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서씨 절부 전주이씨 기적비(徐氏節婦李孺人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69 hit
비표 : 學生達城徐光南妻/節婦孺人全州李氏紀蹟碑(학생달성서광남처절부유인전주이씨기적비)

【위치】 백운면 운교리 산29-5. 신전마을 어귀.
【시기】 1959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8cm, 너비 4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人子之於事親 孝不可一日墜地也 人婦之於從夫 節不可一日墜地也 若卓孝高節 通天地亘萬古綱常之大義也 故昔者 漢陳孝婦之賢 褒而獎之 而先儒之編小學也 垂之簡策 以爲來學 肄業之資焉 今於徐門節婦李孺人 亦是見之矣 節婦系出全州 我世宗朝 大宗伯封星山君 諱軾后 學生閏植女 達城君 諱潁後 故淑陵參奉諱相來之子 光南妻也 幼有淑德 閨範 早著 及其嫁也 勢甚貧寒 日出而鋤 日入而織 事親以孝 奄遭舅喪 初終奉祀之節 竭力辦備 使無憾焉 其夫君偶作遠旅 有年不知所向 而婦人之時年二十五也 家貧無依 偏姑在堂 克誠克孝 旨養倍勝 臥病有年 尿屎自擔 藥餌不絶 以天年終 一如前喪 際是 夫君之畢爲 祟風歸家 以委牀九禩 迎醫救療 百方調護 夜禱星斗 願以身代 昊天不恤 竟而崩城 傍觀者恐或就義之慮 而婦人忍痛停悲而言曰 旣失所天 死雖無惜 旋念家世孤孑 無夫君之兄弟 而亦無嗣續耳 罪在三千無後爲大 不如頑命苟存 立嗣續奉宗祀之爲重也 襲斂之具 祭奠之節 莫不致誠 以從姪廷奎爲後 敎之義方 無墜家聲 專勤桑麻 稍起家業 以保守墓 奉祭之無憂焉 秉彛攸同 屢有薦剡 尙未蒙褒貤 惜我惜哉 一日 蘆隱梁斯文仁權氏 以節婦之男弟 吾友化春甫之託囑 介于不佞曰 李孺人至孝貞節 婦孺所共知 而世久則 似或有泯 故其實鐫石於里邊云者 乃廷奎之固請也 感其孝子之誠 誼不敢辭 略敍如右 【풀이】 무릇 아들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안 되고 지어미가 지아비를 섬김에는 정절을 하루라도 떨어뜨려서는 아니 된다. 탁효(卓孝)와 고절(高節)은 천지(天地)를 싸잡고 만고(萬古)를 통틀어 강상(綱常)의 가장 큰 의리(義理)이다. 그러기 때문에 옛날 한(漢)나라에서는 진효부(陳孝婦)의 현행(賢行)을 포장(褒獎)하였고, 또 선유(先儒)가 『소학(小學)』을 편집하면서 그 책속에 넣어 후학(後學)들의 공부 자료로 삼았는데 지금 서씨(徐氏) 집안의 절부(節婦) 이유인(李孺人)에게서 또 보게 되었다. 절부는 전주(全州)에서 계출(系出) 하였으니 우리 세종조(世宗朝)의 예조판서 성산군(星山君) 휘 식(軾)의 후예인 학생(學生) 윤식(閏植)의 따님으로 달성군(達城君) 휘 영(穎)의 후손인 고(故) 숙릉참봉(淑陵參奉) 휘 상래(相來)의 아들 광남(光南)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숙덕(淑德)이 있어 규범(閨範: 여자의 범절)이 일찍 드러났는데 출가하여 보니 시가(媤家)의 집안 형편이 심히 가난하여 해가 뜨면 나가서 밭을 매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길쌈을 하여 시부모를 효성으로 모시고 시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초종(初終: 초상<初喪>에서 종상<終喪>까지)과 제사의 범절을 힘을 다해 마련하여 서운함이 없게 하였다. 그런데 그 부군이 우연히 멀리 출행(出行)을 하여 몇 년이 되도록 행방을 알 수 없었는데 부인의 나이는 그때 25세였다. 집은 가난하여 의지할 곳이 없고 홀시어머니만 계셨으므로 효성을 지극히 하여 음식 공양과 뜻을 받듬에 갑절 더 잘 하였고 병으로 몇 해를 앓아눕게 되니 대소변 수발을 혼자 도맡아 하면서 약을 끊이지 않았다. 천명으로 돌아가시니 치상(治喪)을 시아버지의 상과 똑같이 하였다. 이때에 부군의 객지 생활이 끝나 풍수(風祟)를 지니고 집으로 돌아와 9년 동안을 병석에 누웠는데 의원을 초빙하여 진료를 하고 백방으로 간호하였으며 밤이면 북두칠성에 빌어 자신으로 대신하게 해주기를 원하였으나 하늘이 무심하여 마침내 붕성(崩城: 남편의 죽음을 뜻함)의 슬픔을 당하니 주위 사람들은 혹 따라 죽지나 않으려나 하고 걱정하였으나 부인은 비통함을 참고 이르기를 “이미 남편을 잃었으니 설사 죽는다 한들 아까울 것이 없겠으나 한편 생각해보면 집안이 고단하여 남편의 형제 하나도 없고 또 후사(後嗣)도 없다. 3천 가지 죄목 중에 무후(無後)가 제일 크다 하였다. 모진 목숨 구차히 살아서라도 후사를 세우고 종사(宗祀)를 받들게 한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염습(殮襲)할 차비와 제전(祭奠)의 범절에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한편으론 종질(從姪) 정규(廷奎)로 뒤를 이어 옳은 도리로 가르쳐서 집안 명성(名聲)을 떨어뜨리지 못하게 하고 근실히 길쌈을 하여 살림을 일으켜 묘소를 지키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걱정이 없게 하였다. 사람의 이성(彝性)은 같은 바라서 여러차례 천장(薦狀)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포정(褒旌)을 입지 못하였으니 거듭 애석할 일이다. 어느 날 노은(蘆隱) 양사문(梁斯文) 인권씨(仁權氏)가 절부의 남동생이자 나의 벗인 화춘보(化春甫: 보는 아칭<雅稱>임)의 부탁으로 넌지시 나에게 말하기를 “이유인의 지극한 효성과 정절은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세대가 오래면 혹 묻혀버릴 수도 있으니 그 사실을 돌에 새기어 마을 언저리에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정규의 간청이었다. 효자의 정성에 감동도 되고 정리로도 사양 할 수 없어 간략하나마 위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단기4292(1959)년 기해(己亥) 동지절에 동래 정귀영(鄭貴泳) 짓고, 남원 양성권(梁聖權)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