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烈婦孺人昌寧成氏紀蹟碑(열부유인창녕성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55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0cm, 너비 53cm, 두께 27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有韓紀元丙寅에 孺人昌寧成氏-卒于鎭安之蘆村하니 鄕之知不知咸曰烈婦라하야 有爲褒狀者와 有爲立傳者-何其盛哉오 若其紀績碑-今焉始圖는 嗚呼其晩矣라 到此綱紀蔑如之秋에 使此貞節로 不有以紀하면 奸人淫婦之肝膽이 孰有以雷破이요 雖然이나 孺人은 果何修而至此오 年十八에 爲居昌愼公疇範再配하야 奉舅事夫에 孝敬이 備至하고 居無何에 喪夫하야 撫前室子를 如己出이러니 一日에 路上에 暴漢이 欲㥘이어늘 孺人이 慢罵矢拒하고 兼賴行商過救하야 得免歸하야 謂家人曰以婦女로 接他男子手하니 吾何忍生이리요 歸拜九天之良人하야 以訴吾心이라하고 遂三刃其項而死하니 修堂處士鄭鍾曄이 贊曰王凝之妻-爲人牽臂에 引斧斷臂러니 今成氏는 永殞其命하니 其節이 可與氷霜으로 同其皎潔이라하니 吾於此에 亦無異辭焉하노라 愼公은 襄烈公以衷의 后요 同敦寧鎰晟의 子也오 孺人은 文景公獨谷石磷之后也라 沒後에 鄕儒全載敏 梁基柱李炳淵吳基烈諸公의 特書烈婦而竪于通街하고 今爲之紀蹟者는 愼氏擧宗而來請文者亮晟景範은 愼門季士而宰哲이 亦與焉하니 於孺人에 孫也라 余爲遣宰哲하야 乞銘于裕齋宋公基冕하니 其銘에 曰 狂瀾이 滔天하고 邪說이 鴟張이라 掃廉蕩耻에 禮敬이 粃糠이라 嗟嗟烈婦-獨任綱常이라 突遇惡漢에 獲救行商이라 適耶偶耶아 鑑自彼蒼이라 猶抱羞惡-寔天之良이라 刃頸昭義-凜若秋霜이라 歸對吾夫에 夫曰吾婦로다 峙其碑之에 鄕士倡首로다 疇其尸之에 宗黨克終이로다 孰芳不彰이며 孰媺不崇이리요 屹彼片石이 日星萬歷이로다
    西紀一九五五年 乙未二月上澣
    全義 李炳殷 撰
    【풀이】 1926년 병인에 유인 창녕 성씨가 진안 노촌에서 돌아가시니, 향리에서 모든 사람이 열부라 하여 포상을 위하여 서장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말로 전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찌 성하지 않으리오. 그 기적비를 이제 비로소 세우고 전하니 슬프고, 늦은 감이 있도다. 기강이 없어져 가는 때에 굳은 절개로 하여금 기강을 세우지 아니하면, 간사한 사람과 음란한 여자의 속마음을 누가 깨뜨릴 것인가? 유인은 과연 어떻게 수신을 하여 이렇게 됐으리오. 나이 18세에 거창 신공 주범의 재배가 되어, 시아버지를 받들고 남편을 섬기어 효도하고 공경함이 갖추어져 있더니, 혼인한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의 상을 당하여 전실의 아들을 자기가 낳은 친아들과 같이 하였다. 어느 날 길가에서 흉악한 사람이 겁탈하고자 하거늘 유인이 엄하게 꾸짖어 똑바로 막고, 마침 지나가던 행인의 구원에 힘입어 화를 면하고 집으로 돌아와 집안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부녀자로 다른 남자의 손을 잡으니 내가 어찌 참고 살으리오. 구천의 남편에게 돌아가 내 마음을 호소하리라 하고 드디어 그 목에 세 번 칼로 찔러 죽으니, 수당처사 정종엽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왕응지의 아내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팔을 끌어당김에 도끼로 자기의 팔을 끊어버리더니, 지금 성씨는 영원히 죽어버리니, 그 절개가 얼음과 서리 같으므로 그 희고 맑음이 같다. 내가 이에 또한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더라. 신공은 양렬공 이충의 후손이요, 동돈녕 익성의 아들이다. 유인은 문경공 독곡 석린의 후손이다. 돌아가신 후에 고향의 선비 전재민, 양기주, 이병연, 오기열 제공이 특별히 열부라 써서 큰길가에 세우고, 이제 기적을 위하는 자는 신씨의 여러 종친이요, 글을 청하러 오는 자는 양성 경범이니 신문중의 수재 선비이며, 재철이 또한 같으니 유인의 손이다. 내가 재철를 보내어 유재 송공 기면에게 명(銘)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그 명에 이르기를 “사나운 물결이 하늘까지 창일하고 간악한 사람들이 말을 속이는지라 / 청렴도 쓸어서 버리고 치욕도 없애 버리니 예의와 경건이 빈쭉정이로 변하였다. / 슬프고 슬프다. 열부여 삼강과 오상을 홀로 맡았도다. / 뜻밖에 악한을 만났으나 행상이 구해주었도다. / 마침이랴, 우연이랴 스스로 저 하늘에 비치더라. / 오히려 자기의 나쁜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나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 이는 저 하늘의 남편 때문이라. / 목을 칼로 찌르고 의리를 밝게 하니 추상(秋霜) 같은 차가움이다. / 돌아가 나의 남편을 대함에 남편이 말하기를 과연 나의 부인이로다. / 그 고개에 비석을 세우니 고향 선비들이 인도하였도다. / 누가 그것을 주관했으리요. 종당(宗黨, 일가)이 마쳤도다. / 누가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아니하며 누가 그 착함을 높이지 않으리오. / 높은 저 비석이 해와 별처럼 만년을 지내리로다.” 서기 1955년 을미(乙未) 2월 상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 찬(撰)
  • 【위치】 백운면 노촌리 671. 영모정 서쪽 신의련효자각 옆.
    【시기】 1968년
    【형태】 높이 140cm, 너비 48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愼公俊範의 配具氏之卓孝者著于家而鄕爲之褒나 然이나 其子鏞八이 恐或世久不傳之爲不孝하야 竪碑閭里하야 以表紀蹟할새 使貴泳之不文으로 文之어늘 乃不顧不文은 而同居一鄕塾世交而然耶아 辭不獲己하야 按孺狀也에 具氏籍은 綾城이요 三重大匡檢校諱存裕의 后요 宗仁의 女라 孺人이 自幼로 異凡하야 在家孝親而女工諸節을 無所不能하니 族戚鄰里莫不稱其善閨範이러니 及歸其嫁에 家貧親老하야 菽水難繼라 與夫君으로 共挽鹿車而或鋤或傭하고 桑麻爲業하니 自是로 一無供養之憂러라 舅氏平日所嗜者는 川魚而雖隆冬極寒이라도 叩永求魚하야 三供進饌에 川漁不絶하고 若有捐攝則致其憂하야 問何適口而進其食飮하고 竭誠用藥하고 夜禱星斗하야 見效以後에 己러라 畢天年終也에 哀毁過度하고 送終奉凡之節을 不顧家勢而極其誠하고 葬祭를 一遵禮制하야 使無憾焉하고 至於奉君子之道에 承順無違하야 一動一靜이 不下於古之賢媛淑女之懿行耳러라 嗚呼라 風潮日變하고 綱倫이 頹敗而子孝其親도 斯世罕聞이어늘 況婦孝其舅也리요 孝當旌褒而今無國典하니 可恨이로다 俊範은 居昌后人이니 襄烈公諱以衷美溪諱義連은 其顯祖也라 鏞八이 介吾友愼吉晟하야 要以刻碑之辭어늘 遂書如此云이로다
    大韓光復戊申天中節東萊鄭貴泳述
    【풀이】 신공(愼公) 준범(俊範)의 처 구씨(具氏)의 탁이한 효성은 집안에서 드러나고 고을에서 포상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용팔(鏞八)이 혹시 세월이 오래되어 전해지지 못하면 불효가 될까 두려워하여 마을 앞에 비를 세우고 사적을 나 귀영(貴泳)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달라고 하였다. 나는 문장이 아니지만 불고(不顧)하는 것은 같은 고향에 살면서 같이 배우고 세교가 있는 까닭에 사양치 못함이다. 유장(孺狀)을 살펴보니 구씨(具氏)의 본관은 능성(綾城)이요 삼중대광검교(三重大匡檢校) 휘(諱) 존유(存裕)의 후손 종인(宗仁)의 딸이다. 유인(孺人)이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아니하여 집에서부터 효친하고 길쌈과 바느질 솜씨를 익혀 능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족척(族戚)과 마을 사람이 그 규범(閨範)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출가하여 보니 시집은 구차하고 시부모가 있으나 숙수(菽水 / 험한 음식)일망정 끼니를 대기가 어려웠다. 지아비와 더불어 조그마한 수레를 끌고 혹은 호미질, 혹은 품팔이하며 누에치고 삼베 짜며 가업에 힘쓰니 이로부터 음식을 올림에 조금도 걱정이 없었다. 시아비는 평소에 좋아하는 것이 물고기라. 비록 엄동극한이라도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잡아 세끼 반찬으로 물고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만일 자시지 않으면 그 연유를 물어 입맛에 맞도록 진지를 올렸다. 정성을 다하여 약을 끓여 올리고 밤에는 북두칠성에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으나 결국 천수를 다하여 임종함에 슬퍼함이 법도를 넘고, 장례 절차는 가세를 돌아보지 않고 극진한 정성으로 하였으며, 예제를 지켜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지아비 섬기는 도리에 따르고 거스름이 없어 일동 일정(一動一靜)이 옛적의 어진 숙녀의 아름다운 행실에 비하여 못하지 않았다. 오호(嗚呼)라! 세상의 풍조가 날로 변하고 강륜(綱倫)이 퇴폐하여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함도 이 세대에는 듣기 어렵거늘, 하물며 며느리의 시부에 대한 효성이리요. 한되도다. 준범(俊範)은 거창(居昌)이 본관이니 양렬공(襄烈公) 휘(諱) 이충(以衷), 미계(美溪) 휘(諱) 의련(義連)은 그의 저명한 선조이다. 용팔(鏞八)이 내 벗 신길성(愼吉晟)으로 하여금 비문을 부탁하거늘 이처럼 쓰노라. 대한광복(大韓光復) 무신( 戊申) 천중절(天中節)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술(述)
  • 【위치】 백운면 평장리 124-1. 평노길 노변.
    【시기】 불명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0cm, 너비 42cm.
    【개요】 이곳에는 본디 1758년까지는 오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후 어느 때인가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비문을 보아 알 수 있다. 정자 이름을 오암정(五巖亭)이라 한 것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가 5개 있었기 때문이다.

    【비문】 鎭安李君廷鵬 作五巖亭於平章坪 將與其村秀子弟 讀書于其中 徒步五百里 來請余文 盛言居觀之勝 記余少時 登赤裳之山 見雲際縹渺 雙尖如馬耳者曰 鎭之望也 不知所謂五巖者 去馬耳幾里 余老矣 無由一臨眺是亭 徒想見其星出碁置於淸川大野之間也 然李君之求余言 豈爲記其形勝而已 盖余聞之 五者河圖之中數 在天爲五星 在地爲五行 而鍾其精秀者爲人 其賦於性 則仁義禮智信 叙於倫 則父子之親 君臣之義 夫婦之別 長幼之序 朋友之信 著於事 則貌之恭 言之從 視之明 聽之聰 思之睿也 今巖之數 偶與之符 豈天地之理 自然形見於融峙之間耶 李君嘗讀小學矣 小學是做人底樣子 而人之所以爲人 惟是敬數者而已 夫子論忠信篤敬以爲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余於登是亭讀是書者 深以是望焉 辛亥二月淸明前一日 寒泉病叟書
    右陶菴李先生 爲門人五巖李公作也 甲戌冬 余宰任實 任與鎭 隣邑也 李公數相訪 說先生敎人節度甚熟 一日袖此文來示之 相與讀之 怳然若復承謦欬於函丈之間也 遂敬書而刻之 使揭于亭 戊寅季夏 後學西河任聖周謹識
    【풀이】 진안(鎭安)의 이군(李君) 정붕(廷鵬)이 평장평(平章坪)에 오암정(五巖亭)을 짓고, 장차 마을의 뛰어난 자제들과 함께 그 곳에서 글을 읽기로 작정하고, 5백 리 길을 걸어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면서 푸짐하게 경치가 뛰어남을 자랑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소시에 적상산(赤裳山)에 올라 구름 사이로 아득히 말의 귀처럼 쌍으로 치솟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진안의 명물이구나!” 하였는데, 이른바 오암(五巖)이란 것이 마이산에서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나도 늙어서 이 정자에 한번 올라가 볼 길은 없고, 그저 맑은 시내와 큰 들판 사이에 별처럼 나열하고 바둑알처럼 벌려진 산천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군이 나의 글을 청하는 취지가 어찌 그 산천의 경개만 기록하는 데 있겠는가? 대체로 내가 듣건대, 오(五)란 것은 하도(河圖 : 옛날 복희씨[伏羲氏] 때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던 도형[圖形]. 낙서[洛書]와 함께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다)의 한 가운데 숫자로, 하늘에 있어서는 오성(五星)이 되고 땅에 있어서는 오행(五行)이 되는데, 그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 사람이 되고, 그 성질로 부여받는 것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며, 윤기(倫紀)로 말하자면 부자의 친(親), 군신의 의(義), 부부의 별(別), 장유(長幼)의 서(序), 붕우의 신(信)이고, 행위로 나타난 것은 모습의 온공스러움[貌之恭], 말의 조용함[言之從], 관찰의 밝음[視之明], 들음의 분명함[聽之聰], 생각의 슬기로움[思之睿]이다. 지금 바위의 수효가 우연히 위의 숫자와 부합하는데, 어쩌면 천지의 이치가 자연히 산수 사이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군은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었다. 소학은 사람의 모양을 만드는 책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직 이 경(敬) 등 몇 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부자(夫子, 공자를 지칭함)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섰을 때는 남의 앞에 나란히 섰는가를 보고, 수레에 있을 때는 굴대에 기대는 것을 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정자에 올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 점에 유의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신해(辛亥, 영조 7, 1731) 2월 청명전(淸明前) 1일 한천병수(寒泉病璟)가 쓰다.
    위는 도암(陶菴) 이선생(李先生, 이재[李縡])이 문인인 오암(五巖) 이선생(李先生)을 위하여 지어 준 글이다. 갑술년(甲戌年) 겨울에 나는 임실(任實)을 맡고 있었는데, 임실은 진안의 이웃 고을이다. 이공(李公)이 자주 찾아와서 선생의 사람 가르치는 법도를 매우 자상하게 말하였는데, 하루는 이 글을 가지고 와서 내놓고 함께 읽으니, 어렴풋이 사석간(師席間)에 선생님의 기침소리를 다시 듣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이 글을 경건하게 써 각하여 정자에 걸게 하였다. 무인(戊寅, 1758) 계하(季夏)에 후학(後學) 서하(西河) 임성주(任聖周)가 삼가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