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상전면 용평리 73임. 대구평마을 어귀.
    【시기】 186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5cm, 너비 47cm, 두께 23cm.
    【개요】 본디 상전면 월포리 대구평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이건되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噫 千古人臣之效節立殣者 何限而且偉乎 謹按余跡閱武科宣傳官訓鍊副正吏曹參議 贈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左贊成原陵君原州元公諱升吉字平仲號南溪 仁祖丙子亂公與弟佐郞諱頤吉 從其大人工判 贈褒典迪毅殉節亨難功臣勳一等議政府領議政兼領平原君謚忠毅諱成模 幷臨難不懼 竭力君親賊益却迫 丁丑正月十三日 殉節于安山德物島 策勳一等 系出 上祖 由國子進士知門下侍中諱弘弼 四傳而大提學原山君諱滉后 文科行吏判世子師兼帶諱繼儉 生參贊公諱虎英孫也 奕世勳業 卓然爲海東望族 而十世相望之間 旌忠褒孝 代不絶書 公性謹謙精 受業于忠貞公李弘冑之門 早藝文科 孝友節義 出而樹勳仗義 入則守志盡性 高行長德 且偉乎彰明矣 事蹟詳載議政左贊成公金幹撰 兵燹之餘 世代浸遠 群行其德 愈久泯歿不傳 謹放政院日記 及幽堂之誌 金公之撰 奇徵豈不感美哉 忠毅公墓在安山馬遊面梨津里 配貞敬夫人長水黃氏 丑坐合祔 翼成公厖村諱喜后 郡守鶠女 卽公考妣也 神道碑誌文事蹟 判書李光迪撰 大司諫李敎寅書 公墓在公兆左側丑坐 配貞夫人陵城具氏 文節公諱鴻后 宣傳正女 育一男 于時夫人聞報 冒矢石 自誓下從 子通德郞諱光玉幼孩 亦翼蔽號哭 賊亦義而不犯 夫人以不死不之幸 而養生送死之禮克終 抱終身之寃 率子入于玉川臥隱洞卒 墓在龍坪里雲巖山甲坐原 子孫居鎭安長水等地 蕃衍大家 嗚呼 人家將興 必有先庥 三父子一般貞忠 卓乎偉哉 此夫人性嚴有法度 俱條理 承事閨壺 輔佐君子 以義烈敎導家庭 典模其懿行淑德乎 其后昆昌大也 余在任實而省夫人墓 諸宗請其碑文 而不敢不文辭之 敬以謹述 己巳仲秋上浣日 傍裔孫密陽府使世澈撰
    【풀이】 희라! 천고(千古)에 남의 신하로 충절을 다하고 절의로 세운 사람은 한이 없고 또 훌륭하기도 하였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무과 선전관 훈련도정 이조참의 증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좌찬성 원릉군(原陵君) 원주 원공(原州元公) 휘 승길(升吉) 자 평중(平仲) 호 남계(南溪)는 인조(仁祖) 병자란(丙子亂)에 아우인 좌랑 휘 이길(灑吉)과 함께 아버지인 공조판서 증 포전적의순절형난공신(贈褒典迪毅殉節亨難功臣) 훈1등(勳一等) 의정부 영의정 겸령(兼領) 평원군(平原君) 시호 충의(忠毅) 휘 성모(成模)를 따라 난리에 다다라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더욱 압박하여 정축(丁丑) 정월 13일 안산(安山)의 덕물도(德物島)에서 순절하여 훈1등에 책봉되었다. 상조(上祖)에서 계출(系出)하여 국자진사(國子進士) 지 문하시중(知門下侍中) 휘 홍필(弘弼)을 거쳐 4대를 내려와서 대제학 원산군(原山君) 휘 황(滉)의 후예인 문과 행 이조판서에 세자사(世子師)를 겸대한 휘 계검(繼儉)이 낳은 참찬공 휘 호영(虎英)의 손자이다. 세상을 빛낸 훈업(勳業)으로 드높이 해동(海東)의 명망 있는 씨족이 되었는데, 10대 사이에 충과 효로 정포(旌褒)된 사람이 대마다 끊이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근실하고 겸손하였는데, 충정공(忠貞公) 이홍주(李弘胄)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문무(文武)를 익혔다. 효우(孝友) 절의(節義)하여 나가서는 공을 세우고 충의를 이뤘으며, 들어와서는 지조를 지키고 천성을 다하여 높은 행실과 큰 덕은 훌륭하고도 드러났다. 그 사실은 의정(議政) 찬성공(贊成公) 김간(金幹)이 지은 글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병란을 겪은 뒤에 세대는 차츰 멀어지니, 그 행실과 덕성이 민몰하여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삼가 정원일기(政院日記)와 묘지명(墓誌銘) 및 김공(金公)의 저술을 상고해 보니, 기특한 증거가 참으로 훌륭하고 감격스러웠다. 충의공(忠毅公)의 묘소는 안산(安山) 마유면(馬遊面) 이진리(梨津里)에 있고,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장수 황씨(長水黃氏)를 축좌(丑坐)에 합부(合蟄) 하였는데, 익성공(翼成公) 방촌(蔯村) 휘 희(喜)의 후손인 군수 언(焞)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고비(考騙)이다. 신도비와 지문(誌文)은 판서 이광적(李光迪)이 짓고, 대사간 이교인(李敎寅)이 썼다. 공의 묘소는 충의공의 묘소 왼쪽 축좌에 있다. 배위 정부인(貞夫人)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문절공(文節公) 휘 홍(鴻)의 후예인 선전관 정(正)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부인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따라 죽기로 스스로 맹세하였으나, 아들인 통덕랑 휘 광옥(光玉)이 어린 나이에도 위에서 감싸고 통곡하니 적들도 의롭게 여겨 범하지 않았다. 부인은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고 마지막 보내는 예(禮)를 잘 마친 후 종신(終身)의 원통함을 안고 아들을 데리고 옥천(玉川, 용담)의 와은동(臥隱洞, 평은리)으로 들어와 세상을 마쳤다. 묘소는 용평리(龍坪里) 설암산(雪巖山) 갑좌원(甲坐原)에 있으며, 자손은 진안(鎭安)과 장수(長水) 등지에 널리 퍼져 큰 성씨를 이루고 있다. 오호라! 사람의 집안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먼저 징후가 나타나는 법인데, 3부자(父子)가 똑같이 정충(貞忠)을 드러냈으니 고상하고 슬기로운 일이요, 부인 역시 성품이 엄명하고 법도가 있어 집안 일을 계승하여 다스렸고, 부군(夫君)을 보필하여 의열(義烈)로 가정을 인솔하여 그 의행(懿行)과 숙덕(淑德)이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니, 그 자손이 창성함은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내가 임실(任實)에 있을 때 부인의 묘소를 전성(展省)하니 여러 일가들이 비문을 청하였는 바,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위와 같이 기술하는 바이다.
    기사(己巳, 1869년) 중추(仲秋) 상순 방후손(傍後孫) 밀양부사(密陽府使) 세철(世澈)이 찬하다.
  • 【비표】 忠婢烈女李姓蘭香之閭(충비렬녀이성난향지려)

    【위치】 상전면 월포리 1173-7. 상전망향의 동산.
    【시기】 197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55cm, 너비 35cm.
    【개요】 이난향(李蘭香)은 호조참판 홍습의 사비(私碑)였다. 임란 때 주인인 홍습의 피신처를 왜병의 고문에도 밝히지 않고 혀를 물고 자결한 비(婢) 난향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선조 32년(1604)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지금의 비는 1971년 남양홍씨 문중에서 중건한 것이다. 본디 상전면 수동리 산정마을 옆 넓이 270cm., 높이 150cm.의 큰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으나 용담댐으로 수몰되기에 이르자 상전망향의 동산으로 이건되었다. 이 정려는
  • 【비표】 副知事安甲濬龍月道路開設功績紀念碑(부지사안갑준용월도로개설공적기념비)

    【위치】 상전면 월포리 1173-7. 상전망향의 동산.
    【시기】 1975년
    【형태】 비신 높이 135cm, 너비 45cm, 두께 22cm.
    【개요】 당시 전라북도 부지사였던 안갑준(安甲濬)이 힘써 상전면 용평리 신연마을과 월포리를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해준 공로를 기린 비이다. 당초 신연-월포간 도로변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망향의 동산으로 옮겼다.
  • 【비표】 贈左丞旨安鳳烈妻淑夫人裵氏孝烈碑(증좌승지안봉렬처숙부인배씨효열비)

    【위치】 상전면 용평리 신연마을뒤 죽산안씨 오산파 재각 뒤
    【시기】 1939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16cm, 너비 44cm, 두께 13cm.
    【개요】 배씨는 성주인(星州人) 술영(述永)의 여(女)로 19세에 죽산인(竹山人) 안봉열(安鳳烈)에게 출가하여 22세 남편을 사별한 뒤 아흔 살과 여든 살된 시부모의 공경과 아들의 양육과 교육에 힘썼다. 광무3년(1899)에 숙부인의 교지가 내렸고 1936년 아들 안재문이 수몰되기 이전 신연마을에 비를 세우고 효열각을 지었는데 용담댐 수몰로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 【위치】 상전면 용평리 신연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새로 조성한 신연마을 못미처 국도 30호선 북쪽 산기슭에 이건되었다.
    【시기】 1939년
    【형태】 높이 105cm, 너비 34cm, 두께 8cm.
    【개요】 우제관(禹濟寬)은 일제하 상전면장이었다.
  • 【위치】 상전면 용평리 신연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 수몰로 새로 조성한 신연마을 못미처 국도 30호선 북쪽 산기슭에 이건되었다.
    【시기】 1939년
    【형태】 높이 102cm, 너비 35cm, 두께 8cm.
    【개요】 안재성(安在聖)의 본관은 죽산으로 죽성군(竹城君) 원형(元衡)의 20세손이며,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주열(周烈)의 아들이다. 1939년 군(郡)에 자작농토를 나눠줄 것을 청하여 정천면(程川面) 용평리(龍坪里) 일대에 혜택을 주었다. 그 공덕을 기리는 비를 길가에 세웠는데, 황재묵(黃在黙)이 찬한 음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