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訓練大將嘉齋全公諱東屹神道碑(훈련대장가재전공휘동흘신도비)

    【위치】 성수면 내곡길 69-4[신기리] 광국재 경내.
    【시기】 1984년
    【형태】 비갓과 거북 대석(臺石)이 있다. 160cm, 두께 58cm, 두께 2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奧我 孝宗大王 以攘斥北虜 興復帝室 爲己任側席求賢 恤民鍊兵將雪深讐 而造弘業 於是先正臣 尤菴宋先生 起自布衣 爲王賓師 延攬英豪 奮圖事功時則有嘉齋全公東屹 卽湖南三傑之一也 將擢用不次以規進取旣而弓劍奄忽天下事無復可爲者矣 自後公外仗六閫之節內爲五營之帥 八域晏然享樂昇平 然識者以公未展頗牧之志虛老管葛之材至今嗟惋不己焉 公字士卓 天安人 百濟歡城君諱聶之後 天安府院君諡忠敏 諱樂爲 勝國顯先也 中世有諱文軾 文政堂文學 倡明道學 世稱都隱先生 本朝世宗朝贈左贊成諡文平 三傳 諱克禮 號浪軒 官至部正卿 世際莊光 棄官遐遁 于湖南之月浪縣 後孫仍爲奠居焉 於公爲六世祖 高祖諱以忠 號竹堂 成宗朝 以孝學 徵英陵參奉不就 曾祖諱奎 禮賓寺主簿 贈司僕寺正 祖諱守瑊 司甕院參奉 贈左承旨 考諱大昇 號駬山 丁卯建虜之亂殉節 贈兵曹參判 加贈禮判載節義錄 妣贈貞夫人平山申氏 主簿蕙女 以萬曆庚戌八月二十日 生公于鎭安嘉林村第 公自幼有英雄氣槩 與晩菴李相公尙眞 肄業蓮亭 志業益高 丁卯丁外憂哀毁備至家貧無以養母賣薪負米竭力供職 丁丑遭內艱廬墓柴毁 甲申器遠謀反倡義錄寧國功 孝廟以將仕郞登第卽拜宣傳官歷內三淸 丙申出監興德 將水操夜觀天像 知有風力言退行 水使李益達不聽列戰船至大洋 狂風猝起列邑軍皆溺死 公船亦飄危務安多慶軍船破依板欲緣上諸卒懼同揜据 公大呼曰 寧同死何忍不救卽解帶投使攀曳得活九十餘人 上下敎曰 不恤自己之危迫思義拯濟人命其爲有識誠不愧於古人矣 特陞堂上 代益達爲主將更設水操點閱是時鐵山府以幽寃餘毒幾至廢邑 遂移拜該都護府使 追雪薔花紅蓮二娥之寃 爲政廉平吏民號稱神明立石頌德 顯廟庚子 移拜慶尙左水使 辛丑拜江原兵使 癸卯又移忠淸黃海再任南北兵使 乃四水使七兵使所至 皆有聲績 肅廟戊午入拜捕盜大將 譏詗如神盜賊屛跡道不拾遺 己未出拜統制使兼慶尙右水使一洗營瘼申明軍律捐元廩設砲倉 穀三百石草五千把以資儲蓄繕舟修城鍊兵備機淸白自持 恩威交孚三道吏卒愛之如父母 有淸白善政碑砲倉又有遺惠文 辛酉復爲捕將 癸亥拜總戎使 其後淸使來詰 大報壇事 朝廷震駭薦公處置仍拜訓鍊大將兼五衛都摠管 公卽坐禮賓寺 各選五軍門 身壯聲雄者 五色衣層立傳相受令遂拏入淸使跪廷 嚴問曰 汝以皇命來耶 卽上誥文不然必死乃已 使乃服罪 公復厲聲曰 矯制欺弄罪固當死然吾王寬仁姑爲特赦後勿復爾出送境外 朝廷慮有後患 公曰吾請自當後亦無事 上曰 卿予之光國將軍 又下敎訓練院曰 古之姜太公窮八十達八十 予之全東屹 窮四十達四十 豈不美哉 肅廟乙酉八月一日 卒于京第 享年九十六 遣官致祭派帥擇地 葬于鎭安 一西面 伐林亭 右麓獨龍甲坐原 配貞夫人安東權氏 兵使鎰女 萬曆己酉二月二十三日生 壼範幽靜 性度溫惠 丙辰正月十七日卒于南兵營 別葬鐵原池濕浦惠自谷卯原 男長亻孝 宣傳官次萬紀通德郞 季萬俊通德郞 女適進士完山李尙益 長房男聖兪武慶州營將 次房男聖會戶曹參議 聖兪四男曰 舜佐武科珍島郡守 釜山防禦使曰舜佑通德郞 有學行曰舜元武科全州營將慶興都護府使 與伯兄舜佐 俱參奮武原從勳曰舜赫號守拙有學行 聖會三男曰舜昊僉知事曰舜岱壽職同知事曰舜喆蔭同知事 公天姿厚重 氣宇英邁 勇略絶倫 識鑑如神 孝於父母友於姉妹 敦睦宗族 追遠之誠到老彌篤 當官處事 必思盡職 廉謹自持 物望自歸 統營多貨 財作是官者 鮮免臟汚 公在營數年只載魚油壹壺而歸京第蕭然如寒士家 勉子弟以淸素輕財喜施撫孤恤寡ㄴ勇武蓋世而文物彬彬 威望掀天 而言貌恂恂 由是四朝委重八方倚仰盖其大節之見於外者固己卓然而內行之纖密 又如次矣 其十世孫 泰熙竭力幹事 將立神道表厥勳業 遠求余銘 銘曰 於皇上帝 降民義仁 仁首父子 義重君臣 惟君與父 天地莫逃 報生以死 則人之操 林林生生 孰無是性 氣欲有拘 或失于正 我觀全公 能全其天 智貫千古 氣呑入埏 赤手養親 孝聲洋洋 白衣勤王 丹書煌煌 聖考修攘 寤寐英俊 大老擢拔 歷敡淸顯 水操知風 快活溺魂 鐵山燭幽 昭雪積寃 仗鉞建節 遂登轅門 外統貔貅 內總虎賁 威行恩洽 賊息民忻 噫吁皇明 萬世必報 虜使詰壇 上下震懼 公則拏鞫 使乃首服 廷重鼎呂 邦奠泰石 王曰嘉哉 將軍光國 惟予尙父 窮達四十 鬱彼伐林 英雄攸宅 九原可作 人百其贖 我銘其實用詔千億
    時閼逢困敦攝提之月 下澣 完山崔秉心 撰 完山 李光烈 書
    【풀이】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북쪽 오랑캐를 쫓아내고 명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현신(賢臣)을 등용하고 백성을 긍휼이 여기며, 장병을 훈련시켜 원수를 갚아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은 바른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암(尤菴) 송 선생이 선비로 있다가 왕의 빈사(賓師)가 되어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영웅호걸을 부르실 때, 호남삼걸(湖南三傑)의 한 사람인 가재(嘉齋) 전공(全公) 동흘(東屹)이 있었는데, 장차 맨 먼저 탁용(擢用)될 사람으로 이미 궁검(弓劍)을 번뜩 움직여 천하사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이후로 공이 밖으로 서울의 육문(六門)을 지키고 안으로는 오영(五營)의 장수가 되니, 팔도가 편안하고 태평하였다. 그러나 식자(識者)는 공이 정승의 재목으로 백성을 다스릴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지금에 이르도록 한탄하며 그치지 않는다. 공의 자는 사탁(士卓)이며 천안인(天安人)이니 백제(百濟) 환성군(歡城君) 섭(褐)의 후손이다. 천안부원군(天安府院君) 충민공(忠敏公) 낙(樂)은 고려에서 두드러진 분이며, 그 뒤로 문식(文軾)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도학을 밝혀 세칭 도은 선생(都隱先生)이라 하였는데, 세종조(世宗朝)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3대를 내려와 극례(克禮)의 호는 낭헌(浪軒)으로 호조판서를 지냈으나, 단종조에 이르러 벼슬을 버리고 호남의 월랑현(月浪縣)으로 종적을 감추므로 이로 인해 후손이 살게 되었으니 공의 6세조가 된다. 고조(高祖)는 이충(以忠)으로 호는 죽당(竹堂)이며, 성종조(成宗朝)에 효행과 학식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증조(曾祖)는 규(奎)로 예빈사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부는 수감(守鉅)으로 사옹원 참봉(司甕院參奉)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대승(大昇)으로 호는 이산(鎖山)이니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순절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로 가증(加贈)되었으며, 절의록(節義錄)에 이름이 실려 있다. 비(騙) 증 정부인(贈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주부(主簿) 혜(蕙)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경술(庚戌)년 8월 20일 진안 가림리 사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웅의 기개가 있었으며, 만암(晩菴) 이상공(李相公) 상진(尙眞)과 더불어 연정(蓮亭)에서 학업을 쌓으니, 뜻과 학업이 더욱 높아졌다. 정묘(丁卯)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훼(哀毁)하며 치루었고, 집이 가난하여 모친을 모시기 어렵자 나무하고 쌀을 지어 나르며 힘을 다해 봉양하였다. 정축(丁丑)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시묘하였고, 갑신(甲申)년에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창의하여 영국공(寧國功)이 있었다. 효종조(孝宗朝)에 장사랑(將仕郞)으로 등제한 후 바로 선전관(宣傳官)에 배수(拜受)되었고 내삼청(內三淸)을 역임하였다. 병신(丙申)년 흥덕(興德)에 가서 수군을 조련할 때, 밤에 천상(天象)을 보고 바람이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수사(水使) 이익달(李益達)이 듣지 않았다. 이에 전선(戰船)이 큰 바다로 나가자 갑자기 광풍(狂風)이 일어나서 열읍(列邑)의 군사가 모두 익사하였다. 공의 배 또한 위급하였으나 힘써 안정시키니, 부서진 배의 파편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오려 하였다. 이에 군졸들이 배가 뒤집어질 것을 걱정하니 공이 크게 외쳐 말하기를 “차라리 같이 죽을지언정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허리띠를 풀어 던져서 이것을 잡고 살아난 사람이 90인이었다.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여 말하시기를 “자신의 위급함을 돌보지 않고 의를 생각하여 사람의 생명을 건졌으니, 그 행위는 성(誠)을 안다 할 것이며 고인(古人)에 견주어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당상관(堂上官)에 올리시어 익달(益達)을 대신하여 주장(主將)을 삼아 수군을 조련하게 하였다. 이때 철산부(鐵山府)가 깊은 원한의 독(毒)으로 폐읍이 되려 하거늘, 담당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되어 장화홍련(薔花紅蓮) 두 여자 아이의 원수를 갚아 원한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청렴하고 공평하게 정치를 행하므로 백성들이 신명(神明)이라 칭송하며 석비를 세우고 송덕하였다. 현종(顯宗) 경자(庚子)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신축(辛丑)년 강원병사(江原兵使), 계묘(癸卯)년 충청(忠淸)과 황해(黃海) 등지에서 병사(兵使)로 재임하여 사수사 칠병사(四水使七兵使)를 지냈는데, 모두 공적이 있었다. 숙종(肅宗) 무오(戊午)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배수하였는데, 귀신처럼 알아내므로 도적이 길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길에 흘린 물건이 있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기미(己未)년 통제사 겸 경상우수사(統制使兼慶尙右水使)를 배수하여 병영의 병폐를 일신하고 군율을 밝혔으며, 원름(元孺)을 폐지하고 포창(砲倉)을 설치하였다. 곡식 300석과 풀 5000파를 군자(軍資)로 저축하고, 배를 수리하고 성곽을 보수하며 병사를 조련하고 무기를 준비하되 스스로 청백함을 지켰다. 은위(恩威)로 사람을 사귀되 삼도(三道)의 이졸(吏卒)을 마치 부모처럼 사랑하였고,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가 있으며 포창(砲倉)에는 유혜문(遺惠文)이 있다. 신유(辛酉)년 다시 포도대장, 계해(癸亥)년 총융사(總戎使)를 배수하였다. 그 후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대보단(大報壇,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낸 일)의 일을 힐문(詰問)하니, 조정이 크게 놀라 공을 천거하였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관(訓鍊大將兼五衛都摠管)이 되었다. 공은 즉시 예빈시(禮賓寺)에 앉아서 오군문(五軍門)에서 몸집이 크고 목소리가 웅장한 자를 선발하여 오색으로 층층이 서게 하고, 영을 내려 청의 사신을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조정에 꿇어앉히고 엄하게 물어 말하기를 “네가 황명(皇命)을 띠고 왔다고 하나 우리 임금에게 그 글을 고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신이 죄를 자복하였다. 공이 다시 꾸짖어 말하기를 “교지(敎旨)를 속이고 희롱한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임금께서 관인하시어 특별히 사면한다. 이후로 다시는 오지 말거라”하고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조정에서 후환을 걱정하는데 공이 말하기를 “제가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고 하였으나 역시 아무 일이 없었다.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은 나의 광국장군(光國將軍)이다”라고 하였고, 또 훈련원(訓練院)에 하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옛날 강태공(姜太公)은 80세까지 궁하다 80년 영화를 누렸다더니, 나의 전동흘은 40세까지 궁하다 40년 영화를 누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숙종(肅宗) 을유(乙酉)년 8월 1일 서울의 집에서 사망하니 향년 96세였다. 관리가 파견되어 조문하였으며, 지사(地師)를 보내 진안의 일서면(一西面) 벌림정(伐林亭) 우측 기슭 독룡(獨龍) 갑좌원(甲坐原)에 자리를 잡아 장사하게 하였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병사(兵使) 일(鎰)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기유(己酉)년 2월 23일 태어났는데, 규문의 법도가 그윽하고 조용하였으며 성정이 따뜻하고 은혜로웠다. 병진(丙辰)년 1월 17일 남쪽 병영(兵營)에서 사망하니 철원(鐵原) 지습포(池濕浦) 혜자곡(惠自谷) 묘좌원(卯坐原)에 별장(別葬)하였다. 장남 효(涍)는 선전관(宣傳官)이고, 차남 만기(萬紀)는 통덕랑(通德郞)이며, 3남 만준(萬俊)도 통덕랑(通德郞)이다. 딸은 진사 완산(完山) 이상익(李尙益)에게 출가하였다. 장남의 아들 성유(聖兪)는 무과하여 경주영장(慶州營將)이요, 차남의 아들 성회(聖會)는 호조참의(戶曹參議)이다. 성유(聖兪)는 4남을 두었으니, 순좌(舜佐)는 무과하여 진도군수(珍島郡守)와 부산방어사(釜山防禦使)를 지냈고, 순우(舜佑)는 통덕랑(通德郞)으로 학행이 있었으며, 순원(舜元)은 무과하여 전주영장(全州營將)과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를 지냈는데 형 순좌와 더불어 분무(奮武)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다. 순혁(舜赫)의 호는 수졸(守拙)이고 학행이 있었다. 성회(聖會)는 3남을 두었는데, 순호(舜昊)는 첨지사(僉知事)요, 순대(舜岱)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내렸고, 순철(舜喆)은 음사(蔭仕)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공은 천자(天姿)가 후중(厚重)하고 기우(氣宇)는 영매(英邁)하였으며 용기와 지략이 절륜하여 판단력이 귀신같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매에게 우애로 대하였으며, 종족과는 돈목(敦睦)하였고, 추원(追遠)의 정성이 늙어서까지 돈독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처사(處事)에 반드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고, 염직(廉直)하고 삼가며 스스로를 지켰고, 들어온 물건이 있으면 스스로 돌려보냈다. 통영(統營)에 모인 재물이 많으면 관리가 감추었다는 오명을 면하는 자가 드물었으나, 공이 통영에 거한 수년에 어유(魚油) 한 병이라도 서울로 실어보내니 그의 집안이 소연(蕭然)하기가 한사(寒士)의 집안과 같았다. 청렴으로 자제들을 면려하였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고아를 키우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는데 희사하였다. 용맹과 무력은 세상을 덮고 문채는 빈빈(彬彬)하였으며, 위엄은 하늘을 들어올리며 언사는 순순(恂恂)하였으니, 이것이 사조(四朝)의 중책을 맡고 팔방(八方)의 우러름을 받은 이유였다. 대개 그 대절(大節)은 밖에서 보기에 자신이 확고하여 탁연하고, 안으로 행동하기는 섬세하였고, 또한 이러하였다. 10세손 태희(泰熙)가 힘을 다해 장차 신도비를 세우고 공업(功業을) 드러내기 위해 멀리 나를 찾아와 명(銘)을 구하였다. 명(銘)하기를 “상제(上帝)께서 황제(皇帝)로 백성에게 의(義)와 인(仁)을 내리셨나니 / 인의 으뜸은 부자(父子) 간이며, 의는 군신(君臣) 간에 중하다. / 임금과 어버이를 떠나서는 천지에 숨을 곳이 없으니 / 죽음으로 낳아주신 은혜를 갚음이 사람의 지조(志操)로다. / 숲처럼 꼭 들어차서 낳고 낳지만 뉘라서 이런 성정이 없을까만 / 기운에 구애된 바가 있으면 혹 올바름을 잃게 되나니 / 하늘의 가르침을 온전히 하는 것을 전공에게서 보았으니 / 지혜는 천고를 꿰뚫고 기운은 땅 끝까지 삼킬만하였더라. / 빈손으로 양친을 봉양하니 효성이 양양(洋洋)하며 / 백의(白衣)로 충성하니 충심이 황황(煌煌)하다. / 효종대왕께서 북벌을 도모할 때 영준(英俊)을 그리워했으며 / 대로(大老) 송시열에 발탁되어 청국 사신 혼내주었구나. / 수군의 훈련 때 바람 불 것을 알아 흔쾌히 사람을 살렸으며 / 철산(鐵山) 장화홍련의 원한도 풀어주었다. / 무관으로 깃대를 세우고 통제사에 오르니 / 밖으로는 용맹한 군대를 통제하고 안으로는 용사를 다스리며 / 위엄과 은혜를 병행하니 도적은 잦아들고 백성은 기뻐하더라. / 희라, 명나라 황제를 위함은 만세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리. / 청국 사신이 대보단을 힐난하매 조정이 크게 두려워했더니 / 공이 잡아 국문하여 사신이 고개를 숙이게 했더라. / 조정에서는 중신으로 중히 여기고 나라에서는 태산반석으로 제사지냈네 / 임금께서 나의 상부는 40년 고생 후에 40년 영달한다고 했다네 / 저 묘역이 울창하도다. 영웅의 무덤이여 / 저승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백 사람이라도 속죄하리. / 나 그 실제를 새겨 천억인에게 알려주리라.” 시알봉곤돈(時閼逢困敦, 1984) 섭제지(攝提之 / 寅)월 하순 완산(完山) 최병심(崔秉心) 찬(撰), 완산(完山) 이광열(李光烈) 서(書)
  •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시기】 1986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2개소의 석정(石亭) 안에 비석이 2개씩 들어 있다.
    【개요】 공주이씨의 종중 비석군이다. 비석은 다음 4개가 있다.
    숭정대부 봉은 이공 효행비(崇政大夫鳳隱李公孝行碑)
    감역 우석 이공 공덕비(監役愚石李公功德碑)
    성균진사 소석 이공선덕 의인 하동정씨 효열비(成均進士小石李公善德宜人何東鄭氏孝烈碑)
    주서 지산 이공 창의비(注書砥山李公倡義碑)
  • 【비표】 淑夫人金海金氏孝烈紀蹟碑(숙부인김해김씨효열기적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82년 4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0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孝烈은 婦德之源이라 言卽雖易나 行卽實難이라 然이나 惟我先大夫人께서는 本是 鎭安面 梧川里 金海金氏 文愍公 濯纓先生 諱 馹孫의 後裔이신 孝益之女也로 一八九六年에 太宗大王第七男 顯錄大夫 溫寧君 諱 裎의 後裔 十四代孫인 純陵參奉 諱 明弼과 結婚 入門後에 舅姑에게 孝養하고 夫君에게 恭待하며 治産規模는 勤儉節約으로 至於成家하니 隣近宗戚간에 稱頌이 藉藉터라 年甫三十에 夫忽 沈病跨朔에 百方求療나 終無效果로 斷指授血하여 漸次 甦生하시어 唱隨偕樂터니 不過幾年에 又復發病危篤하여 亦是 斷指注血이나 僅保數日에 未得回生하고 竟至殞命하시니 命亦天也라 奈何오 仰天哀痛에 卽欲從夫去나 上有媤母하고 下有穉子等에 未能遂志하고 喪葬을 依禮旣畢後에 固心守節하여 上奉下率로 苦生多年에 媤母께서 不意得病하여 數年苦痛에 大小便을 受出하여 侍湯供養을 誠心竭力하여 漸次 快甦하시어 年踰 八十餘에 卒하시니 如此 孝烈을 孰不感歎哉아 下率은 三男五女중 長男 羲暎은 出系伯父하고 其餘子女는 愛育成長하여 嫁娶旣畢하고 庚戌 十二月十六日 卒하시니 是年 九十四라 墓在 長城洞酒幕峙 癸坐原이라 然이나 生前所行實蹟이 苟非孝烈之誠意면 豈能如是具備乎아 是故로 本郡文廟表彰과 成均館 讚揚文이 下達하여 不肖子孫等이 永久不忘키 爲하여 長城洞 媤母 旌門內에 立碑 記念하나이다.
    一九八二年 壬戌 四月 日
    平岡後人 蔡東式 謹書
    【풀이】 무릇 효열은 부덕(婦德)의 근원이지만, 말로는 쉬우나 실행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본시 진안면 오천리 김해 김씨 문민공 탁영 선생 휘 일손(馹孫)의 후예이신 효익(孝益)의 따님으로 1896년 태종대왕의 제7남이신 현록대부 온녕군 휘 정(遼)의 14대손인 순릉참봉 휘 명필(明弼)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님께 효도로써 봉양하고, 남편을 공대하며, 집안의 모든 살림을 근검 절약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문을 일으키니, 인근 일가 친척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나이 30세인 지아비가 갑자기 병이 들어 사경을 헤맬 때, 백방으로 보살피고 간호하였으나, 효과가 전혀 없어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이니, 점차 소생하시어 부부가 함께 즐겁게 지내셨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아 또 다시 발병하여 위독하게 되었다. 역시 손가락을 갈라 피를 먹였으나 겨우 며칠을 못 버티고 결국 운명하니, 사람의 수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어찌 하리요. 하늘을 우러러 슬퍼하며, 남편의 뒤를 따라 죽고 싶었으나, 위로는 시어머님이 계시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들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로서 장례를 마친 뒤에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절개를 지키며 웃어른을 봉양하고 아랫사람을 지도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여러 해를 지나 또 시어머니께서 뜻밖에 병이 들어 수년간 고통을 하시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손수 약을 달여 공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니, 점차 소생하여 80세가 넘도록 살다 졸(卒)하셨다. 이러한 효성과 열녀의 정신을 그 누가 감탄하지 않으리오. 자녀는 3남 5녀인 바 장남 희영은 백부에게 양자로 가고, 그 외의 자녀는 잘 길러 성장하여 모두 결혼을 시킨 후, 1970년 12월 16일 졸(卒)하시니 그 때 나이가 94세였다. 묘소는 장성동 주막재 언덕에 있는 바, 생전의 소행실적이 진실한 효심과 열녀의 성의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와 같이 다 갖출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본군 문묘의 표창과 성균관 찬양문을 보내와 불초 자손들이 영구히 잊지 않기 위하여 장성동 시어머니 정문 안에 비를 세워 기념하는 바이다. 1982(壬戌)년 4월 일 평강후인 채동식 삼가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