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효자 김현응 기적비(孝子金顯應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66 hit
【비표】 孝子金海金公顯應紀蹟碑(효자김해김공현응기적비)

【위치】 부귀면 두남리 524-1 원두남마을 어귀 숭조재 앞.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7cm, 너비 54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金公諱顯應 初諱應喆 以淳實之資 有卓爾之孝 所居里面 迭薦之郡 郡薦之道 將以啓聞 而値世多變 未蒙天褒 人皆惜之 公自幼性孝 甘旨不以貧窶闕供 定省亦未嘗一日廢 愉色婉容 每以悅親爲事 丁巳冬 親癠彌連數朔 醫言鱉可以補元 公出而博謀 氷凍不得 忽淺灘氷解 二鱉自出 用之卽效 又於戊午親患 如醫言求鴨 鴨自墜 快得勿藥之效 兩親以天年終 而每於病劇之際 嘗糞驗症 裂指注血 亦累矣 其先金海人 有諱伉 官判官 有名于麗季 太宗朝 盆城君諱湑生 節孝諱克一 是生執義諱孟 是生濯纓諱馹孫 是生縣監諱大壯 縣監孫進士致三 公之六世祖也 曾祖諱聲武 祖諱鳳章 考諱廷輝 妣慶州金氏父化年 公以 英祖辛酉八月十六日生 庚午十二月十三日卒 葬在鎭安富貴面斗南里村后北麓丙坐原 配慶州鄭氏 相周之女 男再璜 亦以孝名 孫國昇國仲國化國宗 日 其五代孫容培 携其狀軸 訪余南安山房而曰 祖考至行 若是其卓 而未蒙 天褒 世以爲齎恨 而顧今時所欲顯揚者 碑以紀蹟 樹之閭里 願先生有以惠一言也 余爲之言曰 子孫苟賢 人必曰某也有后 其顯揚孰甚焉 君等孝子之後 孝悌爲務 克世其家 則公之名 不以碑之有無 而有所輕重也 旣以是勉之 又撮其來狀 序之如右 系以銘曰 至誠所到 金石可透 鱉出鴨墜 無足爲怪 王氏氷魚 豈獨專美 我朂其後 孝弟不弛 我銘其石 令名不已 己亥仲呂之月下澣 全義李炳殷撰
【풀이】 김공(金公) 휘 현응(顯應)의 초휘(初諱)는 응철(應喆)이니 순실한 바탕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마을과 면에서 군에 천거하고, 군에서는 도에 천거하였고, 도에서는 조정에 계문(啓問)하려 하였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임금의 포양을 받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러워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감지(甘旨, 맛있는 음식)를 올리지 않을 때가 없었고, 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도 단 하루 거르는 일이 없었다. 웃는 얼굴과 밝은 낯빛으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정사년(丁巳年, 정조 21, 1797) 겨울에 부모의 병환이 여러 달 지속되었다. 의원의 말이 자라만이 원기를 보할 수 있다 하나. 공이 널리 구하였으나 얼음이 얼어 구할 수 없었다. 뜻밖에 옅은 여울에 얼음이 풀려 자라 두 마리가 저절로 튀어 올랐다. 그것을 잡아 약을 쓰니 병이 즉석에서 나았다. 또 무오년(戊午年) 친환(親患) 때에는 의원의 말을 듣고 오리를 구하였는데, 오리가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그것으로 병이 쾌히 나아 양친이 모두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쳤다. 그리고 매양 병세가 위독할 즈음에는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공의 선대는 김해인(金海人)으로 휘 항(伉)은 판관(判官)으로 고려 말엽에 이름이 있었고, 태종조에는 분성군(盆城君) 휘 서생(獲生)과 절효공(節孝公) 휘 극일(克一)이 있었다. 절효공이 집의(執義) 휘 맹(孟)을 낳고, 이 분이 탁영(濯纓) 휘 일손(馹孫)을 낳았으며, 일손이 현감 휘 대장(大壯)을 낳고, 현감의 손자는 진사 치삼(致三)이니, 이분이 공의 6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성무(聲武)요, 조부의 휘는 정휘(廷輝)요, 비(騙)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화년(化年)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신유(辛酉, 영조 17, 1741) 8월 16일 태어나 경오(庚午, 순조 10, 1810) 12월 13일 사망하였다. 묘소는 진안(鎭安) 부귀면(富貴面) 두남리(斗南里) 마을 뒤 북록(北麓) 병좌원(丙坐原)에 있다. 배위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상주(相周)의 따님이다. 아들 재황(再璜)은 역시 효성으로 이름이 있었고, 손자는 국승(國昇)·국중(國仲)·국화(國化)·국종(國宗)이다. 어느 날 그 5대손 용배(容培)가 공의 장축(狀軸)을 가지고 남안산방(南安山房)으로 나를 찾아와서 이르기를 “우리 5대 조고의 지극한 행실은 그토록 고상하였으나 조정의 포장(鷸奬)을 얻지 못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돌이켜 오늘날 현양(顯揚)하고자 한다면, 비에 사적을 기록하여 마을 앞에 세우는 길밖에 없겠으니,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한 말씀 해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자손이 어질면 사람들은 으레 ‘아무개는 뒤가 있다’고 말하는데, 현양하는 도리는 무엇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그대들은 효자의 후손으로 효제(孝悌)에 힘써 잘도 가풍을 이어오고 있으니, 공의 명성이 어찌 비가 있고 없고에 더하고 덜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가위 이로써 면려하고 또 가지고 온 장축을 간추려 위와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다는 바이다. 명에 이르기를, “지성(至誠)이 이르는 곳엔 / 금석(金石)도 뚫리나니 / 자라가 솟아나고 오리 떨어짐이 / 하나도 괴이할 것 없으련만 / 그런데 왕씨(王氏)의 잉어만이 / 어찌 고금에 훌륭하다 칭하는가. / 나는 그 후손 면려하여 / 효제에 해이함이 없게 하고 / 또 그 돌에 명을 새기나니 / 영명(令名)은 다함이 없으리로다.” 기해(己亥, 1959) 4월 하순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