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만휴당 양하룡 유허비(晩休堂梁夏龍遺墟碑)
운영자 23-12-22 14:20 89 hit
【비표】 晩休堂梁先生遺墟碑(만휴당양선생유허비)

【위치】 백운면 노촌리 720. 하미마을회관 못미처 250m 지점.
【시기】 1960년
【형태】 높이 150cm, 너비 55cm, 두께 16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此故晩休堂梁先生杖屨之所也 公素生長於南原之竹谷而其遷于鎭安之蘆溪 以山水奇而靜養宜也 方其遷之之日 崔養黙 陳德洞 梁松齋 尹梅軒 諸賢迭爲歌頌而送之曰 吾道北矣 以生屛時居同谷道相合也 生而英邁 不群惟學是力其居廬也 膝處坎而草樹不花孝之出於人 有如是者方弱冠時蔚有聲譽 以親命應進士擧累而不中 執友盧持平學夏者 累致書 以歛華就實勸之遂不應擧就權遂菴文純公之門專心篤學期以成就 鄭丈巖一見器之相尙以道二十餘載蒙薦階嘉善後又腏 享于駬山廟永慕祠 粱氏南原巨姓也 兵部郎中遯菴諱能讓 麗之世顯 祖有諱堅進賢館大提學諱俊 成均祭酒諱東弼 吏曹判書諱克信 文科縣監其七世以上也 高祖諱煜 成均生員 曾祖諱以寬 通德郞 祖諱擎日 成均生員 考諱禹鼎 妣東萊鄭氏 配居昌愼氏 顯泰顯重其二男也 道海宗海滿海其三孫也 公所著 經學要旨蒙學指南及家訓遺稿四冊 不幸入于火有口傳萬東廟詩如今始到華陽洞後見大明天日光而己 後孫以無闡發其潛德世以爲恨將以碑于溪上使人知遺墟之尙存亦見其追遠之至矣 聖權以余之相善也 願有以序之書 大槩如此素之 以銘曰 有溪淸深 有山峻極 君子棲遲 可欲可濯 珠雖藏淵 光輝乃發 賢者遯跡 名聲未沒 今云己古 孚人者德 蒙資嘉善 以其經術 妥享駬山 非賢曷克 仁人所憩 草木猶惜 而其遺址 豈忍視忽 我有銘詞 崇碑斯立 垂之萬世 傳之無極
世庚子五月上澣全義李炳殷撰
【풀이】 이곳은 만휴당(晩休堂) 양 선생(梁先生)의 장구지소(杖爐之所)이다. 공은 남원(南原)의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나, 산수가 빼어나고 정양(靜養)하기 좋은 진안의 노계(蘆溪)로 이거하였다. 이거하던 날 최양묵(崔養默), 진덕동(陳德洞), 양송재(梁松齋), 윤회헌(尹梅軒) 제현(諸賢)이 노래를 부르며 송별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道)가 북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은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동네에 살며 도가 상합했던 까닭이다. 공은 나면서 영매(英邁)하여 또래들과 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시묘할 때는 무릎 닿았던 자리에 구덩이가 생겨 풀이 자라지 않았으니, 효성의 출중함이 이와 같았다. 약관의 나이에 칭송하는 소리가 많아 부모의 명에 의해 진사시에 나아갔으나 입격(入格)하지는 못하였다. 뜻이 통하는 지평(持平) 노학하(盧學夏)는 여러 번 글을 보내 꽃이 피었으니 열매를 거두라고 권하였지만 응하지 않았고, 권수암(權遂菴) 문순공(文純公)의 문하에서 전심(專心)으로 학문을 하여 성취하였다. 정장암(鄭丈巖)이 공을 한 번 보고 국량을 알아 20년간을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으며, 천거를 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후에 이산묘 영모사(鎖山廟永慕祠)에 배향되었다. 양씨는 남원의 거성이다. 병부낭중(部郎中) 둔암(遯菴) 능양(能讓)은 고려에 두드러졌던 조상이며, 견(堅)은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요, 준(俊)은 성균관 좨주(成均祭酒), 동필(東弼)은 이조판서(吏曹判書)요, 극신(克信)은 문과로 현감인데 모두 공의 7대조 이상이다. 고조(高祖)는 욱(煜)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증조(曾祖)는 이관(以寬)으로 통덕랑(通德郞)이요, 조부는 경일(擎日)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고, 고(考)는 우정(禹鼎)이다. 비(妣)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며, 배(配)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고, 현태(顯泰)와 현중(顯重)은 아들이다. 도해(道海)·종해(宗海)·만해(滿海)는 손자이다. 공의 경학요지(經學要旨)는 학문을 계몽하는 지침으로 두드러졌다. 가훈과 유고 4책은 불행히도 화재로 불타 버렸고, 구전하는 《만동묘시(萬東廟詩)》에 즉, “이제 처음으로 화양동(華陽洞)에 이르니 비로소 대명(大明)의 천일(天日) 빛남을 보겠도다”가 있을 뿐이다. 아주 환한 하늘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보는 듯하다. 후손들이 공의 숨겨진 덕을 천양(闡揚)할 길이 없음을 대대로 한으로 여겼더니, 장차 계곡의 위에 이 비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유적지를 알게 하고, 또한 추원(追遠)하게 하려 한다. 성권(聖權)은 나와 잘 지내는 사이로 글의 서(序)를 써주기 바랬다. 그 대략은 이와 같으니 명하기를 “계곡물은 맑고 깊으며 산은 높이 뻗쳐 있어 / 가히 군자가 깃들어 살 만하구나. / 깊은 못 속에 구슬을 감추어도 마침내 빛을 발하나니 / 현자(賢者)의 둔적(遯跡)한 명성은 민몰되지 않는구나. / 지금 와서 옛사람의 덕을 말하노니 / 경학에 뛰어나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내려졌고 / 이산묘(鎖山廟)에 배향되었으니 현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러겠는가. / 어진 사람은 쉬어 가고 초목도 애석해 한다. / 유적지가 소홀하게 되는 것을 어찌 참을 수 있으랴 / 나는 명을 하여 이렇게 비를 세우는 바이니 / 만세에 드리워지고 무극(無極)토록 전하라.” 경자(庚子)년 5월 상한(上澣) 전의 이병은(全義李炳殷)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