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83년 5월
    【형태】 비 주변은 철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5cm, 너비 56cm, 두께 3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孟子曰事孰大焉고 事親爲大라하시니 人能盡其道於事之大者則外他百千萬務는 皆仁餘裔而世級日下에 甚難其人焉이러니 幸於月浪에 以孝延譽於淸流者는 卽靑田處士李公諱羲祚是矣니 豈非五夜之孤燭과 地雷之一聲也耶아 李氏籍全州니 奕世大著而溫寧君諱程은 其十五代祖也라 公이 纔學語問字로 極儇慧하고 讀書之暇에 甘旨斑衣로 供歡雙親하니 人以董老深誠이 備於一身으로 稱之라 其大人公이 以七旬隆老로 司視失明하고 荐遭風患에 奄奄床席하야 起居須人이라 藥餌之奉과 尿屎之滌과 祈禱之誠이 愈往愈勤하고 或有差强이면 負步庭園하여 玩物隨景으로 慰悅心志가 以至十五年而及其危篤에 指血延三日之壽하고 竟歸觀化에 毁瘠骨立而口不近葷辛之物하고 墓無闕展省之日이라 恒切風樹之痛하여 後喪亦如之라 上自成均으로 以及各郡校宮이 薦狀이 成軸이라 其子日載가 亦以孝繼孝하야 積屢經營에 命其弟得載永載眞相銘相與典學崔昶鉉典校全泰成泰各項書籍及宋升煥全永哲安道遠三斯文聯函하고 來請銘詞曰先君行義는 備在文字而不肖誠薄識淺하여 奉置篋笥에 深恐蠹蟫之或侵하여 雖一片石이나 表以圖不朽하야 承儒林大義來請하니 願惠琬琰之文하야 伸不明不仁之誅則受賜大矣로다 嗚呼라 鼎鐺이 有耳에 余亦聞公之懿蹟이 夙矣라 居在涯角에 常恨無一面之雅而遽作存歿之感者久矣러니 今於貞珉之役에 豈以昏耗하야 筆硯生塵으로 牢拒하여 以孤諸賢之意孝子之誠也리요 遂爲銘曰 董廚萊衣其孝旣極十五年病贍護愈篤王氏氷魚公以指血其物雖殊其誠直一中外薦狀積成卷軸一片貞珉昏衢孤燭
    檀紀四千三百十六年癸亥五月念三日 晉陽 河千秀 謹撰
    【풀이】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무엇을 섬김이 큰 일인고, 부모를 섬김이 큰일이다”라고 하시니, 사람이 능히 그 도리를 다하여 큰일을 행하면 나머지 백천만 가지의 일은 모두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나 날로 세상은 저급해져 그런 사람은 심히 찾기 어려우나, 다행히도 효성을 기리는 아름다운 풍속을 행한 영예스러운 사람이 진안에 있으니, 바로 청전처사(靑田處士) 이공(李公)으로 휘(諱) 희조(羲祚)가 바로 그이다. 어찌 깊은 밤의 등촉 하나와 세상을 깨우치는 뇌성 벽력소리라 아니하랴. 이씨(李氏)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세상에 크게 드러난 온령군(溫寧君) 휘(諱) 정(程)은 15대조이다. 공이 겨우 말을 배울 때부터 지극히 영리하였고 독서하는 틈에 색동옷을 입고 양친을 즐겁게 하니, 사람들이 동로(董老 / 董召南)같은 깊은 정성을 한 몸에 갖췄다고 하였다. 공의 부친이 칠십을 넘긴 노인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돼, 거듭 풍환을 만나매, 병상을 떠나지 않고 시탕과 음식을 받들며 오줌똥 세탁과 기도의 정성이 갈수록 근실하였다. 혹시 차도가 있으면 업고 뜰을 거닐어 경치를 즐기게 하므로 위로하는 심지가 15년에 이르렀다. 위독함에 이르러 손가락 피로 3일간 수를 연장케 하였고, 결국 별세함에 이르자 뼈만 앙상하게 남고 양념 든 음식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묘에는 성묘하지 않는 날이 없었고, 항상 풍수지통(風樹之痛, 부모 잃은 슬픔)하여 후상(後喪)도 역시 이와 같았다. 위로는 성균관에서 각 군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천장이 성축을 이루었다. 아들 일재(日載)가 역시 효를 계승하여 오랜 세월 경영(經營)함에, 아우 득재(得載)·영재·진상(眞相)·명상(銘相)에게 명하고, 더불어 전학(典學) 최창현(崔昶鉉)과 전교(典校) 전태성(全泰成)이 각 서책을 받들고, 송승환(宋升煥)·전영철(全永哲)·안도원(安道遠) 세 선비가 연명으로 편지를 써서 비문을 청하였다. “선군(先君)의 행의(行義)는 이미 문자(文字)로 되어 있으나, 불초들은 성의가 박하고 배움이 짧아 상자에 넣어두면 좀이나 쓸까 몹시 두려워하여 비록 일편석(一片石)에나마 기록하여 불후하도록 유림이 대의로 와서 청하니, 원컨대 좋은 글을 주셔서 불명(不明)하고 불인(不仁)한 허물을 면하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오호(嗚呼)라! 솥에도 귀가 있어 나도 역시 공의 아름다운 행적은 일찍이 들었소. 외지고 먼땅[涯角]에 살아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문득 돌아가셨다하여 아쉬워 한지 오래 되었소. 이제 비석을 세우는 일에 어찌 혼모한 늙은이로 붓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하고 잘라 거절하여 제현의 뜻과 효자의 정성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이에 명하니 “동소남(董召南)이 색동옷으로 효도하듯 그 효성은 극진했네 / 15년간의 병석에 잘 보살피고 독실히 했네 / 왕씨(王氏, 王祥)가 빙어(氷魚)를 구한 것이나 공이 손가락의 피를 먹인 것은 / 방법은 달랐으나 정성은 똑같았네 / 안팎의 천장이 권축으로 쌓여져 / 일편의 비석을 세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 하나가 되네”
    단기 4316(1983)년 계해(癸亥) 5월 3일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