贈貞夫人) 통천 최씨(通川崔氏)로 응태(應泰)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었고, 정조(正祖) 갑진(甲辰)년 평장마을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자(天姿)가 순수하고 성효가 돈독하였다. 6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애통하며 예에 따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으니 원근의 사람이 감복하였다. 조상의 제삿날에는 청소하고 그릇 씻고 조리하는 일을 손수 하였으며, 지사(地師)를 데려와 조상을 명당에 안치하였다. 모친을 받듦에 경(敬)과 성(誠)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여묘 3년 동안 해진 옷을 벗지 않고 쌀을 먹지 않았다. 상을 마친 후에도 성묘하는 일을 그 전과 같이 하였으며, 석의(石儀)를 구비하고 제전(祭田)을 만들어 경황 중에 못했던 일들을 성취하였다. 독서(讀書)함에 삼성사물(三省四勿)과 구용구사(九容九思)로 좌우명을 삼았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한번 보았으나 이루지 못하자 책을 품에 품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경전을 탐독하여 안과 밖으로 사귀고 부양함에 지행(知行)이 나란하였고, 제자백가서에 능통하여 그 궁극에 다다랐다. 규칙을 확고하게 지켰으며,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봄볕이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고한 뜻은 태산의 무거움과 같아 거경존성(居敬存誠)을 마음 세우는 근본으로 하여 선을 밝히고 의를 행하며 덕을 쌓았다. 책을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혹 글을 써서 화답할 때는 간단하나 뜻이 깊은 글을 쓰니 화려함과 실속이 겸전하였다. 기운은 좋은 옥과 같이 온화하며, 얼굴은 정금(精金)과 같이 빛나니 부르지 않아도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더러운 것은 떨쳐버리게 하고, 학문을 연마하여 얻지 못함이 없이 각자 충만하게 하였고, 숭상할 만한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어리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예로 대하며 칭찬하였다. 사궁(四窮)으로 의탁할 곳이 없는 사람은 혼인 자금을 도와 주었으며,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부조하였고, 재(齋)를 세우고 수계(修契)하여 어린아이들을 가르쳤다. 집안은 비록 청한(淸寒)하였지만 항상 손님이 많았으며, 거친 옷을 입고 산수에 나아가 음영(吟詠)하며 명승지를 찾아다녔다. 고을 수령들이 찾아와서 공을 뵙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규당(葵堂) 정범조(鄭範朝)가 “백리에 수풍의 소문이 퍼져 정려에 경의를 표했구나[百里樹風 望閭必式]”라고 칭찬하였으며, 병사(兵使) 이관연(李觀淵)이 수직으로 천거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에 오르니, “학(鶴)이 울면 하늘이 듣는다” 하는 이치가 틀림이 없다. 고종(高宗) 경오(庚午)년에 사망하여, 서주동(鼠走洞) 선영의 아래 곤향원(坤向原)에 장사지내니 만가(輓歌)를 부르고 곡을 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범우(範羽)의 따님인데 수중대(水中臺) 축좌(丑坐)에 장사지냈다. 4남을 낳으니 장남은 진룡(鎭龍)인데 효학(孝學)으로 누차 도에 천거되었고, 차남과 3남은 진봉(鎭鳳)과 진린(鎭麟)이나 요절하였고, 4남은 진구(鎭龜)다. 희(噫)라, 공의 깊은 학문과 염직함으로 벼슬길에 나갔다면, 공(功)을 베풀어 널리 혜택을 주었을 것이지만, 세상과 상위(相違)하여 밭고랑 사이에서 칩거하는데 그쳤으니 심히 안타깝다. 그러나 고을의 사표(師表)가 되어 후인을 깨우치고 유학을 일으켰으니,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함이 더욱 빛나도다. 후손 정신(正信)·성린(聖麟) 두 친구가 국사(菊史) 병연(柄淵) 옹(翁)이 기술한 가장(家狀)을 가지고 내게 찾아와 비석의 명(銘)을 맡겼다. 국사옹의 향기와 아름다운 덕은 존경받는 바이어서, 나는 모자란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을 줄여 서하고 명하기를 “성(誠)의 깊기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 학문이 돈독하기는 성리(性理)의 종장(宗匠)이었네. / 영재를 기르고 기쁘게 베풀어 / 천작(天爵 / 德)을 닦으니 인작(人爵)이 따랐구나. / 백리(百里)에 수풍(樹風)의 소문이 퍼져 정려에 경의를 표했구나 / 먼저 간 현자들이 이미 밝혔도다. / 영지(靈芝)를 사르니 향기가 퍼지고 / 보도(寶刀)를 묻으니 기운이 하늘로 오르네.” 단기 4307(1974)년 갑인(甲寅)년 8월 그믐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