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김억석 효자비(金億錫孝子碑)
운영자 23-12-22 14:20 64 hit
【비표】 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金公億石孝子之碑(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김공억석효자지비)

【위치】 부귀면 오룡리 454-3. 오산마을앞 나들목 로타리 안.
【시기】 1890년
【형태】 모친 전주이씨 효열비 우측에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0cm, 너비 40cm, 두께 16cm. 비석에는 비문이 없다.
【개요】 효자 김억석은 그 아들 재성(載聲)이 임금의 어가행차에 징을 울려 호소하니 1888년 예조에서 그 모친의 효행과 더불어 정려를 내렸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따로 옆에 새로 세운 정려문에 실려 있다.

【정려문】 대범 사람의 행실로 효도만 한 게 없는데 효도 중에도 특이한 효도가 있으니 옛날 왕상(王祥)이란 사람은 얼음을 두드리며 물고기를 구하니 두 마리의 잉어가 튀어나왔고, 맹종(孟宗)이란 사람은 눈을 밟고 울면서 죽순을 구하니 바로 죽순이 솟아올랐다 하니 비록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동한 소치라 해도 특이한 사적이 아니리요. 근자에 또 특이한 효행이 있으니 진안에 거주하는 김호연(金浩鉉, 億錫)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던바 나이 겨우 7세 때 그 모친이 시어머니의 대상을 마치고 시렁에 목을 매었더니 잠자다 놀라 일어나 목맨 줄을 풀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요행이 회생이 되었으니 이 역시 어릴 때 효성이 지극한 일이다. 모친이 병으로 누워 과일 중에 오직 생밤이 먹고 싶다 하나 때는 봄철이었다. 즉시 밤나무 아래 축단을 하고 목욕재계한 뒤 주야기도를 하였던 바 홀연 밤나무가지 하나가 개화 수일 후 아홉 송이나 결실하니 이를 따 모친에게 드리니 바로 병이 나았다고 하니 이 역시 효성이 특이한 일이다. 그 모친이 수를 다하고 임종하려 하매 다시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이니 어찌 범인들이 행할 일인가. 초종을 마친 후 마을 앞 소죽봉아래 깊은 골짜기에 출빈하고 저녁밥을 먹은 뒤에는 그 빈소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며 빈소 아래에 장례를 모시고 출빈한 날부터 육년간을 풍우도 피하지 않고, 추위와 더위도 가리지 않고 저녁에 가서 새벽에 돌아오기를 초종날처럼 하였다. 중간에 냇가가 있었는데 날 저물어 건너면 호랑이가 마중하였다가 밤을 같이 세워주었으니 이 역시 효성에 감동된 바라 대강을 들어 말하였으나 그 효행의 독실함이 왕상이 잉어를 얻은 일과 맹종이 죽순을 얻은 일보다 못하지 않음이라 이에 유림들이 방백에게 알리니 포창을 하고 위에 올려 특별히 정려를 내려주시고 관직의 교지를 하사하니 가선대부행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嘉善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이요, 또한 위로 3대까지 관직을 추증하니 부 치권(致權 자 尙仲)에게는 증(贈) 가선대부 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 조부 선징(善徵)에게는 증(贈) 통정대부 공조참의(通政大夫工曹參議), 증조부 구정(龜鼎)은 증(贈) 통훈대부 절충장군 사복시정(通訓大夫折衝將軍司僕寺正)이었다. 유생 중에서 나에게 그 기문을 써주기를 청하는 이가 있어 내 생각건대 진술에 재주는 없으나 착한 행실을 표창하는 일을 가리기 어려워 그 행실을 드러내 대강 실상을 기록하노라.
찬 정려문(撰旌閭文)
저 정려를 보건대 두 번이나 손가락을 잘랐고 / 오직 효행이로다. 아홉 송이 밤이 열리도다. / 저물녘 내를 건너면서 육년을 가고 오니 / 범이 나와 마중한지라 지극한 정성이로다. / 군(郡縣)이 흠탄하고 위로 궁궐에 주달하니 / 유림이 추천하여 영예로운 이름이 하사되었다. / 남다른 저 효성이여 흠모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 누가 감히 논평하랴 그 뜻을 찬양하리라.
임진(1892) 4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