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主事前面長白南虎不忘碑(주사전면장백남호불망비)

    【위치】 부귀면 거석리 787. 부귀면사무소 마당.
    【시기】 1936년
    【형태】 비갓이 있다. 비신 높이 150cm, 너비 40cm, 두께 16cm.
    【개요】 이 비는 당초 신정삼거리에 있다가 수년 전 부귀면사무소 마당으로 옮겨졌다. 비의 전면 우측에는 莅面十春 賴及千人 設校育英 捐金恤貧 좌측에는 執務勤勉 行政信仁 立石頌德 百世維新이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면장을 맡아 10년, 천인에게 혜택을 주었다. 학교를 설립 육영을 하고, 사재를 털어 가난을 구휼하였다. 집무는 부지런하고, 행정은 믿음과 인(仁)을 위주로 하여, 비를 세워 송덕하니 백세(百世)에 새로울 것이다.”라는 뜻이다.
  • 【비표】 全州林應煥積善碑(절충임응환적선비)

    【위치】 부귀면 하수항길 6. 민가 내 담장 안.
    【시기】 동치 6년(1867)년 정묘(丁卯)
    【형태】 비신(碑身) 높이 113cm, 너비 38cm, 두께 16cm.
    【개요】 같은 집 울 안에 임응진의 비와 나란히 서 있다. 임응환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동리 사람들에 의하면 이 분들이 예전에 전주쪽으로 가는 길을 잘 딲고 정비했다고 한다. 비의 후면에는 同治 6年(1867) 정묘(丁卯)(丁卯) 도유사(都有司) 장(2자 판독불능), 유사(有司) 朴順福이라 刻해 있다.
  • 【위치】 부귀면 오룡리 454-3. 오산마을앞 나들목 로타리 안.
    【시기】 1890년
    【형태】 아들 김억석 효자비 좌측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6cm. 비석에는 비문이 없다.
    【개요】 효자 김억석(金億石)의 모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손자 재성(載聲)이 임금의 어가행차에 징을 울려 호소하니 1888년 예조에서 정부인의 아들 억석(億錫)의 효행사실과 더불어 정려를 내렸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따로 옆에 새로 세운 정려문에 실려 있다.

    【정려문】 무릇 물건에는 귀천이 있으니 주옥이 귀한 것이 아니라 우임금과 순임금이 投壑함이 바로 귀함이요, 반대가 천함이다. 흙더미가 천한 것이 아니라 진문공이 받은 흙더미가 천함이요, 반대가 귀함이다.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경중이 있다. 매신의 처는 부귀를 구하려 했으나 도리어 가볍게 되고 기옥의 처는 죽기로 지켜서 스스로 중하게 되니 물건의 귀천은 사람들이 취사하나 사람의 경중은 선한가 악한가에 있는데 항차 높은 절개가 있는 이는 그 귀하고 중함이 어떠하겠는가? 그런즉 귀하고 중함이 단지 벼슬이 높은 것을 이르는 게 아니라 비록 공경의 귀한 신분일지라도 사람이 용열하고 암탁하면 사람들이 침 뱉고 비웃으며 비록 여항(閭巷)간의 천한 신분이라도 정렬(貞烈)이 높고 광명한즉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나니 대개 행실을 닦으면 귀함이 되고 윤리를 상하면 천하게 되는 것이 바른 이치라 귀중한 가운데 더욱 귀중함이 있으니 한 부녀자로 효와 열을 겸비함이라 이러한 이가 천백인중에 한 사람 있으니 내가 김씨 문중에서 보았노라. 사인 尙仲公의 본관은 김해인데 경순왕의 후예라 누대로 문학과 예절로 향리에서 평판이 높았고 그 부인은 전주인 時龍의 딸이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시와 례를 행하는 친정에서 성장하여 성품은 본래 온화 貞純하며 시집가는 날 친척이 화목하여 이웃들의 치하가 끊이지 않더니 겨우 어린 두 아들을 두고 과부가 되니 하늘이 어찌 이 여자에게 가혹하다 아니하겠는가? 그 지아비가 병이 위중해지자 눈을 무릅쓰고 얼음을 밟고 하늘에 빌고 산신에게 빌며 만방으로 구환하였으나 천명이 다하였으니 어찌하리오, 지아비를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다시 생각한즉 늙은 시어미는 안방에 있고 의탁할 데 없는 어린아이는 강보에 있는데 지아비를 따라 죽으려는 것이 의롭다고는 하나 구차하게 살아서라도 시어미를 봉양하는 것도 중하고, 어린 아들도 어미의 젖이 없으면 살리기 어렵고, (그렇게 되면) 이 집안의 뒤가 끊어지니 내 한목숨 죽고 사는 데에 달렸으니 이 또한 큰 일이 아닌가. 가난한 집 썰렁한 부엌이지만 맛있는 것을 구하여 시어미를 극진히 공궤하고 청상 빈방에서 애통하며 죽은 지아비의 후사를 잇게 하니 이는 참으로 생명을 상하지 않고도 효도가 더욱 도탑고 죽지를 아니하여 행실이 더욱 매운지라 자식이 열 살도 못되어 시모가 또 죽으니 평소에 봉양하는 절차와 초종 장례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받드니 그 행실이 비록 명문대가의 법도나 대현 학행이라도 어찌 이에 미치리요. 또한 대상을 당하매 저녁에 주찬을 차려놓고 이웃을 초청하여 말하기를 미망인이 오히려 잔명을 보존한 것은 오로지 의탁할 데 없는 늙은 시모가 있고 자식은 어려 살길이 없었음이니 이젠 시모가 세상을 버리시고, 어린 아들이 강보를 면했으니 죽은 들 무슨 여한이 있으리오. 나 죽은 후에 이웃의 의를 생각하여 내 자식을 불쌍히 여기소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예삿말로 알고 돌아갔는데 이튿날 미명에 그 집에서 소리가 나거늘 놀래어 쫓아가 보니 목을 시렁에 매어 명이 거의 끓긴지라 그 아들이 놀래 일어나 급히 그 줄을 풀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대고 피를 넣다 그 옆에 혼절한지라 이웃 사람들이 일제히 구환했더니 모자가 다행히 회생한지라 효자로구나 이 아들이어 어미가 그처럼 효열하니 자식도 마땅히 그러하구나. 세수를 안한 10년 때 묻은 흔적 귀밑머리 완연하고 향년 80에도 목맨 흔적 턱 아래에 완연하니 이게 어찌 효열로 말미암은 게 아니랴. 이에 관청에 보고하고 영문에 고하는 문서가 쌓였다. 금상 25년(1888) 무자(戊子)에 특히 정문 세움을 명하셔서 그 행적을 표창케 하시니 그 탁월한 실적은 도를 통하여 조정에 이미 갖추어 말했거니와 그 여항(閭巷)의 일개 필부(匹婦)가 이처럼 효열을 겸행했으니 어찌 장한 일이 아니랴. 일국 일주가 흠선(欽羨)하지 않을 수 없어 이를 존귀하니 이는 신분이 높다하여 반드시 귀함이 아니요, 신분이 낮다고 반드시 천함이 아니라. 무릇 하종(下從)은 여인네의 한 절개이지만 부모를 모심이 더 큼을 알며 대를 잇는 일이 중함을 알아 효도에 극진하고, 가르침에 열심하여 매사가 의리에 합당하여 어찌 가히 한 부인에 견주리오. 참으로 여인 중에 군자로다. 그 정문을 세우는 날 내게 그 효열 실적의 기문을 청하는 고로 사양치 못하고 그 실상을 기록나 문사가 졸렬하고 뜻이 천박하여 그 행적의 만의 하나라도 제대로 적지 못하노라.
    임진(1892) 4월 일
    통사랑행종부참봉 완산후인 원천 이건하 기
  • 【비표】 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公億石孝子之碑(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김공억석효자지비)

    【위치】 부귀면 오룡리 454-3. 오산마을앞 나들목 로타리 안.
    【시기】 1890년
    【형태】 모친 전주이씨 효열비 우측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6cm. 비석에는 비문이 없다.
    【개요】 효자 김억석은 그 아들 재성(載聲)이 임금의 어가행차에 징을 울려 호소하니 1888년 예조에서 그 모친의 효행과 더불어 정려를 내렸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따로 옆에 새로 세운 정려문에 실려 있다.

    【정려문】 대범 사람의 행실로 효도만 한 게 없는데 효도 중에도 특이한 효도가 있으니 옛날 왕상(王祥)이란 사람은 얼음을 두드리며 물고기를 구하니 두 마리의 잉어가 튀어나왔고, 맹종(孟宗)이란 사람은 눈을 밟고 울면서 죽순을 구하니 바로 죽순이 솟아올랐다 하니 비록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동한 소치라 해도 특이한 사적이 아니리요. 근자에 또 특이한 효행이 있으니 진안에 거주하는 김호연(金浩鉉, 億錫)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던바 나이 겨우 7세 때 그 모친이 시어머니의 대상을 마치고 시렁에 목을 매었더니 잠자다 놀라 일어나 목맨 줄을 풀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요행이 회생이 되었으니 이 역시 어릴 때 효성이 지극한 일이다. 모친이 병으로 누워 과일 중에 오직 생밤이 먹고 싶다 하나 때는 봄철이었다. 즉시 밤나무 아래 축단을 하고 목욕재계한 뒤 주야기도를 하였던 바 홀연 밤나무가지 하나가 개화 수일 후 아홉 송이나 결실하니 이를 따 모친에게 드리니 바로 병이 나았다고 하니 이 역시 효성이 특이한 일이다. 그 모친이 수를 다하고 임종하려 하매 다시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이니 어찌 범인들이 행할 일인가. 초종을 마친 후 마을 앞 소죽봉아래 깊은 골짜기에 출빈하고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그 빈소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며 빈소 아래에 장례를 모시고 출빈한 날부터 육년간을 풍우도 피하지 않고, 추위와 더위도 가리지 않고 저녁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기를 초종날처럼 하였다. 중간에 냇가가 있었는데 날 저물어 건너면 호랑이가 마중하였다가 밤을 같이 세워주었으니 이 역시 효성에 감동된 바라 대강을 들어 말하였으나 그 효행의 독실함이 왕상이 잉어를 얻은 일과 맹종이 죽순을 얻은 일보다 못하지 않음이라 이에 유림들이 방백에게 알리니 포창을 하고 위에 올려 특별히 정려를 내려주시고 관직의 교지를 하사하니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이요, 또한 위로 3대까지 관직을 추증하니 부 치권(致權 자 尙仲)에게는 증(贈)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 조부 선징(善徵)에게는 증(贈)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 증조부 구정(龜鼎)은 증(贈) 통훈대부 절충장군 사복시정(通訓大夫折衝將軍司僕寺正)이었다. 유생 중에서 나에게 그 기문을 써주기를 청하는 이가 있어 내 생각건대 진술에 재주는 없으나 착한 행실을 표창하는 일을 가리기 어려워 그 행실을 드러내 대강 실상을 기록하노라.
    찬 정려문(撰旌閭文)
    저 정려를 보건대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랐고 / 오직 효행이로다. 아홉 송이 밤이 열리도다. / 저물녘 내를 건너면서 육년을 가고 오니 / 범이 나와 마중한지라 지극한 정성이로다. / 군(郡縣)이 흠탄하고 위로 궁궐에 주달하니 / 유림이 추천하여 영예로운 이름이 하사되었다. / 남다른 저 효성이여 흠모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 누가 감히 논평하랴 그 뜻을 찬양하리라.
    임진(1892) 4월 일
  • 부귀면 황금리 운장산 남쪽 계곡에 있는 칠성대는 넓은 바위 뒤에 자연석의 제단이 있어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인데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남학 교도들이 봉기하려다 미수에 그쳐 교주 및 교인 7명이 처형을 당하자 남학 교인들이 이곳에 제단을 쌓고 기도를 드리던 장소이다. 칠성대 암벽에는 ‘七星臺’, ‘山王壇’ 등 암각서와 ‘칠성대영유기(七星臺咏遊記)’, ‘우당 김처사 병서’란 2점의 글씨를 얇은 대리석에 새겨 바위를 파고 끼워 넣었다.
  • 【위치】 부귀면 황금리
    【시기】 1924년
    【형태】 암벽에 대리석 석판 삽입
    【개요】 칠성대 영유기의 내용은 정삼품 규장각 직각 정인욱(鄭寅昱)의 기문(記文)과 이덕응, 이송암, 김명봉, 박성암 등 4인의 시운이 새겨져 있다.

    【비문】 湖南處士敎 事實 明佛金庸培 嘗通悟三敎之綱 全而一之 故叅立皇壇節義於玉川華陽岡 事無不正 誠無不至 而往年 以法衣古冠 方西行洛遊也 紫雲觀道人 書以贈贊曰 明佛善爲其明 着衣冠 兼通佛玄之義 懿歟盛哉 今七星坮之享會也 與其從遊及門弟某某 文以告之 刻以着之 抑或此坮之享 諸氏之銘 宜配於犻帝峰神 小徵星靈 使眞人有此會享歟 于時 德星聚 恨無太史奏之之處 余鄕洛路左 縱未能參會 然而聞諸紫雲道人 不勝歆戀 爲之原其事跡 又名坮以依南者 盖取杜工部每依北斗望京華之義也 旣又爲之記 以示來者云
    甲子元月 日 正三品奎章閣直閣 鄭寅昱 記
    【풀이】 호남 처사교(湖南處士敎)의 사실(事實)은 이러하다. 명불(明佛) 김용배(金庸培)가 일찍이 삼교(三敎)의 강령(綱領)을 통찰하여 깨달아 온전히 하여 통일하였다. 그래서 옥천(玉川)의 화양(華陽) 언덕에 황단 절의(皇壇節義)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으니, 일은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고 정성이 지극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왕년에 법의(法衣)에 고관(古冠)을 쓰고 서쪽으로 가서 서울에 유람할 적에, 자운관 도인(紫雲觀道人)이 글로 써서 찬을 지어 주었는데, 거기에 “명불은 그 명철함을 잘 행하였다. 의관(衣冠)을 입고 불교와 도교의 뜻을 겸통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름답고 훌륭하구나. 지금 칠성대의 향회(享會)에서 교유하는 친구 및 문하의 제자들 누구누구와 함께 글로써 고하고 새겨서 드러내었다. 아마도 이 대의 향회와 여러 사람들의 글을 새긴 것은 패제봉(犻帝峰)과 소미성(小徵星)의 신령의 뜻에 응해서 진인(眞人)으로 하여금 이 향회를 열게 하였나 보다. 그래서 덕성(德星)들이 모였으나 태사(太史)가 아뢸 곳이 없는 것을 한탄한다. 내 고향이 낙로(洛路)의 동쪽에 있어 비록 향회에 참석하지는 못하나 자운도인에게 듣고서 흠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 사적(事跡)의 근원부터 찾아내 적는다. 또 대의 이름을 짓고 남쪽을 의지하는 것은 두보(杜甫)가 매번 북두성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던 뜻을 취한 것이다. 이윽고 기문을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인다.
    갑자(1924)년 1월 정삼품 규장각 직각 정인욱이 쓴다.

    依瞻南斗惠重重 喩我昔年又濟儂 深院俯聽聞法鳥 絶巓仰駕護禪龍 七纏石氣三天降 一片坮靈萬姓從 淨老誠心連碧落 小徵長照此小峰 華陽君子 李守堂

    남두성(南斗星)을 바라보니 은혜가 중중(重重)해서 / 나 옛날 그대와 함께 했음을 알려 주네 / 깊은 집에서는 법조(法鳥)소리를 듣고 / 산 꼭대기에서는 신룡(神龍)을 탄다네 / 일곱 번 얽어맨 돌기운이 삼천(三天)에서 내려오고 / 한 조각 대의 영기에 만백성이 따르네 / 정결한 늙은이의 성심이 하늘에 닿아 / 소미성이 길이 이 봉우리를 비추리라.
    화양군자(華陽君子) 이수당(李守堂)

    門深巷僻樹千重 氣味相論若似儂 靑嶂而過來翠鳥 白雲深處吠烏龍 佛緣仙業心淸淨 世態人情夢過從 聖代他年徵召日 於君乞與此三峰 紫洞詩翁 李松庵
    외진 마을 깊은 곳에 문을 내고 나무 심었으니 / 기개와 취미를 논하자면 그대와 비슷했지 / 푸른 산을 지나가니 취조(翠鳥)가 찾아오고 / 흰구름 깊은 곳에 개가 짖는다 / 부처의 인연 도가의 업으로 마음이 청정해서 / 세태와 인정은 꿈속에 지났구나 / 훗날 태평성대에 임금이 부르면 / 이 세 봉우리나 달라고 해야지.
    자동시옹(紫洞詩翁) 이송암(李松庵)
    天有七星下降重 名坮遊友是誰儂 東方講約多君子 南國勇知幾虎龍 新觴味足看花飮 舊誼感因銘石從 盛筵會合誠非偶 携手更登高一峰 明庵處士 金明峰
    하늘에 있던 칠성(七星)이 내려와 / 대의 이름으로 짓고 교유하는 이 누구인가 / 동방의 강약(講約)에는 군자가 많았고 / 남국의 용지(勇知)에는 용호(龍虎)가 얼마였던가 / 새로 따른 술잔은 꽃 보며 마시기에 충분하고 / 옛 친구의 우정은 돌에 새길 생각이네 / 훌륭한 자리의 회합은 참으로 우연이 아니니 / 손잡고 다시 한번 최고봉에 오르리라.
    명암처사(明庵處士) 김명봉(金明峰)

    此坮出義義尤重 望北依南孰與儂 山稱犻帝應天地 境澈遠方隔月龍 世間是有眞人跡 名下元無處士從 烏石靈源無過此 諸賢杖屨上斯峰 德山處士 朴星庵
    이 대에 의연금을 낸 것은 그 뜻이 더욱 중하나 / 북쪽을 바라보고 남쪽을 의지하는 것은 누가 함께 하나 / 산을 패제라 부르니 천지에 응할 것이고 / 길이 끝난 먼 곳이라 월룡을 이웃했다
    세상에는 진인의 자취가 있는데 / 이름 아래에는 원래부터 처사가 없다 / 오석산 영원산도 이보다는 못할 터 / 여러 현자여 채비를 갖추고 이 봉우리에 올라 보세.
    덕산처사(德山處士) 박성암(朴星庵)
  • 【비표】 前資憲大夫尹公致昊施惠不忘碑(전자헌대부윤공치호시혜불망비)

    【위치】 부귀면 거석리 729. 부귀로변 대창정미소 동쪽.
    【시기】 1929년 2월
    【형태】 윤치호 흥학불망비와 좌우로 나란히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5cm, 너비 54cm, 두께 14cm.
    【개요】 비의 좌우에는 “耕玆土足食莫匪之恩之德 登此校牖智識 宜乎載頌載勅”라고 적혀 있다. 풀이하면 “농사를 지을 땅이 있어 배부르게 된 은덕은 더할 바 없고, 이 학교에 등교하여 지식을 배우게 하니 마땅히 길이 칭송하고 역사에 실리리라.”라는 뜻이다. 비의 후면에는 “기사(1929) 2월 일(己巳 二月 日, 五龍里, 鳳巖里. 弓項里 小作一同)”라고 비를 세운 일자와 리명이 새겨져 있다. 윤치호는 한말 개화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부귀면 땅에 상당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소작료를 경감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년의 친일행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비표】 前資憲大夫尹公致昊興學不忘碑(전자헌대부윤공치호흥학불망비)

    【위치】 부귀면 거석리 729. 부귀로변 대창정미소 옆(동).
    【시기】 1931년 3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7cm, 너비 47cm, 두께 14cm.
    【개요】 윤치호는 한말 개화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부귀면 땅에 상당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소작료를 경감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년의 친일행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문】 設學校毓英才 實當世之急務 而顧此本面僻在荒陬 民窮且窶 興學未曰矣 何幸尹公以萬金巨額 特施厚蠲 俾爲公校之資凡百 維持迨今二載而聰俊子弟 朝益暮習 日後國家之需用 將拭目可睹矣 吁其盛哉 峨峨雲山 不足爲高 洋洋錦流 不足爲淸 略擧梗槪如右
    昭和六年 三月 富貴面 代表人 白南虎
    【풀이】 학교를 세워 영재를 기르는 것은 실로 당세의 급한 일인데 돌아보니 본면은 벽지에다 황폐한고로 백성이 궁핍하여 아직 학교를 세우지 못했는바 다행히도 윤공이 만금의 거액을 특시(特施)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재를 구비하여 수업함에 2년에 이르니 총준(聰俊)한 자제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습하여 장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목이 될 것이다. 아, 거룩한 일이로다. 아아(峨峨)히 구름덮힌 높은 산도 이보다 높지 아니하고 양양(洋洋)한 금류(錦流)도 이보다 맑지 않으리로다. 이를 간략히 우(右)와 같이 적는다.
    소화 6(1931)년 3월 부귀면 대표인 백남호(白南虎, 당시의 부귀면장)
  • 【비표】 孝子金海金公顯應紀蹟碑(효자김해김공현응기적비)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 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7cm, 너비 54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金公諱顯應 初諱應喆 以淳實之資 有卓爾之孝 所居里面 迭薦之郡 郡薦之道 將以啓聞 而値世多變 未蒙天褒 人皆惜之 公自幼性孝 甘旨不以貧窶闕供 定省亦未嘗一日廢 愉色婉容 每以悅親爲事 丁巳冬 親癠彌連數朔 醫言鱉可以補元 公出而博謀 氷凍不得 忽淺灘氷解 二鱉自出 用之卽效 又於戊午親患 如醫言求鴨 鴨自墜 快得勿藥之效 兩親以天年終 而每於病劇之際 嘗糞驗症 裂指注血 亦累矣 其先金海人 有諱伉 官判官 有名于麗季 太宗朝 盆城君諱湑生 節孝諱克一 是生執義諱孟 是生濯纓諱馹孫 是生縣監諱大壯 縣監孫進士致三 公之六世祖也 曾祖諱聲武 祖諱鳳章 考諱廷輝 妣慶州金氏父化年 公以 英祖辛酉八月十六日生 庚午十二月十三日卒 葬在鎭安富貴面斗南里村后北麓丙坐原 配慶州鄭氏 相周之女 男再璜 亦以孝名 孫國昇國仲國化國宗 日 其五代孫容培 携其狀軸 訪余南安山房而曰 祖考至行 若是其卓 而未蒙 天褒 世以爲齎恨 而顧今時所欲顯揚者 碑以紀蹟 樹之閭里 願先生有以惠一言也 余爲之言曰 子孫苟賢 人必曰某也有后 其顯揚孰甚焉 君等孝子之後 孝悌爲務 克世其家 則公之名 不以碑之有無 而有所輕重也 旣以是勉之 又撮其來狀 序之如右 系以銘曰 至誠所到 金石可透 鱉出鴨墜 無足爲怪 王氏氷魚 豈獨專美 我朂其後 孝弟不弛 我銘其石 令名不已 己亥仲呂之月下澣 全義李炳殷撰
    【풀이】 김공(金公) 휘 현응(顯應)의 초휘(初諱)는 응철(應喆)이니 순실한 바탕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을과 면에서 군에 천거하고, 군에서는 도에 천거하였고, 도에서는 조정에 계문(啓問)하려 하였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임금의 포양을 받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워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감지(甘旨, 맛있는 음식)를 올리지 않을 때가 없었고,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도 단 하루 거르는 일이 없었다. 웃는 얼굴과 밝은 낯빛으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정사년(丁巳年, 정조 21, 1797) 겨울에 부모의 병환이 여러 달 지속되었다. 의원의 말이 자라만이 원기를 보할 수 있다 하나. 공이 널리 구하였으나 얼음이 얼어 구할 수 없었다. 뜻밖에 옅은 여울에 얼음이 풀려 자라 두 마리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그것을 잡아 약을 쓰니 병이 즉석에서 나았다. 또 무오년(戊午年) 친환(親患) 때에는 의원의 말을 듣고 오리를 구하였는데, 오리가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그것으로 병이 쾌히 나아 양친이 모두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그리고 매양 병세가 위독할 즈음에는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공의 선대는 김해인(金海人)으로 휘 항(伉)은 판관(判官)으로 고려 말엽에 이름이 있었고, 태종조에는 분성군(盆城君) 휘 서생(獲生)과 절효공(節孝公) 휘 극일(克一)이 있었다. 절효공이 집의(執義) 휘 맹(孟)을 낳고, 이 분이 탁영(濯纓) 휘 일손(馹孫)을 낳았으며, 일손이 현감 휘 대장(大壯)을 낳고, 현감의 손자는 진사 치삼(致三)이니, 이분이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성무(聲武)요, 조부의 휘는 정휘(廷輝)요, 비(騙)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화년(化年)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신유(辛酉, 영조 17, 1741) 8월 16일 태어나 경오(庚午, 순조 10, 1810) 12월 13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진안(鎭安) 부귀면(富貴面) 두남리(斗南里) 마을 뒤 북록(北麓) 병좌원(丙坐原)에 있다. 배위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아들 재황(再璜)은 역시 효성으로 이름이 있었고, 손자는 국승(國昇)·국중(國仲)·국화(國化)·국종(國宗)이다. 어느 날 그 5대손 용배(容培)가 공의 장축(狀軸)을 가지고 남안산방(南安山房)으로 나를 찾아와서 이르기를 “우리 5대 조고의 지극한 행실은 그토록 고상하였으나 조정의 포장(鷸奬)을 얻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이켜 오늘날 현양(顯揚)하고자 한다면, 비에 사적을 기록하여 마을 앞에 세우는 길밖에 없겠으니,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한 말씀 해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자손이 어질면 사람들은 으레 ‘아무개는 뒤가 있다’고 말하는데, 현양하는 도리는 무엇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그대들은 효자의 후손으로 효제(孝悌)에 힘써 잘도 가풍을 이어오고 있으니, 공의 명성이 어찌 비가 있고 없고에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가위 이로써 면려하고 또 가지고 온 장축을 간추려 위와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다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지성(至誠)이 이르는 곳엔 / 금석(金石)도 뚫리나니 / 자라가 솟아나고 오리 떨어짐이 / 하나도 괴이할 것 없으련만 / 그런데 왕씨(王氏)의 잉어만이 / 어찌 고금에 훌륭하다 칭하는가. / 나는 그 후손 면려하여 / 효제에 해이함이 없게 하고 / 또 그 돌에 명을 새기나니 / 영명(令名)은 다함이 없으리로다.” 기해(己亥, 1959) 4월 하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이 찬하다.
  • 【비표】 孝子金海金公諱再璜紀蹟碑(효자김해김공휘재황기적비)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 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8cm, 너비 54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高宗辛卯 鎭安儒生 上其城主書 若曰金應喆 旣以卓孝名 其子有璜 能繼其父行 竭誠養親 壬午冬 父病劇幾殞 公裂指灌血 延二日命 又斷一指 延三日命 及遭喪 一遵禮式 檸風惡雪 日三省墓 遠近皆曰 孝子方生孝子 其行祿又曰 居家極儉素 接人甚溫恭 敎子則嚴正 處事則詳密 勤農業 而誠於善事 厚於賓客 公諱再璜 有璜其初諱也 其先金海大姓 濯纓馹孫之后 九代祖縣監大壯 七代祖進士致三 曾祖諱鳳章 祖廷輝 考顯應 其曰應喆 初諱也 妣慶州鄭氏 相周女 以 正廟乙巳九月八日生 甲寅二月四日卒 葬在鎭安上田面月浦里陽地村案山白雲洞巳坐 配泗川金氏 大奎女 男國昇國仲國化國宗 孫昌祚昌浩昌九昌錫昌龍昌元昌重昌南 余以其玄孫容培請 曾銘公大人碑 容培又懇請公碑 其誠于爲先 非今人所不可及 吾雖九耋隆聾 而懿性所存 不可辭 系爲之銘曰 慈爲父道 孝爲子職 喪葬盡禮 供養竭力 理所固然 何用擧說 世降俗末 人泊利慾 忘親背恩 禽窟獸域 如公卓行 何不揚極 以振頹綱 以戒流俗 吁嗟公兮 於萬來斯 名不湮沒 己亥仲呂之月下澣 全義李炳殷撰
    【풀이】 고종 신묘년(辛卯年, 고종 28, 1891)에 진안(鎭安)의 유생(儒生)들이 그들의 성주(城主, 수령)에게 올린 글에서 이르기를, “김응철(金應喆)은 기왕에 드높은 효성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황(有璜) 또한 능히 아버지의 행실을 이어 부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임오년(壬午年, 순조 22, 1822) 겨울에 아버지의 병이 더하여 거의 죽게 되자 공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아 넣어 2일간 목숨을 연장하였고, 또 하나의 손가락을 잘라 3일간 목숨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절에 따르고 사나운 바람과 매서운 눈 속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성묘를 하여 원근에서도 모두 이르기를, ‘효자가 효자를 낳았다’ 하였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또 그 행록(行錄)에 이르기를 “집에 있어서는 극히 검소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매우 온공하였으며, 아들을 가르침에는 엄정하였고, 일처리는 상밀(詳密)하였으며,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위선사에 성실하고, 손님 접대는 후히 하였다.”고 하였다. 공의 휘는 재황(再璜)이니, 유황(有璜)은 그 초휘(初諱)이다. 선대는 김해대성(金海大姓)이고,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후예이다. 9대조는 현감 대장(大壯)이요, 7대조는 진사 치삼(致三)이며, 증조의 휘는 봉장(鳳章)이요, 조부의 휘는 정휘(廷輝)이며, 고(考)는 현응(顯應)인데, 응철(應喆)이라 한 것은 초휘(初諱)이다. 비(騙)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을사(乙巳, 정조 9, 1785) 9월 8일에 태어나 갑인(甲寅, 철종 5, 1854) 2월 4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진안 상전면(上田面) 월포리(月浦里) 양지촌(陽地村) 안산 백운동(白雲洞) 사좌(巳坐)에 있다. 배위 사천 김씨(泗川金氏)는 대규(大奎)의 따님이다. 아들은 국승(國昇)·국중(國仲)·국화(國化)·국종(國宗)이요, 손자는 창조(昌祚)·창호(昌浩)·창구(昌九)·창석(昌錫)·창룡(昌龍)·창원(昌元)·창중(昌重)·창남(昌南)이다. 나는 그 현손 용배(容培)의 청탁으로 일찍이 공의 대인(大人, 아버지)의 비에 명을 한 바 있는데, 용배가 또 공의 비에 명을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위선(爲先)하는 성의가 지금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가 있기에, 내가 비록 90세의 극로(極老)로 귀까지 어두우나 이성(醒性)이 있는 바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명을 다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인자함은 아비의 도리요 / 효도는 자식의 직책인지라 / 상장(喪葬)에 예를 다하고 / 공양(供養)에 힘을 다함은 / 이치의 당연한 도리일진대 / 구태여 거론할 것 있겠냐마는 / 세상은 못되고 풍속은 그릇되어 / 사람마다 이욕에 빠져서 / 부모를 잊고 은혜를 등지며 / 금수(禽獸)의 소굴로 변해가니 / 공같은 드높은 행실을 / 어찌 끝까지 치켜올려서 / 무너진 기장 진작하고 / 세속을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 공이여 / 천만년 내세까지 / 이름이 묻히지 말지어다.” 기해(己亥, 1959) 4월 하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이 찬하다.
  •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8cm, 너비 43cm, 두께 18cm.
    【개요】 김용섭(金容燮, 1889~?)의 자는 선경(善京). 호는 해산(海山), 본관은 김해로써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후손으로 효자 재황의 현손이다. 이 비에는 김용섭이 종족을 위하여 힘쓴 일을 기록하였다.
  • 【비표】 縣監鄭侯基春淸白恤民不忘碑(현감정후기춘청백휼민불망비)

    【위치】 부귀면 부귀로 83(봉암리 548-5) 신촌마을회관 옆 민가 담벼락
    【시기】 1865년
    【형태】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2cm.
    【개요】 정기춘(鄭基春)은 진안현감으로 1864년 7월에 부임하여 1865년 8월에 이임하였다. 재직시 백성들의 부역ㅇㄹ 감해준 공으로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8. 장기호 공덕불망비(張箕浩功德不忘碑)
    【비표】 前通政大夫張公箕浩功德不忘碑(전통정대부장공기호공덕불망비)

    【위치】 부귀면 수항리 신기마을 길가
    【시기】 계묘(癸卯)년-연도환산 불능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4cm, 너비 40cm, 두께 16cm.
    【개요】 『진안지』에 장기호(張箕浩)는 자는 한명(漢明). 본관은 구례. 오위장(五衛將) 석문(錫文)의 아들로서 무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은 신기마을에 주민들이 시탄(柴炭)을 구할 수 있는 산림을 기증하여 주민들이 그 공로를 기려 비를 세웠다고 한다.
  • 【비표】 折衝林應振種德碑(절충임응진종덕비)
    【위치】 부귀면 하수항길 6[수항리]. 민가 내 담장 안.
    【시기】 을해(乙亥, 1875)년 3월
    【형태】 비신(碑身) 높이 113cm, 너비 38cm, 두께 16cm.
    【개요】 같은 집 울 안에 임응환의 비와 나란히 서 있다. 임응진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동리 사람들에 의하면 이 분들이 예전에 전주쪽으로 가는 길을 잘 딲고 정비했다고 한다. 종덕비(種德碑)라는 말도 드문데 종덕은 ‘남에게 은덕(恩德)이 될 일을 행(行)함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