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孝子金海金公顯應紀蹟碑(효자김해김공현응기적비)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 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7cm, 너비 54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金公諱顯應 初諱應喆 以淳實之資 有卓爾之孝 所居里面 迭薦之郡 郡薦之道 將以啓聞 而値世多變 未蒙天褒 人皆惜之 公自幼性孝 甘旨不以貧窶闕供 定省亦未嘗一日廢 愉色婉容 每以悅親爲事 丁巳冬 親癠彌連數朔 醫言鱉可以補元 公出而博謀 氷凍不得 忽淺灘氷解 二鱉自出 用之卽效 又於戊午親患 如醫言求鴨 鴨自墜 快得勿藥之效 兩親以天年終 而每於病劇之際 嘗糞驗症 裂指注血 亦累矣 其先金海人 有諱伉 官判官 有名于麗季 太宗朝 盆城君諱湑生 節孝諱克一 是生執義諱孟 是生濯纓諱馹孫 是生縣監諱大壯 縣監孫進士致三 公之六世祖也 曾祖諱聲武 祖諱鳳章 考諱廷輝 妣慶州金氏父化年 公以 英祖辛酉八月十六日生 庚午十二月十三日卒 葬在鎭安富貴面斗南里村后北麓丙坐原 配慶州鄭氏 相周之女 男再璜 亦以孝名 孫國昇國仲國化國宗 日 其五代孫容培 携其狀軸 訪余南安山房而曰 祖考至行 若是其卓 而未蒙 天褒 世以爲齎恨 而顧今時所欲顯揚者 碑以紀蹟 樹之閭里 願先生有以惠一言也 余爲之言曰 子孫苟賢 人必曰某也有后 其顯揚孰甚焉 君等孝子之後 孝悌爲務 克世其家 則公之名 不以碑之有無 而有所輕重也 旣以是勉之 又撮其來狀 序之如右 系以銘曰 至誠所到 金石可透 鱉出鴨墜 無足爲怪 王氏氷魚 豈獨專美 我朂其後 孝弟不弛 我銘其石 令名不已 己亥仲呂之月下澣 全義李炳殷撰
    【풀이】 김공(金公) 휘 현응(顯應)의 초휘(初諱)는 응철(應喆)이니 순실한 바탕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을과 면에서 군에 천거하고, 군에서는 도에 천거하였고, 도에서는 조정에 계문(啓問)하려 하였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임금의 포양을 받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워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감지(甘旨, 맛있는 음식)를 올리지 않을 때가 없었고,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도 단 하루 거르는 일이 없었다. 웃는 얼굴과 밝은 낯빛으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정사년(丁巳年, 정조 21, 1797) 겨울에 부모의 병환이 여러 달 지속되었다. 의원의 말이 자라만이 원기를 보할 수 있다 하나. 공이 널리 구하였으나 얼음이 얼어 구할 수 없었다. 뜻밖에 옅은 여울에 얼음이 풀려 자라 두 마리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그것을 잡아 약을 쓰니 병이 즉석에서 나았다. 또 무오년(戊午年) 친환(親患) 때에는 의원의 말을 듣고 오리를 구하였는데, 오리가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그것으로 병이 쾌히 나아 양친이 모두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그리고 매양 병세가 위독할 즈음에는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공의 선대는 김해인(金海人)으로 휘 항(伉)은 판관(判官)으로 고려 말엽에 이름이 있었고, 태종조에는 분성군(盆城君) 휘 서생(獲生)과 절효공(節孝公) 휘 극일(克一)이 있었다. 절효공이 집의(執義) 휘 맹(孟)을 낳고, 이 분이 탁영(濯纓) 휘 일손(馹孫)을 낳았으며, 일손이 현감 휘 대장(大壯)을 낳고, 현감의 손자는 진사 치삼(致三)이니, 이분이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성무(聲武)요, 조부의 휘는 정휘(廷輝)요, 비(騙)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화년(化年)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신유(辛酉, 영조 17, 1741) 8월 16일 태어나 경오(庚午, 순조 10, 1810) 12월 13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진안(鎭安) 부귀면(富貴面) 두남리(斗南里) 마을 뒤 북록(北麓) 병좌원(丙坐原)에 있다. 배위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아들 재황(再璜)은 역시 효성으로 이름이 있었고, 손자는 국승(國昇)·국중(國仲)·국화(國化)·국종(國宗)이다. 어느 날 그 5대손 용배(容培)가 공의 장축(狀軸)을 가지고 남안산방(南安山房)으로 나를 찾아와서 이르기를 “우리 5대 조고의 지극한 행실은 그토록 고상하였으나 조정의 포장(鷸奬)을 얻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이켜 오늘날 현양(顯揚)하고자 한다면, 비에 사적을 기록하여 마을 앞에 세우는 길밖에 없겠으니,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한 말씀 해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자손이 어질면 사람들은 으레 ‘아무개는 뒤가 있다’고 말하는데, 현양하는 도리는 무엇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그대들은 효자의 후손으로 효제(孝悌)에 힘써 잘도 가풍을 이어오고 있으니, 공의 명성이 어찌 비가 있고 없고에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가위 이로써 면려하고 또 가지고 온 장축을 간추려 위와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다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지성(至誠)이 이르는 곳엔 / 금석(金石)도 뚫리나니 / 자라가 솟아나고 오리 떨어짐이 / 하나도 괴이할 것 없으련만 / 그런데 왕씨(王氏)의 잉어만이 / 어찌 고금에 훌륭하다 칭하는가. / 나는 그 후손 면려하여 / 효제에 해이함이 없게 하고 / 또 그 돌에 명을 새기나니 / 영명(令名)은 다함이 없으리로다.” 기해(己亥, 1959) 4월 하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이 찬하다.
  • 【비표】 孝子金海金公諱再璜紀蹟碑(효자김해김공휘재황기적비)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 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8cm, 너비 54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高宗辛卯 鎭安儒生 上其城主書 若曰金應喆 旣以卓孝名 其子有璜 能繼其父行 竭誠養親 壬午冬 父病劇幾殞 公裂指灌血 延二日命 又斷一指 延三日命 及遭喪 一遵禮式 檸風惡雪 日三省墓 遠近皆曰 孝子方生孝子 其行祿又曰 居家極儉素 接人甚溫恭 敎子則嚴正 處事則詳密 勤農業 而誠於善事 厚於賓客 公諱再璜 有璜其初諱也 其先金海大姓 濯纓馹孫之后 九代祖縣監大壯 七代祖進士致三 曾祖諱鳳章 祖廷輝 考顯應 其曰應喆 初諱也 妣慶州鄭氏 相周女 以 正廟乙巳九月八日生 甲寅二月四日卒 葬在鎭安上田面月浦里陽地村案山白雲洞巳坐 配泗川金氏 大奎女 男國昇國仲國化國宗 孫昌祚昌浩昌九昌錫昌龍昌元昌重昌南 余以其玄孫容培請 曾銘公大人碑 容培又懇請公碑 其誠于爲先 非今人所不可及 吾雖九耋隆聾 而懿性所存 不可辭 系爲之銘曰 慈爲父道 孝爲子職 喪葬盡禮 供養竭力 理所固然 何用擧說 世降俗末 人泊利慾 忘親背恩 禽窟獸域 如公卓行 何不揚極 以振頹綱 以戒流俗 吁嗟公兮 於萬來斯 名不湮沒 己亥仲呂之月下澣 全義李炳殷撰
    【풀이】 고종 신묘년(辛卯年, 고종 28, 1891)에 진안(鎭安)의 유생(儒生)들이 그들의 성주(城主, 수령)에게 올린 글에서 이르기를, “김응철(金應喆)은 기왕에 드높은 효성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황(有璜) 또한 능히 아버지의 행실을 이어 부모의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임오년(壬午年, 순조 22, 1822) 겨울에 아버지의 병이 더하여 거의 죽게 되자 공이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아 넣어 2일간 목숨을 연장하였고, 또 하나의 손가락을 잘라 3일간 목숨을 연장하였으며, 상을 당해서는 한결같이 예절에 따르고 사나운 바람과 매서운 눈 속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성묘를 하여 원근에서도 모두 이르기를, ‘효자가 효자를 낳았다’ 하였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또 그 행록(行錄)에 이르기를 “집에 있어서는 극히 검소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매우 온공하였으며, 아들을 가르침에는 엄정하였고, 일처리는 상밀(詳密)하였으며,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위선사에 성실하고, 손님 접대는 후히 하였다.”고 하였다. 공의 휘는 재황(再璜)이니, 유황(有璜)은 그 초휘(初諱)이다. 선대는 김해대성(金海大姓)이고,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후예이다. 9대조는 현감 대장(大壯)이요, 7대조는 진사 치삼(致三)이며, 증조의 휘는 봉장(鳳章)이요, 조부의 휘는 정휘(廷輝)이며, 고(考)는 현응(顯應)인데, 응철(應喆)이라 한 것은 초휘(初諱)이다. 비(騙)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을사(乙巳, 정조 9, 1785) 9월 8일에 태어나 갑인(甲寅, 철종 5, 1854) 2월 4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진안 상전면(上田面) 월포리(月浦里) 양지촌(陽地村) 안산 백운동(白雲洞) 사좌(巳坐)에 있다. 배위 사천 김씨(泗川金氏)는 대규(大奎)의 따님이다. 아들은 국승(國昇)·국중(國仲)·국화(國化)·국종(國宗)이요, 손자는 창조(昌祚)·창호(昌浩)·창구(昌九)·창석(昌錫)·창룡(昌龍)·창원(昌元)·창중(昌重)·창남(昌南)이다. 나는 그 현손 용배(容培)의 청탁으로 일찍이 공의 대인(大人, 아버지)의 비에 명을 한 바 있는데, 용배가 또 공의 비에 명을 해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위선(爲先)하는 성의가 지금 사람으로서는 미칠 수 없는 바가 있기에, 내가 비록 90세의 극로(極老)로 귀까지 어두우나 이성(醒性)이 있는 바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명을 다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인자함은 아비의 도리요 / 효도는 자식의 직책인지라 / 상장(喪葬)에 예를 다하고 / 공양(供養)에 힘을 다함은 / 이치의 당연한 도리일진대 / 구태여 거론할 것 있겠냐마는 / 세상은 못되고 풍속은 그릇되어 / 사람마다 이욕에 빠져서 / 부모를 잊고 은혜를 등지며 / 금수(禽獸)의 소굴로 변해가니 / 공같은 드높은 행실을 / 어찌 끝까지 치켜올려서 / 무너진 기장 진작하고 / 세속을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 공이여 / 천만년 내세까지 / 이름이 묻히지 말지어다.” 기해(己亥, 1959) 4월 하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이 찬하다.
  •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8cm, 너비 43cm, 두께 18cm.
    【개요】 김용섭(金容燮, 1889~?)의 자는 선경(善京). 호는 해산(海山), 본관은 김해로써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후손으로 효자 재황의 현손이다. 이 비에는 김용섭이 종족을 위하여 힘쓴 일을 기록하였다.
  • 【비표】 縣監鄭侯基春淸白恤民不忘碑(현감정후기춘청백휼민불망비)

    【위치】 부귀면 부귀로 83(봉암리 548-5) 신촌마을회관 옆 민가 담벼락
    【시기】 1865년
    【형태】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2cm.
    【개요】 정기춘(鄭基春)은 진안현감으로 1864년 7월에 부임하여 1865년 8월에 이임하였다. 재직시 백성들의 부역ㅇㄹ 감해준 공으로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