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오암정기 비(五巖亭記碑)
운영자 23-12-22 14:20 65 hit
【위치】 백운면 평장리 124-1. 평노길 노변.
【시기】 불명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90cm, 너비 42cm.
【개요】 이곳에는 본디 1758년까지는 오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이후 어느 때인가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비문을 보아 알 수 있다. 정자 이름을 오암정(五巖亭)이라 한 것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가 5개 있었기 때문이다.

【비문】 鎭安李君廷鵬 作五巖亭於平章坪 將與其村秀子弟 讀書于其中 徒步五百里 來請余文 盛言居觀之勝 記余少時 登赤裳之山 見雲際縹渺 雙尖如馬耳者曰 鎭之望也 不知所謂五巖者 去馬耳幾里 余老矣 無由一臨眺是亭 徒想見其星出碁置於淸川大野之間也 然李君之求余言 豈爲記其形勝而已 盖余聞之 五者河圖之中數 在天爲五星 在地爲五行 而鍾其精秀者爲人 其賦於性 則仁義禮智信 叙於倫 則父子之親 君臣之義 夫婦之別 長幼之序 朋友之信 著於事 則貌之恭 言之從 視之明 聽之聰 思之睿也 今巖之數 偶與之符 豈天地之理 自然形見於融峙之間耶 李君嘗讀小學矣 小學是做人底樣子 而人之所以爲人 惟是敬數者而已 夫子論忠信篤敬以爲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 余於登是亭讀是書者 深以是望焉 辛亥二月淸明前一日 寒泉病叟書
右陶菴李先生 爲門人五巖李公作也 甲戌冬 余宰任實 任與鎭 隣邑也 李公數相訪 說先生敎人節度甚熟 一日袖此文來示之 相與讀之 怳然若復承謦欬於函丈之間也 遂敬書而刻之 使揭于亭 戊寅季夏 後學西河任聖周謹識
【풀이】 진안(鎭安)의 이군(李君) 정붕(廷鵬)이 평장평(平章坪)에 오암정(五巖亭)을 짓고, 장차 마을의 뛰어난 자제들과 함께 그 곳에서 글을 읽기로 작정하고, 5백 리 길을 걸어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면서 푸짐하게 경치가 뛰어남을 자랑하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소시에 적상산(赤裳山)에 올라 구름 사이로 아득히 말의 귀처럼 쌍으로 치솟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진안의 명물이구나!” 하였는데, 이른바 오암(五巖)이란 것이 마이산에서 몇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였다. 이제는 나도 늙어서 이 정자에 한번 올라가 볼 길은 없고, 그저 맑은 시내와 큰 들판 사이에 별처럼 나열하고 바둑알처럼 벌려진 산천을 상상해 볼 뿐이다. 그러나 이군이 나의 글을 청하는 취지가 어찌 그 산천의 경개만 기록하는 데 있겠는가? 대체로 내가 듣건대, 오(五)란 것은 하도(河圖 : 옛날 복희씨[伏羲氏] 때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용마의 등에 그려져 있던 도형[圖形]. 낙서[洛書]와 함께 역괘[易卦]의 원리가 되었다)의 한 가운데 숫자로, 하늘에 있어서는 오성(五星)이 되고 땅에 있어서는 오행(五行)이 되는데, 그 정기를 받아 태어난 것이 사람이 되고, 그 성질로 부여받는 것이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며, 윤기(倫紀)로 말하자면 부자의 친(親), 군신의 의(義), 부부의 별(別), 장유(長幼)의 서(序), 붕우의 신(信)이고, 행위로 나타난 것은 모습의 온공스러움[貌之恭], 말의 조용함[言之從], 관찰의 밝음[視之明], 들음의 분명함[聽之聰], 생각의 슬기로움[思之睿]이다. 지금 바위의 수효가 우연히 위의 숫자와 부합하는데, 어쩌면 천지의 이치가 자연히 산수 사이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군은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었다. 소학은 사람의 모양을 만드는 책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직 이 경(敬) 등 몇 가지에 있을 따름이다. 부자(夫子, 공자를 지칭함)가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섰을 때는 남의 앞에 나란히 섰는가를 보고, 수레에 있을 때는 굴대에 기대는 것을 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정자에 올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 점에 유의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신해(辛亥, 영조 7, 1731) 2월 청명전(淸明前) 1일 한천병수(寒泉病璟)가 쓰다.
위는 도암(陶菴) 이선생(李先生, 이재[李縡])이 문인인 오암(五巖) 이선생(李先生)을 위하여 지어 준 글이다. 갑술년(甲戌年) 겨울에 나는 임실(任實)을 맡고 있었는데, 임실은 진안의 이웃 고을이다. 이공(李公)이 자주 찾아와서 선생의 사람 가르치는 법도를 매우 자상하게 말하였는데, 하루는 이 글을 가지고 와서 내놓고 함께 읽으니, 어렴풋이 사석간(師席間)에 선생님의 기침소리를 다시 듣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이 글을 경건하게 써 각하여 정자에 걸게 하였다. 무인(戊寅, 1758) 계하(季夏)에 후학(後學) 서하(西河) 임성주(任聖周)가 삼가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