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全州林應煥積善碑(절충임응환적선비)

    【위치】 부귀면 하수항길 6. 민가 내 담장 안.
    【시기】 동치 6년(1867)년 정묘(丁卯)
    【형태】 비신(碑身) 높이 113cm, 너비 38cm, 두께 16cm.
    【개요】 같은 집 울 안에 임응진의 비와 나란히 서 있다. 임응환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동리 사람들에 의하면 이 분들이 예전에 전주쪽으로 가는 길을 잘 딲고 정비했다고 한다. 비의 후면에는 同治 6年(1867) 정묘(丁卯)(丁卯) 도유사(都有司) 장(2자 판독불능), 유사(有司) 朴順福이라 刻해 있다.
  • 【비표】 前資憲大夫尹公致昊施惠不忘碑(전자헌대부윤공치호시혜불망비)

    【위치】 부귀면 거석리 729. 부귀로변 대창정미소 동쪽.
    【시기】 1929년 2월
    【형태】 윤치호 흥학불망비와 좌우로 나란히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5cm, 너비 54cm, 두께 14cm.
    【개요】 비의 좌우에는 “耕玆土足食莫匪之恩之德 登此校牖智識 宜乎載頌載勅”라고 적혀 있다. 풀이하면 “농사를 지을 땅이 있어 배부르게 된 은덕은 더할 바 없고, 이 학교에 등교하여 지식을 배우게 하니 마땅히 길이 칭송하고 역사에 실리리라.”라는 뜻이다. 비의 후면에는 “기사(1929) 2월 일(己巳 二月 日, 五龍里, 鳳巖里. 弓項里 小作一同)”라고 비를 세운 일자와 리명이 새겨져 있다. 윤치호는 한말 개화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부귀면 땅에 상당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소작료를 경감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년의 친일행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비표】 前資憲大夫尹公致昊興學不忘碑(전자헌대부윤공치호흥학불망비)

    【위치】 부귀면 거석리 729. 부귀로변 대창정미소 옆(동).
    【시기】 1931년 3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7cm, 너비 47cm, 두께 14cm.
    【개요】 윤치호는 한말 개화파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부귀면 땅에 상당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부귀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소작료를 경감해 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만년의 친일행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문】 設學校毓英才 實當世之急務 而顧此本面僻在荒陬 民窮且窶 興學未曰矣 何幸尹公以萬金巨額 特施厚蠲 俾爲公校之資凡百 維持迨今二載而聰俊子弟 朝益暮習 日後國家之需用 將拭目可睹矣 吁其盛哉 峨峨雲山 不足爲高 洋洋錦流 不足爲淸 略擧梗槪如右
    昭和六年 三月 富貴面 代表人 白南虎
    【풀이】 학교를 세워 영재를 기르는 것은 실로 당세의 급한 일인데 돌아보니 본면은 벽지에다 황폐한고로 백성이 궁핍하여 아직 학교를 세우지 못했는바 다행히도 윤공이 만금의 거액을 특시(特施)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재를 구비하여 수업함에 2년에 이르니 총준(聰俊)한 자제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습하여 장래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목이 될 것이다. 아, 거룩한 일이로다. 아아(峨峨)히 구름덮힌 높은 산도 이보다 높지 아니하고 양양(洋洋)한 금류(錦流)도 이보다 맑지 않으리로다. 이를 간략히 우(右)와 같이 적는다.
    소화 6(1931)년 3월 부귀면 대표인 백남호(白南虎, 당시의 부귀면장)
  • 【비표】 折衝林應振種德碑(절충임응진종덕비)
    【위치】 부귀면 하수항길 6[수항리]. 민가 내 담장 안.
    【시기】 을해(乙亥, 1875)년 3월
    【형태】 비신(碑身) 높이 113cm, 너비 38cm, 두께 16cm.
    【개요】 같은 집 울 안에 임응환의 비와 나란히 서 있다. 임응진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동리 사람들에 의하면 이 분들이 예전에 전주쪽으로 가는 길을 잘 딲고 정비했다고 한다. 종덕비(種德碑)라는 말도 드문데 종덕은 ‘남에게 은덕(恩德)이 될 일을 행(行)함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