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高麗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贈諡文成公李据神道碑(고려대사마대장군평장사겸시중증시문성공이거신도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산내길 66-3. 산수동 전주이씨 재각 경모재 마당.
    【시기】 196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60cm, 너비 59cm, 두께 27cm.
    【개요】 비문에서는 백운면 평장리를 가리키고 있으나 비는 성수면 산수동에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湖之南에 有以平章으로 名洞里者二니 今在鎭安白雲面者其一也라 鎭之山勢가 鬱積磅磚하고 水口又絶佳하니 於其地靈所鍾에 傑人名宦이 往出其間이라 以餘所聞則李氏平章事公이 致仕而肇基于此하고 至其曾孫하여 示官平章하니 其所以名里가 蓋尊榮之而傳之尙不泯者近千示異矣라 近考其郡誌則不果誣也로다 日에 其遠裔炳春炳文炳紹者顧余南安山齋而曰 我全州之李姓 實出新羅司空諱翰하니 其塚有疑하여 設壇하니 乾止山肇慶壇이 是也라 自司空으로 累傳而諱珍有와 有諱宮進初諱宮准諱勇夫는 大將軍이니 是生內侍執奏諱璘과 次諱据하니 官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諡文成이니 我 太祖高皇帝之從六世祖也라 公이 退居于鎭安縣東德泰山下하니 地勢狹塏하고 明氣醉人하니 所謂平章里者是也라 有男三人하니 諱陽翼은 官三城將軍門下舍人이요 次曰陽軫은 陽星이요 舍人이 孫男行典은 官門下侍中平章事라 按公의 表德則晩祥이요 又靖菴이니 高麗明宗四年甲午正月九日에 生于紫晩洞私第하고 高宗三十三年丙午正月三日에 卒하니 墓在平山治矢干峯下中麓乾亥壬三回龍下癸坐라 配南平文氏殿中內給事克純女고 明宗二年壬辰二月二日生이요 高宗二十四年二月五日에 卒하니 墓合窆이라 噫라 年代旣邈而累經桑溟하여 其立朝履歷과 志業風栽를 無可攷懲하고 而墓失其傳하여 酒掃不及하고 香火未薦이라 秋霜春露에 齎恨含痛이 庸有旣乎아 平章里之近左右浦上山水洞冠帽峯之下에 有公後禮曹判書珍寶之墓라 每歲一祀之日에 一宗이 咸爲後孫은 其得享하되 先祖는 其不得享하니 胡爲而可오 從古爲壇者實以墓之疑信相半而望墓以設하니 顧人子恣性自然而亦可爲義起之事라 第念惟平章里則雖云無公之墓나 卽杖屢所而子孫奠居也 府君於昭之靈이 安知以時陟降于此乎리요 且彼溪山岩石이 雖曰孱削消磨於千年風雨之間이로되 而迺不變其所則有之하니 亦莫非公之所以登臨者요 而且人情之所合神理之所宜也니 此可以設壇而行上塚之儀也니라 乃卜吉日하여 除地而壇하니 判書公墓南邊也 式旣擧에 又以治一丈石하여 爲神道顯刻이라 敢請長者有以一言之相也니라 炳殷이 人之俱微而大耋之하여 不省事하니 其何能承이리요 當窃念羅麗之墓失傳者何限而今之世壇享을 亦不可數計니 此獨近日人情之最厚也라 推而上之則人倫이 大明하고 風俗이 甚厚而宗國之興其在此乎인저 吾所以有感中者는 況吾友鄭貴泳이 以書로 道李門追遠之賢勞하니 不敢辭也로다 按其家牒則公之後裔而最顯者는 判書諡孝靖珍實이요 子禮判軾이 端宗朝에 以靖國功臣으로 封星山君贈諡忠靖이라 是生甲仁은 進士宗親府副正이요 由義는 進士文科濟州牧使成宗朝功臣이요 由禮는 進士副司直宗親府副正이라 由智는 進士內禁衛將宗親府副正이라 四昆季子孫이 散居鎭安高山益山任實江西而不失鄕中之令名이요 若彭錫은 生員文科縣監郡守요 御侮將軍階至通政하고 成宗庚戌에 錄功佐理功臣하고 彭東은 以孝行으로 除授獻陵參奉하고 彭種은 生員이요 彭穗彭祖는 俱顯監이요 元貞은 生員이니 文科로 縣監郡守요 堯貞堯卿은 俱生員이요 守宇는 生員三縣監三縣令六郡守로 階通政하고 累典十二邑하여 多治蹟하고 中宗三十七年에 壬寅老而致仕歸鄕하니 凡三十五年善治에 一世名稱이요 宇宙는 中宗三年戊辰에 中文科하여 初擢翰林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兼經筵參贊官司諫院大司諫司憲府大司憲弘文館大提學議政府左贊成이라 上이 命稱安靖功臣諡文敬하고 希忠及曄은 主簿요 芷는 參議요 世恭은 參奉이요 世儉은 縣令으로 皆至通訓하고 世讓은 寺正이요 萬興은 通政大夫요 哲은 通政大夫同知中樞府事요 昌福은 宗親通直郞이요 昌慶은 累徵不就하고 昌吉은 慶科로 將仕郞敎授요 龍壽는 通德郞이요 好誠은 宣務郞禮賓寺主簿요 好詠은 贈同知中樞府事요 日雲은 武科로 郡守요 祥虎는 武科로 訓練院參軍이요 健은 弘文館典翰이요 信은 僉正이요 顯宗朝癸丑十月十九日에 加資送使臣이 下鄕하니 信이 別世가 五日이니 見不幸之事하니 浪淚하고 上京하여 上疏하니 上이 見上疏文하고 恨歎하며 贈五衛都摠官하다 櫶은 生員이요 震興은 判官이요 命立은 同知中樞府事階嘉善이요 尙翊은 贈吏曹參判 延鵬은 受學於李先生締之門하고 東彦은 贈司僕寺正이요 孝伯은 僉知中樞府事하고 階通政하다 蒙濟는 宗親應製로 文科正言하고 亨益은 贈戶曹參議요 雲起는 僉知中樞府事하고 階通政이요 延景은 武科로 御侮將軍이요 承秀는 贈吏曹參判이요 夏興은 僉知中樞府事요 階通政이라 夏昌은 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요 信馨은 高宗朝副護軍階通政이요 惟馨은 憲宗朝嘉善大夫行敦寧府同敦寧요 高宗朝贈五衛都摠官이요 仁醇은 哲宗朝特命으로 宗親府應製乾元陵參奉이요 仁燮은 武科로 行守門將하고 贈五衛都摠官이요 宗植은 高宗朝贈嘉善大夫行政秘書요 若其宗子則坪圭요 尸碑役者는 政基甲喆振基銀圭也라 余旣序之如此하고 又爲之銘하니 曰 天佑勝國篤生偉人이요 爲將爲相에 柱石之臣이라 麗史所居月浪에 麗水佳山이라 里名平章에 表其達尊이라 山亦德泰山이요 柳非厚仁가 況又曾孫이 繩厥先武라 位極平章하고 榮貴罕都라 錫祚無彊하니 世奠厥居로다 篤心報本하니 封壇是謀라 爰相厥基하니 于彼冠峯이로다 衆巒星拱하고 百神護從이라 齊明盛服하여 薦以馨香하니 於左於右에 如在洋洋이라 庶幾夙夜에 著存不忘이라 而又礱石에 峙于高岡이라 永永萬年에 不泯平章이로다.
    全義李炳殷謹撰
    【풀이】 호남에 평장(平章)이라 이름한 동네가 둘 있으니, 현재 진안 백운면에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진안의 산세는 첩첩이 둘러싸여 물과 바위가 절경을 이루니, 그 땅의 지령(地靈)으로 뛰어난 인물과 명환(名宦)이 왕왕 나왔다. 들은즉 이씨 평장사공(平章事公)이 여기에 터를 잡아 증손에 이르러 평장사의 벼슬을 보았다고 한다. 동네 이름이 된 까닭은 대개 그 영화(榮華)를 받들어 전하여 민몰하지 않게 하고 천년 가까이 제사를 지냄에 있다. 군지(郡誌)를 살펴본즉 헛된 소리가 아니로다. 하루는 그 후손 병춘(炳春)·병문(炳文)·병소(炳紹)가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전주 이씨는 실로 신라(新羅) 사공(司空) 휘(諱) 한(翰)에서 나왔으나, 그 무덤에 의문이 있어 단을 세우니, 건지산(乾止山) 조경단(肇慶壇)이 그것이라. 사공(司空)부터 몇 대를 전하여 진유(珍有)와 궁진(宮進, 초휘[初諱] 궁회[宮准])이 있었고, 휘(諱)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이라. 이 분이 내시집주(內侍執奏) 휘(諱) 린(璘)과 휘(諱) 거(据)를 낳으니 벼슬이 대사마대장군평장사겸시중(大司馬大將軍平章事兼侍中)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고, 우리 태조(太祖)의 종6세조(從六世祖也)라. 공이 물러나 진안현의 동쪽 덕태산 아래에 우거하였는데, 땅이 좁고 높아 밝은 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하니 소위 평장리이다. 아들 셋을 낳으니 양익(陽翼)은 벼슬이 삼성장군문하사인(三城將軍門下舍人)이요, 둘째는 양진(陽軫)이요, 다음은 양성(陽星)이다. 사인(舍人)의 손자 행전(行典)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라. 공의 행장을 살펴보니 호는 만상(晩祥)이요, 또 정암(靖菴)이라고도 하였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4년 갑오(甲午) 5월 9일 자만동(紫晩洞) 집에서 태어나 고종(高宗) 33년 갑오(甲午) 1월 3일 졸(卒)하니, 묘는 평산(平山) 시간봉(矢干峯) 중록(中麓) 건해임(乾亥壬) 삼회룡(三回龍)의 아래 계좌(癸坐)라. 배(配)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극순(克純)의 따님이고, 명종(明宗) 2년 임진(壬辰) 2월 2일에 태어나 고종(高宗) 24년 2월 5일에 사망하여 합폄(合哮)하였다. 희(噫)라, 연대가 멀어 조정에서의 이력(履歷)과 공업(功業)과 풍모를 고증하지 못하고, 묘 또한 실전(失傳)하여 성묘하고 향화를 올리지 못하였으니, 해마다 한스럽고 애통함이 어찌 없으리요. 평장리 근처 좌우 시냇가 위 산수동(山水洞) 관모봉(冠帽峯) 아래에 공의 후손 예조판서(禮曹判書) 진보(珍寶)의 묘가 있다. 종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매년 시제를 모실 때 후손은 모시나 조상을 모시지 못하니 어찌 옳다 하겠는가. 예법에 따라 설단한 것은 실제의 묘가 어디인지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며, 묘라 생각하고 설단하였으니, 돌아보아 자손의 심성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義)로운 일이라 하겠다. 생각하니 평장리에는 비록 공의 무덤은 없으나 공께서 이 곳에 주(住)하심으로 자손이 이 곳에 살며 제사지내게 되니, 부군(府君)의 밝은 영혼이 어찌 이 곳에 오르내리지 않겠는가. 또한 계곡과 산과 암석이 비록 천년의 풍우에 마모되었으나 그 장소는 남아 있으니 또한 공께서 이 곳에 오르시던 곳이 아니라 할 수 없으며, 인정(人情)에 부합하는 것이 신리(神理)에도 부합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설단하여 상총(上塚)의 예의로 행함이 가하다. 길일을 받아 땅을 고르고 단을 쌓으니 판서공(判書公) 묘의 남쪽이다. 또 이미 일장(一丈)의 돌을 다듬어 놓고 신도비(神道碑)를 각하려 하니, 감히 청컨대 어르신의 한 마디 말씀을 받았으면 한다 하였다. 하지만 병은(炳殷)은 미흡하고 늙어 일을 살피지 못하니, 어찌 능히 받들 수 있겠는가. 당하여 혼자 헤아려보니, 신라와 고려 때의 묘를 실전한 경우가 어찌 셀 수 있을 것이며, 금세에 설단하고 향사하는 예가 또한 셀 수 없으니, 이는 요즈음 사람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일이다. 위로 조상을 받들면 인륜이 크게 밝아지고 풍속이 심후하게 되어 나라의 흥함이 여기에 있음이로다. 내가 감격한 까닭은 하물며 내 친구 정귀영(鄭貴泳)이 글로써 이씨 문중의 조상을 추원(追遠)하는 노고를 해주었으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가첩(家牒)을 보건대 공의 후손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은 판서 효정공(孝靖公) 진보(珍寶)요, 그 아들 예조판서 식(軾)이 단종(端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지고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아들 유인(由仁)은 진사로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이요, 유의(由義)는 진사로 문과하여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낸 성종(成宗) 때의 공신이요, 유례(由禮)는 진사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으며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이고, 유지(由智)는 진사로 내금위장(內禁衛將)과 종친부 부정(宗親府副正)을 지냈다. 4형제의 후손이 진안(鎭安)·고산(高山)·익산(益山)·임실(任實)·강서(江西) 등에 흩어져 살지만, 고을에서 명예를 실추하는 일은 없었다. 팽석(彭錫)은 생원으로 문과하여 현감과 군수를 지냈고, 어모장군(御侮將軍)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階)에 올랐으며, 성종(成宗) 경술(庚戌)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팽동(彭東)은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팽종(彭種)은 생원이요, 팽수(彭穗)와 팽조(彭祖)는 현감이다. 원정(元貞)은 생원으로 문과하여 현감과 군수를 지냈고, 요정(堯貞)과 요경(堯卿)은 모두 생원이다. 수우(守宇)는 생원으로 현감 3번, 현령 3번, 군수 6번을 지내고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12읍에 기록되었는데 치적이 많았다. 중종(中宗) 37년 임인(壬寅)에 늙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무릇 35년의 선정(善政)에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우주(宇宙)는 중종(中宗) 3년 무진(戊辰)년에 문과하여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겸 경연 참찬관,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의정부 좌찬성(吏曹參議成均館大司成兼經筵參贊官司諫院大司諫司憲府大司憲弘文館大提學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중종이 안정공신(安靖功臣)에 명하고, 칭찬하여 문경(文敬)이라 시호를 내렸다. 희충(希忠) 및 엽(曄)은 주부(主簿)요, 지(芷)는 참의(參議)요, 세공(世恭)은 참봉이요, 세검(世儉)은 현령으로 모두 통훈대부(通訓大夫)이다. 세양(世讓)은 시정(寺正)이요, 만흥(萬興)은 통정대부(通政大夫)요, 철(哲)은 통정대부동지중추부사(通政大夫同知中樞府事)요, 창복(昌福)은 종친통덕랑(宗親通德郞)이요, 창경(昌慶)은 몇 번 불렸으나 나가지 않았고, 창길(昌吉)은 경과(慶科)로 장사랑(將仕郞)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용수(龍壽)는 통덕랑(通德郞)이요, 호성(好誠)은 선무랑(宣務郞) 예빈사 주부(禮賓寺主簿)요, 호영(好詠)은 증 동지중추부사(贈同知中樞府事)요, 일운(日雲)은 무과로 군수(郡守)요, 상호(祥虎)는 무과로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이요, 건(健)은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요, 신(信)은 첨정(僉正)으로 현종(顯宗) 계축(癸丑)년 10월 19일에 가자(加資)를 받든 사신이 내려왔는데 이미 5일에 별세하였으므로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상경하여 상소하였다. 현종이 상소문을 보시고 한탄하며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하였다. 헌(櫶)은 생원이요, 진흥(震興)은 판관(判官)이요, 명립(命立)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가선대부(嘉善大夫)요, 상익(尙翊)은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연붕(延鵬)은 이선생 체(締)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동언(東彦)은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효백(孝伯)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몽제(蒙濟)는 종친응제(宗親應製)로 문과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형익(亨益)은 증 호조참의(贈戶曹參議)요, 운기(雲起)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연경(延景)은 무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요, 승수(承秀)는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요, 하흥(夏興)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하창(夏昌)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요, 신형(信馨)은 고종(高宗) 때 부호군(副護軍)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유형(惟馨)은 헌종(憲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돈령부 동돈령(敦寧府同敦寧)을 지냈고, 고종(高宗) 때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다. 인순(仁醇)은 철종(哲宗) 때 특명(特命)으로 종친부 응제(宗親府應製)를 거쳐 건원릉참봉(乾元陵參奉)을 지냈고, 인섭(仁燮)은 무과로 수문장(守門將)을 지내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官)에 추증되었으며, 종식(宗植)은 고종(高宗) 때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정비서(行政秘書)에 추증되었다. 그 집안의 종손(宗孫)은 평규(坪圭)요, 비를 세우는 데 힘을 쏟은 사람은 정기(政基)·갑철(甲喆)·진기(振基)·은규(銀圭)이다. 나는 이와 같이 서(序)를 쓰고 또 명(銘)하기를 “하늘이 도와 고려 때 위인(偉人)을 나게 하였으니 / 장군, 재상으로 사직의 주춧돌이 되었구나. / 고려 때 월랑(月浪)에 우거하니, 산수가 수려하였더라. / 마을 이름 평장이니 그 달존(達尊, 덕과 나이와 벼슬)을 표함이라. / 산 또한 덕태산(德泰山)이니, 유씨가 후인(厚仁)하지 않겠는가. / 하물며 또 증손이 선대의 발자취를 이어 / 평장사의 지위에 오르니, 그 영귀함이 도성에서도 드물었더라. / 복록을 내림이 무궁하니 대대로 이 곳에 안주하였다. / 조상을 위한 돈독한 마음으로 단을 세우려 하도다. / 이에 터를 다듬으니 저기가 관봉(冠峯)이구나. / 뭇 봉우리가 조아리며 뭇 신령이 지켜주는데 / 제물을 갖춰 제복을 입고 향화를 피워 올리니 / 좌에도 우에도 양양한 기운이로다. / 조석으로 살피는 마음 두드러져 잊지 못하니 / 돌을 다듬어 높은 산등성이에 올렸구나. / 만세에 길이 민몰치 않을 평장이로다.” 전의(全義) 이병은(李炳殷) 근찬(謹撰)