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만육 최양 둔적유허비(晩六崔瀁遯跡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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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忠翼公晩六崔先生瀁遯跡遺墟碑(충익공만육최선생양둔적유허비)

【위치】 백운면 반송리 360-2. 반송마을앞 백장로 큰길가.
【시기】 1871년
【형태】 구남각 내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60cm.
【개요】 이 비는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부상서대제학에 이른 만육(晩六) 최양(崔瀁)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후손과 인근의 주민들에 의해서 고종 8년(1871)에 건립되었다. 노사 기정진(盧沙奇正鎭)이 글을 지었으며 구남각(龜南閣) 내에 세워져 있다.

【비문】 晩六崔公 於我 聖祖 有嚴陵之契 幸宮一進 世疑之犯座客星 然公罔僕之義 又不但嚴之高尙其事 故尙論者又或以爲 伯夷嚴光合爲一人 此其遯跡之地 權近誌文所稱中臺山者是也 後移鳳崗墓下以終 中臺之山不平 先生之風與之俱長 何以碑爲 碑焉者 雲仍私也 來求銘者 崔氏二秀鳳翊鍾大 銘曰 遯入麗末 壬申前乎 社屋曾不幾旬 瓦後鳳崗 自玆徙倚 考終于 寶籙三十三年甲辰 碑于聖上辛未之春 嗚呼首尾未五百者二十年
幸州奇正鎭撰
【풀이】 만육(晩六) 최공(崔公)은 우리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리킨 말)에게는 엄자릉(嚴子陵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어릴 때 친구인 엄광[嚴光]의 자가 자릉이다. 광무제가 천하를 얻은 뒤 벼슬길에 나와달라고 불렀으나, 그는 나오지 않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이나 하면서 생을 마쳤다)과 같은 우의(友誼)가 있었다. 행궁(幸宮, 행행할 때 거처하는 궁궐)에 한번 입궐하니 세상에서는 어좌(御座)를 범한 객성(客星)에 비기었다. 그러나 공의 망복(罔僕, 신하가 되지 않음)한 절의는 엄자릉의 그 일을 높이 추켜세우려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상론자(尙論者, 평론자와 같은 뜻)는 혹 이르기를 “백이(伯夷)와 엄광(嚴光)을 합쳐서 한 사람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곳은 그 분이 자취를 숨기고 살던 곳이니, 권근(權近, 호는 양촌[陽村])의 지문(誌文)에서 칭한 바 중대산(中臺山)이 바로 이곳이다. 뒤에는 봉강(鳳崗)의 묘소 아래로 옮겨와 살다가 생을 마쳤다. 중대산은 펼쳐질 수 없으니 선생의 풍도(風度)와 수명을 같이 할 텐데 비는 무엇을 하려 세울까? 비를 세운 것은 자손이 사사로이 한 것이고, 나를 찾아와서 명(銘)을 부탁한 사람은 최씨의 두 수재(秀才)인 봉익(鳳翊)과 종대(鍾大)이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 숨었다니 / 임신년(壬申年 :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임신년[공민왕 4, 1392] 7월 17일 고려를 멸하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이전이던가 / 사직이 망한 지 얼마 후이라네. / 와해(瓦解 : 기와가 부서지듯 산산조각이 나다. 생활이 그런 것인지 혹 죽음을 말함인지는 미상임)한 후일의 봉강(鳳崗)은 / 이 곳에서 이사하여 살았던 곳이라오. / 보록(寶擁 : 임금의 역년[歷年]을 높혀서 부른 말) 33년 갑진(甲辰 : 조선 개국 33년째인 세종 6년 갑진[甲辰]을 말함인 듯)에 고종(考終)하여 / 성상의 신미년(辛未年 : 고종 8년 신미[辛未]를 말함인 듯 하나 연수[年數]는 맞지 않음) 봄에 비를 세우니 / 아! 전후로 5백 년에서 20년이 모자라는구려.” 행주(幸州) 기정진(奇正鎭)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