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수면 구신리 시동마을에서 신기마을 쪽으로 가는 모롱이 도로변 산기슭에 있는 3기의 비석. 유원규 영세불망비, 이익응 영세불망비, 이중익 영세불망비 등이다.
  • 【위치】 성수면 도통리 352. 목동마을 남쪽.
    【시기】 1919년
    【형태】 높이 87cm, 너비 37cm, 두께 19cm.
    【개요】 습재 최재학(崔濟學)선생이 살며 삼우당(三友堂)을 지었던 곳이다.
    비의 전면에는 삼우동(三友洞), 비의 뒷면에는 우동팔경(友洞八景)이라 해서 ‘鳳浦流雲 麟峰積雪 木洞樵歌 柳川漁火 卵山落照 舟沼歸帆 芝谷暮烟 仙坮明月’이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포유운(鳳浦流雲, 봉황산 위에 흘러가는 구름) / 난산 낙조(卵山落照, 알미산에 비취는 저녁놀) / 주소귀범(舟沼歸帆, 소에서 노닐다가 선창으로 돌아오는 배) / 유천어화(柳川魚火, 동네 앞 버드나무 냇가에서 밤고기 잡는 횃불) / 목동초가(木洞草歌, 목동마을의 초동들이 부르는 노래) / 지곡모연(芝谷暮煙, 지곡마을 저녁밥 짓는 연기) / 선대명월(仙坮明月, 달밝골에 떠오르는 보름달) / 인봉적설(麟峰積雪, 성수산의 하얀 설경)’의 뜻이다.
  • 【비표】 愛國志士習齋崔濟學先生紀念碑(애국지사습재최제학선생기념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352. 목동마을 남쪽.
    【시기】 1987년
    【형태】 높이 177cm, 너비 60cm, 두께 32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이곳 삼우당(三友堂)은 명문 탐진 최씨의 터로 효계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온 곳이며, 또 을사조약 직후에 의열에 불타던 최제학(崔濟學) 선생이 그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받들고 호남 최초로 의병활동을 준비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중열(仲悅)이요, 호는 습재(習齋)이다. 1882년 3월 아버지 성호(成鎬)와 어머니 흥덕 장씨의 차남으로 이곳 목동에서 태어나시었다. 일찍이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 들었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을 받들던 중 면암을 흠모하여 사제의 의리를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곧 면암과 송사를 찾아 구국의 계책을 품의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남(秀男) 고석진(高石鎭)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泰仁)의 종석(鍾石)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임실태수 조규하(趙奎夏), 운봉주서 박봉양(朴鳳陽), 영남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화개 강두령(姜頭領)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약천(若川) 제태(濟泰)와 함께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일제의 눈을 피하였으니, 그 같은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 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진과 동시에 일광(一狂) 정시해(鄭時海)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가 면암은 3년, 돈현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극진히 간병하다가 면암이 순국하시니 장례를 극진히 모시었다. 고향에 돌아와 고산(高山) 윤자신(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단기 4284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청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단기 4292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 역사 속에, 그리고 나라를 잃은 통분 속에,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 충렬과 정의에 몸부림치다가 돌아가시었으니, 이 의롭고 빛나는 일생을 기리어 작은 이 돌에 선생의 행적 일부나마 새겨 이 나라 자손 만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단기 4321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장 최창규(崔昌圭) 지음. 광복회원 정상렬(鄭相烈) 씀
  • 【비표】 興德張氏孝烈碑(흥덕장씨효렬비)
    【비표】 耽津崔公致瑞紀蹟碑(탐진최공치서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631-1. 원도통마을 어귀 외자로변.
    【시기】 1973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고,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0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이 비는 부강문(扶綱門) 내에 흥덕장씨와 아들 최치서 기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흥덕장씨 효열비(興德張氏孝烈碑)
    【비문】 月浪之鄉 木洞之里 孝烈婦張氏 莊景公 思全後 景祚妻也 太師公吉後 穉和女也 生長深閏 以嬿婉聞及其鳩居 事親極孝 奉夫克敬 愛育前配稚子 而奄作朝露 淚目未乾 隣里稱其賢 年卄三 夫病 垂絶注以指血 啖以股肉 甦延三日 而卒即欲下從夫 昏迷몽語曰 吾死命也 婦人今有身生而保育奉先立後則孝烈得矣只以殉從爲心則不過徑情之行吾何瞑目於隂界乎婦人恪遵遺志飮泣抱痛葬祭踰禮固守召史之節每於夫日悲痛如初終生子致瑞不以恩掩義使之摳衣於勉菴崔先生門篤修學業先生舉義誓死同盟力說熊掌之辨嚮導衛正斥邪之義一生一心飮恨而終鳴呼母以孝烈子以忠義孫以闡先流休範於季世綱常大道華在一家冝乎儒林薦之載錄載誌而余以文拙不得發揚光輝何遂銘曰 法家閨養 天姿端淑 惟孝惟烈 本於天植 夫病贍護 漸至危劇 不心己心 夫戒懇篤 指血無靈 繼以股肉 大命有限 竟至晝哭 大賢門下 命子修業 先生舉義 俾參盟錄 義氣撑空 衛正斥邪 以之報師 以之報國 翼然豎碑 爲世柯則
    檀紀四千三百十六年癸亥應鍾月上日
    晋陽河千秀 謹撰 金海金鍾寬 謹書
    【풀이】 월랑땅 목동마을의 효열부 장씨는 장경공 사전의 후예인 경조의 아내인데 태사공 길의 후손인 치와의 따님이다. 원래 양반 가정의 규수로 마음씨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출가함에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고 부군을 공경스럽게 받들 뿐 아니라 전실 소생의 어린 자식까지도 사랑으로 정성껏 보살펴 이웃 사람들로부터 어질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나이 스물 셋에 부군께서 병을 앓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허벅살을 베어 바치는 등 갖은 정성을 기울여 사흘 동안이나 꺼져가는 목숨을 연장시켰고 돌아가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군께서 혼미한 중에 부탁하기를 “나의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 부인은 지금 홀몸이 아니니 딴 뜻을 두지 말고 뱃속의 아이를 낳아 잘 길러 대를 이은 즉 효열을 얻을 것이라, 다만 나를 따라 목숨을 끊을 마음을 먹는다면 이는 곧 사사로운 정에 끌리는 행동일 것이오. 내 어찌 음부에서나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오?” 하였다. 이에 부인은 부군의 유지를 받들어 비통한 마음을 달래며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홀어머니로서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 항상 비통한 마음을 한결같이 두었다. 이처럼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치서를 엄히 가르치어 장성함에 면암선생의 문하로 보내어 학업에 열중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뜻을 같이 하여 의리를 부르짖고 정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우며 한 평생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나라 잃은 한을 머금고 이생을 마치었다. 오호라! 어머니는 효열로 살고, 아들은 충의로 살고, 손자는 선영을 드러내는데 힘써 이 말세에 모범이 되고 강상대도가 온 집안에 빛나도다. 이에 유림은 이를 마땅히 여겨 각종 책에 기록한 바 있는데 나는 짧은 글로 이러한 사적을 다 들출 수 없어 몇자 새김을 붙여두노니, 銘曰, 법도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나 / 품으신 마음 곱고 고왔네 / 이처럼 효열스런 그 마음도 / 타고난 천성일 터라 / 깊어지는 님의 병을 / 정성껏 돌보다가 / 하릴없이 되고보자 / 님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 두었네 / 손 끊고 살 베어도 / 어찌할 수 없노니 / 인명은 재천인가. / 그만 홀로 되었네 / 크신 스승님께 / 귀한 자식 보냈거니 / 스승님 크신 뜻에 / 목숨 바쳐 뒤 따랐네 / 의로운 기운은 하늘을 뚫고 / 올바른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니 / 스승님께 보답하고 / 나라위한 일이었네 / 거룩한 부인의 뜻 길이길이 비에 새겨 / 어지러운 이 세상에 법도를 삼아보세.
    단기 4306(1973)년 계해 10월 상일
    진양 하천수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

    탐진 최치서 기적비(耽津崔致瑞紀蹟碑)
    【비문】 勉庵崔先生 道學文章 忠孝節義 與日星並耀門多 耽津崔氏其縁由則習齊崔公濟學 勉庵舉義 爲招募迎入 此地 紏合同志 傾産籌備 故自然一門成蹊 耽津崔公 諱致瑞 字泰眞 亦其一也 及夫先生倡義 公與諸友歃血叅 同盟誓死 從先生於矢石 爲義㤀軀 先生被執繫 馬島抗賊 不食倭粟 而歿 公以精神 貫日華夷 見氣節凌霜 天地知之句 痛哭而加麻 一生一心仰慕 虎頭燕頷之風 常誦楚辭 與熊掌章讓彼附倭 知非遷善 臥薪嘗膽 竟至寃逝 崔氏以麗朝大賢 諡莊景 配仁宗廟廷 諱思全 爲始祖 贈戶曺叅判 諱萬成后 德多載 先代狀碣故 略之 公之事親 孝爲國忠 尊師義特出 於天賦之性 鄉省章甫議曰 挽回世途 五儒之責孤忠苦節之可以爲模範 於人者 是爲警俗之金柝 耽津崔公 嘉行徽蹟當闡 而揚之鐫而傳之 仍使其子 龍鉉 璟鉉 齎遺事與諸斯文來 余責其銘噫此豈如 余愚迷者所敢承當者乎 然余嘗欽慕公之歷履銘 諸肝肺且 不得辭諸賢之命 孝子之誠遂拜 銘曰 孝篤行潔 餘事文章 先生舉義 誓心従之 棟樑遽摧 一木難支 仁天下助 萬邦含悲 臥薪嘗膽 遹追先師 公議竣發 豎此穹碑
    歲昭陽大淵獻之上月下絃 慶州金正復謹撰 金海金鍾寬謹書
    【풀이】 면암 최익현선생의 도학문장과 충효절의는 해나 별과 더불어 빛날 것인데 그 문하에는 탐진최씨가 많다. 그 이유인즉 습재 최제학이 면암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초모장이 되어 선생을 이 땅으로 모시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가산을 기울여 의병활동을 준비했기 때문이라 자연히 한 집안이 뒤따라 모였던 것이다. 탐진최공 치서의 자는 태진이니 이도 또한 그러한 연유로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면암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뒤를 따라 의를 위해서 한 몸을 버리기로 작정한 바 있었고, 면암께서 대마도로 붙잡혀 가시어 끝내 왜놈의 곡식을 먹지 않으리라고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심에 공은 ‘빼어난 애국정신은 해라도 뚫고, 높으신 절의는 서리보다 더 하다’는 추모시를 읊고, 제자의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다. 이 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항상 면암선생의 풍모를 우러러 사모하며 언제나 굴원의 절개와 맹자의 의리를 읊으며 왜놈에 붙은 간사한 무리들이 돌아설 것과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었다가 마침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원통히 일생을 마쳤다. 최씨는 고려조의 대현 장경공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사전을 시조로 하고, 증 호조참판 만성의 후예로 그 빛나는 행적이 선대의 금석에 적혀 내려오기 때문에 약(略)하거니와 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스승을 높히 받드는 윤리실천이 천성적으로 남달랐다. 그리하여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의론하기를 ‘세도를 만회하는 것이 우리 유림의 책무라 공의 높은 충절은 가히 타인의 모범되고 또 풍속을 일신하는 데에 좋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러하니 탐진최공의 행적을 마땅히 드러내고 금석에 새겨 전함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되는 용현, 경현이 남겨진 사적을 들고 여러 사문들과 함께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매한 내가 어찌 이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편 내 일찍이 공의 지난 사적을 흠모하여 가슴에 새겨둔 바라 어찌 꼭 사양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 다만 제현의 명과 효자의 성의에 따라 기꺼이 명(銘)하노니, 두터운 효심과 맑은 행실이 근본이요 / 글공부는 다음이라 / 선생의 거의에 / 마음 다해 따랐으나 / 대들보 무너짐에 / 한 나무로 버틸까? / 하늘도 무심하지 / 온누리 울었네 / 나라를 못잊고 / 선생을 못 잊었다니 / 높으신 공의 뜻을 / 이 돌에 새겨두오
    癸亥 시월 하순 경주 김정복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
  • 【비표】 嘉善大夫戶曹參判松史崔先生神道碑(가선대부호조참판송사최선생신도비)【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0년 1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2cm, 너비 54cm, 두께 23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풀이】 최만성(崔萬成)의 자는 사추(士樞)요, 호는 송사(松史)로 탐진인(耽津人)이다. 장경공(莊景公) 사전(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세원(世遠)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재기(才器)가 남달랐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듯하면 한 시라도 옆을 떠나지 않고 사당(祠堂)에 들어가 속히 쾌유(快癒)하기를 빌었다.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움에 한 번 들은 글귀는 잊지 아니하고 암송(暗誦)하였으며, 운(韻)을 부르면 곧바로 시문(詩文)을 지어내어 문재(文才)가 날로 훌륭해졌다. 그리하여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온 고을에 떨치게 되었다. 부친께서 병환이 위중하니 보름이 넘도록 약 수발을 정성껏 드리며 밤낮을 불구하고 쉴 줄 몰랐으며,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죽 마저도 입안에 넣지 않고 심히 애통히 하였다. 그리하여 주위에서 억지로 권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집안 형편이 빈한(貧寒)한데도 망극한 일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홀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가 길지(吉地)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 산 아무 향의 자리보다 더한 곳이 없으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문득 깨어나 아침을 기다려 꿈대로 자리를 찾으니, 과연 전날 꿈에 계시 받은 자리가 있기에 온 재산을 기울여 선고(先考)를 모셨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마다 공의 장한 효심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공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 후,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생전의 봉양은 물론 상제(喪祭)의 정성도 시종 여일(始終如一)하여 누구나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평거(平居)에 간중 과묵(簡重寡黙)하여 바깥 사물에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정좌(靜坐)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좌우에 그 글을 모시고 매일 읽고 힘써 행하며, 깊은 뜻을 뒷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 졌으나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갑진(甲辰, 1784)에 사림(士林)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1980년 1월 진양 하천수 근찬
  • 14. 연담거사 최치환 효행비(蓮潭居士崔致煥孝行碑)
    【비표】 蓮潭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연담거사탐진최공치환효행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9cm, 너비 42cm, 두께 21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비문】 孝爲天下萬古之大經, 故堯舜之道, 亦孝悌而己. 盖五品之中, 事親爲首, 故孝爲百行之源, 萬善之本, 而修齊治平, 従此出焉. 豈不爲大經㦲? 由是孝子一出, 則千里之外, 聞風興起, 矧此學文兼備㦲? 曰耽津人崔蓮潭先生, 諱致煥, 字文秀, 高麗平章事謚莊景公諱思全爲鼻祖. 吏部尙書諱應奎, 其中祖也. 五傳諱沃, 以禦侮將軍至麗社旣屋, 抗節不仕, 謚貞簡公, 是生諱臨江, 成均生員. 是生諱膺遇, 中宗祖以扶社原從二等功臣, 官至通訓大夫益山倅, 謚忠貞. 於公爲十四世祖也.高祖諱聖福工曺叅議, 諱養直諱寧諱景老, 高與祖若曾祖, 而并著孝行. 妣安東金氏, 孝著鄕隣, 有三男, 公其長也. 憲宗丁酉正月七日擧公于第, 自幼志學, 以尊聖模賢四字, 爲脈膺, 而篤孝其親, 輕暖甘脆, 盡其口體之養, 其考遘奇疾, 百方治療, 病勢愈重, 愛護若嬰孩, 大小便躬執其器, 一不委人, 十二年如一日, 而醫云鳶肉好, 故公廣求至數百里外, 而終不求, 回路中, 數三兒童, 戱鳶而遊, 故重價買歸, 和藥進之, 果得其効. 後又沉重公, 又出外求藥, 而當村前潦水汎漲, 勢不能渡, 公號天哀訢, 水忽中斷, 蒼黃急渡, 洎至江畔, 水漲復合, 天地感應, 無加於此, 烏不可壯哉? 一日氣息頓絶, 公以血指連灌, 能禾魚蘇 三日, 終遭故, 哀痛過禮而執喪如禮, 其大夫人患腫六七朔, 吮之而拔根, 生新以安餘年, 洎丁憂三年間, 一如先考喪, 鄕隣亟稱其孝, 而鄕道交薦, 宜有天褒而運蔑未蒙, 此所以汲汲於銘石, 而其孫漢洙, 要役於余, 余亦秉彜所存, 豈敢辭之固耶?據其鄕儒上書道儒發文, 而書其所感, 一以頌彰孝爲先之道, 一以警㤀祖叛經者, 而系之銘曰, 高矣蓮潭 孝源曾閔 兼備學行 阿誰不式 名傳萬年 公得其詮 聿修燦然 賢人之阡. 歲昭陽大淵獻之 上月 下絃 慶州 金正復 謹撰 金海 金鍾寬 謹書.
    【풀이】 효(孝)는 천하(天下)에 만고(萬古)토록 변하지 않는 대경(大經)이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의 도리도 또한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대체로 오품(五品) 중에 사친(事親)이 가장 우선이 되는 까닭에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근본이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어찌 대경(大經)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효자가 한 명 나오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분은 학문(學文)까지 겸비하였음에랴. 탐진(耽津) 사람 최연담(崔蓮潭) 선생은 휘(諱)가 치환(致煥)이고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장경공(莊景公)인 휘(諱) 사전(思全)이 비조(鼻祖)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휘 응규(應奎)가 그 중시조(中始祖)이다. 이로부터 5세(世)를 전하여 휘 옥(沃)은 어모 장군(禦侮將軍)으로서 고려 왕조가 이미 망하자 절의(節義)로 항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이 분이 휘 임강(臨江)을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이 분이 휘 응우(膺遇)를 낳았는데 중종(中宗) 때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한 2등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서 벼슬이 통훈 대부(通訓大夫) 익산 현감(益山縣監)에 이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분이 공에게 14세조(世祖)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휘가 성복(聖福)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휘 양직(養直)과 휘 령(寧)과 휘 경로(景老)가 선고(先考)와 조(祖) 및 증조(曾祖)인데 모두 효행(孝行)으로 드러난 분들이다.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효심이 향리와 이웃에 알려졌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장남이다. 헌종(憲宗) 정유년 정월 7일에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인을 존경하고 현자를 본받는다[尊聖模賢]’는 네 글자를 맥락으로 삼아 가슴 속에 품었으며 어버이에게 매우 효성이 깊어서 가벼운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와 달고 연한 음식 등을 장만하여 부모의 입맛과 몸에 맞는 것들을 모두 봉양하였다. 공의 선고(先考)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세가 갈수록 중해지니 마치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듯이 모시면서 대소변을 몸소 자기 손으로 받아내고 한번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12년 동안을 하루처럼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솔개 고기[鳶肉]가 이 병에 좋다.”고 하였으므로 공은 솔개 고기를 널리 구하려고 수백 리 밖에까지 갔다가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애들 서너 명이 솔개를 데리고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고는 비싼 값을 주고 사갖고 돌아와서 약에 섞어 선고에게 드리니 과연 그 효험을 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은 다시 약을 구하려고 밖에 나가보니 마을 앞에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하늘에 울부짖으며 애달프게 호소하니 냇물이 갑자기 흐름이 끊겼다. 이에 공은 급히 서둘러 내를 건너 건너편 강가에 이르자 냇물이 다시 합쳐져 세차게 솟구치며 흘렀으니 하늘과 땅이 공의 효심에 감응(感應)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하루는 부친의 숨[氣息]이 갑자기 끊기자 공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연거푸 부친의 입속에 흘러들게 하여 사흘간 소생시켰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자 예법보다 지나칠 정도로 애통(哀痛)하였고 상례(喪禮)도 예법대로 치렀다. 그 대부인(大夫人)께서 6-7달이나 종기(腫氣)를 앓았는데 공이 고름을 빨아내어 뿌리를 뽑아내자 새 살이 돋아나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상을 당한 뒤로 삼년 동안 하루처럼 복상(服喪)하는 것을 선고의 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므로 향리와 이웃이 그 효성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고 향도(鄕道)가 서로 천거하였으니 마땅히 임금의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도 운이 없어서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비석에 새기는 일을 서두른 것이며, 공의 손자인 한수(漢洙)가 나에게 일을 요청하였는데, 나 또한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으니 어찌 감히 고사(固辭)하겠는가. 향유(鄕儒)들이 올린 글과 도유(道儒)들의 발문(發文)에 근거하여 그 느낀 점을 써서 한편으로는 공의 효행을 드러내고 조선(祖先)을 위하는 도리를 칭송하고, 한편으로는 조상을 망각하고 원칙[經]을 배반하는 자들을 경계하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도다 연담(蓮潭) 선생이여 / 효행이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에 근본하였네 / 학행(學行)까지 겸비하였으니 /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않겠으랴 / 명성이 만년토록 전해지니 / 공은 그 설명을 얻었노라 / 이에 반짝이는 비석을 세웠노니 / 어진 분이 묻혀있는 무덤길이네. 歲 昭陽大淵獻(癸亥, 1983) 상월(上月) 하현(下絃) 경주(慶州) 김정복(金正復) 삼가 찬하고, 김해(金海) 김종관(金鍾寬) 삼가 쓰다.
  • 【비표】 學生東萊鄭公相黙之配 / 孝烈婦全州李氏紀績碑(학생동래정공상묵지배효열부전주이씨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산127-1임. 지동마을 남쪽 진입로변.
    【시기】 1985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60cm, 너비 55cm, 두께 5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東萊氏鄭은 望重鰈域이라 吏判公後에 曰有耘谷이라 其諱允泳이 有子相黙이라 早襲庭訓에 而孝而學이라 其齋李氏는 全州是籍에 起沅閨養이요 孝寧後績이라 姿性方潔에 具備四德이라 及其笄歸에 行義加勗이라 冀妻敬極에 陳婦孝篤이라 夫順婦恭에 人稱雙璧이라 和氣蕩蕩에 可期景福터니 夫罹貞疾에 長時蟄伏이라 晝宵贍護에 問醫供藥이라 秦緩無靈에 祈斗誠極이라 若歇無常에 漸至危谹이라 垂之指血하고 亦割股肉이라 夫方殊殊에 曰有懇託이 鰥舅在上에 孝事勤慤이요 稚孤在下에 煦嫗殫力하라 孝慈無欠이면 我可瞑目이라 願言夫人은 鄙意莫逆하라 延至三日에 畢竟皐復이라 夫人芳年이 才二十六이라 矢死靡他을 飜意改革이라 忍痛飮泣에 遵夫約束이라 送終如禮에 泄哀盡哭이라 勞身百役에 耘耔紡織이라 入廚上堂에 洞洞屬屬이라 問何食飮하여 問其寒燠이라 志養體養에 竭誠盡職이라 然而無嗣하니 不孝罪積이라 勸置繼室에 舅氏牢却이라 輕重緩急을 裁判胸臆이라 自爲媒婆하야 周旋親戚이라 幸得淑女하야 俾薦枕席이라 同居未幾에 無望生育이라 曰違所志에 歸守全節이라 夫人挽止에 延拕幾日이라 進舅靈丹에 强輔氣血이라 弄璋有慶에 團圝家室이라 其子相埰가 文藝秀發이라 神明感應은 夫人孝烈이라 風雨滔滔에 世無其匹이라 頌聲載路에 薦狀成軸이라 時制異古에 恩典寂寞이라 何必闡揚이 烏頭赤脚이 公議峻發에 礱此貞石이라 吾友柳川에 抄狀正確이라 導遠泰成은 儒林宿德이요 梱泳相濂은 强近親族이라 遠訪不佞하야 銘詞委囑이라 鍾權成勳이 擔當物力하니 兩婿誠意로 亦可感服이라 辭以老恤이 於心孔赫이라 忘拙書此하야 使歸之刻이라 於休徽蹟은 昏衢孤燭이라
    大韓民國六十七年二月小晦 晉陽 河千秀 謹撰 慶州李容伯 謹書
    【풀이】 동래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명망이 중한 집안인데 이판공(吏判公)의 후손에 운곡(耘谷)이 있다. 휘(諱) 윤영(允泳)의 자식이 상묵(相默)이라 일찍부터 가훈을 익혀 효도하고 학문하였다. 처 이(李)씨는 전주인(全州人) 기원(起沅)의 규수요, 효령(孝寧)대군의 후손이라, 자태는 방정하고 성품은 결백하여 4덕(四德)을 갖췄다. 출가한 후 행의에 더욱 힘써 기처(冀妻)처럼 극진히 공경하고, 진부(陳婦)처럼 효성이 지극하므로 지아비는 순종하고 며느리는 공경함에 사람들이 쌍벽이라 칭했다. 화기가 탕탕함에 경복을 기대함직 하였는데, 지아비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누으니, 밤낮으로 구환하고 의원에 물어 약을 드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북두칠성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했으나, 무상하게도 점점 위독해지니 손가락 피를 먹이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지아비가 죽음에 이르러 말하기를 “홀아비된 시아비가 위에 있으니 효도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오. 어린 아들이 아래에 있으니 힘써 훈육하고 효도와 자애가 무결하면, 나는 편히 눈을 감겠소. 원컨대 부인은 이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라고 하며, 사흘이 지나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인 나이 20의 꽃다운 나이로 지아비를 따라 죽기로 맹세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슬픔을 참고 울음을 삼키며 지아비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하고, 장례를 마침에 예절과 슬픔을 다하였다. 온갖 일을 가리지 않고 김매고 베를 짰으며, 부엌에 들거나 시아비를 뵈면 조심하여 어떤 음식을 잡수실지를 묻고, 춥고 더운지를 묻으며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양함에 정성과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대 이을 자식이 없으니, 불효하고 죄 짓는 일이라 후실을 들이기를 권했는 바, 시아비는 물리쳤으나 경중완급을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매파가 되어 친척들에게 주선한 바, 다행히 숙녀를 구하여 침소에 들도록 천거하였으나 동거한지 얼마가 지나도 생산을 바랄 수 없었다. 그 숙녀가 이르기를 뜻대로 안 되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련다 하매, 부인이 며칠만 기다리라 하고 시아비에게 영단(靈丹)을 드려 강장(强壯)하고 기혈을 돋우어, 아들을 낳는 경사에 단란한 집안이 되었다. 그 아들 상채(相埰)가 문예에 뛰어나니 신명이 감응함은 부인의 효열 덕분이다. 풍우가 도도함에도 세상에는 그와 견줄만한 짝이 없다. 칭송소리 길에 널렸고, 천장이 성축이라 시대가 예전과 달라 정려를 내리는 은전이 없어졌으나 어찌 정려를 세우는 것만이 천양한다 하리요. 비석을 세우자는 공론이 준발하고, 내 벗 유천(柳川, 송승환[宋升煥]의 호)이 행장을 간추린 것이 정확(正確)하니 안도원(安導遠)과 전태성(全泰成)은 유림(儒林)의 덕망가요, 정곤영(鄭梱泳)과 정상렴(鄭相濂)은 가까운 친족(親族)이라. 재주없는 사람에게 멀리서 찾아와 명문을 맡기고 종권(鍾權)과 성훈(成勳)이 물력(物力)을 담당하며 두 사위 성의가 또한 감복이라,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도 마음에 불안하여 졸함도 잊고 이 글을 써 돌아가 각하게 하니, 아름다운 자취는 민몰하지 않아 어두운 거리에 등촉과 같으리. 대한민국(大韓民國) 67년 2월 소회(小晦)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 경주(慶州) 이용백(李容伯) 근서(謹書)
  • 【비표】 孝子兵曹參判天安全公永重之碑(효자병조참판천안전공영중지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71-4. 음수동마을 안 동쪽.
    【시기】 192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24cm, 너비 50cm, 두께 12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子夏曰 事父母 能竭其力 雖曰未學 吾必謂之學 今於湖南全孝子 可謂竭力事親 孺慕不已者也 日 鎭安全友道錫 袖全孝子行狀而造余曰 彰善揚美 人之常情 而今湖南人士 將以全孝子事 不可使湮沒 欲勒石圖存 不可無弁文 要請執事 幸賜一則文以侈之 余旣欽其行 難孤此請 謹按來狀 公諱永重 字化順 號淸溪 官至兵曹參判 其先天安人 武節公諱仁亮 浪軒公諱克禮 工議諱繼宗 其十一代以上也 戶曹參判諱萬錫 其考也 以剛毅之性 兼純實之行 家素貧乏 勤儉治産 專事養親 甘旨溫凊 克供志體 以至睦族齊家 百善兼備 每於貧窮 必施救恤 如恐不及 咸稱萊東山中積善家 其父有患 湯藥煎粥 誠靡不到 其妻金寧金氏 承順夫志 事舅姑以誠 侍癠患 嘗糞禱天 遭艱 廬墓泣血 其子振權 擩襲庭訓 以孝友 見重於鄕里 此其全氏世行之萬一 至於奉祀接賓 各積其宜 爲一方之於式 爲傳播之美談 詩云 孝子不匱 永錫爾類 全門之昌大於來世 必拭目而待之 銘曰 純實其性 卓煢其行 積德行仁 名著一方 賢助肖嗣 振振家聲 丹雘載新 百世欽仰 丙寅仲秋
    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安東金宗漢撰
    【풀이】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가 이르기를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칭하겠다”라고 하였다. 지금 호남의 전효자(全孝子)는 가위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유모(孺慕, 어린이가 부모를 따르듯 함)하여 마지않았다 하겠다. 어느 날 진안의 전우(全友) 도석(道錫)이 전효자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이르기를 “훌륭하고 착한 일을 포양(鷸揚)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지금 호남의 인사들은 전효자의 일을 그대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하여 돌에 새기어 보존하려 하는데, 그러자면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집사(執事, 상대를 높혀서 호칭한 말)께서는 글 한 장을 주셔서 볼품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본래 그 행실을 흠탄해 오던 사람이었기에 청을 저버리기 어려웠다. 삼가 행장을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영중(永重)이요, 자는 화순(和順)이며, 호는 청계(淸溪)인데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선대는 천안인(天安人)으로 무절공(武節公) 휘 인량(仁亮)과 낭헌공(浪軒公) 휘 극례(克禮)와 공조 참의 휘 계종(繼宗)은 11대 이상이고, 호조참판 휘 만석(萬錫)이 아버지이다. 공은 강인한 성질과 순실한 행위를 겸하였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하고 검박하게 살림살이를 꾸려나가 형세를 이루었다. 부모를 섬기는 데에는 뜻을 오롯이 하여 맛있는 음식과 알맞은 거처로 지체(志體)를 잘 공양하였으며, 일가간에 화목하고 집안을 다스림에도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곤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구휼을 베풀되 못 도와서 한이 되는 듯이 하니, 모두가 내동산(萊東山)속의 적선가(積善家)라 칭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약을 다리고 죽을 끓이고 하여 정성을 빠짐없이 다하였는데, 그의 부인 금녕 김씨(金寧金氏)도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은 대변의 맛을 보고 하늘에 비는 등 도리를 다하였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하면서 울음으로 3년을 넘겼다. 그의 아들 진권(振權)도 가정의 교훈을 잘 받들어 효우(孝友)로 고장에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는 전씨 가문이 대대로 행해온 행실의 일면이다. 선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두루 지극함을 보이니, 한 고장의 모범이 되어 많은 미담(美談)으로 전파되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대대로 효자를 점지한다”고 하였으니, 이 후로도 전씨 가문이 반드시 융성할 것이므로 나는 눈을 씻고 기다려 보겠다. 명(銘)하기를 “순실한 성품과 / 드높은 행사로 / 덕을 쌓고 인(仁)을 행하여 / 명성이 한 지방에 드러났다. / 어진 아내 훌륭한 아들에 / 집안의 성화는 자자하구나. / 이에 단청(丹靑)도 새로우니 / 백세토록 흠앙을 받으리로다.” 병인(丙寅, 1926) 중추(仲秋) 숭록대부예조판서원임규장각제학(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안동(安東) 김종한(金宗漢)이 찬하다.
  • 【비표】 孝婦貞夫人金寧金氏之碑(효부정부인금녕김씨지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71-4. 음수동마을 안 동쪽.
    【시기】 1928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24cm, 너비 50cm, 두께 12cm.
    【개요】 위 효자 전영중(全永重)의 처로 비석이 좌우로 나란히 있다.

    【비문】 夫人家之興贊有係於婦人甚綦重聞諸古語而有疑旣而見鎭安郡全家事益信其無疑也 孝烈婦金寧金氏敬順王后敎官溶尙女 天安人孝子兵曹參判全永重妻也 銀紫光祿大夫吏部尙書諱仁亮 戶曹參判諱萬錫夫之世德也 甫齔能知孝順之道 奉幌惟敬惟 女紅婦道 無不設備 鄕里咸稱賢婦人而感而化之者多矣 舅患數年躬檢刀圭 與夫同心祈禱乞代 誠得差效甦延五日 奉夫益勤克進承順之道 晩年家稍饒敎子奉祀一遵古禮 且好施惠每見貧窮必救之恤之頌聲載路 累登儒薦 事載三綱錄及郡誌 噫氏之事蹟只孝烈之爲重備經艱苦 苦心奮勵能使全門昌大於今日由以知天道報施也 不是有 士林之囑叙其事 而爲銘曰 性本仁順 行篤孝烈 勤儉持家 潔貞完節 有子克肖 善繼家聲 煌煌丹雘 赫赫其名
    戊辰十月 上浣
    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安東金宗漢撰
    【풀이】 효열부(孝烈婦) 금녕 김씨(金寧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 교관(敎官) 용상(溶尙)의 여(女)이며, 천안인(天安人) 효자(孝子) 병조참판(兵曹參判) 전영중(全永重)의 처(妻)이다.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휘(諱) 인량(仁亮), 호조참판(戶曹參判) 휘(諱) 만석(萬錫)은 지아비의 조상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순(孝順)의 도리를 행하고, 아녀자의 솜씨를 익혀 향리에서 누구나 현부인감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사부의 병환 수년 동안 약 수발을 힘써 행하고 지아비와 더불어 자신들의 몸으로 대신해 달라고 기도하니 효험이 있어 5일간을 연명하였다. 지아비를 받들어 열심히 노력하니 만년에는 집안이 넉넉하여지고 아들 교육과 제사를 받드는데 가례가 있었다. 또한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남의 빈궁한 것을 보면 반드시 도와주니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널렸더라. 여러 번 유림에서 추천이 있었고, 이 일이 삼강록 및 군지에 실려 있다. 희라! 김씨의 효열 사적은 간고한 가운데서 행해졌고, 고심(苦心) 분려(奮勵)하여 전씨 문중을 창성케 하였으니, 천도가 보응한 것이라 하겠다. 사림에서 그 일을 서(敍)해 달라 부탁하니 이에 명하기를 “성품이 본시 인순하여 효열의 행의가 독실하였네. / 근검히 집안을 꾸려오고 처신함이 깨끗하니 / 자식들도 뜻을 받들고 가성을 잘 이어오네. / 정려가 황황(煌煌)하고 그 이름 혁혁(赫赫)하도다.” 무진(戊辰) 10월 상순 숭록대부예조판서원임규장각제학(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안동(安東) 김종한(金宗漢)이
  • 【비표】 訓練大將嘉齋全公諱東屹神道碑(훈련대장가재전공휘동흘신도비)

    【위치】 성수면 내곡길 69-4[신기리] 광국재 경내.
    【시기】 1984년
    【형태】 비갓과 거북 대석(臺石)이 있다. 160cm, 두께 58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奧我 孝宗大王 以攘斥北虜 興復帝室 爲己任側席求賢 恤民鍊兵將雪深讐 而造弘業 於是先正臣 尤菴宋先生 起自布衣 爲王賓師 延攬英豪 奮圖事功時則有嘉齋全公東屹 卽湖南三傑之一也 將擢用不次以規進取旣而弓劍奄忽天下事無復可爲者矣 自後公外仗六閫之節內爲五營之帥 八域晏然享樂昇平 然識者以公未展頗牧之志虛老管葛之材至今嗟惋不己焉 公字士卓 天安人 百濟歡城君諱聶之後 天安府院君諡忠敏 諱樂爲 勝國顯先也 中世有諱文軾 文政堂文學 倡明道學 世稱都隱先生 本朝世宗朝贈左贊成諡文平 三傳 諱克禮 號浪軒 官至部正卿 世際莊光 棄官遐遁 于湖南之月浪縣 後孫仍爲奠居焉 於公爲六世祖 高祖諱以忠 號竹堂 成宗朝 以孝學 徵英陵參奉不就 曾祖諱奎 禮賓寺主簿 贈司僕寺正 祖諱守瑊 司甕院參奉 贈左承旨 考諱大昇 號駬山 丁卯建虜之亂殉節 贈兵曹參判 加贈禮判載節義錄 妣贈貞夫人平山申氏 主簿蕙女 以萬曆庚戌八月二十日 生公于鎭安嘉林村第 公自幼有英雄氣槩 與晩菴李相公尙眞 肄業蓮亭 志業益高 丁卯丁外憂哀毁備至家貧無以養母賣薪負米竭力供職 丁丑遭內艱廬墓柴毁 甲申器遠謀反倡義錄寧國功 孝廟以將仕郞登第卽拜宣傳官歷內三淸 丙申出監興德 將水操夜觀天像 知有風力言退行 水使李益達不聽列戰船至大洋 狂風猝起列邑軍皆溺死 公船亦飄危務安多慶軍船破依板欲緣上諸卒懼同揜据 公大呼曰 寧同死何忍不救卽解帶投使攀曳得活九十餘人 上下敎曰 不恤自己之危迫思義拯濟人命其爲有識誠不愧於古人矣 特陞堂上 代益達爲主將更設水操點閱是時鐵山府以幽寃餘毒幾至廢邑 遂移拜該都護府使 追雪薔花紅蓮二娥之寃 爲政廉平吏民號稱神明立石頌德 顯廟庚子 移拜慶尙左水使 辛丑拜江原兵使 癸卯又移忠淸黃海再任南北兵使 乃四水使七兵使所至 皆有聲績 肅廟戊午入拜捕盜大將 譏詗如神盜賊屛跡道不拾遺 己未出拜統制使兼慶尙右水使一洗營瘼申明軍律捐元廩設砲倉 穀三百石草五千把以資儲蓄繕舟修城鍊兵備機淸白自持 恩威交孚三道吏卒愛之如父母 有淸白善政碑砲倉又有遺惠文 辛酉復爲捕將 癸亥拜總戎使 其後淸使來詰 大報壇事 朝廷震駭薦公處置仍拜訓鍊大將兼五衛都摠管 公卽坐禮賓寺 各選五軍門 身壯聲雄者 五色衣層立傳相受令遂拏入淸使跪廷 嚴問曰 汝以皇命來耶 卽上誥文不然必死乃已 使乃服罪 公復厲聲曰 矯制欺弄罪固當死然吾王寬仁姑爲特赦後勿復爾出送境外 朝廷慮有後患 公曰吾請自當後亦無事 上曰 卿予之光國將軍 又下敎訓練院曰 古之姜太公窮八十達八十 予之全東屹 窮四十達四十 豈不美哉 肅廟乙酉八月一日 卒于京第 享年九十六 遣官致祭派帥擇地 葬于鎭安 一西面 伐林亭 右麓獨龍甲坐原 配貞夫人安東權氏 兵使鎰女 萬曆己酉二月二十三日生 壼範幽靜 性度溫惠 丙辰正月十七日卒于南兵營 別葬鐵原池濕浦惠自谷卯原 男長亻孝 宣傳官次萬紀通德郞 季萬俊通德郞 女適進士完山李尙益 長房男聖兪武慶州營將 次房男聖會戶曹參議 聖兪四男曰 舜佐武科珍島郡守 釜山防禦使曰舜佑通德郞 有學行曰舜元武科全州營將慶興都護府使 與伯兄舜佐 俱參奮武原從勳曰舜赫號守拙有學行 聖會三男曰舜昊僉知事曰舜岱壽職同知事曰舜喆蔭同知事 公天姿厚重 氣宇英邁 勇略絶倫 識鑑如神 孝於父母友於姉妹 敦睦宗族 追遠之誠到老彌篤 當官處事 必思盡職 廉謹自持 物望自歸 統營多貨 財作是官者 鮮免臟汚 公在營數年只載魚油壹壺而歸京第蕭然如寒士家 勉子弟以淸素輕財喜施撫孤恤寡ㄴ勇武蓋世而文物彬彬 威望掀天 而言貌恂恂 由是四朝委重八方倚仰盖其大節之見於外者固己卓然而內行之纖密 又如次矣 其十世孫 泰熙竭力幹事 將立神道表厥勳業 遠求余銘 銘曰 於皇上帝 降民義仁 仁首父子 義重君臣 惟君與父 天地莫逃 報生以死 則人之操 林林生生 孰無是性 氣欲有拘 或失于正 我觀全公 能全其天 智貫千古 氣呑入埏 赤手養親 孝聲洋洋 白衣勤王 丹書煌煌 聖考修攘 寤寐英俊 大老擢拔 歷敡淸顯 水操知風 快活溺魂 鐵山燭幽 昭雪積寃 仗鉞建節 遂登轅門 外統貔貅 內總虎賁 威行恩洽 賊息民忻 噫吁皇明 萬世必報 虜使詰壇 上下震懼 公則拏鞫 使乃首服 廷重鼎呂 邦奠泰石 王曰嘉哉 將軍光國 惟予尙父 窮達四十 鬱彼伐林 英雄攸宅 九原可作 人百其贖 我銘其實用詔千億
    時閼逢困敦攝提之月 下澣 完山崔秉心 撰 完山 李光烈 書
    【풀이】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북쪽 오랑캐를 쫓아내고 명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신(賢臣)을 등용하고 백성을 긍휼이 여기며, 장병을 훈련시켜 원수를 갚아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은 바른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암(尤菴) 송 선생이 선비로 있다가 왕의 빈사(賓師)가 되어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영웅호걸을 부르실 때, 호남삼걸(湖南三傑)의 한 사람인 가재(嘉齋) 전공(全公) 동흘(東屹)이 있었는데, 장차 맨 먼저 탁용(擢用)될 사람으로 이미 궁검(弓劍)을 번뜩 움직여 천하사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후로 공이 밖으로 서울의 육문(六門)을 지키고 안으로는 오영(五營)의 장수가 되니, 팔도가 편안하고 태평하였다. 그러나 식자(識者)는 공이 정승의 재목으로 백성을 다스릴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지금에 이르도록 한탄하며 그치지 않는다. 공의 자는 사탁(士卓)이며 천안인(天安人)이니 백제(百濟) 환성군(歡城君) 섭(褐)의 후손이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충민공(忠敏公) 낙(樂)은 고려에서 두드러진 분이며, 그 뒤로 문식(文軾)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도학을 밝혀 세칭 도은 선생(都隱先生)이라 하였는데, 세종조(世宗朝)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3대를 내려와 극례(克禮)의 호는 낭헌(浪軒)으로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단종조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호남의 월랑현(月浪縣)으로 종적을 감추므로 이로 인해 후손이 살게 되었으니 공의 6세조가 된다. 고조(高祖)는 이충(以忠)으로 호는 죽당(竹堂)이며, 성종조(成宗朝)에 효행과 학식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증조(曾祖)는 규(奎)로 예빈사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수감(守鉅)으로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대승(大昇)으로 호는 이산(鎖山)이니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로 가증(加贈)되었으며, 절의록(節義錄)에 이름이 실려 있다. 비(騙) 증 정부인(贈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주부(主簿) 혜(蕙)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경술(庚戌)년 8월 20일 진안 가림리 사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웅의 기개가 있었으며, 만암(晩菴) 이상공(李相公) 상진(尙眞)과 더불어 연정(蓮亭)에서 학업을 쌓으니, 뜻과 학업이 더욱 높아졌다. 정묘(丁卯)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훼(哀毁)하며 치루었고, 집이 가난하여 모친을 모시기 어렵자 나무하고 쌀을 지어 나르며 힘을 다해 봉양하였다. 정축(丁丑)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시묘하였고, 갑신(甲申)년에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창의하여 영국공(寧國功)이 있었다. 효종조(孝宗朝)에 장사랑(將仕郞)으로 등제한 후 바로 선전관(宣傳官)에 배수(拜受)되었고 내삼청(內三淸)을 역임하였다. 병신(丙申)년 흥덕(興德)에 가서 수군을 조련할 때, 밤에 천상(天象)을 보고 바람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수사(水使) 이익달(李益達)이 듣지 않았다. 이에 전선(戰船)이 큰 바다로 나가자 갑자기 광풍(狂風)이 일어나서 열읍(列邑)의 군사가 모두 익사하였다. 공의 배 또한 위급하였으나 힘써 안정시키니, 부서진 배의 파편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오려 하였다. 이에 군졸들이 배가 뒤집어질 것을 걱정하니 공이 크게 외쳐 말하기를 “차라리 같이 죽을지언정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허리띠를 풀어 던져서 이것을 잡고 살아난 사람이 90인이었다.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여 말하시기를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고 의를 생각하여 사람의 생명을 건졌으니, 그 행위는 성(誠)을 안다 할 것이며 고인(古人)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에 올리시어 익달(益達)을 대신하여 주장(主將)을 삼아 수군을 조련하게 하였다. 이때 철산부(鐵山府)가 깊은 원한의 독(毒)으로 폐읍이 되려 하거늘, 담당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되어 장화홍련(薔花紅蓮) 두 여자 아이의 원수를 갚아 원한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치를 행하므로 백성들이 신명(神明)이라 칭송하며 석비를 세우고 송덕하였다. 현종(顯宗) 경자(庚子)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신축(辛丑)년 강원병사(江原兵使), 계묘(癸卯)년 충청(忠淸)과 황해(黃海) 등지에서 병사(兵使)로 재임하여 사수사 칠병사(四水使七兵使)를 지냈는데, 모두 공적이 있었다. 숙종(肅宗) 무오(戊午)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배수하였는데, 귀신처럼 알아내므로 도적이 길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길에 흘린 물건이 있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기미(己未)년 통제사 겸 경상우수사(統制使兼慶尙右水使)를 배수하여 병영의 병폐를 일신하고 군율을 밝혔으며, 원름(元孺)을 폐지하고 포창(砲倉)을 설치하였다. 곡식 300석과 풀 5000파를 군자(軍資)로 저축하고, 배를 수리하고 성곽을 보수하며 병사를 조련하고 무기를 준비하되 스스로 청백함을 지켰다. 은위(恩威)로 사람을 사귀되 삼도(三道)의 이졸(吏卒)을 마치 부모처럼 사랑하였고,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있으며 포창(砲倉)에는 유혜문(遺惠文)이 있다. 신유(辛酉)년 다시 포도대장, 계해(癸亥)년 총융사(總戎使)를 배수하였다. 그 후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대보단(大報壇,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낸 일)의 일을 힐문(詰問)하니, 조정이 크게 놀라 공을 천거하였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관(訓鍊大將兼五衛都摠管)이 되었다. 공은 즉시 예빈시(禮賓寺)에 앉아서 오군문(五軍門)에서 몸집이 크고 목소리가 웅장한 자를 선발하여 오색으로 층층이 서게 하고, 영을 내려 청의 사신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꿇어앉히고 엄하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황명(皇命)을 띠고 왔다고 하나 우리 임금에게 그 글을 고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신이 죄를 자복하였다. 공이 다시 꾸짖어 말하기를 “교지(敎旨)를 속이고 희롱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임금께서 관인하시어 특별히 사면한다. 이후로 다시는 오지 말거라”하고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조정에서 후환을 걱정하는데 공이 말하기를 “제가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고 하였으나 역시 아무 일이 없었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은 나의 광국장군(光國將軍)이다”라고 하였고, 또 훈련원(訓練院)에 하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옛날 강태공(姜太公)은 80세까지 궁하다 80년 영화를 누렸다더니, 나의 전동흘은 40세까지 궁하다 40년 영화를 누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을유(乙酉)년 8월 1일 서울의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 96세였다. 관리가 파견되어 조문하였으며, 지사(地師)를 보내 진안의 일서면(一西面) 벌림정(伐林亭) 우측 기슭 독룡(獨龍) 갑좌원(甲坐原)에 자리를 잡아 장사하게 하였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병사(兵使) 일(鎰)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기유(己酉)년 2월 23일 태어났는데, 규문의 법도가 그윽하고 조용하였으며 성정이 따뜻하고 은혜로웠다. 병진(丙辰)년 1월 17일 남쪽 병영(兵營)에서 사망하니 철원(鐵原) 지습포(池濕浦) 혜자곡(惠自谷) 묘좌원(卯坐原)에 별장(別葬)하였다. 장남 효(涍)는 선전관(宣傳官)이고, 차남 만기(萬紀)는 통덕랑(通德郞)이며, 3남 만준(萬俊)도 통덕랑(通德郞)이다. 딸은 진사 완산(完山) 이상익(李尙益)에게 출가하였다. 장남의 아들 성유(聖兪)는 무과하여 경주영장(慶州營將)이요, 차남의 아들 성회(聖會)는 호조참의(戶曹參議)이다. 성유(聖兪)는 4남을 두었으니, 순좌(舜佐)는 무과하여 진도군수(珍島郡守)와 부산방어사(釜山防禦使)를 지냈고, 순우(舜佑)는 통덕랑(通德郞)으로 학행이 있었으며, 순원(舜元)은 무과하여 전주영장(全州營將)과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를 지냈는데 형 순좌와 더불어 분무(奮武)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순혁(舜赫)의 호는 수졸(守拙)이고 학행이 있었다. 성회(聖會)는 3남을 두었는데, 순호(舜昊)는 첨지사(僉知事)요, 순대(舜岱)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내렸고, 순철(舜喆)은 음사(蔭仕)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공은 천자(天姿)가 후중(厚重)하고 기우(氣宇)는 영매(英邁)하였으며 용기와 지략이 절륜하여 판단력이 귀신같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매에게 우애로 대하였으며, 종족과는 돈목(敦睦)하였고, 추원(追遠)의 정성이 늙어서까지 돈독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처사(處事)에 반드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염직(廉直)하고 삼가며 스스로를 지켰고, 들어온 물건이 있으면 스스로 돌려보냈다. 통영(統營)에 모인 재물이 많으면 관리가 감추었다는 오명을 면하는 자가 드물었으나, 공이 통영에 거한 수년에 어유(魚油) 한 병이라도 서울로 실어보내니 그의 집안이 소연(蕭然)하기가 한사(寒士)의 집안과 같았다. 청렴으로 자제들을 면려하였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고아를 키우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희사하였다. 용맹과 무력은 세상을 덮고 문채는 빈빈(彬彬)하였으며, 위엄은 하늘을 들어올리며 언사는 순순(恂恂)하였으니, 이것이 사조(四朝)의 중책을 맡고 팔방(八方)의 우러름을 받은 이유였다. 대개 그 대절(大節)은 밖에서 보기에 자신이 확고하여 탁연하고, 안으로 행동하기는 섬세하였고, 또한 이러하였다. 10세손 태희(泰熙)가 힘을 다해 장차 신도비를 세우고 공업(功業을) 드러내기 위해 멀리 나를 찾아와 명(銘)을 구하였다. 명(銘)하기를 “상제(上帝)께서 황제(皇帝)로 백성에게 의(義)와 인(仁)을 내리셨나니 / 인의 으뜸은 부자(父子) 간이며, 의는 군신(君臣) 간에 중하다. / 임금과 어버이를 떠나서는 천지에 숨을 곳이 없으니 / 죽음으로 낳아주신 은혜를 갚음이 사람의 지조(志操)로다. / 숲처럼 꼭 들어차서 낳고 낳지만 뉘라서 이런 성정이 없을까만 / 기운에 구애된 바가 있으면 혹 올바름을 잃게 되나니 / 하늘의 가르침을 온전히 하는 것을 전공에게서 보았으니 / 지혜는 천고를 꿰뚫고 기운은 땅 끝까지 삼킬만하였더라. / 빈손으로 양친을 봉양하니 효성이 양양(洋洋)하며 / 백의(白衣)로 충성하니 충심이 황황(煌煌)하다. / 효종대왕께서 북벌을 도모할 때 영준(英俊)을 그리워했으며 / 대로(大老) 송시열에 발탁되어 청국 사신 혼내주었구나. / 수군의 훈련 때 바람 불 것을 알아 흔쾌히 사람을 살렸으며 / 철산(鐵山) 장화홍련의 원한도 풀어주었다. / 무관으로 깃대를 세우고 통제사에 오르니 / 밖으로는 용맹한 군대를 통제하고 안으로는 용사를 다스리며 /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니 도적은 잦아들고 백성은 기뻐하더라. / 희라, 명나라 황제를 위함은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리. / 청국 사신이 대보단을 힐난하매 조정이 크게 두려워했더니 / 공이 잡아 국문하여 사신이 고개를 숙이게 했더라. / 조정에서는 중신으로 중히 여기고 나라에서는 태산반석으로 제사지냈네 / 임금께서 나의 상부는 40년 고생 후에 40년 영달한다고 했다네 / 저 묘역이 울창하도다. 영웅의 무덤이여 / 저승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백 사람이라도 속죄하리. / 나 그 실제를 새겨 천억인에게 알려주리라.” 시알봉곤돈(時閼逢困敦, 1984) 섭제지(攝提之 / 寅)월 하순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 찬(撰), 완산(完山) 이광열(李光烈) 서(書)
  • 비표 : 孝子慶州李振玉之閭(효자경주이공진옥지려)

    【위치】 성수면 신기리 48. 내곡 신기저수지 제방아래 산기슭.
    【시기】 1927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65cm, 너비 75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高宗戊辰 湖南儒生 進士朴膺宗等 上書于大宗伯曰 鎭安士人 李振玉 以益齋李文忠公之後孫 世趾其美 百行豁如 惟孝爲本 家貧 躬耕山而樵水而漁 爲其奉養也 聲不作其色不失 和爲其志養也 剖氷求魚 祝天身代 爲祈禱生也 母先遘疾 斷指以延三年之兪 父又病劇 亦如之然 感神之誠 終不能勝 在天之定命 連遭內外艱 六年居廬 哀毁逾禮 是豈■加入 一等之孝乎 該曹聞而駕尙 特下獎諭之訓 然未能入啓 天聰而旌表其閭 子姓又益零替 朝野拱申之狀藏之塵 苟而蠹食 斷爛可勝歎哉 嗣孫圭生 爲是之懼 竭力傾資 招工伐石 記公之事 行以耀人觀聽屬 余以記之述敍其略 俾歸刻焉 歲 柔兆攝提格 三月下浣 小華遺民 李道復記
    【풀이】 고종 무진(戊辰, 고종 5, 1868)에 호남 유생 진사 박응종(朴膺宗) 등이 대종백(大宗伯, 예조판서)에게 글을 올리기를 “진안의 사인(士人) 이진옥(李振玉)은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서 온갖 행실이 여유로웠고 오직 효로써 근본을 삼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오고 물에서 고기를 잡은 것은 봉양을 위해서이고 목소리에는 힘을 빼고 얼굴빛에는 온화한 기상을 잃지 않은 것은 지양(志養, 뜻을 받들음)을 위해서이며 얼음을 깨서 고기를 구하고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겠다고 한 것은 회생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3년의 목숨을 연장하였고 아버지의 병이 더치자 또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명을 감동시키는 정성은 아무래도 하늘에 있는 정명(定命)을 이길 수 없어 연해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여 6년을 시묘(侍墓)하면서 애훼(哀毁)함이 예절에 지나쳤으니 이 어찌 남들보다 한 단계 높은 효성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예조에서는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장유(장유)하는 제음(題音)을 내렸으나 천총(天聰)에 입계(入啓)하여 정려(旌閭)를 내리시게 하지 못하였고 자손도 더욱 침체하여 조야(朝野)에서 아뢴 글을 먼지 낀 골방에 쳐박아 두어 좀이 슬고 찢겨져 너덜너덜하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겠는가. 사손(嗣孫) 규생(圭生)이 이를 걱정하여 힘을 다하고 자산을 기울여 석공을 불러다가 돌을 다듬고 공의 사행(事行)을 기록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빛나게 하려면서 나에게 기술하기를 부탁한지라 그 대략을 기록하여 돌아가 각하게 하였다. 정묘(丁卯, 1927) 3월 하순 소화유민(小華遺民) 이도복(李道復) 기(記)
  • 【비표】 縣監柳侯遠奎永世不忘碑(현감류후원규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92년 8월
    【형태】 높이 107cm, 너비 43cm, 두께 12cm.
    【개요】 유원규(柳遠奎)는 진안현감으로 1892년 4월에 부임하여 1893년 11월에 보성군수로 전임하였다. 뒷면에는 民之望矣 淸白爲慶 捐滅之戶 蠲護之賦라 각자되어 있다. 풀이하면 ‘백성의 소망은 청백하면 경사로 여기는 일인데 호구세를 부담하는 호수를 줄여주고 조세를 줄여주었다’는 뜻이다.
  • 【위치】 성수면 좌산리 319-3. 중기마을 어귀 가외반로변.
    【시기】 1966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80cm, 너비 50cm, 두께 21cm.
    【개요】 연안송씨는 뒤 김석봉의 모친이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人姓宋氏 籍延安 我朝文科禮曹判書諱寶山號退休齋后 泰喆女 瑞興金氏參議諱中坤后 時權妻也 生有淑德 在家事父母孝 適人事舅姑 亦如之 養志無違 菽水盡誠 夫以擧業 早遊京師 因以不返 聲息頓絶 夫人以靑年時節 生離所天 非孀而孀 幼子錫鳳 乳哺無知 家如懸磬 飢寒難堪 而母子相依 固守蓬戶 以傭縫紡織僅僅保命 而舅姑喪 盡其哀 葬與祭 盡其禮 常願夫子之生還 禱山祈水 祝天拜星 爲一生事 其子稍長 亦感於是 事母至孝 順志不咈 光武六年壬寅 全州希堂道會時 全北各郡儒林代表 五十三人 及全州南原鎭安鄕校 儒生 齊聲發文 仰稟于所居地 鎭安郡守題曰 一家孝烈 有是母有是子 爲鄕隣矜式 令人欽歎 襃揚之節 益俟公議事 其後載三綱錄 其孫士文 將立石于村右路邊 以闡揚其祖妣之孝烈事 其族叔眞燮 齎四郡通文 來謀於余 余謹按其蹟而欽歎曰 噫夫人 不以夫不在而孝衰於舅姑 不以貧窮而有二心 抱徹天之恨 而隱忍自重 潔身俟命 傭縫雇績 養老育幼 全平生之大節 保一家之門戶 使幾絶之祀 措之於泰山之安 孝且烈 孰大於是 使婦女子聞之 頑可潔懦可立 大韓民國四十八年 丙午 冬至節 陜川 李英浩 撰
    【풀이】 부인(夫人)의 성은 송씨(宋氏)요 적(籍: 관<貫>)은 연안(延安)이니 아조(我朝)의 문과(文科) 예조판서 휘 보산(寶山) 호 퇴휴재(退休齋)의 후손인 태철(泰喆)의 따님이자 서흥김씨(瑞興金氏) 참의(參議), 휘 중곤(中坤)의 후예인 시권(時權)의 처이다. 낳으면서부터 숙덕(淑德)이 있어 친가(親家)에 있어서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또 똑같이 섬겨 뜻을 받드는 데에 어김이 없었고 음식 공양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부군(夫君)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일찍 서울에 유학(遊學)하다가 그 길로 돌아오지 않고 소식마저 끊겨버렸다. 부인이 젊은 시절에 남편과 생이별을 하였으니 과부아닌 과부였고 어린 아들 석봉(錫鳳)은 젖먹이의 철부지였으며 집안은 가난하여 네 벽만이 서 있고 속은 텅 비어 기한(飢寒)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오막살이를 굳게 지키고 삯바느질과 길쌈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시부모의 상에는 슬픔을 다하였고 장사(葬事)와 제사에는 예(禮)를 다하였다. 항상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산에 빌고 물에 빌며 하늘에 빌고 별에 비는 것으로 일생동안 일을 삼았다. 그 아들도 조금 자라자 여기에 감동하여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광무(光武) 6년 임인(壬寅: 광무 6, 1902)에 전주(全州) 희당(希當)의 도회(道會) 때에 전북 각 군의 유림대표 53인과 전주 남원(南原) 진안의 향교(鄕校) 유생(儒生)이 연명(聯名)으로 발문(發文)하여 소거지의 관장(官長)에게 앙품(仰稟)하니 진안군수가 제사(題辭)하기를 “한 집안이 효열(孝烈)하여 이러한 어머니와 이러한 아들이 있어 고을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탄(欽歎)하게 하나 포양(褒揚)하는 절차는 공의(公議)를 더 기다려 볼 일” 이라 하였는데 그 뒤에 삼강록(三綱錄)에 실리게 되었다. 그 손자 사문(士文)이 마을 오른쪽 길 가에 돌을 세워 그 할머니의 효열사적을 천양(闡揚)하려고 할 때에 그의 족숙 진섭(眞燮)이 4군(郡)의 통문(通文)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상의하여 나는 조심스레 그 사적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흠탄하였다. 아, 부인은 부군이 없다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이 덜하지 않았고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철천지한을 품고서도 은인 자중하여 자신을 지키면서 천명(天命)을 기다렸고 삯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른 봉양하고 어린이를 길렀다 평생의 대절(大節)을 온전히 하고 한 집안을 보전하여 거의 끊길 번한 종사(宗祀)를 태산(泰山)처럼 안전하게 하였으니 효성과 정열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부녀자들이 들으면 완악한 사람 정숙해지고 나약한 사람 굳세어질 것이다. 대한민국 48년(1966) 병오 동지절 합천 이영호(李英浩) 찬(撰)
  • 【비표】 孝子瑞興金公紀蹟碑(효자서흥김공기적비)

    【위치】 성수면 좌산리 319-3. 중기마을 어귀 가외반로변.
    【시기】 1966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5cm, 너비 46cm, 두께 18cm.
    【개요】 문중에서 연안부 송씨 열녀비와 나란히 건립하였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士人 瑞興金公諱錫鳳字洛弼 我朝文科參議諱中坤之后時權子 其母夫人 延安宋氏 禮判諱寶山號退休齋後泰喆女也 宋氏 事舅姑至孝 夫以擧業 早年遊京 經歲不返 永無消息 公其時尙乳 家無儲甖 情狀不忍言 而母夫人携幼守屋 以雇舂織紡 僅僅資生 而日望其夫子之生還 禱山祈水 祝天拜星 終身不變 公稍長 有感於是 事母至孝 養志洞屬 未嘗少咈 定省之節 供甘之誠 一是靡懈 母病數年 藥餌之物 躬資調進 行不以翔 笑不至矧 及至病革 嘗糞祈天 裂指垂血 回甦三日 竟遭大艱 哀毁之節 朔望哭墓 終身如一 祭亦齊戒 必致如在之誠 以家大人出外不還 爲平生大恨 每逢佳節 涕泣之痕 在於枕席之間 以母氏之心爲心 亦 祈於山水 祝天不懈 鄕里之人 皆曰孝子人也 光武六年壬寅 全州希堂道會時 全北各郡儒林代表 五十三人 及全州南原鎭安鄕校 儒生 齊聲發文 仰稟于所居地 鎭安郡守題曰 一家孝烈 有是母有是子 爲鄕隣矜式 令人欽歎 襃揚之節 益俟公議事其後載三綱錄及湖南縉紳錄 公之胤士文 與其族叔 眞燮議曰 吾家兩世 有如此之孝烈 而家勢寒微 不能闡揚于世 是可恨也 及吾未死之時 雖極少規模 刻記蹟于一片石 立于村右路邊 使行路之人 觀瞻而有可語之資 豈不可哉 乃使之齎文 而來謀於不侫 余曰 夫大孝 終身慕父母 終身慕者 余於此公見之矣 且祖先有美行之實則能闡揚於世者 是乃爲孝 若士文者 亦可謂孝矣 詩云孝子不匱 永錫爾類者 其此家之謂歟 大韓民國四十八年 丙午 冬至節 陜川 李英浩 撰 【풀이】 진안(鎭安)의 사인(士人) 서흥김공(瑞興金公) 휘 석봉(錫鳳) 자 낙필(洛弼)은 아조(我朝) 문과 참의 휘 중곤(中坤)의 후예인 시권(時權)의 아들이고 그 모부인(母夫人) 연안송씨(延安宋氏)는 예조판서 휘 보산(寶山) 호 퇴휴재(退休齋)의 후예인 태철(泰喆)의 따님이다. 송씨는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부군(夫君)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일찍 서울로 유학하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그 길로 영영 소식이 없었다. 공은 그 때에 아직 젖먹이였는데 집에는 한 단지의 곡식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정상은 참아 말 할 수가 없었다. 모부인은 어린 아이를 안고 집을 지키면서 삯 절구질과 길쌈으로 겨우 겨우 살아가면서 날마다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산과 물, 하늘과 별에 빌기를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다. 공은 조금 자라자 여기에 감명을 받아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늘 조심스런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며 혼정(昏定) 신성(晨省)하는 예절과 맛있고 음식을 올리는 정성에 한결같이 해이함이 없었다. 모부인이 몇 해를 병으로 누었으니 병석을 몸소 보살피고 약을 손수 달여서 올렸으며 수심에 쌓여 걸어도 힘이 없었고 웃어도 입을 벌리고 웃지 않았다. 이윽고 병이 더치니 변(便)을 맛보아 병증을 징험하고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손가락을 깨서 피를 입에 드리워 사흘을 소생하게까지 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하게 되니 애훼(哀毁)하는 일이나 삭망(朔望)으로 성묘하고 곡하는 일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하고 제사에는 재계(齋戒)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가대인(家大人: 아버지의 경칭)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평생의 대한(大恨)으로 여겨 매번 가절(佳節)을 만나면 눈물자욱으로 베개와 이부자리가 얼룩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공 역시 산과 물에 빌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일컬었다. 공의 아들 사문(士文)이 그의 족숙 진섭(眞燮)과 상의하기를 “우리 집 양세(兩世)에 이러한 효(孝)와 열(烈)이 있었으나 집안이 한미(寒微)하여 세상에 천양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비록 작은 규모일망정 제가 죽기전에 그 사적을 돌에 새겨 마을 오른편 길 가에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서 말할 거리가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분더러 글을 싸 가지고 나를 찾아가 도모해보라 하였다. 나는 이르노니 무릇 대효(大孝)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 분에게서 보게 되었다. 또 조상(祖上)에게 훌륭한 행실이 있었으면 세상에 천양하는 것이 바로 효가 되는 것인데 사문과 같은 사람은 가위 효라고 이를만하겠다. 시(詩: 시경<詩經>)을 말함)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영원토록 그런 사람을 내려준다(孝子不匱, 水錫爾類)”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 집안을 두고 한 말인가보다. 대한민국 48년(1966) 병오 동지절 합천 이영호(李英浩) 찬(撰)
  • 【위치】 성수면 좌포리 산69-4. 고분제로변 좌측 산기슭.
    【시기】 1925년(공자탄생2476)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00cm, 너비 40cm.
    【개요】 비문은 마모된 부분이 많아 전체 해독은 어려우나 대략을 간추리면, 이씨는 본관이 진안으로 사인(舍人) 경환(璟煥)의 딸로 경주인(慶州人) 계림군의 후손 정송현(鄭松鉉)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효순(孝順)하여 출가해서도 시부모에게 효를 다하였다. 시모의 병환에 지극한 정성으로 구환하고 운명하자 슬퍼함이 법도를 넘어섰다. 지아비가 병으로 위독하자 하늘에 자기 몸을 대신해달라고 빌었으나 운명하자 통곡하며 장례절차를 예로써 지내고 탈상을 마친 뒤 목을 매어 지아비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